강역고/고구려

고구려의 평양을 찾아서(7)

지보고 2023. 10. 8. 16:47

13. 대방(帯方)과 대방국(帶方國)

 

- 대방(帯方) 의 연혁

 

1. BC 108, 낙랑군 대방현(帶方縣) 설치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낙랑군 대방현을 설치함

 

그림 7-1 <담기양>이 그린 낙랑군 대방현

2. 115, 태조황제 12城 중수

 

태조황제 4乙卯(을묘, AD115)

2월, 西河, 南口, 河城, 安平, 長嶺, 菟城, 屯有, 平郭, 河陽, 遼陽, 高顯, 南蘇등의

城(성)을 重修(중수)하여, 西南(서남)을 대비하였다.

<고구려 사초>

 

3. 141년 대방령 <장언長彦>과 낙랑태수 <용준龍俊>의 반란

 

태조황제 30년 신사(AD141)

4월 대방(帶方)의 <장언張彦>이 둔유(屯有)를 침입하니

토성(菟城)태수 <을어乙魚>가 쳐서 죽였고,

낙랑(楽浪)태수 <용준龍俊>이 서안평(西安平)에 쳐들어오니

안평(安平)태수 <상잠尙岑>이 쳐서 깨뜨리고,

신안(新安)과 거향(居鄕)까지 추격하여 그 들의 처자와 병장기를 빼앗아 돌아왔다.

적은 도망하여 유주(幽州)로 들어갔다.

<고구려 사초>

 

순제(126-143)와 환제(146-167) 연간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과 거향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을 공격하고 대방령을 도상에서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又攻西安平 於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三國志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질제(145년)·환제(146-167)의 시대에 다시 요동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군국지는 서안평현과 대방현이 요동군에 속함)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質桓之閒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郡國志 西安平 帶方 縣 並屬遼東郡) 掠得樂浪太守妻子

<후한서 고구려>

 

삼국지 위서와 후한서를 보면 마치 漢나라가 요동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요동태수를 사로잡은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둔유와 서안평은 태조 황제가 115년에 중수한 고구려 최 남단의 성이다.

한(漢)이 대방령 <장언張彦>과 낙랑태수 <용준龍俊>을 꼬드겨 고구려의 둔유와 서안평을 침입케 하니

토성태수 <을어乙魚>는 대방령 <장언張彦>을 쳐 죽이고

안평태수 <상잠尙岑>은 낙랑태수 <용준龍俊>을 쳐서 깨뜨리니

낙랑태수 <용준龍俊>은 보정시 당현의 유주(幽州)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신안(新安)은 진한(辰韓)지역으로 신라의 강역이고, 거향(居鄕)(今 보정시 淸苑區)은

마한(馬韓)지역으로 백제의 강역이고, 유주(幽州)의 치소 당현은 漢의 강역에 있었다.

 

 

4. 146, 대방태수 <유호劉虎>의 반란

 

태조황제 35년 병술(A.D.146)

.....

대방(帶方)이 반란하여, <을어乙魚>가 대방태수 <유호劉虎>를 공격하여 목을 베니, 나머지 무리들은 두려워 굴복하였다.

 

 

5. 188년, 백제 구지왕 <백고伯古(155-226) 재위 188-225)> 즉위

 

휘(諱)는 <백고伯古>이고, 기루왕(己婁王)의 7째 아들이고, 개루왕(盖婁王)의 이복동생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성스러운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공경하고 추모하여 말하기를

“구대왕(仇臺王)이 다시 돌아왔다”고 하였다.

당시 개루왕의 같은 어머니 동생들이 모두 임금의 특별한 총애가 있었으나,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개루왕이 병이 깊어지자 죽음에 임하여 왕비 사씨(沙氏)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동생들이 비록 많다고 하나 오로지 <백고>가 가장 현명하고,

내가 죽으면 너의 자식들은 모두 어리니 만약 여러 동생들이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너의 자식들에게 불리해질 것이므로, 백고를 너의 계부(繼夫)로 삼음만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씨가 이에 한 밤중에 은밀히 궁중으로 거두었다(불렀다).

이날 밤에 눈이 사람의 키를 넘었는데 모든 왕의 동생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원년 무진(A.D.188) 12월 사씨(沙氏)를 후로 세우고, 어머니 흘씨(屹氏)를 태후로 삼았다.

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인(舍人) <가기賈杞>의 아내 백씨(苩氏)를 거두어

아들 <백인苩仁>과 딸 백화<苩花>를 낳았는데, 왕의 깊은 총애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백씨를) <가기>에게 되돌아가도록 명하고, (백씨가 데려온) 자식들을 <가기>의 자식이라 명하였다.

<백제왕기>

 

6. 190년, 백제 구지왕 <백고>와  요동태수 <공손도>의 혼인동맹

 

구지3년 경오(A.D.190)

3월 <공손도公孫度(145?-204)>왕이 딸 <보루宝婁(173-222)>를 시집보내며 말하기를

“왕을 듣자하니 실가(室家, 가정)가 없다고 하는데,

그런 까닭에 감히 천식(賤息, 남에게 자기 자식을 일컫는 말)을 보내오니

건즐(巾櫛, 여자가 아내나 첩이됨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 삼고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백마(白馬) 3쌍을 폐물로 삼고 장가들었다.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백제 구지왕 <백고>에게 시집보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한다.

 

7. 192년 백제 구지왕 <백고>가 북한산성을 쌓음

 

구지5년 임신(A.D.192) 

2월 북한산(성)을 축조하여 고구려에 대비하였다. 

8월 신라왕 <일성逸聖>이 섰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백제왕기>

 

8. 197,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는 요동을 공손도에게 내어 줌

 

<공손도>가 개마, 구리, 하양, 도성, 둔유, 장령, 서안평, 평곽 등을 차지함

 

 

9. 평주(平州) 대방군(帯方郡) 설치(200년경)

 

공손도(公孫度)가 설치하였다. 현은 7이며 가구수는 190이다.

1)대방현(帯方縣).2)열구현(列口縣).3)남신현(南新縣).4)장잠현(長岑縣).5)제해현(提奚縣).

6)함자현(含資縣).7)해명현(海㝠縣).

<晉書 지리지>

 

평주 대방군은 후한 말에 요동태수 <공손도(145?-204) 재위 190-203)>가 200년경 설치한 낙랑군 둔유현 이남지역으로

7개현에 가구수가 190이니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에 설치한 군이다.

 

10. 209, 고구려의 환도성(창남산성, 안시성 인접) 천도

 

공손강이 점점 강성해지자 고구려는 공손강의 침입에 대비하여

백제에 화친을 청하고 창남산성으로 천도한다.

백제는 <공손강>과 고구려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두 나라를 견제한다.

 

11. 217년, <공손강>이 대방국을 세우고 여동생 <보고>를 구지왕에게 잉첩으로 보냄

 

12. 2371차 위연전쟁

 

동천대제11년{AD237}정사,

춘3월, <전>황후가 <장>공주를 낳고 눈물 흘리며 먹기를 피하니, 상도 또한 눈물을 흘렸다.

<류흔>・<선우사>・<오림> 등이 대방, 낙랑 등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고,

<공손연>과는 표리와 같이 되었더니,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을 칭하고 교만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이에 상은 魏에 사신을 보내어 <공손연>을 토벌하는 계획을 상의하였다.

魏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삼아서 선비, 오환과 함께, 요수(遼遂)에 진을 치고 <공손연>을 응징하게 하였더니,

<공손연>이 {먼저} 나와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관구검>은 다시금 싸우고 싶었으나,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서 요수가 넘실대니,

군사를 잃을까 겂나서 우북평으로 철수하였다.

우리 군대가 이 허를 틈타 현도 서쪽의 땅 백 여리를 취하였다.

<고구려사초>

 

13. 238년, 위연전쟁으로 공손연의 멸망

 

동천대제12년{AD238}무오,

춘정월, ......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 함께 <연>을 멸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주희>에게 명하여 주부대가가 되어서 5천병을 이끌고 남소로 출병하고 관망하여 성원하라 하였다.

8월에 <공손연>을 멸하였더니,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 방자하여졌다.

상이 노하여 <사마의>와 교통을 끊었다.

 

7-2 위연전쟁 요수(遙遂), 남소(南蘇) 및 요동성

 

14. 238년, 왜 여왕 비미호가 북위에 사신을 보냄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

今以汝爲親魏倭王. 假金印紫綬. 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

경초 2년(238) 6월, 왜 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 등을 보내니

우리 郡에 이르기를 천자에게 조헌하기를 구하였다...

대방태수 <유하劉夏>가 사신 <난승미難升米>를 나에게 보내왔다...

이제 (비미호) 너를 친위왜왕(親魏倭王)으로 삼는다.

금빛자빛 인수를 임시로 만들어 보내니 대방태수가 너에게 수여할 것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왜인>

 

이 기록에 의하면 왜의 여왕 <비미호>는 위(魏)에 조공하기 위하여 <난승미>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난승미>는 위의 동쪽 관문인 대방군에 나아가 대방태수 <유하>에게 중개를 요청하였다.

대방태수 <유하>가 관리를 보내어 왜의 사신을 그 수도 장안에 안내하여 명제(明帝)에게 조공케 하였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從郡至倭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군(郡)에서 왜로 가려면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는데 한국(韓國)을 거치고

남으로 동으로 가면 구사한국(狗邪韓國)의 북안에 닿는데 그 거리가 칠천여리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왜인>

 

이 기사는 <비미호>의 조공을 받은 위(魏) 황제가 그 답례사로서 <장정張政>을 보냈으므로

<장정 張政 >이 대방군을 출발하여 왜국으로 가는 경로를 기록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소중한 사료이다.

이 기록은 ‘왜는 대방의 동남쪽 대해 중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한국(韓國)을 거쳐 거기에서 남동쪽을 향하여 항행하면

북구주의 구사한국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최소한 238년까지는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지 않고 대륙에 있었고

한반도에는 삼한 즉, 마한, 변한, 진한등의 소국(小國)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 당시 한반도에 백제와 신라가 있었다면 <장정>은 한국(韓國)이 아니고 백제국을 거친다고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중원과 왜의 해상항로를 밝혀주고 있다.

 

 

15. 239년, 대방의 유민 3,000명이 백제로 옴

 

초고14년 기미(AD.239)

3월 대방인(帶方人) 3천명을 나라의 서쪽으로 이주시켰다.

7월 왕이 서쪽을 순행하여 패하구(浿河口)에 이르렀다.

<백제왕기>

 

16. 239년, 신라가 고구려에게 죽령 땅을 요구하나 거절 당함

 

동천대제13년{AD239}

<신라>의 사신이 와서 옥돌을 바치며 <죽령>땅을 얻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구려 사초>

 

 

17. 기리영전투(240)

 

동천대제14년{AD240}경신,

3월 대방 사람 <궁준弓遵>이 魏의 태수를 자칭하며, 변방을 침략하고, 신라 및 왜와 소통하여, 근심거리가 많아졌다.

<어관於灌>에게 명을 내려, 韓의 신지(臣智) 등을 이끌고 나가서 이를 쳐 죽이게 하였다.

<고구려사초>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 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仮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三國志 魏志 韓傳>

경초중(AD 237-239年)에 명제(明帝)는 비밀리에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한국(韓國)의 여러 신지들에게 읍군 인수를 주고 그 아래에는 읍장 인수를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의책(衣幘)을 매우 좋아해서

하호까지 가짜 인수, 의책을 가지고 있었고, 1,000여 인이 郡으로 찾아와 조알하였다.

부종사 <오림吳林>이 한국(韓國)은 본래 낙랑군이 통치하였으므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해서 낙랑군으로 한다고 하니 통역이 잘못되어

韓의 신지들이 격분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다가 <궁준弓遵>이 전사하였다.

2郡(대방군, 낙랑군)은 마침내 韓(마한, 진한)을 멸망시켰다.

 

240년에 대륙의 마한과 진한이 기리영전투로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한반도에는 마한 55국, 진한12국, 변한12국의 소국이 있었다.

 

237년 3월에 魏는 비밀리에 <유흔>을 대방태수로, <선어사>를 낙랑태수로,

<오림>을 부종사로 임명하여 대방군과 낙랑군의 중국의 유민에게

중국과의 교역을 인정하는 인수를 주어 <공손연>을 견제토록 하였으나 공손연은 이들과 안팕으로 회동하여

더욱 교만해져 연왕을 칭하게 되고, 이듬해에 15만 대군으로 중원을 공격하려고 하니 이에 魏燕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魏燕전쟁의 결과 <공손연>의 燕國은 멸망하고 (曺)魏가 낙랑과 대방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중원이 삼국(위,초,오)으로 패권을 다투던 시기로

<사마의>가 <공손연>의 중원 침입을 막기 위하여 <공손연>을 멸하였으나

낙랑과 대방은 漢인과 예인(부여인) 맥인(고구려인) 말갈인 등이 혼거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240년 3월에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대방군과 낙랑군에 있는 신지의 인수를 거두고

직접 한반도에 있는 삼한(三韓)의 8국과 倭와의 무역을 하고자 하였다.

韓의 신지(읍군장)와 고구려 장수 <어관>이 힘을 합쳐 싸운 결과

240년에 대방태수 <궁준>은 전사하였지만 대륙의 마한과 진한은 멸망하였다.

대륙의 마한과 진한의 멸망은 246년 魏의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 242년, 안평대전

 

동천대제16년{AD242}임술,

하5월, 상이 친히 5도의 장군인 <방축>・<회고>・<주희>・<현>・<목장> 등을

거느리고 십만 병을 이끌어 <서안평>을 쳐서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이다.

애초에 <사마의>가 <요동>을 빼앗고 이곳으로 자신의 주력을 옮겨 동쪽을 도모하려 하였었다.

이제 그 설비를 파괴해버렸더니, 백성들과 진보가 모두 우리 것이 되었다.

....

고구려는 안평대전으로 발기의 난으로 잃었던 성을 대부분 되찾게 된다.

 

19. 244년, 비수대전

 

동천대제18년{AD244}갑자

7월에 <관구검>이 현도(玄兎)에 쳐들어와 노략질 하였다.

상이 보기 2만 병을 이끌고 나아가서 비류수의 위쪽에서 이를 받아쳐서 크게 이기고 3천여 급을 베었다.

이를 비수대전(沸水大戦)이라 한다.

 

20. 246년, 양맥대전

 

동천대제20년{AD246}병인,

추8월에 상이 <주>후・<엽>비・<맥>비 등을 데리고 서천으로 가서 병사를 사열하고, 두눌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돌연히 <관>적이 우회하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근> 등을 채근하여 맞아 싸웠으나, 우리는 수가 적고 저쪽은 수가 많은데다가,

그들의 예봉을 마주하더니, 자못 어려워하였다.

이에 상이 철기 5천을 추려서 그들의 진영을 양구 서쪽에서 들이받아 크게 이겼고,

노획한 병장과 마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상이 <주>후와 함께 포로를 접수하였다.

 

<관구검>의 대군이 또다시 밀려오니, <우근>이 싸우다 죽었다.

<관구검>이 방진을 펼쳐 그 전봉의 위세가 파죽인데, 남쪽의 통로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

후비들까지 데리고 있는데다가 상황이 녹녹하지 않아서, 날랜 기병 천여 기와 함께 압록원으로 물러났다.

 

<주전>의 군대 역시 패하여, 죽은 이가 만 명이나 되었다.

상은 옹구로 동천하였다.

 

10월, <관구검>이 도성에 들어가 백성을 약탈하고 보물들을 챙겼고,

이 소식을 듣은 상은 통곡하면서 <목능>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맥>비가 자기의 고향으로 피하기를 청하였다. 죽령에 이르렀더니 군사들 거의 모두를 잃었었다.

 

「동부」우태인 <밀우>가 무사들을 모아서 힘써 싸웠고,

상은 산곡으로 숨어들어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를 지켰더니,

백성들은 평소에 상의 성덕을 흠모하였던지라 모두들 죽기로 싸우길 원하였다.

<왕기>의 추격군이 들판에서 농사를 짓거나 산속에서 사는 사람들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적은 수가 많고 우리 쪽은 수가 적을뿐더러

짧은 쇠토막도 없어서 그 형세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창간 관리 <뉴유>가,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음식으로 <왕기>를 대접하면서,

숨겼던 칼로 그를 베어 죽이고 여러 막장들의 목을 베었더니, 적들은 어지러워졌다.

이에 상이 백성과 병사를 독려하며 <왕기>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이때, <관구검> 군대는 이미 물러나 있었고, <목장>이 와서 {상을} 맞이하니,

상은 “짐이 자네 부친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되었다.”하였다.

.....

246년 관구검의 침공으로 도성인 창남산성(환도성)이 불타자 이듬해인 247년에 평양(고성진)으로 천도한다.

 

7-3 양맥전쟁(관구검)

 

21. 274년, 의 평주 설치

 

서천대제5년{AD274}갑오,

추8월, {서}晉이 유주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로 삼았다;

일설엔 범양, 상곡, 북평, 요서를 말하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요동・대방・낙랑・현도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晉의 땅이 아니었었다.

교위・태수・참군을 허설(虗設)한 것이었으니, 또한 웃을 일 아니겠는가?

五年 甲午 秋八月 ... 晉分幽州五郡 爲平州 一云 ?,上谷,北平 及遼西

而一云 昌黎,遼東,帶方,樂浪,? 然 此等地 皆已非晉之有也 虛設校尉,太守,參軍 不亦可笑乎

<고구려 사초>

AD276, 咸寧二年 창려, 요동, 현도, 대방, 낙랑 5군 치소를 평주에 두었다

 

晉은 이름뿐인 평주를 설치한다.

 

22. 286년, 고구려의 대방 침공과 책계왕의 즉위

 

고이23년 병오(AD.286)

2월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대방왕 건虔}이 구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대방을 구하도록 명하였다.

고구려가 우리를 원망하여, 장차 변경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아단성(阿旦城)사성(蛇城)을 수선하고 지붕을 이어 대비하였다.

 

책계왕[혹은 청계라고도 한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 고이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왕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

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대방왕 <건 >은 백제 구지왕 <백고>의 손자로, <백고>와 <공손도>의 딸 <보고>에서 태어난 <소沼>의 아들이다.

 

23. 298년, 책계왕의 전사

 

책계 13년 무오(서기 298년)

9월, 한인과 맥인이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막으러 나갔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責稽)十三年 戊午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而薨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가 대방(帶方) 한맥(漢貊) 다섯 부락을 공격하다가 복병을 만나 죽었다.

아들 <분서>가 섰는데, 총명하고 슬기롭고 특출하게 빼어났다고 한다.

<責稽><帶方><漢貊>五部, 遇伏兵而死. <汾西>. 聰慧英{}.

<고구려사초>

 

백제의 책계왕이 고구려의 혼란을 틈 타 대방군을 공격하였다가

한(漢)과 맥(貊)의 복병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은 삼국사기와 남당유고의 고구려사초에도 기록되어있다.

두 기록의 차이는 <백제본기>는 한과 맥이 침입하니 책계가 막으러 나갔다고 기록하였고

<고구려사초>에서는 대방한맥5부(帶方漢貊五部)라고 기록되어있고

백제왕 <책계>가 먼저 이 지역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있다.

대방이라는 지역은 한족(漢族)과 맥족이 더불어 살고 있었던 지역이며

이 시기는 晉 惠帝 때이므로 여기에서 기록한 漢貊은 漢人과 貊人(고구려인)을 말하며

晉과 고구려의 두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책계왕이 <모용외>의 고구려 침공을 틈타 대방군의 맥인들을 몰아내고자

공격하였으나 복병을 만나 전사하였거나

<모용외>의 공격을 받고 서부여에서 탈출한 <의라> 일파에게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4. 304년, 분서왕의 죽음

 

미천대제5년{AD304}갑자,

2월, <분서>가 낙랑의 서도를 습격하여 파하고는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그 땅은 본래 <분서>의 모친인 <보과> 나라의 도읍이었다.

<분서>가 모친을 위하여 탈취한 것이다.

낙랑 왕 <자술>이 <장막사>에게 사신을 보내 힘을 합치자고 청하였다.

상(미천)은 <장막사>에게 <분서>와 상통하고 모의하여 낙랑을 쪼개라고 명하였더니,

<자술>은 이에 화가 치밀어 화의를 거두고,

<분서>가 서도를 습취한 것에 분을 참지 못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이해 10월, 계림 사람으로 잘생기고 담력과 용기가 있는 <자술>의 신하 <황창랑>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꾸며 <분서>를 찾아가니,

<분서>가 그 아름다움에 빠져 수레 안에서 거두는 중에, <황창량>이 <분서>를 칼로 죽였다.

<고구려사초>

 

분서7년 봄 2월,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백제왕기>

 

25. 고구려의 대방 정벌

 

고국원제22년{AD352}임자,

2월, <해발觧發>이 정남대장군(征南大将軍)이 되어 <방식方式>·<우신于莘>·<동리佟利> 등을 이끌고 나가서

대방(帶方)을 정벌하고 그 왕 <장보張保>를 사로잡았으며,

<근초고>와 관미령(関彌岺)에서 싸워 대파하고 세 개의 성을 쌓았으며, 두 나라의 남녀 1만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고구려사초>

 

26. 366년, 신라 기림왕이 우두주에서 낙랑과 대방의 공물을 받다

 

기림왕 3년(A.D.366) 화호(火虎=丙寅)

정월 왜와 다시 화친을 하였다

2월 순찰하여 비열홀(比列忽)에 이르러 백성과 노인을 구휼하였다.

신후(神后, 광명)가 폐신(嬖臣) <흘해訖解 329-392)>와 사통(私通)하여,

왕에게 북쪽을 순찰하도록 명령하고는 사랑하고 좋아하였다.

3월 근초고(近肖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5월 왕이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의 공물을 받았다.

당시 구려(句麗, 고구려)와 부여(夫余, 백제)는 영토를 다투어, 모두 우리에게 순(順)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2국(二國, 낙랑과 대방) 모두 우리에게 순(順)하였다.

왕이 이에 선무(仙巫)를 이끌고 태백산(太白山)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기림이사금 3(300)

정월 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2월 왕이 비열홀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자와 가난한 자를 직접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하사하였다.

3월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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