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시길(柴吉)의 낙랑국과 최리(崔理)의 낙랑국
BC 54년
.......
말갈들이 <오만奧万(BC83-BC42)>땅을 침입하여, <두진斗辰(BC92-BC45>이 달려가 구원하였다.
<시길柴吉( ?-BC12)>이 낙랑국(樂浪國)을 칭하고,
졸본국(卒本國)이 곤연(鯤淵)을 병탄하고
<송양松讓( ?-BC22)>이 <오건奧犍(BC79-BC23)>과 고국원(故國原)을 다투었다.
<추모경>
BC 59년 북부여 모수제가 붕어한 후 북부여는 <왕불>이 난을 일으켜 일시 장악한다.
이 틈을 노려 BC 54년에 말갈인 <시길>이 남하하여 낙랑국을 세워 순노 땅을 침범하니
동부여의 제후국인 갈사후 <옥두진>이 구원을 하였다.
순노국 <오만>은 추모의 이복누나 <황>의 아들이고 <옥두진>은 추모의 외할아버지이다.
<오만>의 친동생 <오건>이 다스리는 청하국의 곤연을 졸본국이 병탄하고
비류국 <송양>은 청하국의 고국원을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었다는 것이다.
광명대제8년 기유(BC.12) 5월 <시길柴吉>의 아들 <창특昌特>이 섰다.
<광명대제기>
二十年 丁未三月 樂浪反 上親征其都沃沮 拔之 崔理北走南沃沮
蚕支落部戴升 反屬于漢 本盖馬臣也 奸譑無比
往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
대무신제 20년(AD47)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상이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뿌리뽑으니, <최리崔理 >가 남옥저로 패주하였다.
<잠지락>부의 <대승>이 배반하고 한(漢)으로 갔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기가 비할 데 없어 적성,잠지락 강 사이를 오가더니 개마국을 잠식하였다.
<대무신제기>
적성(赤城)은 개마국에 있는 성이고 잠지락부는 낙랑군의 치소인 평양 인근의 평지에 있는 마을이다.
시길의 낙랑국은 <시길 재위BC54 - BC13> → <창특 재위 BC12 - ? > → ? → <최리 재위 ? - AD 54>로 4대로 이어왔는데
<창특>과 <최리> 사이의 왕은 누구인지 빠져있다.
47년에 대무신제가 개마국과 왕검성(낙랑군의 치소, 평양) 사이에 있는 낙랑국의 도성 옥저성을 점령하니
낙랑국의 유민들 중 1만명은 잠지락부의 <대승>과 함께 낙랑군 치소인 평양(왕검성)에 투항하고
5천명은 신라로 이주하고 <최리>는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신라의 서북변에 정착하니
시길이 옥저에 세운 낙랑국의 남쪽에 있어 이를 남옥저라 하였다.
47년은 신라 혁거세 40년이다.
이 <최리>가 세운 남옥저의 낙랑국을 대무신제가 54년에 병탄하여 죽령군으로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효동왕자와 낙랑공주, 고구려 중천대제 <연불>과 신라 <옥모> 后의 러브 스토리를 탄생시킨 곳이
바로 이 죽령군으로 신라는 벌휴왕 때 <옥모>후가 중천대제로 부터 죽령을 얻어 죽령군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 남옥저의 땅 인근에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이 있었고 훗날 발해의 신라도(新羅道)인 남경 남해부(南海部)가 된다.
四年..........
冬十月 蠶友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민중왕) 4년(47년) 겨울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가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후한서에는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민중왕 4년(47년)은 대무신제 20년이다.
온조 반정에 의한 유리의 죽음(18년)을 감추기 위하여
유리가 죽은 후 온조가 통치한 9년을 고구려사초는 유리가 통치한 것으로 기록하고
삼국사기는 유리가 죽은 후 대무신제가 18년에 즉위한 것(실제는 28년이 대무신제 원년이다)으로
9년을 끌어 올리다보니 고구려 초기 기년이 뒤틀린 까닭이다.
대무신제가 낙랑국을 정벌하니 잠지락부 대가 <대승>이 배반하여 낙랑군에 귀부한 것을 말한다.
삼국사기는 이 사실을 잠우락부의 1만여家가 漢에 투항하였다고 기록하였다.
二十三年冬 句驪 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건무) 23년(서기 47년) 겨울,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명이 낙랑(樂浪)으로 와서 복속하였다.
<後漢書 卷八十五>
후한서는 만여명이 낙랑에 복속하였다고 하였다.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옥저국(沃沮國) 지역이며 고구려 때 비사성(沙卑城)으로 당나라 이세적이 공격하였던 곳이다.
발해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로 불렀다.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는데 너비가 9리나 된다.
옥주(沃州) 청주(晴州) 초주(椒三) 등 3주를 관할하였다.
옛 현은 옥저(沃沮) 취암(鷲巖) 용산(龍山) 빈해(濱海) 승평(昇平) 영천(靈泉) 등 여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태평(太平) 연간(1021~1031)에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남해성(南海城)을 굳게 지켜
1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별부 추장이 모두 사로잡히자 비로소 항복하였다.
그리고나서 반란군을 모두 상경(上京)으로 이주시켜 천료현(遷遼縣)을 설치하였다.
택주(澤州)의 백성을 옮겨 채웠다. 호구수는 1,500이며, 관할 주는 2개이고, 관할 현은 1개이다.
海州 南海軍 節度, 本 沃沮國地, 髙麗 為 沙卑城, 唐李世勣 嘗攻焉. 渤海 號 南京 南海府, 疊石 為 城, 幅員 九里,
都督 沃晴椒 三州, 故縣六, 沃沮 鷲巖 龍山 濵海 昇平 靈泉, 皆廢. 太平中 大延琳 叛, 南海城堅守, 經歳不下,
别部酋長 皆 被擒, 乃降因盡. 徙其民於上京, 置遷遼縣, 移澤州民來實之. 户一千五百, 統州二 縣一.
<요사 지리지>
요사지리지는 비사성(卑沙城)은 돌로 쌓았는데 크기가 폭원(幅員) 9리라고 한다.
동서남북의 길이가 같은 정사면체의 성이라면 사방이 각각 900m 정도 되는 커다란 성이라는 걸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비사성(卑沙城)이 발해의 남경 남해부로 그 당시 신라로 가는 신라도(新羅道)라고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 멸망 후 통일신라 시대까지 신라가 이 곳에 있었던 것인가?
통일신라 시대 신라인 해상왕 장보고의 동상이 산동반도의 법화원에 있고 그의 비석이 일본의 교토 엔랴쿠지(延曆寺)에
지금도 남아 있으니 통일신라의 강역이 여기까지는 아니라도 산동반도까지는 아닐까 추측해 본다.
발해는 한반도의 동해루트가 아닌 장보고의 해상루트를 따라 신라와 일본으로 왕래한 것이다.
二十二年 己酉 正月 遣将軍于刀,烏義等 伐戴升于蚕支洛河柵 斬于柵南 進拔赤城蠶支
遂率紫蒙王,滿離,斯古,涉得等 分四道 進功右北平,漁陽,上谷,太原等地
奪其宝玩美色絹織珍味等多数 歲以爲常 蔡彤大惧約修年貢而乞和
대무신제 22년 을묘(A.D.49) 정월
장군 <우도于刀>와 <오의烏義> 등을 잠지락하 목책으로 보내어 <대승戴升>을 쳐부수고 목책의 남쪽에서 목을 베었다.
진격하여 적성과 잠지를 빼앗고, 자몽왕 <만리사고滿離斯古>와 <섭득涉得> 등을 거느리고 네 길로 나누어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공격하여
보물노리개(宝玩), 미색(美色), 비단(絹織), 진미(珍味) 등 여러 가지를 빼앗았다.
년 중 항상 이러하였더니, <채동蔡彤>은 크게 두려워하여 매년 조공하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대무신제기>
대무신제는 배반한 <대승>의 목을 베고 내친김에 멀리 산동성의 태원까지 진격한다.
모본왕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 (北平) · 어양 (漁陽)· 상곡 (上谷) · 태원 (太原)을 습격하였으나
요동 태수 채동 (蔡彤)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해하고 친하게 지냈다.
.......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어느 나라의 사서인지?
요동태수 <채동>이 해마다 조공하고 화친을 구걸하였다고 하는데
오히려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니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중모화(從中慕華)도 분수는 지켜야지...
二十五春正月 遼東徼外貊人 貊人 穢貊國人也 貊音陌
寇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烏桓大人來朝 大人謂渠帥也
건무25년(49) 춘 정월,
요동요외의 맥인(맥인은 예맥국 사람이고 맥은 맥이라 발음한다.)이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노략질하여, 요동태수 제융이 투항을 권유하였다.
오환 대인이 내조하였다. 대인은 거수를 일컫는다.
<후한서 권1 광무제>
후한서는 한술 더 떠 노략질하러 멀리까지 왔으니 투항하라고 권유하였다고 한다.
春 正月 遼東徼外貊人寇邊 太守祭肜招降之
肜又以財利撫納鮮卑大都護偏何 使招致異種 駱驛款塞
肜曰 審欲立功 當歸擊匈奴 斬送頭首 乃信耳
偏何等即擊匈奴 斬首二千餘級 持頭詣郡
其後歲歲相攻 輒送首級 受賞賜
自是匈奴衰弱 邊無寇警 鮮卑 烏桓並入朝貢
肜為人質厚重毅 撫夷狄以恩信 故皆畏而愛之 得其死力
춘 정월, 요동요외의 맥인들이 변경을 노략질하자 태수 <제융祭肜>이 항복을 권하였다.
<제융祭肜>은 또 재물과 이익을 내세워 선비대도호 <편하偏何>를 받아들였다.
사신을 보내 다른 종족들을 초치하니 연이어 새(塞)를 두드렸다.
<제융祭肜>이 말하기를 “만약 공을 세우고자하면 마땅히 돌아가서 흉노를 격퇴하고
우두머리의 머리를 참하여 보내거라 그리하면 믿겠노라.
<편하偏何> 등이 즉시 흉노를 공격하여 2천여 급을 참수하고 머리를 갖고 군에 도달하였다.
이후 매년 서로 싸우고 번번이 수급을 보내와서 상을 받아갔다.
이로부터 흉노가 쇠약해지고 변경에는 도적들을 방비할 필요가 없어지고
선비와 오환이 나란히 들어와 조공을 하였다.
제융은 사람됨이 중후하고 강직하여 이적을 은혜와 신의로서 달래었기에,
모두 그를 존경하여 사랑하니, 그를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자 하였다.
<자치통감>
중국인의 사서의 곡필이 이 정도이다.
대무신제 27년 갑인(AD54) 4월
<호동好童>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을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하여 최리(崔理)의 새 도읍에 이르러
최리의 딸과 사이좋게 사귀었다.
그녀는 호동을 위해 북과 나발을 망가뜨려 맞이하였다.
왕이 거느린 대군은 옥저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가서 그 도읍을 빼앗고 최리의 내외를 사로잡아 돌아왔으며,
그 땅은 죽령군(竹岺郡)으로 삼았다.
<대무신제가>
12. 섭라국의 여왕 혁거지
동명14년(BC24)
九月,涉羅女主<奕居知>遣使入貢. 涉羅,在於桓那之東南,依山傍海,世襲女主.
山多野少,民以魚獵為生,冡冢居岩伏,好歌舞鬼神.
囯之俊秀者為女主之嬖臣,生女為巫,其最少者継之.
其俗淳,實不草[華],能為其主而盡忠. 上,賜<奕居知>綾緞,命親自入朝.
9월, 섭라국(涉羅國) 여왕 <혁거지奕居知>가 사신을 보내 입공하였다.
섭라(涉羅)는 환나(桓那)>동남으로 산을 의지하면서 큰 물가에 있고 여왕(女王)이 세습하고 있었다.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백성들은 어렵(漁獵)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언덕에 거주하거나 가파른 곳에 숨어 살고 귀신에게 즐겨 노래하며 춤추었다.
나라 안에선 지혜와 풍채가 빼어난 이가 여왕의 폐신(嬖臣)이 되어서,
딸을 낳으면 무녀(巫女)를 삼고 그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이로 뒤를 이었다.
그곳은 습속이 순박하나 실로 거칠지 않고, 능히 그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상께서 <혁거지>에게 능라(綾羅)를 하사하였으며 친히 스스로 입조하라고 명하였다.
<추모경>
섭라국은 환나국의 동남으로 산을 의하면서 큰 물가에 있고 여왕이 세습한다고 하였다.
神國의 나라 신라에는 神國의 道가 있어 二聖(여왕과 남왕)이 나라를 다스렸다.
여왕은 神后로서 남왕보다 우세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여왕을 중심으로
朴, 昔, 金이 여왕의 부군이 되거나 아들이 되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추모경에서 말하는 섭라국은 바로 사로국으로서 훗날의 신라를 말하는 것이다.
그 신라가 큰 물가에 있어 산을 의지하여 언덕에 거주한다고 하였으니
안신진(군사지도에는 신안진으로 되어 있다)이 진한 6촌 지역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昔者 仙桃山 元始聖母 波穌天王 頭戴絳色金冠 身被銀色錦神衣內着紫黃綠四十九彩
率大瓢碧海加耶三仙姑乘彩雲 而下降 于仙桃山 千年老桃 梪王之宮 以爲六部之神
天神 乃率雷火風三神而下降 與聖母合歡 而娠大日光明 天神 是爲奕西居 於是 眞花發於吾土仙骨大昌
예전에 선도산(仙桃山) 원시(元始) 성모(聖母) <파소波穌>천왕이 머리에 진홍색 금관을 쓰고
몸에는 은색의 비단 신의(神衣)를 걸치고, 안에는 자황록의 49가지 색깔의 옷을 입고
<대표大瓢>, <벽해碧海>, <가야加耶>의 세 선녀(三仙姑)를 거느리고
채운(彩雲)을 타고 선도산 천년 묵은 복숭아 ‘두왕(梪王)의 궁’에 내려와 6부의 神이 되었다.
이에 <천신天神>이 <뇌신雷神>, <화신火神>, <풍신風神> 三神을 이끌고 내려와,
성모(聖母)와 합환(合歡)하여 대일광명(大日光明 : 혁거세)을 임신하였다.
천신(天神)은 <혁서거奕西居>이다.
이로부터 진화(眞花)가 우리 땅에서 피어나 선골(仙骨)이 크게 번창하였다.
<위화진경 魏華眞經 >
?(혁거지 BC40?-) - 혁서거(BC20?- )(파소 BC19?- ) - 혁거세(BC5-66)
<혁거지>는 <혁거세>의 조모이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후 고구려인과 백제인을 다스리기 위하여 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해를
1갑자 정도 위로 끌어 올려 실성왕 이전의 신라기년은 맞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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