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十五年 移都平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5년(서기 427),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삼국사기의 장수왕 15년(427년)의 '移都平壤'이라는 네 글자는 고구려의 강역을 한반도로 축소하는 단서를 제공하여
일제 식민사학자와 강단사학자는 장수왕이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국내성에서 북한의 평양으로 천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장수대제14년{AD427}정묘,
2월, <평양>의 새 궁으로 이거하였다.
궁전과 관사의 규모의 웅장하기가 나라가 있어 온 이래로 처음 있는 것이었다.
상이 돌아 본 후에 좌우들에게 이르길;
“옛날 우리의 동명(東明)께서는 띠 풀 지붕에 사시면서도 대업을 능히 이루셨소.
짐은 이렇게 금으로 지은 궁전에 머물기가 마음이 개운하지 않소.
장차 동명(東明)께 어떻게 보답한단 말이오.
그대 백료들 모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주와 성심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어서
동명(東明)의 나라를 빛내야 할 것이오.” 라 하였더니, 군신들이 엎드려 절하였다.
<고구려사초>
고국원제 13년(343년)
추7월,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상불>을 동진으로 보내 <황>의 무도함을 하소연하였다.
<고구려사초>
342년 고연전쟁으로 환도성이 불타자 343년에 밀도(密都)인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한다.
고국원제 33년(363년)
3월, 경도의 인구가 조밀하여졌기에 헤아려서 여러 관청을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사초>
동황성(東黃城)은 밀도(密都)로 규모가 작아 363년에 여러 관청을 동황성 밖의 평양으로 옮긴다.
그리고는 427년에 평양(今 보정시 정흥현 고성진)에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궁전과 관청을 지어 동황성에서 이거한다.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것이 아니라 평양의 동황성에서 새로 지은 평양의 궁궐(평양대궁)로 이거한 것이다.
고구려사초 외 다른 사료들도 살펴보자
<사료1>
東夷高句驪國,今治漢之遼東
<宋書 고구려>
동이 고구려국은 현재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을 다스리고 있다
송서는 AD 462년 송나라 효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서로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에 대하여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을 지배하여 다스리고있다고 한다.
한나라 시대는 지금의 남역수가 요수이고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이 요동성이었다.
<사료2>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宋書 백제>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 밖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송서 백제 기록은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고 하며
백제가 다스린 요서의 치소가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한다.
진평현은 유성현(今 보정시 서수구 동부산향)과 북평현(今 보정시 순평현) 사이에 있었다.
<사료3>
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 ...중략...
於廓靈海百川注焉東明之裔 寔爲朝鮮
<연남산묘지명>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중략)
넓고도 신령스러운 바다여! 수많은 강물이 모이는 곳.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
焉公姓泉諱男生字元德遼東郡平壤城人也
<연남생묘지명>
공의 성은 천이며 휘는 남생이고 자는 원덕으로서, 요동군 평양성사람이다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출생지가 요동군 평양성이라 하였다..
위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 멸망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연남산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조선을 계승하였으며, 평양을 조선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 연남생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나라를 세워 요동에서 패망한 것이다.
그리고 요동성은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이다.
<사료4>
高麗之地本孤竹國也周代以之封于箕子
<隨書 배구전>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다.
《사기·백이열전》<괄지지(括地志)>기록에 “고죽고성은 노룡현 남 12리에 있다.[孤竹古城在盧龍縣南十二里]”고 했고,
《한서(漢書)》에는 “요서군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遼西郡令支縣有孤竹城]"라고 하였다.
고죽국은 노룡(盧龍)에 있었다.
노룡(盧龍)은 갈석산, 창려(昌黎) 등과 함께 진황도시 쪽으로 이치되기 전에는
창려(昌黎), 도하(徒河), 극성(棘城), 영지(令支)와 함께 유성(柳城, 今 보정시 서수구 동부산향)의 서북쪽 인근에 있었다.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治三郡
<삼국유사 고조선>
당서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한나라가 3군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十八年初 焬帝之幸 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隠與之見帝 黄門侍郎裴矩
說帝曰髙勾麗本 箕子所封之地 漢晉皆爲郡縣 今乃不臣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但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8년(607) 처음에 수양제가 <계민>의 장막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여 그와 더불어 황제를 만나 보았다.
황문시랑 <배구>가 황제를 설득하며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진 晉 때에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앞의 황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 땅임을 기록하고 있다.
고죽국은 BC 650년경 齊 환공이 멸한 하북성에 있었던 나라이다.
<사료 5>
안동대도호부
순임금이 청주를 분할하여 營州를 만들었고 牧을 배치하였으니 마땅히 요수의 동쪽이 이곳이다.
춘추시대 및 전국시대에는 아울러 연나라에 소속되었고 秦나라와 전한.후한시대에는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낙랑과 통하였다.
晉나라 시기에는 그대로 따랐으며 겸하여 平州를 설치하였다.
後魏시대에 고구려가 그 지역에 도읍하였다.
大唐 總章(당나라 고종의 연호) 원년(668년)에 <이적>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176개 성을 얻어 그 지역을 都督府 9, 州 42, 縣 100개를 분할했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하고 그 지역 토박이 지도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았다.
<「通典」권180 州郡 古靑州 安東府>
「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편찬한 책이다. 모두 2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우>는 唐 玄宗 開元 23년(735년)에 태어나 唐 憲宗 元和 7년(812년)에 서거했다.
<두우>는 풍부한 정치적 경험과 고결한 문화적 수양을 갖추었다.
따라서 그는 역사가의 안목으로 현실의 정치. 경제 문제를 처리했고 정치가의 식견으로 역사서를 저술했다.
「통전」은 <두우>가 唐나라 代宗 大歷 원년(766년) 무렵에 편찬을 시작하여
德宗 貞元 17년(801년)까지 35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을 소요하여 편찬 한 책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것은 668년인데 두우가 통전의 편찬을 시작한 것은 766년이다.
그러니까 고구려가 멸망한 지 100년 뒤에 「통전」을 편찬 한 것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일이고
위안부문제는 이때를 전후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 몸으로 겪은 사람들과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증언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두우>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67년 뒤인 735년에 태어나서
766년 고구려가 멸망한 지 100년후에 「통전」의 저술에 착수했다.
<두우>도 고구려 문제를 직접 체험한 사람과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소상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당나라의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평양이 대동강 유역의 평양인지
남역수 유역 平州 평양인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지 67년 뒤에 태어나
현장을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을 통해 증언을 들었을 <두우>는
당나라에서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에 있었는지 아니면 평주에 있었는지 환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두우>는 안동도호부가 평주,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지역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과연 역사의 진실이 아니라고 반박할 자료가 있겠는가.
平州의 치소는 노룡현이다.
전국시대에는 연나라에 속하였고 진나라 때는 우북평 요서군 지역이었다.
전한.후한시대에는 秦나라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따랐다.
晉나라 때는 요서군에 소속되었고 後魏 시대에도 역시 요서군이라 하였다.
수나라 초기에 평주를 설치하였고 양제 초기에 평주를 폐지하고 다시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당나라 때는 수나라 행정구역을 그대로 따랐다.
관할한 현은 3개인데 盧龍縣, 石城縣, 馬城縣이다.
<「통전」북평군 평주>
<사료 6>
晉나라 때 平州를 설치했던 지역에 後魏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고
唐나라때에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
<通監地理通釋>
南宋 말년의 학자 <왕응린王應麟(1223-1296)>의 「通鑑」의 지리에 관한 주석에서
<두우杜佑>의 주장을 그대로 계승하여 말하고 있다.
<사료 7>
箕子後封遙之樂浪 今平州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德以遙爲箕州 八年 而高麗亦其地
<路史 27券 朝鮮>
기자는 뒤에 요의 낙랑에 봉하였다.
오늘날의 평주 노룡현 지역으로 여기에 조선성이 있다.
그러므로 무덕 연간에는 요(遙)를 기주로 삼았다.
무덕 8년임. 그런데 고구려도 또한 그 지역에 있었다.
이 자료는 「路史」의 저자 <羅泌>이 「路史」를 저술하던 송나라 당시의 平州 노룡현에
기자조선과 한사군의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울러서 고구려도 역시 그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사료 8>
唐征高麗 拔平壤 置安東都護府 其國東徙 在鴨綠水東南千餘里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압록수 동남쪽 1,000여리에 있게 되었다.
<鄭開陽雜著 5券 朝鮮考>
朝鮮考의 저자 <鄭開陽>은 <王守仁>의 제자로 明나라 때 유명한 학자이다.
「日本圖纂」, 「朝鮮圖說」, 「琉球圖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동아시아의 정세에 아주 밝았던 학자로 그의 고구려에 대한 이와 같은 주장은
반드시 어떤 명확한 근거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압록수(今 요하) 동남쪽 천리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옮겨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을 말한다.
<사료 9>
後唐 淸泰 연간(934-936) 말에 고구려가 다시 일어났으니
<왕건>이 신라의 변두리 읍을 쳐서 점령하고 송악에 도읍을 세웠다.
元史에 "압록강 동쪽 천여 리에 있는 곳은 옛 평양이 아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신라{고려}는 겨우 海城의 동쪽과 조선의 여러 도를 차지하고 있었고 당나라 때의 지역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五代 이후 요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이어서 끊어지지 않았다.
계림에 관해서 보면, 곧 길림으로서 鷄(ji)와 吉(ji)의 발음이 서로 부합하고 여러 지리를 조사해 보아도 또한 모두 부합한다.
<滿州源流考>
元史 고려전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료 10>
<고구려 적은 무리(少醜소추)가 마음이 어지럽고 사리에 어두워 불손함이 극에 달해
윗 나라를 받들어 모실 줄은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발해(勃海)와 갈석(碣石)의 사이에 가득 차게 모여 요(遼)와 예(濊)의 땅을 거듭 침식하여
한나라와 위나라 때 여러 번 그 소굴을 뒤집어 그 나라 백성들을 분산시키곤 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거리가 멀어 그 족속들이 여전히
전에 살던 곳을 회복하고 번식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저 화양(화북)을 돌아다보니 모두 고구려가 잘라먹고 세월이 흘러 쌓여진 폐단이 그 땅에 이미 그득하다
하늘은 음흉하고 사악한 자들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 고금의 변하지 않는 이치일진대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선량한 백성들과 공손한 이웃나라들의 평상의 생활을 어지럽히고
도덕과 의리를 그르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데
이를 스스로 반성하며 부끄러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행을 숨기고 간사한 마음을 품으려 한다
살던 땅을 떠나본 고통과 험한 것을 일찍이 겪어보지 않아
천자를 배알하는 예를 몸소 하려하지 않으며 계속 우리의 착한 망명자를 꾀어드리고
나라 경계에 첩자가 들끓어 우리의 감시병을 몹시 괴롭히고 있다
그리하여 국경문의 빗장을 열고 닫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되지 않아
천하가 시끄럽게 되고 백성들은 곤하여 생업에 열중하지 못하게 되었다
선왕의 정벌이 있을 때에 잠시 그물을 벗어났으나
그 때 사로잡은 자들을 죽일 생각이 없어 이를 미루고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랬는데 일찍이 그 은혜를 깨닫지 않고 도리어 마음속에 악함만을 길러
거란의 족속과 합세해 해변의 경계(境界)를 약탈하며
바다를 지키는 우리의 병사를 죽이고 말갈의 무리와 협력해 요서를 침노하였다
또한 청구(한반도의 신라와 백제를 말함)의 외방(外方)이 다 조공을 받으려 하고
벽해(碧海)의 바닷가 백성들이 오로지 중국의 은혜를 받들려 하는데
고구려가 이를 중간에서 막고 재물을 도적질하며 여러 나라의 통로를 끊었다
그 무례함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며 드디어는 그 잔학함이 별로 죄가 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다만 성실한 사람만이 손해를 거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사명을 받든 수레가 해동(海東)에 가려고 고구려를 지나가면 중간에서 길을 막고 못 가게 했다
군왕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를 갖출 수 있겠는가?
이래도 참을 수가 있다면 어떤 것인들 수용하지 못하랴?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마저 무거우며 권력을 잡은 신하와 호족들이 다 국권을 마음대로 하여
서로 편을 가르고 자기편만을 아끼는 것을 풍속으로 아니
뇌물은 시장과 같고 억울한 사람이 있어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거기에다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모두 굶주리고 전쟁은 쉴 틈이 없다
나라 일에 동원되는 일은 기한이 없고 장정들의 힘은 전부 군량운반에 동원되어
몸뚱어리는 진 구렁텅이에 굴러 고통을 받고 있으니 나 말고 누가 가서 이들을 구하겠는가?
나라의 다급함이 이미 경각에 달했는데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지경이다
백성들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하기에만 여념이 없고
어린아이까지 그 혹독함을 탄식할 형편이다
내가 마침 지방을 살피기 위해 나라의 북쪽인 유주(幽州)와 삭주(朔州)까지 온 이상
이왕 왔던 길에 진구렁에 나뒹구는 백성을 위로하고 그 수괴(首魁)를 처벌할 것이다
이에 내가 친히 6사(師)를 통솔하며 9가지 벌을 실행해 저들의 위급함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못된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을 섬멸하는 동시에 선왕께서 도모하고자 했던 정책을 아름다운 일로 계승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 부대는 정해진 규율에 따라 부대를 나누어 나쁜 무리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의의 노정에 올라
우레와 같이 발해를 뒤엎고 부여를 거쳐 번개같이 그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모두 창과 방패를 갖추고 갑옷을 입힌 병마를 앞세워 힘차게 행군할 것이며
여러 번 거듭 필승을 다짐한 후에 각자 정성을 다해 싸우도록 하라
좌측 12군은 루방*장금*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로 가고
우측 12군은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해*답둔*숙신*갈석*동이*대방*양평 등의 길로 가되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집하라>
<수 양제의 조서>
612년 1월 3일 수양제는 탁군(涿郡)의 임유각(臨楡閣)에 올라
모든 장수와 군사들에게 고구려를 치고자 하는 장문(長文)의 조서(詔書)를 발하였다
여기에서 <수양제>가 제 입으로 말한 이야기를 들어
그즈음 고구려와 경계는 물론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를 살펴보자
먼저 그는 <발해와 갈석 사이에 가득 차게 모여......>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그 무렵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 사이의 지역인 하북성 보정까지 점령하고 있음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다음의 <요와 예의 땅을......> 이라는 글에서도 보듯
요수{漕河}와 예수{易水}의 땅을 역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발해를 덮고 부여를 거쳐.......>라고 한 것은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보정의 북부를 동서남북에서 협공한다는 말이며
부여는 갈석산의 동쪽에 있던 요서지역의 북부여(보정시 서수구 동부산향) 땅을 말하고 있다.
<나라의 북쪽인 유주(幽州)와 삭주(朔州)...>라고 한것은
유주(幽州)는 지금의 하북성을 말하며 삭주(朔州)는 산서성을 말하는 것이다.
<옥저와 낙랑 대방등의 길로 전진해서 평양으로 총집하라>는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전쟁을 시작하면서 내린 명이라 더욱 그런 것이다
옥저, 낙랑, 대방은 평양의 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사료 11>
광개토왕비문 399년 기해년 기사에 王巡下平壤이라 하였다.
백제가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자 수도인 평양에서 하평양인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순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북한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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