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역고/고구려

고구려의 평양을 찾아서(8)

지보고 2023. 10. 9. 07:41

14. 평양(平壤)

 

- 평양(平壤)의 연혁

 

왕검성(기자조선) 요동군 험독현(, BC300-BC222) 왕검성(위만조선 BC194-BC108)

낙랑군 조선현 노룡성(前漢 BC108-AD313) 평양(고구려 장수왕 천도 AD427) 안동도호부(당 668)

홀한주, 중경 현덕부(발해 699-927)

홀한성, 동단국, 남경, 천복성, 동경 요양부(요 928-1125)

 

지금까지 BC300년경 燕 <진개>의 東征 후 설치한 요동군과

BC108년 漢 무제가 위만조선 멸망 후 설치한 낙랑군의 주요한 현을 살펴 보았다.

 

그러면 고구려의 평양은 어디인가?

 

- 평양의 후보지

 

① 대동강 평양설 : 일제 식민사학의 대두 <이병도>의 후학인 강단사학자의 주장(<윤용구> 등)

 

                                     <대동강 낙랑설로 박사가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윤용구>

 

② 요녕성 요하유역 요양 평양설 : 인하대 <복기대> 교수의 주장

③ 요녕성 대릉하유역 조양 평양설 :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주장

④ 하북성 난하 유역의 노룡 평양설 : 민족문화연구원의 <심백강> 원장의 주장

 

                                              <민족문화원장 심백강 원장이 주장하는 낙랑군>

 

심백강 원장은 낙랑군 25개 현의 강역을 넓게 보정에서 진황도까지로 보았다.

 

⑤ 하북성 보정시 역수 유역의 보정 평양설 : 단재 <신채호> 선생의 주장

 

그림 8-1 평양의 후보지

 

해방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낙랑군 조선현에 설치한 평양의 위치에 대한 해설이 분분하다.

 

몇년 전 물러난 일본의 아베 수상의 할아버지인 일제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1875-1953)>는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총독부가 폐지되자 1945. 9. 12일 일본으로 떠나면서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사람으로 살 것이다.

보라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우리는 언제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구려의 평양을 이야기 하다보면 

자칫 국수주의에 빠진 환빠로 매도되기도 하고, 일제 식민사학의 앵무새라고 비난 받기도 한다.

마치 지금 우리의 국론이 분열되어 좌파니 우파니 무당파니 하는 모습과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한류의 열풍을 전세계에 몰고 다니는데....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역사의 왜곡이 외적의 침입으로 사서를 불태워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왜곡이 되었다고 하였다.

아직도 고조선을 한낱 신화로 생각하고 장수대제가 천도한 평양이 대동강 평양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병도의 후학인 강단사학자들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병도가 죽기 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한사군은 하북에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그의 후학들은 그들이 받은 박사학위 논문이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되고

그들의 밥줄이 끊기는 것을 두려워 하여 선생이 죽기 전 노망이 들었다고 항변한다.

 

否之匪人 盈虛消息 天行也(비지비인 영허소식 천행야)

주역은 천지비(天地否) 괘에서 고집과 편견, 고정관념에 빠진 사람은

내유외강(內柔外剛)의 소인(小人)으로 불통(不通)이라고 하여

가득차면 비우고 소멸하면 생기는 것이 하늘의 운행이라 하였다.

 

아직도  이병도의 후학인 <윤용구>등은 자랑스럽게 대동강 낙랑설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고 사학자이니 중국의 서서를 모를 리 없지만 고정관념에 빠져 마음을 비우지 못할 뿐이다.

필자는 이들이 고집과 편집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 

 

그러면 고구려의 평양은 위의 5곳의 후보지 중 어느 곳인가?

 

1.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

 

-  평양의 필요 충분 조건

 

①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어야 한다.

② 요하 또는 요수가 흘러가는 곳이어야 한다.

③ 갈석산과 <몽념>이 쌓은 진장성이 있어야 한다.

 

위의 3가지 필요충분 조건 중 강은 시대에 따라 물줄기와 이름이 바뀔 수 있으니

가장 확실한 것은 몽념이 쌓았다는 진장성과 갈석산의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그림 8-1의 3곳의 갈설산중 진짜 갈석산은 어느 곳인가?

 

- 갈석산의 필요충분 조건

 

①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다.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상서우공편

 

역사에 등장하는 갈석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도이(島夷)는 발해만 북부지역에 살던 동이족의 한 갈래인데,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인 중국 하나라 우임금 시절에 도이(島夷)가 배를 타고 발해만 연안을 돌아,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에 우뚝 솟은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② 갈석산은 태행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한다.

 

태행산맥 동쪽 끝의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동쪽 부목(榑木) 땅에 이른다.

太行石間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東至日出之東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時則訓

 

한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BC179~BC122)>이 편찬한 회남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갈석산이 태행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갈석산을 넘으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나온다고 하였다.

 

③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다.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사기색은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위치한 이 갈석산을 사기색은에서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이 갈석산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또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라고 하였다.

 

④ 갈석산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지형을 따라 험난한 곳을 이용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 만여 리에 이르렀다

築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

사기몽념열전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몽염장군에게 명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 起自臨洮,至于碣石.

수경주하수河水 3’

 

위의 두 구절에서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임조에서 요동까지또는 임조에서 갈석까지이며,

갈석산이 곧 요동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다.

 

위 4가지 필요충분 조건을 만족시키는 갈석산은 보정시 역현에 소재한 갈석산이다.

 

대동강 평양의 갈석산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에 의하여 이병도가 억지로  끼워 넣은 가짜 갈석산이고

난하 유역 갈석산은 중국이 왜곡하기 위하여 고의로 창려, 노룡, 영주, 서안평, 양평, 요양 등과 함께  옮긴 가짜 갈석산이다.

 

2.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하는 갈석산

 

「北史」와 「隋書」를 考하면 「魏」와 「隋」가 일즉 「上爲」에 在하야 郡을 置하야 「樂浪」이라 하고

縣을 置하야 「遂成」이라 일홈 하얏스니 燕의 長城은 上爲谷에 起한 것이 明白하다.

(단재는 수서 지리지 기주 상곡군 수성현을 설명하고 있다

 기주 상곡군 수성현은 본래 낙랑군 수성현인데  燕장성의 기점이 상위곡(上爲谷)이라는 것이다)

 

「晉書」의 書載가 此를 指함이라.

「晉書」作者 「唐太宗」이 「隋」末에 生하야 「晉陽」에 家하매 항상 此를 見하고 燕의 長城을 이갓치 말함이라.

(단재는 진서 지리지 평주 낙랑군 수성현을 설명하고 있다

 진서를 찬한 당태종의 생가가  진양(晉陽)에 있어 燕장성을 보고 그 기점이 상위곡(上爲谷)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碣石山」은 엇지 함이뇨.

(禹貢冀州가 夾右碣石이라 하고 其下又云太行王屋至於碣石)이라 하니 이는 一時에 二碣石이 有한 연고라.

(단재는 갈석산이 보정에 우갈석과 좌갈석으로 2곳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新唐書」에 平州石城에 有碣石山이라 하고 營州柳城에 亦有碣石山이라 하니

당시에 대개 衆石이 碑碣 갓치 立한 것이면 「碣石山」이라 名함도 그럴 뜻하나니 엇지 上谷인덜 碣石山에 無하리요.

(단재는 평주 석성과 영주 유성에도 갈석산이 있어 여러 돌이 비석처럼 보이는 산은 모두 갈석산이라고 하는데

상곡에도 있으니 상곡에 있는 산이 갈석산이라는 것이다.)

『朝鮮民族의 全盛時代』 (삼천리 제7권 제1호, 1935년 1월 1일 발행)

 

낙랑군(樂浪郡) [한(漢)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조선현(朝鮮縣)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屯有縣), 혼미현(渾彌縣),

수성현(遂城縣)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루방현(鏤縣), 사망현(駟望縣).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晉書』  권 14 '地理 上', '平州'

 

수성현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했다. 북위가 영주에 준하여 남영주를 설치했다. 5군 11현이다.

(용성현‧광흥현‧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한다. 석성현‧양무현‧광도현은 건덕군에 속한다. 양평현‧신창현은 요동군에 속한다. 영락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부평현‧대방현‧영안현은 영구군에 속한다.)

북제(北齊)는 오직 창려군 한 개만 남겨놓고 영락현과 신창현 등 2개현을 다스렸으며,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개황원년(581년)에 주(州)를 옮겼으며, 3년에는 군을 폐하였고, 18년에는 수성현으로 고쳤다. 용산이 있다. 

遂城. 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 五郡十一縣. 龍城 廣興 定荒 屬 昌黎郡, 石城 陽武 廣都 屬建德郡, 襄平 新昌 

屬遼東郡, 永樂屬樂浪郡, 富平 帶方 永安 屬營丘郡. 後齊唯留黎一郡, 領 永樂 新昌 二縣, 餘並省. 開皇元年州移, 

三年郡廢, 十八年改為遂城. 有龍山.

『隋書』  지리지, 冀州 上谷郡 遂城縣

 

단재 <신채호> 선생도 상곡에 있는 어느 산이 갈석산인지 상곡엔들 어찌 없겠냐면서 결론을 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면 단재 <신채호>선생이 말하는 상곡에 있는 갈석산은 어느 산을 말하는가?

 

3. 갈석산(碣石山) 앞에 세운 연소왕(燕昭王)의 황금대(黃金臺)

 

황금대 (黃金臺)

 

북으로 지친 말을 몰아 연나라에 이르렀건만 / 北乗羸馬到燕然

이곳에서 누가 다시 현자를 예우하리오 / 此地何人復礼賢

소왕을 찾고자 하였으나 왕의 처소는 없고 / 欲問昭王無處所

황금대위에 잡초만 하늘에 닿을 듯 / 黃金臺上草連天

 

후어(後語)에 이르기를.. 옛 연나라 쾌왕이 제나라 대왕에게 피살되었다.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이어서 즉위하여 대신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현사(賢士)를 얻어 똑같이 선왕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겠소?"

곽외(郭隗)가 답하였다.

"왕께서 갈석산(碣石山) 앞에 누대를 지으시고 저(곽외)를 높여 현왕(玄王)으로 삼으시면

곧 왕께서 좋아하실만한 천하의 현사들이 반드시 스스로 찾아 올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따라 누대를 짓고 금옥으로 가득 채워 황금대(黃金臺)라 일컬었다.

後語云 昔燕噲王被斉大王所殺 燕昭王次立乃謂大臣曰 安得賢士与同大以報先王之?

郭隗曰 王能築臺於碣石山前 尊隗為玄王 即天下賢士以王好賢必自至也

王如其言作此臺 多以金玉崇之 号 黃金臺

胡曾 詠史詩('常熟瞿氏鐵琴銅劍樓藏景宋鈔' )'黃金臺' 春秋後語인용 기사

 

황금대 - 연소왕(燕昭王)이 현사를 초빙하기 위해 세움.

지금의 하북 역현 동남의 북역수(北易水) 남쪽에 있다.

지금의 북경시, 서수, 만성, 정흥에도 두루 황금대가 있는데 후대 사람들이 차용한 것이다.

黃金台 - 燕昭王招賢所筑, 在今河北易縣東南的北易水南.

今北京市, 徐水, 滿城, 定興均有黃金台, 乃后人依托

中國古今地名對照表'黃金台'

 

서기전 311년에 연소왕이 즉위하였다.

곽외(郭隗)의 협조하에 역수(易水) 곁에 황금대를 축조하였다.

널리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들였는데, 악의(乐毅), 추연(邹衍), 극신(剧辛) 등이 찾아와 의탁하였다.

公元前311, 燕昭王即位. 在郭隗的協助下, 於易水旁修筑黃金台,

廣招天下人才, 樂毅, 鄒衍, 劇辛等前來投奔

바이두 백과 - '燕昭王修筑黃金台'

 

(안숙)현의 서북 25리에 장성(長城)이 있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진시황이 장군 몽염(蒙恬)을 무수로 보내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長城在縣西北二十五里 舊傳秦始皇遣將蒙恬於武遂築長城

安肅縣志(乾隆 43, 1778) 2 '古蹟' 조항,

 

안숙(安肅)은 보정시 서수구(徐水區)의 옛 지명이고 무수(武遂)는 서수구 수성진(遂城鎭)의 고대 지명이다.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의 땅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

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武經總要前集 16 

 

수성현은 옛날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이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 1년 이목 장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성현이었다.

『한서지리지』는 말하기를 "연(燕)에서 남쪽으로 탁군의 북신성(北新城)에 이른다." 하였다.

후한 때는 중산국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에 신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 하였다.

후위의 무제영희2년(533년)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 치소는 부산(釜山)촌이다.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인데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遂城縣舊二十三鄕今四鄕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 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 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太平寰宇記68

 

태강지리지에 이르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史記索隱1 '夾右碣石' 조항

 

그림 8-2&nbsp; 황금대와 낭아산(갈석산)

 

4. 진시황(秦始皇)과 갈석산(碣石山)의 선인(仙人) 선문고(羨門高)

 

碣石東頭喚羨門 // 갈석(碣石)의 동쪽 머리가 선문(羨門)을 부르고,

六鰲載我三山來 // 여섯 자라()가 나를 싣고 삼산(三山)으로 돌아온다.

靜修集3, '登荊軻山'

 

()대의 시인 유인(劉因, 1249~1293, 하북성 보정 용성容城 출생)의 시집

靜修集(정수집)에 실린 '등형가산(登荊軻山, 형가산에 오르다)'이란 제목의 시 일부

 

형가산(荊軻山)이 [역(易)]주의 치소 서쪽 5리에 있다.

荊軻山在州治西五里

弘治易州志1, '山川', 明 弘治壬戌年 (1502) 간행

 

그림 8-3 형가산과 낭아산(갈석상)

 

 

32년, 진시황이 갈석(碣石)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을 시켜 선문고(羨門高)의

서(誓)를 찾게 하고 갈석의 문에 글을 새겼다. 성곽을 허물고 제방을 터서 통하게 하였다.

三十二年始皇之碣石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壞城郭決通隄防

史記'秦始皇本紀'

 

장(張)이 이르기를 「선문(羨門)은 갈석산 위의 선인(仙人) 선문고(羨門高)이다」 하였다.

張云 : 羨門, 碣石山上仙人羨門高也.

史記正義119

 

장(張)이 말하기를 「선문자고(羨門子高)는 선인(仙人)으로서 갈석산 위에 거하였다」 하였다.

張曰 : 羨門子高, 仙人, 居碣石山上.

資治通鑑7, 胡三省 注

 

유인(劉因)은 형가산(荆軻山)에 올라 갈석산(碣石山)의 동쪽 봉우리를

직접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의 시 '등형가산(登荊軻山)'을 지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가 인식한 진시황의 순행처(巡幸處) '갈석(碣石)'은  보정의 낭아산(狼牙山)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5. 무양고대 (武陽故臺)

 

武陽故臺 - 劉因

 

仁義徒令此舌存 어질고 의로운 이들은 혀가 있음을 경계하노니

轍環初不捄紛紛 수레바퀴 자국도 처음부터 흐트러지지는 않네.

天公欲爲秦漢計 하늘은 진(秦)‧한(漢)의 꾀함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野色更無燕趙分 들판의 색이 바뀌듯 연(燕)‧조(趙)의 구분(區分)도 사라졌구나.

滿眼兵塵餘故壘 눈에 가득하던 초병은 티끌 되고 옛 보루만 남았는데

一聲樵唱入秋雲 나뭇꾼의 노래 소리는 가을 구름 속으로 젖어든다.

擬乘碣石觀滄海 견주어 갈석산(碣石山)에 올라 창해(滄海)를 굽어볼까 하노라!

易水東流去不聞 역수(易水)는 동쪽으로 흘러가고 소식이 없네.

靜修集15, '武陽故臺

 

창해(滄海)는 지금의 백양정(白洋淀)이다.

 

 

6. 황금대부(黃金臺賦)

 

嗚呼噫嘻望碣石兮山嵳嵳

오호! 아아! 갈석(碣石)을 바라보니 산(山)은 울쑥불쑥 솟아 있고

涼風蕭蕭兮易水波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쓸쓸한 역수(易水)에 물결이 인다.

訪故址兮何在招望諸兮悲歌

옛 터를 찾았으나, 바라보며 손짓하는 슬픈 노래만이 있을 뿐

易可竭兮碣可磋高臺之風不可磨

역수가 마르고 갈석산이 닳을지언정 바람이 고대(高臺)를 갈아 없애지 못하리라.

麗則遺音2, '黃金臺賦' (元 楊維楨 撰) 중에서

 

 

7. 당태종(唐太宗)이 바라본 발해(渤海)

 

春日望海 (봄날에 바다를 바라보다)   - 唐太宗

 

披襟眺滄海 憑軾玩春芳

옷깃 헤치고 창해를 바라보며, 수레 손잡이에 기대어 봄 향기 음미하노라.

積流橫地紀 疏派引天潢

바다와 대지는 이치에 따라 트이고 갈라져 은하수를 끌어왔도다.

仙氣凝三嶺 和風扇八荒

신선의 기운이 세 산줄기에 머물고 건들바람이 온누리에 부는데,

拂潮雲布色 穿浪日舒光

바닷물 떨쳐낸 구름은 색을 펼치고 파도를 뚫은 태양은 빛으로 흩어져

照岸花分彩 迷雲雁斷行

언덕에 핀 꽃을 비추어 광채를 베풀고, 구름이 미혹하여 기러기 행렬 갈라졌구나.

懷卑運深廣 持滿守靈長

낮은 곳을 품어 드넓게 펼쳐졌으니 가장 영묘하고 뛰어나다 하기에 충분한데,

有形非易測 無源詎可量

형상이 있어도 가늠이 쉽지 않으니 어디가 시작인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洪濤經變野 翠島屢成桑

넓은 바다는 변화를 겪어 들판이 되었고 푸른 섬은 여러 번 뽕밭이 되었다네.

之罘思漢帝 碣石想秦皇

지부산에서 한무제를 생각하고 갈석산에서 진시황을 떠올리니

霓裳非本意 端拱且圖王

신선의 옷 입는 건 내 본 뜻이 아니어, 단정히 두 손 모으고 왕업(王業)를 도모(圖謀)한다.

 

서기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당시 그가 갈석산에 올라  창해(滄海), 즉 발해를 바라보며 지은 시()이다.

 

갈석산에서 내려다 본 발해만의 해안이 드넓은 평원을 이루어  어디까지가 땅이고,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토사가 쌓여 발해만의 육지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낭아산(갈석산)의 기암기봉의 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