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유물 4

두로공(豆盧公) 신도비(神道碑)

두로공 신도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이 지은 것으로 북주(北周) 천화(天和) 원년(566)에 각자(刻字)되었다. 이 비문은 현재 의 문집에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비석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공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주에서 농우총관부 장사(隴右總管府長史)를 역임하고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증직된 公을 말한다. 여기서 는 성, 은 이름을 가리킨다. 두로씨는 원래 모용선비족 인데 후연(後燕)의 이 탁발선비 정권인 북위(北魏)에 항복하자 두로라고 성을 하사했다. 두로는 선비족의 언어로서 귀순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 두로씨의 시조가 되는 셈인데 이들은 뒤에 다시 노씨(盧氏)로 바뀌었다. 성씨심원(姓氏尋源)에 따르면 북위 효문제 이 태화(太和)(477~499) 초기에 조서를 내려서 두 씨를..

유적, 유물 2023.12.11

광개토경호태왕비

장수대제 원년{AD414}{갑인} 9월, 대행을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태자가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광개토호태왕릉은 옛 북부여의 제후국인 구다국(勾茶國)의 황산(黃山)에 있었다. 이 황산(黃山)은 342년 高燕전쟁시 우룡장군 가 前燕의 과 싸우다 전사한 곳이며 645년 高唐전쟁시 당 태종 이 주필한 주필산이 바로 이 황산(黃山)이다. 광개토호태왕비는 광개토호태왕 사후 2년 뒤인 AD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열제가 父王의 정복업적을 기록하여 황산(黃山)에 세운 훈적비(勳績碑)이다. 필자는 고구려 패망 후 고구려 부흥운동의 상징으로 집안현으로 옮겨졌다고 본다. ​ 이 비석은 19세기 후반 발견되었으나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글자의 위조, 변조와 글자를 마멸시켜 그 참된 모습이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지 ..

유적, 유물 2023.11.05

칠지도(七支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논쟁 중인 한일 관련 고대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 하나가 칠지도(七支刀)이다. 원래는 나라현(奈良縣) 텐리시(天理市) 이소카미 신궁의 신고(神庫)에 녹이 슨 채로 보관되었는데, 이소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임명된 국학자 스가 마사토모(菅政友 1824-1897)가 1874년 신고(神庫)를 조사하며 칠지도의 녹을 떼보았다가 명문을 찾아내었다.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모습읗 드러낸 것이다. 길이74.9센티메터이며 일곱 개의 가지가 있고 양면에 62자의 한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다. 글자 일부가 훼손되어 추측해서 해독해야 되는 탓도 있지만 기록된 내용을 둘러싸고 한일 학자간에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앞면〉 泰△四年 △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

유적, 유물 2023.10.26

덕흥리 고분

1.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글자) (묵서명 번역문) □□군 신도현(信都縣) 도향 [중]감리 사람으로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요동(遼東)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幽州)자사였다. 진은 77살에 죽어 영락(永樂) 18년 무신년(408년) 신유월(12월) 을유일(25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이 땅을 보고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의 택함이 한결 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富)는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 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侯王)에 이르고,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와 쌀은 다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유적, 유물 202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