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요동군 안시현
임오년에 연(燕)의 <배도倍道>가 침략하여 안촌홀을 공격하고, 약탈하더니 험독까지 처들어 왔다.
수유 사람 <기후>가 아들과 형제 등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 와 전쟁을 도와 주었다.
이에 군사의 사기가 올라 갔다.
마침내 진한과 번한의 두 병력이 협공함으로써 연(燕)을 대파시켰다.
또 군을 나누어 계성(薊城)의 남쪽으로 파견하여 진(偏)을 구축하고, 다음 전쟁을 대비하였다.
연(燕)은 겁을 먹고 사죄하였다. 이에 공자를 인질로 삼았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요동군 안시현은 중국의 지리지에 지명만 나오고 안시현에 대한 기사나 주석이 없다.
고당전쟁시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결사항전한 우리에게는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그러면 안시성은 언제 어디에 누가 쌓은 성인가?
태백일사에 BC339년에 燕의 <배도>가 안촌홀을 공격하고 험독까지 쳐들어왔다고 하였다.
BC 339년 임오년은 고조선 <보을>단제3년, 燕 文公 23년이다.
안촌홀이 안시성이라면 안시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연나라의 <배도>가 고조선을 침공할 때 안시성을 먼저 공략하고 험독까지 쳐들어 온 것을 보면
안시성은 고조선 때부터 중요한 국방의 방위성으로 산성에 지은 견고한 성이었을 것이다.
험독은 왕검성을 말하고 燕이 인질로 보낸 공자는 BC 300년경에 고조선을 침공하여
1,000리나 물러나게한 <진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때 전쟁을 도운 <기후 箕詡 >는 BC 322년에 기자조선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험독이 기자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라면 안시성은 지금의 보정시 정흥현 고성진 인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계책을 의논한 다음, 이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5천 명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에게 정예군 1만1천 명을 주어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고연수가 주저하면서 나아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에게 명령하여 돌궐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그를 유인하게 하였다.
첫 교전에서 당나라의 병사가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 하자 연수가 말했다.
“다루기가 쉽구나.” 앞을 다투어 기세를 타고 안시성(安市城) 동남방 8리 지점에 이르렀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
황제는 직접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황제는 모든 군대에게 북과 나팔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맹렬한 공격을 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또한 담당자에게는 항복받을 군막을 조당(朝堂) 옆에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날 밤에 유성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
황제가 올랐던 산의 이름을 고쳐서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으며,
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으로 삼고,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다.
帝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 陣於西嶺 長孫無忌牛進達 將精兵萬一千 爲奇兵
自山北出於狹谷 以衝其後 帝恐其低徊不至 命大將軍阿史那社尒 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僞走
延壽曰 易與耳 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陣 ....
帝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山 帝勑諸軍 聞鼓角 齊出奮擊 因命有司 張受降幕於朝堂之側 是夜 流星墜延壽營 ....
更名所幸山 曰駐驆山 以高延壽爲鴻臚卿 高惠眞爲司農卿
『삼국사기』 보장왕 4년 (서기 645년)
안시성은 당 태종이 올랐던 주필산 인근에 있었다.
수산(首山)이 (요양遼陽)성 서남 15리에 있다. 산 정상에 마르지 않는 샘이있다.
진(晉)의 사마의가 양평에서 공손연을 에워쌌다 하였고,
유성이 수산(首山)을 좇아 성의 동남쪽에 떨어졌다 하였는데, 즉 이곳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때 주필(駐蹕)하여 돌에 그 공적을 새겼다 하여 주필산(駐蹕山)으로 고쳤다.
首山 城西南十五裡 山頂有泉不竭 晉司馬懿圍公孫淵於襄平 有星從首山墜城東南 即此
唐太宗伐高麗嘗駐蹕 勒石紀功 因改駐蹕山
『遼東志』 권1 '遼陽', (1443년 처음 편찬 후 1537년에 간행된 수정본)
주필산(駐蹕山)은 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그 산 앞머리(巔)에서 며칠을 주필(駐蹕)하며
돌에 공(功)을 새겼던 곳이다. 속칭 수산(手山)이다.
산 앞머리(巔)의 평평한 돌 위에 손바닥과 손가락의 형상이 있어,
그 가운데에서 샘이 솟는데, 이를 취하여도 마르지 않는다.
駐蹕山 唐太宗征高麗 駐蹕其巔數日 勒石紀功焉 俗稱手山 山巔平石之上有掌指之狀 泉出其中 取之不竭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全遼志(전요지)》에 「수산(首山)이 요양성(遼陽城) 서남 15리에 있다.
진(晉)의 사마의가 양평에서 공손연을 에워쌌다 하였고,
유성이 수산(首山)을 좇아 성의 동남쪽에 떨어졌다 하였는데, 즉 이곳이다.」 하였다. 혹은 수산(手山)이라고도 한다.
全遼志曰 首山在遼陽城西南十五里 晋司馬懿圍公孫淵於襄平 有星從首山墜城東南 即此 一作手山
『遼史拾遺』 권 13
당 태종이 올랐던 주필산이 수산(首山) 혹은 수산(手山)으로 요동군 요양현 서남 15리에 있다고 하였다.
요양현(遼陽縣)은 본래 발해의 금덕현(金德縣) 지역이었다. 한(漢)나라 때 패수현(浿水縣)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현(句麗縣)으로 고쳤다. 발해때에 상락현(常樂縣)이 되었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遼陽縣 本渤海國 金徳縣地 漢浿水縣 髙麗改為勾麗縣 渤海為常樂縣 户一千五百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한때 22만여명이었던 대도시 요양현(구려현)의 인구가 고구려 패망 후 1만명도 채 안되는 작은 읍으로 변하였다.
요양은 지금도 그 지명이 남아있는 상락부촌이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高勾麗方言 稱大鳥曰‘安市’ 今鄙語往往有訓鳳凰曰‘安市’ 稱蛇曰‘白巖’
隋唐時就國語 以鳳凰城爲安市城 以蛇城爲白巖城 其說頗似有理
『열하일기』'도강록'
많은 내외 문헌에 이 양만춘의 안시성이 바로 봉황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옛 성터로 적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박연암을 비롯, 많은 연행 학자들이 옛날 서당에서 가르치는 천자문에 '봉(鳳)'자가
"안시 봉"으로 훈독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봉황의 옛 방언이 안시요, 곧 안시성이 봉황성이라고 고증하고있다.
『이규태의 新 열하일기』 '봉황산 안시성'
안시성은 요동군 요양현 서남 15리 인근에 있는 봉황산에 있었던 것이다.
지형지도를 보더라도 마치 봉황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듯한 모습을 한 산이다.
보정시 역현 소재 북소촌(北小村) 인근의 봉황산(鳳凰山)이 안시성의 절대좌표이다.
요령성의 영성자산은 전혀 봉황의 모습이 아니다.
삼국유사는 342년 8월에 고국원왕이 안시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안시성을 환도성이라고 하였다.
209년 <공손강>이 둔유의 땅을 차지하고 대방국을 세우자
산상대제는 평지의 수도인 西都(아란원)와 北都(국내성)에서
옛 환나국 계루여왕의 수도인 우산(于山)의 창남산에 밀도(密都)를 세워 <공손강>의 침공을 방비하였는데
이 창남산성을 환도성이라고 불렀다 하니 창남산성이 안시성이거나 아니면 안시성과 인접하여 별도로 축성하였을 것이다.
8. 낙랑군 루방현(鏤方縣)
자몽현(紫蒙縣)은 본래 한(漢) 루방현(鏤方縣)이었다.
후에 불녈국(拂涅國)이 동평부(東平府)를 설치하고 자몽현을 관할하였다. 후에 요성으로 옮겨 황령현에 편입하였다.
발해가 자몽현으로 회복시켰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紫蒙縣 本 漢 鏤方縣地 後 佛寧國 置 東平府 領 紫蒙縣 後徙 遼城 并入 黄嶺縣 渤海 復為 紫䝉縣 户一千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요사지리지는 漢의 낙랑군 루방현이 遙나라의 동경요양부 자몽현이라고 한다.
8월, <부위염扶尉厭>이 구리성(九里城)을 쳐서 빼앗아 구려현(句麗縣)을 설치하고서
자몽성(紫蒙城)[곤도(昆都)]으로 들어갔더니,
자몽왕 <서천西川>이 자신의 처 <루흡婁洽>을 내어놓으며 목숨을 구걸하기에
<위염>이 <루흡>과 상통하여 첩을 삼았으며,
<서천>이 또다시 <작설雀舌>을 바치며 찾아와서 목숨을 구걸하기에 <위염>이 또한 취하고는,
매년 소와 말 2천 필과 약초 20종 및 호피 70장을 조공하기로 약조를 받고 군대를 호해(胡海)로 물렸으며,
크기가 소만한 자몽돼지(紫蒙豕)와 더불어 <루흡>과 <작설>을 상께 바쳤다.
八月, 扶尉厭伐九里城拔之置句麗縣 入紫蒙城[昆都]. 紫蒙王西川以其妻婁洽乞命, 尉厭遂通婁洽而妾之,
西川又以其雀舌来乞命. 尉厭亦取之, 約歲貢牛馬二千匹‧薬草二十種‧虎皮七十張而退軍湖海,
献紫蒙豕大如牛者及婁洽‧雀舌.
南堂遺稿 『芻牟鏡』 下 권6 本紀 제7, 동명성왕 16년 (서기전 22년)
<서천>은 東胡 저제후(且鞮侯)의 딸 <가달>의 손자이다.
부위염이 쳐들어간 자몽성(낙랑군 루방현)은 구려현(요양현) 가까이 있었다.
모용외(慕容廆). 자(字)는 혁낙괴(弈洛瑰)다. 창려(昌黎)의 극성(棘城)의 선비인(鮮卑人)이다.
그 선조(先祖)는 유웅씨(有熊氏)의 묘예(苗裔-현손)이다.
세세토록 북이(北夷)에 거하여 자몽(紫蒙)의 들에 읍(邑)을 삼으며 동호(東胡)라 불렀다.
慕容廆 字弈洛瑰 昌黎棘城鮮卑人也 其先有熊氏之苗裔 世居北夷 邑於紫蒙之野 號曰東胡
『晉書』 권 108
《晉書》에 실린 기록에 근거하면 진(秦), 한(漢) 시기에 동호(東胡)가 자몽(紫䝉)의 들에 모여 살았다.
《唐書》 '地理志'에 평주(平州)에 자몽, 백랑, 창려 등의 수(戍)가 있다고 하였다.
모두 평주의 북쪽 지경, 거란의 남쪽 경계이다.
據晉書載記 秦漢之間 東胡邑于紫䝉之野 唐書地理志平州有紫䝉白狼昌黎等戍 盖平州之北境契丹之南界也
『資治通鑑』 권 214, 胡三省 註
원강(元康, 291년~299년) 4년, (모용외가) 대극성(大棘城)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소위(所謂) 자몽의 읍(紫蒙之邑)이라 한다.
元康四年 定都大棘城 所謂紫蒙之邑也
『別本十六國春秋』 권 3, 北魏 崔鴻 撰
진서와 자치통감은 자몽은 동호의 일파인 모용선비가 대대로 살던 곳이라고 한다.
동호의 일파인 선비가 살았다는 선비산이 만주나 내몽골, 대흥안령산맥 지역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부여와 고구려에 이웃하고 있었다.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水經』 '浿水'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鏤方)을 나와서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수부(水部)이고 '패(貝)'의 소리를 따른다. 어떤 사람은 패수현을 나온다고 하였다. '浿'는 배(普拜切)로 읽는다.
浿, 水出樂浪鏤方東入海从水貝聲一曰出浿水縣普拜切
『説文解字』 권 11上
루방현은 구려현(요양현, 패수현) 인근으로 패수가 흘러 들어가는 곳이다.<그림 4-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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