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요동군 번한현(番汗縣)
패수(沛水)가 새(塞) 밖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應劭曰汗水出塞外西南入海番音盤師古曰沛音普盖反汗音寒.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한수(汗水)가 새(塞) 밖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番의 음은 반(盤)이라고 하였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沛의 음은 배(普盖反)이고 汗의 음은 한(寒)이라고 하였다.
<한서 지리지>
한서지리지는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사료를 전해주고 있다.
요동군 번한현으로 패수(沛水)가 흘러가는데 <응소>는 이 패수(沛水)가 한수(汗水)라고 하였다.
웅심산(熊心山)이 고구려의 모태(母胎)라면 한수(汗水)는 고구려의 젖줄과 같은 것이다.
북부여 청하백(靑河白) <옥두진>의 딸 <옥유화>가 모수제를 만나 <추모>를 잉태한 곳이
태백산 남쪽 웅심산의 우발수 가였다.
그리고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가 기병한 곳도 바로 이 웅심산이었다.
웅심산(熊心山)은 개마국과 청하국 사이의 개마산(蓋馬山)(고마산, 곰산)의 한자식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한수(汗水), 비류수(沸流水), 탕수(湯水), 패수(沛水)는 온천이 있는 늪지대 강의 한자식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패수(沛水)가 한수(汗水)이고 비류수라면 요동군 번한현은 비류국 인근에서 찾아야 한다.
추모가 비류국을 정벌 한 후 비류수를 경계로 탕동(湯東), 탕서(湯西), 탕외(湯外)로 나누었다는데
탕동지역은 비류와 청하의 경계로 웅심산의 압록행궁이 있었고 비류천 상류에 태백산이 있었다.
비류국과 졸본국의 경계에 추모가 고구려를 세운 비류곡 서성산이 있었으며 용산의 흘승골성이 있었고
동명신궁과 온수궁(溫水宮)이 있는 동도(東都)가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비류수(汗水) 가의 한빈(汗濱)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이 한수(汗水)의 이남, 즉 한남(汗南)이 졸본과 관노부지역으로 온조가 주로 활동한 곳이다.
<그림 3-3 참조>
10. 현도군 고구려현
현도군(玄菟郡)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에 열었다.
고구려(髙句驪)는 왕망이 하구려(下句驪)로 고쳤으며 유주(幽州)에 속한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옛 진번조선(真番朝鮮) 호(胡)의 나라이다.
가구수는 45,006이고 인구수는 221,815명이다. 현은 3개이다.
玄菟郡, 武帝元封四年開. 髙句驪, 莽曰下句驪. 属幽州. 應劭曰故真番朝鮮胡國.
戸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
현도군 고구려현(髙句驪縣)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요동군 요수현(遼隊縣)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새(塞) 밖을 지난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옛 구려(句驪) 호(胡)이다.
髙句驪,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應劭曰故句驪胡
<한서 지리지>
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아마도 한(漢)의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고,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며,
《한지(漢志)》에 이른바 현도(玄菟)의 속현 고구려(高句麗)가 이것일 것이다.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亰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髙句麗是歟.
<삼국사기 권13 地理 高句麗>
한서지리지에 현도군 고구려현에 남소수(南蘇水)가 있다고 하였다.
현도군 고구려현을 찾으려면 남소(南蘇)를 찾으면 될 것이다.
- 남소(南蘇)의 연혁
1. 구다국의 도읍지 남소(南蘇)
대무신제 9년 병신(A.D.36)
10월 개마주(盖馬主) <소쾌小噲>의 처 <반을半乙>이 (소)쾌를 죽이고 아들 <숙을叔乙>을 세웠다.
<소쾌>의 아들인 <후만厚滿>과 <구문狗文> 등이 서로 다투어, <후만>이 먼저 입성하여 <숙을>을죽이니,
<반을>은 <구문>과 잠통(潛通)하여 거두어들였다.
<후만>이 도망해 오자, 왕이 친정하여 <구문>을 베고 개마국을 개주군(盖州郡)으로 삼았다.
12월 구다왕(勾茶王) <후린厚燐>이 개마(盖馬)가 멸망했음 듣고 나라를들어 항복해 왔다.
<후린>은 <섬니閃尼>의 아들이다.
연나부(掾那部)를 <락문絡文>에게 넘겼으나, 음으로는 반대하는 뜻이 있어,
<소쾌>가 죽자 <구문狗文>을 도와 서하(西河)와 남구(南口)를 치기로 약속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나라가 없어지게 되었고, 그 도읍은 남소(南蘇)라 하였으며,
(이로써) 서쪽의 길(西路)이모두 열리게 되었다.태보 송의(松義)가 죽었다.
........
개마(盖馬)의 배반한 무리들이 한인(漢人)들과 함께 구려성(句麗城)에 쳐들어 왔다.
현도(玄菟)태수 <구추勾鄒>가 가서 구하였으나 병이 나서 죽었고, 송옥구가 대신하여 평정하였다.
<고구려 사초>
AD36년에 개마국이 멸망하자 개마국의 동쪽에 있던 구다국도 항복하였는데 그 도읍지가 남소였다.
2. 남소성 축조
신명선제 14년 을유(A.D.86) 5월 남소성(南蘇城)을 쌓았다.
<고구려 사초>
3. 남소성 중수
태조황제 4년(115) 을묘 2월,
서하(西河)・남구(南口)・하성(河城)・안평(安平)・장령(長岺)・토성(菟城)・둔유(屯有)・평곽(平郭)・고현(高顯)・하양(河陽)・
남소(南蘇) 등의 성을 고쳐 쌓아 서쪽과 남쪽을 대비했다.
<고구려 사초>
4. 남소는 안평의 북쪽에 있었다.
산상대제 14년(210) 경인 3월,
공손강이 서안평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양성(河陽城)은 물가에 있어 지키기 어려워,
남소성(南蘇城)의 서쪽, 안평성(安平城)의 북쪽에 새로이 신성(新城)을 쌓아 공손강을 꼼짝 못하게 했다
<고구려 사초>
5. 남소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이다.
동양대제 12년(238) 무오,
위나라의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 함께 연(燕)을 멸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주희에게 명해 5천병을 이끌고 남소(南蘇)로 출병하고 관망하여 성원하라 했다.
8월에 공손연을 멸하였더니,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방자해졌다. 상이 대노하여 사마의와의 교통을 끊었다
<고구려 사초>
이때 고구려의 수도는 안시성에 있는 밀도인 창남산성(환도성)이다.
남소에서 요하를 건너면 곧장 중원과 연결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
6. 고연전쟁에서 燕의 모용황에게 남소를 빼앗김
고국원제15년{AD345}을사,
춘정월, 왕이 용강(龍江)에 거동하여 용주희(龍珠戱)를 하여 평양(平壤)의 부로들 71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10월에 <모용각慕容恪>이 쳐들어오자, 남소(南蘇)의 소수(小守) <승융勝戎>이 연(燕)에 투항하여
<각恪>과 함께 남소(南蘇)를 협공하여 빼앗았다.
이에 패자(沛者) <빈조賓兆>와 사마(司馬)<우매牛買>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모용각>이 남소를 함락시킨 후 수비군을 두고 돌아갔다.
이듬해 1월 <모용황慕容皝>의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있던 <봉유封裕>가 모용황에게 표문을 올려 간언했다.
“고구려(句麗)와 백제(百濟) 및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兵勢)에 의하여 옮겼으므로,
중국(中國, 중화)인과 같이 의(義)를 사모하여 온 것이 아니므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거의 10만호에 육박하나, 도성(都城)으로 급하게 몰려서, 이제 곧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와 종속(宗屬)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기고,
이들을 은혜로 위무하는 한편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 사초>
남소는 중원과 연결되는 길의 통로로 남소가 함락되면 적들이 쉽게 고구려로 쳐 들어 올 수가 있는 것이다.
7. 고당전쟁시 이세적이 남소를 깨뜨리고 서쪽으로 서압록의 상류를 건너 감
압록의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 황암(黃嵓)이란 두 물줄기가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수(數)리를 지나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당(唐) 나라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이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구려를 크게 깨뜨리고,
강을 건너면서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遼水)의 근원」이라고 했다.
鴨綠之西。又有白浪,黃嵒二水。自頗利城行數里。合流而南。是爲遼水。
唐正觀間。李勣大破高麗於南蘇。旣渡。怪其水淺狹。問之。云是遼源。
『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城邑 封境
[정관]21년(647), 이적이 남소에서 고구려를 거듭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군사를 되돌려 파리성에 이르러 백랑, 황암 두 강을 건너니 모두 무릎 깊이도 안 되었다.
이적이 두 강물이 좁고 앝은 것을 괴이하게 여기어 요수의 발원지가 있는 곳을 거란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이 두 강물이 수(數)리를 더 가다가 서로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는데, 곧 요수라 일컫는다.
요수의 발원지에는 갈 수 없다」 하였다.
二十一年,李勣復大破高麗於南蘇。班師至頗利城,渡白狼、黃巖二水,皆由膝以下。勣怪二水狹淺,問契丹遼源所在。云:「此二水更行數里,合而南流,即稱遼水,更無遼源可得也。」
『通典』 권186
고당전쟁 시 이세적의 행로로도 남소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이세적은 남소에서 서쪽으로 압록강(요하)의 상류인 서압록으로 가서 요수의 발원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개마국과 구다국의 사이에 있는 옛 구다국의 도성인 남소에 있었던 것이다..
<남소의 위치는 그림 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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