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역고/고구려

고구려의 평양을 찾아서(2)

지보고 2023. 10. 3. 11:01

3. 요동군 양평현과 낙랑군 수성현

 

그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는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

『史記』 '匈奴列傳'

 

사고가 말하기를 "조양은 지명으로 상곡의 변경에 있고 양평(襄平)은 즉 요동의 치소이다."라고 했다.  

師古曰 造陽地名在上谷界 襄平即遼東所治也.

『前漢書』 권94 上 

 

요동군 양평현(襄平縣)

목사관(牧師官)이 있다. 왕망은 창평(昌平)이라 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양평현(襄平縣)

동이교위(東夷校尉)가 있는 곳이다.

<晉書 지리지>

 

그림2-1 <담기양>이 그려놓은 요동군 양평현

 

양평이라는 지명은 <사마천>의 사기 흉노전에 처음 등장한다.

BC 300년경 燕의 장수 <진개>가 동호를 물리치고 그 후 동호를 막기 위하여 조양에서 양평까지 성을 쌓았으며

양평은 요동의 치소로 지방행정과 군정을 함께 관장하는 목사(牧師)와 동이교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조양에서 양평까지 동호를 막기 위하여 쌓은 성은  언제, 누가, 어디에  쌓은 것인가?

조양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요동군 양평현부터 알아보자.

 

낙랑군 수성현(遂城縣)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 晉書 지리지>

 

(안숙)현의 서북 25리에 장성(長城)이 있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진시황이 장군 몽염(蒙恬)을 무수(武遂) 로 보내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長城在縣西北二十五里 舊傳秦始皇遣將蒙恬於武遂築長城

『安肅縣志』 (乾隆 43, 1778) 권2 '古蹟' 조항, 

 

태강지리지에 이르기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史記索隱』권1 '夾右碣石' 조항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 (遂城縣) 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의 땅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

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武經總要』前集 권16 上

 

수성현은 옛날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이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 1년(BC244년) 이목장군이 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성현(北新城縣)이었다.

『한서지리지』는 말하기를 "연(燕)에서 남쪽으로 탁군의 북신성(北新城)에 이른다." 하였다.

후한 때는 중산국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河間)에 신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 하였다.

후위의 무제 영희2년(533년)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 치소는 부산(釜山)촌이다.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인데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遂城縣舊二十三鄕今四鄕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 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 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太平寰宇記』권68

 

여러 사서들은 진시황 때 몽염( ?- BC 210)이  수성(遂城)(동쪽 기점)에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사기 흉노열전은 연나라가 장성을 쌓았다고 하였지만 

몽염이 장성을 쌓았다면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 한 이후 BC 215경에 장성을 쌓았을 것이다.

안숙(安肅)은 보정시 서수구(徐水區)의 옛 지명이고, 무수(武遂)는 서수구 수성진(遂城鎭)의 옛 지명이다.

 

그러면 수성(遂城)은 어디인가?

 

그림 2-2 <담기양>이 그려놓은 낙랑군 수성현

 

수성(遂城)  네개의 마을에 수성산, 역수, 조수, 포하가 있다.  

고적  수성산 본래 이름은 용산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그 위에 왕왕 선인과 용의 흔적이 있다."고 했다.  

부산 《형자여고양기(邢子勵高陽記)》에 이르기를 "조수(漕水) 부산(釜山)에서 나온다."고 했다.  

반비산 《도경(圖經)》에 이르기를 "수양제가 동쪽을 정벌하였다. 산위에 반희의 사당을 세웠다."고 했다.  

역수  조수 《高陽記》에 이르기를

"조수는 부산(釜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양각정 북신성의 서쪽을 지나 복룡샘에 이르러 더불어 흐른다."고 했다.  

장성 몽염이 쌓았다.  

신성 《高陽記》에 이르기를 "본래 전욱이 짓고 또한 복룡성이라 이름 지었다"고 했다. 

遂城 四鄕有遂城山易水漕水鮑河 古跡 遂城山 本名龍山 括地志云 其上徃徃有仙人及龍跡 釜山 邢子勵高陽記云

漕水出釜山是也 班妃山 圖經云 隋煬帝東征於山上置班姬廟 易水 漕水 高陽記云 漕水出釜山 南流經羊角淀

北新城西 至伏龍泉與漕水流 長城 蒙恬所築 新城 高陽記云 本顓頊所造 又名伏龍城

『元豊九域志』 사고전서本 권2

 

 

遂城道中 (수성으로 가는 길 가운데서)

() 劉因(유인)

 

鐵城秋色接西垣견고한 성(城) 가을빛은 서쪽 담벽에 잇닿고,

遠客還鄉易斷魂고향에 돌아온 원객(遠客)에 넋이 끊길 듯한 슬픔이 번진다.

霸業可憐燕太子가련하다 연 태자의 패업(霸業)이여!

戰樓誰弔漢公孫한나라 공손(公孫)의 전루(戰樓)에 조문할 이 아무도 없는가?

冷煙衰草千家塚차가운 연기, 시든 잡초 무성한 천가총(千家塚),

流水斜陽一點村그리고 냇물이 흐르는 해질녁 마을 하나.

慰眼西風猶有物서풍은 불거진 눈을 오히려 달래주고,

太行依舊壓中原태행(太行)은 의구(依舊)히 중원(中原)을 누르고 있다.

 

원(元)대 보정의 토박이 시인 유인(劉因, 1249~1293)의 시 《遂城道中(수성으로 가는 길 가운데서)》는

그가 고향(보정 용성현容城縣)으로 가는 길에 지금의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의 수성(遂城) 유적지를 지나치며

감회에 젖어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한 시이다.

 

공손연은 남쪽의 포위를 공격하여 돌파했으나 선제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쳐부수고,

유성이 떨어진 양수(梁水)에서 그를 참하였다.

성에 들어간 후 두개의 푯말을 세워 젊은이와 늙은이를 구분하고,

15세 이상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여 경관(京觀)을 만들었다.

文懿攻南圍突出帝縱兵擊敗之斬于梁水之上星墜之所既入城立兩標以別新舊焉

男子年十五已上七千餘人皆殺之以為京觀

晉書1, 宣帝紀

 

[경초(景初)] 2년 봄에 조정에서는 태위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도록 했다.

6월, 군대가 요동(遼東)에 도착하니,

공손연은 장군 비연과 양조 등을 파견해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요수(遼隧)에 주둔시켰으며,

주위에 20리 이상 참호를 팠다.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한 후, 공손연은 비연에게 명령하여 맞아 싸우도록 했다.

사마의는 장군 호준 등을 보내어 그들을 쳐부수게 했다.

사마의는 군대에 명령을 내려 주위에 참호를 파도록 하고,

군대를 이끌고 동남 쪽으로 달려가다가,

동북쪽으로 급히 방향을 돌려 즉시 양평(襄平)으로 달려갔다.

비연 등은 양평(襄平)이 무방비 상태로 있음을 걱정하고 밤중에 달아났다.

사마의의 군대는 수산(手山)으로 나아갔으며,

공손연은 또 비연 등을 다시 보내어 위나라 군사와 사력을 다해 싸웠다.

다시 공격해 크게 무찌르고, 드디어 성 아래까지 진군하여 주위에 참호를 팠다.

마침 30여 일간 장맛비가 내려 요수(遼水)가 불어났으므로,

운송선이 요수 입구(遼口)에서 성 아래 까지 직행했다.

비가 그치자, 사마의는 흙산을 쌓고 누대를 만들어, 그 위에서 연발식 화살을 성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급박해졌다.

성안에는 양식이 다 떨어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장군 양조 등은 투항했다.

8월 병인(丙寅)일 밤에 길이가 수십 장 되는 큰 유성이 수산의 동북쪽에서 양평성(襄平城)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六月軍至遼東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

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

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

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為圍塹

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為發石連弩射城中

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

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

三國志魏書 8, 二公孫陶四張傳

 

유인은 폐허가 된 수성과 함께 경관을 바라보며 양평성의 참혹한 최후를 회상하고 있다.

유인(劉因)이 아울러 언급한 '연태자(燕太子)의 패업(霸業)'이란 곧

연태자 단(丹)이 주도하여 실행하였으나 실패로 끝난 진시황(秦始皇) 암살미수 사건을 가리킨다.

《史記(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 따르면 이로 말미암은 진시황의 공격을 피해

계(薊)에서 요동(遼東)으로 달아난 연왕(燕王) 희(喜)가 그곳에서 자신의 아들 단(丹)의 목을 베어

진(秦)에 바친 댓가로 연(燕)은 몇 년 더 버틸 수 있었으나 결국에는 진(秦)에 멸망 당하였다.

유인은 수성(遂城)을 연태자 단의 목이 잘린 곳(즉 요동성)으로 당연히 인식하였으므로

그곳을 지나치며 몹시 애달퍼했던 것이다.

 

《全遼志(전요지)》에 「수산(首山)요양성(遼陽城) 서남 15리에 있다.

진(晉)의 사마의가 양평에서 공손연을 에워쌌다 하였고,

유성이 수산(首山)을 좇아 성의 동남쪽에 떨어졌다 하였는데, 즉 이곳이다.」 하였다.

혹은 수산(手山)이라고도 한다.

全遼志曰 首山在遼陽城西南十五里 晋司馬懿圍公孫淵於襄平 有星從首山墜城東南 即此

一作手山

遼史拾遺13

 

<그림 2-3 진장성>

수성진은 지금도 보정시 서수구에 그 지명이 남아 있다.

보정시 서수구의 수성진이 양평이라는 것을 <유인>의 시와 <사마의>의 <공손연> 정벌 기사로 교차 검증 하였다.

 

秦의 장수 <몽염>이 BC 215년경 축성한 진장성의 동쪽기점인 양평은 燕나라 때 설치한 요동군 양평현이고

이후 漢나라 때 낙랑군 수성현이고,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는 곳이다.

이 요동성이 秦.漢 시기에 중원과 북부여, 고구려와의 경계이고,  隋,唐 시기에는 고구려의 강역이었다.

 

그러면 <안사고>고 말하는 상곡의 변경에 있다는 진장성의 서쪽기점인 조양(造陽)은 어디인가?

 

상곡군 저양현(沮陽縣)

왕망이 말하기를 저음(沮陰)이라 했다.孟康曰音俎. 맹강(孟康)은 沮(저)의 음이 조(俎)라고 했다.

<한서 지리지>

 

조양(造陽)이라는 지명은 지리지에 보이지 않고 한서지리지에 상곡군 저양현(沮陽縣)이 있는데

<맹강>은 沮(저)의 음이 조(俎)라고 했다.

 

저양현(沮陽縣)이 조양현(造陽縣)인가?

 

그림 2-4&&nbsp; <담기양>이 주장하는 진장성

 

4. 상곡은 자형관(紫荊關), 오회령(五廻嶺), 도마관(倒馬關)(본래 연의 상곡)과

   과라타(연장성의 기점, 연5군의 상곡) 일대이다.

 

조양현(造陽縣)을  찾을 수 없다면 상곡군(上谷郡)은 어디인가?

 

전국시기 조(趙)나라의 공자 가(嘉)가 스스로 대(代)왕이 되어 군사를 상곡에 주둔시켰다.

진(秦)나라가 대(代)를 멸하고 상곡군을 설치하였다.

옛 보정, 역주, 선화이고 순천과 하간의 일부에 미친다. 모두 다 그 지경이다.  

戰國時 趙公子嘉自立為代王 軍上谷 秦滅代 置上谷郡 舊保定 易州 宣化 及順天 河間 之一部 皆其境

『中国古今地名大辞典』  '上谷郡'

 

대군(代郡)은 진나라가 설치하였다. (왕)망이 염적이라 하였다. 오원관(五原關)과 상산관(常山關)이 있으며, 유주에 속한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대국(代國)이라 하였다.  

代郡 秦置 莽曰厭狄 有五原關 常山關 屬幽州 應劭曰故代國

『前漢書』 권28 下

 

유주(幽州) 상곡군

상곡군(上谷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왕망이 말하기를 삭조(朔調)라 하였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36,008이고 인구수는 117,862명이다. 속한 현은 15개이다.

上谷郡, 秦置, 莽曰朔調, 屬幽州. 戸三萬六千八, 口十一萬七千七百六十二. 縣十五. 

<한서 지리지>

 

BC 227년 진시황이 조나라를 정벌 할 시 趙나라의 태자 가(嘉)가 대(代)로 피신하여

그 대(代)나라의 상곡에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진시황이 BC222년에 대(代)를 멸하고 상곡군을 설치하였다고 하고, 전한서는  代郡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런대 이 代郡(상곡군)에 오원관과 상산관이 있다고 하였다.

 

자형관은 역주 서쪽 80리에 있다. 

즉 한나라의 오원관이다. 일명 자장관이다. 송나라때는 또한 금파관이라 했다.

<방여기요>에 이르기를 "송나라 사람들은 자형관을 금파관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후에 산에 자형나무가 많다고 하여 (자형관으로) 개명하였다.

紫荆關在易州西八十里 即漢之五原關也 一名子莊關 宋時亦曰金坡關

方輿紀要 紫荆關宋人謂之金坡關後以山多紫荆樹改名為

『畿輔通志』 권41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역현의 자형관은  시대에 따라 형원(荊阮) , 오원관 , 금파관 , 자형관으로 불리었고

상산(常山)은 항산(恒山)으로 북악산인 대무산이므로 상산관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의 도마관(倒馬關)이다.

자형관과 도마관 일대가 代郡이고 상곡군이라는 것이다.

본래 전국시대 燕나라가 이 代郡(상곡군)에 있었는데

BC 300년경 東胡를 밀어내고 보정시 역현까지 상곡군의 관할이 되었다.

 

조양(造陽)선화(宣化)에 있었다.

지금 그땅은 변방의 바깥으로 더욱 멀리 동떨어져 나가 있지만,

진한(秦漢) 때에는 상곡군장성, 즉 지금의 거용(居庸)관 등 내삼관(內三關)의 변경이었다.  

造陽在宣化 今其地尚懸出邊外 秦漢時上谷郡之長城 即今居庸等內三關之邊牆

『欽定熱河志』 권56

 

연나라 남장성은 서(西) 기점인 현 하북성 역현 서쪽 지경의 인의장(仁義庄) 서쪽

과라두(科羅頭, 즉 科羅坨)산 제2 봉우리에서 시작한다.

동으로 역현의 동쪽 경계인 곡성촌(曲城村)에 이르러 서수현(徐水縣) 태화장(太和庄)으로 진입한 뒤

서수 해촌(解村)을 지나 서수현 성관(城關)에 이른다.

다시 동으로 상평장(商平庄)을 지나 용성현(容城縣) 흑룡구촌(黑龍口村)에 이른다.

燕國南長城西起今河北易縣西境仁義庄西科羅頭的第二個山峰上 向東至易縣東境曲城村入徐水縣

太和庄 經徐水解村至徐水縣城關, 再往東經商平庄至容城縣黑龍口村

燕文化, 陳平 지음 2006, 168.

 

흠정열하지에 조양(造陽)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秦,漢 때 장성이 있었으며

내삼관(거용관, 자형관, 도마관)의 변경이라 하였으며

<진평>은 그의  저서 「燕文化」에서 진장성의 서쪽기점은 자형관의 변경인 과라타산 봉우리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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