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역고/고구려

고구려의 평양을 찾아서(1)

지보고 2023. 10. 1. 11:17

1.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과 낙랑군 조선현

 

중국인과 일본인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까지도 대부분 고구려의 평양은 북한의 평양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은 지금의 요동반도의 요동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사극을 만들어 버젓이 방영하고 있으며

그것이 사실이고 또한 아무른 비판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동군 험독현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왕(王) 위만의 도읍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險瀆)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는데

험독현(此)은 자연적으로(自) 올바른(是) 험독이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낙랑군 조선현

應劭曰武王封箕子於朝鮮.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고 했다.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요동군 험독현은 BC300년경 燕 나라의 <진개秦開>가 東胡를 1,000리 밖으로 물리치고 

고조선의 영토에 처음으로 설치한 燕5郡 중 가장 동북쪽에 설치한 요동군의 현으로

<응소>는 <위만>의 도읍지로 험독이라 하고,

<신찬>은 그 도성의 이름이 왕험성인데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낙랑군 조선현은 BC108년에 漢 무제가 설치한 군으로 <응소>는 기자조선의 도읍지라 하였다.

 

그리고 <담기양>은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험성은 요동군 험독현으로 지금의 요하 유역에 있었고

기자조선의 도읍지 낙랑군 조선현은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지도에 그려 넣었다.

 

일본인과 이병도의 제자인 우리의 강단사학자는 기자조선은 물론  위만조선 마저도

그 도읍지인 왕험성이 북한의 평양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담기양>의 지도를 보자.

 

그림 1-1 <담기양>이 그린 위만조선의 도읍지 요동군 험독현

 

 

그림 1-2 <담기양>이 그린 기자조선의 도읍지 낙랑군 조선현

 

 

燕의 중흥군주 소양왕(재위 BC311-BC279)의 사후 燕나라는 국력이 쇠퇴해 지고

BC 300년경 <진개>의 東征으로 설치한 燕5郡(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은

B C239년에 건국한 북부여가 이후 회복하게 되고, BC 222년에  燕은 멸망하였으니

燕이 요동지역을 차지한 것은 길어도 80년 미만이다. 

이 짧은 기간에 차지한 강역을 고무줄 늘이듯이 지금의 요하유역까지 늘여 놓았다.

 

BC 108년 漢의 걸출한 군주 무제가 북부여의 제후국인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침략하여

낙랑군과 현토군을 설치하였다.

기왕에 늘인 고무줄을 더욱 늘여 북한의 평양까지 漢의 유주(幽州)에 포함하게 된다. 

 

한서지리지와 일제 식만사학자와 이병도의 제자인 강단사학자의 주장이 맞다면 요동군 험독현은 곧  낙랑군 조선현이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BC 108년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은 24개 현이고 현토군은 3개 현이다.

BC 300년경 燕이 설치한 요동군의 현은 18개 현이다.

낙랑군의 영역은 요동군 18개현에  200년경 <공손도>가  황무지에 설치한 대방군 6개 현(190戶)을 더한 지역이다.

요동군의 18개현과 낙랑군의 현 중에서 대방군에 포함되는 열구, 남감, 장잠, 제해, 함자, 해명을 제외한 현은

같은 곳을 이중으로 중복하여 기록한 것이다.(낙랑군=요동군 + 대방군의 영역이다)

한서지리지에는 前漢시대에 존재한 현 외에 그 이전의 현도 포함하여 기록하였다.

이 중복된 현과 그 후 고의로 왜곡하여 이치된 현을 찾아야만 고대사의 복원이 가능할 것이다.  

 

 

2. 요동군 요양현과 낙랑군 패수현 

 

요동군 요양현(遼陽縣) 

대량수(大梁水)가 서남쪽으로 요양현(遼陽縣)에 이르러 요수(遼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요음(遼隂)이라 했다.

<한서지리지>

 

현도군 요양현 (遼陽縣)

옛날에 요동군에 속했다.

안제(安帝) 가 즉위하는 해에 현을 3으로 나누어 내속(來屬)하였다

<후한서 군국지>

 

동경 요양부 요양현 (遼陽縣) 

본래 발해의 금덕현(金德縣)이다.

한나라 때 패수현(浿水縣)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현(句麗縣)으로 고쳤다.

발해 때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遼陽縣 本 渤海國 金德縣地, 漢 浿水縣, 髙麗 改為 勾麗縣, 渤海 為 常樂縣, 户一千五百.

<요사지리지>

 

낙랑군 패수현 (浿水縣)

패수( 浿 水)가 서쪽으로 증지현(増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왕망은 락선정(樂鮮亭)이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浿의 음은 배(普大反)라고 했다.

<한서 지리지>

 

요양현은 前漢의 한서지리지에는 요동군에 속하였는데 後漢의 후한서군국지에는 현도군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약 700년간 지리지에서 사라지고 10세기의 요사지리지에 동경 요양부 요양현으로 등장한다.

 

고구려의 강역을 이은 발해, 그 발해의 강역을 이은 나라가 遙나라 이다.

그 지리서에서 漢 나라의 낙랑군 패수현이고, 고구려가 구려현으로 고쳤으며 발해 때는 상락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담기정>은 낙랑군 패수현을 북한의 청천강 상류에 그려놓았다. 

<신찬>은 왕검성이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북한의 평양이 왕검성이라면 전혀 방향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요동군 요양현(燕) → 낙랑군 패수현(前漢) →  현도군 요양현(後漢) →구려현(고구려)  → 금덕현, 상락현(발해)

→ 동경 요양부 요양현(요)은 어디일까?

 

낙랑군의 치소인 평양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계조하의 상류에 상락부(常樂富)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 상락부촌이 발해의 상락현이고 요동군 요양현이며 낙랑군 패수현인 것이다.

 

그림 1-3 상락부촌(요양)과 소수맥, 1957.9 미육군지도 지도출처

 

<지도설명>

 

1. 고대해안선 ①은 기자조선(BC1100년경) 때의 해안선이고, ②는 위만조선(BC 200년경), 은 隋, 唐 때의 해안선이다.

    기자조선의 왕검성은 발해만의 해안과 인접하였다. 

 

2.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요동성)을 지나 발해만으로 흐르는 지금의 남역수(南易水)가

    隋.唐 이전의 秦.漢시대의 요수(遙水)이다.

 

2. 계조하(鷄爪河)의 상류가 소수(小水)이고 낙랑군의 치소인 왕검성(평양성) 서쪽에서 동남으로 흘러 발해만으로 흐르는

    지금의 평하(萍河)가 패수(浿水)이고 그 아래의 노초만(盧草灣)이 한우초(蓒芋草) 재배지인 한우락(蓒芋濼)이고 

    한우초(蓒芋草)는 토란을 말하는는데 고대에는 토란을 재배하여 흉년이 들면 쌀 대신 구황작물로 사용하였다. 

    한우초 (蓒芋草)가 많이 재배되어 패수는 범수(范水, 풀이름 范)라고도 불리었고 이 범수 북쪽이 범양(范陽)이다.

 

3. 그 위로 흐르는 큰 강줄기가 거마하(拒馬河)이고 이 거마하의 한 갈래가 중역수(中易水)인데

    고구려에서는 대하(大河)라고 불렀으며 말갈과 숙신의 활동 근거지 였다.    

 

4.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진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왕검성이고 낙랑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훗날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으로 요동군 험독현이고, 낙랑군 조선현 지역이다.

 

5.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이 요동성으로 요동군 양평현, 낙랑군 수성현 지역이다.

 

6. 평양성에서 서수구까지의 거리는 13km이고 평양성에서 요동성까지의 거리는 15km내외로 

    춘추전국시대 軍行一日一舍(一舍는 12km)라 하였으니 기병은 한나절, 보병은 하루 남짓 거리이다.

    평양성과 요동성이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의 강역이 燕의 요동군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7.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왕검성이 있다는 <신찬>의 주석과

    험독이 위만과 기자의 도읍지라는 <응소>의 주석은 옳은 것이다.

 

8. 계조하 상류에 흐르는 강이 소수(小水)이고 맥궁이 유명하여 소수맥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9. 북갈이 개사수 지역에 남하하여 옥저라고 부르고 <시길柴吉>은 이곳에 낙랑국을 세웠다

    이 <시길>의 낙랑국은 말갈족이 세운 나라로 BC 54년에서 AD54년까지 108년간 존속하였는데

    대무신제 때 최리가 배반하여 대무신제의 침공을 받고 신라의 서북방으로 남하하여 병탄되었다.

 

10. 지금도 남아있는 발해의 상락현의 상락부촌이 요동군 요양현이고, 낙랑군 패수현이며 

     후한 때는 현도군 요양현이며, 고구려의 구려현이고, 요나라의 동경 요양부 요양현이다.

 

11. 발해의 중경 현덕부가 요의 동경 요양부로 위만조선의 왕검성이고 고구려의 평양성이다. 

 

12. 소수맥과 요동성 사이가 중원가 치열한 전투를 벌린 안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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