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역고/고구려

고구려의 평양을 찾아서(3)

지보고 2023. 10. 4. 13:54

 

5. 요동군 후성현(候城縣)과 낙랑군 동이현(東暆縣), 불이현(不而縣)

 

 

요동군 후성현(候城縣)

중부도위(中部都尉)가 다스린다. 

<한서지리지>

 

그림3-1 <담기양>이 그린 요동군 후성현 (노란색 부분)

 

함주(咸州) 안동군(安東軍)이 설치되었으며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 동산현(銅山縣) 지역으로 발해는 동산군(銅山郡)을 설치하였다. 

지역은 한나라 때의 후성현(候城縣) 북쪽과 발해의 용천부(龍泉府) 남쪽에 있다. 

산이 많고 험준하여 도적떼들이 모여있는 곳이어서 

평주(平州)와 영주(營州)의 객호(客戶) 수백을 불러 성을 세우고 거주케 하였다. 

처음에는 학리태보성(郝里太保城)이라 불렀다가 개태 8년 주를 설치하였다. 

군사와 관련된 일은 북여진병마사에 속하게 하였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咸州安東軍 下 節度, 本 髙麗 銅山縣地, 渤海 置 銅山郡, 地在漢候城縣北 渤海龍泉府南地.  

多山險 寇盜以為淵藪, 乃招平營等州客户數百 建城居之, 初號 浩里太保城, 開泰八年 置州, 兵事屬北女直兵馬司, 統縣一.

 

함평현(咸平縣) 당나라 안동도호(安東都護)가 천보(天寶) 연간에는 

영주(營州)와 평주(平州)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 곳이 이곳이다.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다시 안동군(安東軍)을 설치하였다. 개태 연간에 현을 두었다. 

 咸平縣 唐安東都䕶 天寳中 治 營平二州 間, 即此 太祖 滅 渤海 復置 安東軍, 開泰中 置縣. 

<요사 지리지>

 

遙의 함주 (咸州)가 발해의 용천부(유성柳城, 북부여 불이성)의 남쪽에 있고  요동군 후성현의 북쪽에 있으므로

요동군 후성현은 발해 용천부의 남쪽에 있었다.(그림 3-3 참조)

 

낙랑군 동이현(東暆縣) 

應劭曰音移. 응소(應劭)는 暆의 음이 이(移)라고 했다

<한서 지리지>

 

낙랑군 불이현(不而縣)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린다

<한서 지리지>

 

그림3-2 <담기양>이 그린 낙랑군 불이현과 동이현 (노란색 부분)

 

동경도(東京道) 녹주(淥州) 

녹주(淥州) 압록군(鴨淥軍)은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 고국(故國)이며 발해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라고 불렀다. 

성의 높이는 3길이며 너비는 20리나 된다.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豐州)•정주(正州) 등 4주의 일을 관할하였다. 

옛 현은 신록(神鹿)•신화(神化)•검문(劍門)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머지 잔당들을 상경으로 옮겨 역속현(易俗縣)을 두어 거주시켰다. 

호구수는 2,000이며,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4주와 2현을 관할하였다.                                 

渌州 鴨渌軍 節度, 本 髙麗 故國, 渤海 號 西京 鴨渌府, 城髙 三丈, 廣輪 二十里, 都督 神桓豐正 四州事, 

故縣三, 神鹿 神化 劔門, 皆廢.  大延琳 叛, 遷 餘黨於上京, 置易俗縣居之.  在者户 二千, 隸東京留守司, 統 州四 縣二.  

 

정주(正州) 

본래 비류왕(沸流王)의 옛 지역으로 공손강(公孫康)에게 병합되었다. 

발해가 비류군(沸流郡)을 설치하였다. 비류수(沸流水)가 있다. 

호구수는 5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다. 서북쪽으로 38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동나현(東那縣) 본래 후한의 동이(東暆) 부이현(不而縣)땅으로 정주에서 서쪽으로 70리 떨어져 있다.   

正州 本 沸流王故地國, 為公孫康所併, 渤海 置 沸流郡, 有沸流水.  户五百, 隸渌州, 在西北三百八十里.  統縣一, 

東那縣 本 漢 東暆 不而縣地, 在州西七十里.

<요사지리지>

 

낙랑군 불이현과 동이현은 북부여 제후국인 비류국에 있었다.

 

그림 3-3 북부여 제후국및 고구려 주변 정세도

<지도설명>

1. 가운데 둥근 원 청하(靑河)가 고구려의 모태(母胎)인 웅심산(熊心山 개마산, 고마산)과 비류수(일명 汗水),

   고국원(故國原), 북도(北都), 동도(東都), 압록수(살수, 폭하), 비류곡 서성산이 있는  절노부 지역 이다.

2. 청하 왼쪽이 북부여의 도읍 불이성(不而城)으로 낙랑군 불이현(不而縣) 지역이다.

3. 그 위쪽으로 왼쪽부터 오환, 비류, 개마, 구다, 자몽이 있고 북부여의 동남이 졸본과 안평이다 . 

4. 광명대제가 계루부와  한남(汗南)의 관노부는 온조에게, 절노부와 순노부는 비류에게 다스리게 하고

    서부지역인 연노부는 소서노와 함께 西都(아란원)와 北都(국내성)에서 직접 다스렸다.

5. 북부여 불이성이 발해의 상경 용천부이고 청하지역이 서경압록부, 고구려의 평양이 중경 현덕부이다.

6. 요하의 상류가 서압록이고 청하구의 폭하 일대가 동압록이다.

7. 왕검성(평양, 낙랑군 치소)의 남쪽으로 둔유와 대방이 있고 신라의 전신 섭라국은 안신현에 

   백제의 위례성은 청원현에 있었다.

   

 

 

6. 요동군 서안평현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 말하기를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句驪) 별종(别種)이 (있는데), 그것의 이름(즉 소수 小水)으로 인하여 소수맥(小水貊)이라 한다.

魏氏春秋曰..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驪别種, 因名之小水貊.

<후한서 군국지>

 

또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고]구려는 나라를 세워 큰 물에 의존하여 거주하였다.

서안평현(西安平縣)의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고] 구려의 별종(別種)이 소수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곳에서는] 좋은 활이 나오니, 이른바 맥궁(貊弓)이다.  

又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三國志』 魏志 권30, 東夷傳 高句麗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

원래 한(漢)의 요동군(遼東郡) 서안평현(西安平)의 땅이다.

신(新) 왕망(莽)은 북안평(北安平)으로 고쳤었다.

태조(太祖)는 천제산(天梯)과 박라산(博囉) 등 3개의 산의 기세를 위전(葦甸)에서 취하여

금착전(金齪箭)을 쏘아 그것을 깨달아 룡미궁(龍眉宫)이라고 하였다.

신책(神冊) 3년에 그곳에 성을 쌓았고 황도(皇都)라고 불렀다.

천현(天顯) 13년에 이름을 상경(上京)으로 바꾸었고 부(府)를 림황(臨潢)이라고 하였다.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新莽曰北安平. 太祖取 天梯 博囉 等三山之勢于葦甸, 射金齪箭以識之,

謂之龍眉宫. 神冊三年城之, 名曰皇都. 天顯十三年, 更名上京, 府曰臨潢.

<요사지리지>

 

후한서 군국지와 삼국지 위지는 고구려가 소수(小水) 유역에서 나라를 세웠고

그 소수(小水)는 요동군 서안평현의 북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 간다고 하였다.

또한 요사지리지는 야율아보기가 요동군 서안평의 땅에서 요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추모는 동부여를 탈출하여 순노국에 도착한 후 말갈을 물리치고 졸본국의 소서노의 도움을 얻어 

졸본국과 비류국 사이에 있는 비류곡 서성산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면 고구려와 요나라가 나라를 세운 요동군 서안평은 어디인가?  

 

그림 3-4 <담기양>이 그린 요동군 서안평

 

- 서안평의 연혁

1. 쌍산전쟁(동명16년 BC22년)
7월, 안평왕 <종리鍾离>와 쌍산(﨎山)에서 싸워 대파하였다.
<종리鍾离>는 안평성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굳게 지키며 나오지 않았다.
군량이 다하여서 물러났으며, 그곳의 생구 7천인을 잡아다가 노비로 삼았는데, 미녀와 재주 많은 남자들이 많았다.
<종리>가 사신을 <정도송鄭道宋>에게 보내와서 화친을 청하였기에,

상께서 <정도송>에게 명하여 그 사신을 <한소>에게로 보내게 하였다.
약속을 받아내길, 해마다 소와 말 각각 천 두, 채단 3천 필, 황금 2천 근,약재 70종, 콩과 기장 3만 석을 조공하고 칭신하며
딸과 남자생구 3백인 및 여자생구 7백인을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쌍산(雙山) 전쟁에서 우장군 <보연宝燕>이 몸에 열 군데의 부상을 입고 죽어서, 시신을 포대에 넣어서 돌아왔다.
상께서 그의 처 <극克>씨와 함께 시신을 어루만지며 곡하고 이르길
“그댄 나의 <조참曹參>이었으니, 마땅히 나라에서 천년이 되도록 제사가 끊이지 않을 것이오.”라 하였다.
......

동명 17년(BC21년) 3월
.....
<환백桓柏>과 <양신羊臣> 등이 동안평(東安平)을 쳐서 빼앗고, 대대로 호족이었던 스무 집안을 서도(西都)로 옮겼더니,
소・양・말・돼지・콩・기장 및 비단 필들이 무수하였다.
안평주(安平州)에 자사(刺使)와 태수(太守)를 두었다.

추모는 북벌하여 말갈을 정벌한 후 남벌하여 BC21년에 안평국을 멸망시키고 안평주를 설치한다.

 

 

2. 서안평에 성을 쌓음

대무신제 28년 을묘(A.D.55) 2월
개마, 하성, 구리, 고현, 남구, 자몽, 구려, 거란, 하양, 서안평등 10성을 쌓아 한(漢)과 선비(鮮卑)에 대비하였다.

태조대왕 3년(55) 봄 2월에 요서 (遼西)에 10성을 쌓아 한 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삼국사기>

태조황제 4년 乙卯(을묘, AD115년) 2월,
西河, 南口, 河城, 安平, 長嶺, 菟城, 屯有, 平郭, 河陽, 高顯, 南蘇등의 城을 重修(중수)하여, 西南(서남)을 대비하였다.
<고구려사초>

대무신제 28년(55년)에 서안평에 성을 쌓고 태조황제 4년(115년)에 중수하여 漢의 침략에 대비한다.

3. 낙랑태수의 서안평 침략

태조황제 30년 신사(A.D.141) 4월
대방령(帶方令) <장언張彦>이 둔유(屯有)를 침입하니 도성(菟城)태수 <을어乙魚>가 쳐서 죽였고,
낙랑(楽浪)태수 <용준龍俊>이 서안평(西安平)에 쳐들어오니 안평(安平)태수 <상잠尙岑>이 쳐서 깨뜨리고,
신안(新安)과 거향(居鄕)까지 추격하여 그 들의 처자와 병장기를 빼앗아 돌아왔다.
적은 도망하여 유주(幽州)로 들어갔다.

낙랑과 대방이 반란하여 서안평과 둔유를 침략하니 고구려는 내친김에 신안과 거항까지 추격한다.

1957. 9월 초판한 미 육군 군사지도에 신안진의 지명이 남아 있다.

4. 197년 발기의 난으로 <공손도>가 서안평을 차지한다.

   

5. 고구려의 서안평 정벌

산상대제9년{AD205}을유, 4월,
진서장군 <주설>에게 명하여 <서안평>을 정벌하게 하였더니, 평호에서 싸우다가 장군 10명이 죽었다.
상이 남겨진 자식들을 위무하고 처들에게는 녹봉을 주었다.
<주설>의 아들 <주희>를 <우림>교위로 삼고 공주를 처로 삼아 주었더니,
<주희>는 스스로 나서서 변방의 장수가 되었고 원수도 갚았다.

6. 공손강의 서안평 침공
산상대제14년{AD210}경인, 3월,
<공손강>이 서안평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양[성]은 물가에 있고 지키기 어려워, 남소[성]의 서쪽 안평[성]의 북쪽에 새로이 성{신성}을 쌓아서,
<공손강>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공손강이 치열하게 싸운 곳이 서안평이다.

 

7. 안평대전
동천대제16년{AD242}임술,
하5월, 상이 친히 5도의 장군인 <방축>・<회고>・<주희>・<현>・<목장> 등을 거느리고
십만 병을 이끌어 <서안평>을 쳐서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이다.
애초에 <사마의>가 <요동>을 빼앗고 이곳으로 자신의 주력을 옮겨 동쪽을 도모하려 하였었다.
이제 그 설비를 파괴해버렸더니, 백성들과 진보가 모두 우리 것이 되었다.
......
고구려와 조위가 치열하게 싸운 곳도 서안평이다.

8. 미천대제의 서안평 공격
311년 8월, <방부> 등이 진공하여 서안평을 빼앗고 그 곳의 남녀 2천명을 붙잡아 평양(平壤)으로 데려오니,
왕이 이를 받아들이고는, 상으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선옥>을 안평태수로, <선술>을 좌위{장군}로, <만강>을 우위{장군}로, <곽>을 좌기{장군}로, <석>을 우기{장군}로 삼았다.

10월, 상이 <주>황후와 순행하여 안평에 이르러서 사졸들을 위로하였다.
<고경>을 안평 소수로 삼아 <서안평>을 다스리게 하였다.
......
서진(西晉) 때인 미천대제 시 고구려는 서안평과 낙랑군의 중원세력을 안전히 쫓아낸다.

그림 3-5 서안평

 

그림 3-6 신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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