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5세 풍월주 562년 <사다함斯多含(547-564)>
斯多含者仇利知子也.
<사다함斯多含>은 <구리지仇利知>의 아들이다.
비량(벽화) - 구리지(519-564?)(금진) - 사다함(547-564) < 5세 풍월주(562)>
初比梁公慕碧花后常如其厠. 法興大王愛比梁公 不禁之果通后生子 故曰仇利知.
처음 <비량比梁>공이 <벽화碧花>후를 그리워하여 늘 후의 뒷간에 갔다.
법흥대왕이 <비량比梁>공을 사랑하여 금하지 않았다.
과연 후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런 연유로<구리지仇利知>라 하였다.
美如碧后胆如比公 及長好郎徒武事
<구리지仇利知>는 아름답기가 <벽화碧花>후와 같고 담력은 <비랑比梁>공과 같앗다.
자라서 낭도의 무사(武事)를 좋아하였다.
通金珍娘主生兎含塞達斯多含. 塞達者二花公之妾也
<금진金珍>낭주와 사통하여 <토함兎含>, <새달塞達>, <사다함斯多含>을 낳았다.
<새달塞達>은 <이화二花>공의 첩이다.
<구리지>
.... <옥진> 형제와 친하지 않았다.
<금진>은 이에 문상에 물러나 살았다.....
<구리지>는 낭도를 모아 <금진>을 원화(源花)로 삼고자 하였다.
이보다 앞서 <구리지>는 숙위두상(宿衛頭上)으로서 <금진>의 명을 전(殿) 아래서 늘 받들었다.
<구리지>는 마음 속으로 그것을 원해 천주사(天柱寺)에서 무릇 5년을 발원하였는데 <금진>이 비로소 홀로 살게 되었다.
<구리지>는 이에 날마다 가서 원화가 될 계책을 바쳤다.
<금진>은 나이가 또한 적었기에 명리를 탐하여 허락하였다.
<구리지>는 또 ... 원화라는 것은 의협의 인물로 낭도들과 더불어 죽을 의리로써 의리를 지킨다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면 .... <금진>이 말하기를 ...<구리지>...낭주에게...한 것이 5년전의 일....의 일이다.
<금진>은 이에 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바라...무리가 받들었다.....나의 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 하였다.
...말하기를 " 신은 ...아직...의 몸..허락합니다." 하였다.
<금진>이 말하기를 " 네가 나의 집 ...황□(皇□)의 귀함으로 뒷간에서 사통을 허락하여 ....." 하였다.
<구리지.가 말하기를 " 신이 나이가 젊어 동東.....어찌 업신여김이 이와 같은가" 하였다.
<금진>...." 일찍이 가득했을 따름이다. 지난날에 너로서 ... 아버지이다. 오늘은 네가 ...아니다" 하였다.
<구리지>가 이에 기뻐 말하기를 " 신은 이로부터 더욱 힘써 ...." 하였다.
정이 더욱 무르익었다.
<옥진>궁주는 ..... 서로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금진>은 ...당하여 ....<사다함>....을 알고 장군 <주령珠玲>을 따라 출정하여 독산에서 죽었다.
<금진>
처음에 <구리지>에게는 용양신 <설성薛成>이 있었는데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지어 보였다.
<구리지>가 출정하여 자리를 비우자 <금진>과 통정하여 <설원薛原>랑을 낳았다.
<동륜>태자가 탄생하였을 때 <사도>황후가 <금진>을 불러 유모(乳姆)로 삼았는데
이로 인하여 <사다함> 형제도 궁중에서 자랐다.
그 때 왕의 나이가 아직 한창 때였는데 태후가 빈공(嬪供)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도 또한 <사도思道>와의 정이 각별하여 아직 다른 사람을 총애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사도>는 산후 3개월간 왕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
<금진>이 이에 교태를 보이자 왕은 슬라(瑟羅)에 갈 때 (금진을) 황후궁의 궁인으로 삼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였다.
황후가 그것을 알고 ..... 왕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금진을 ....에서 나가 살게 하였다.
...<금진>은 <설성> 등 다섯 사람을 몰래 거느렸다.
.... 다시 불러 조하방부인(朝霞房夫人)으로 삼았다.
그 때 .... 그 어머니에게 간언하여 ...이 없도록 ...<금진>이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왕이 이에 .... 하였다.
<금진>이 이에 울며 말하기를 " 첩이 불행이도 타락하여 ....사노(私奴) <설성>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설성>을 나마(奈麻)로 삼아 돌려....노(奴)를 따라서 상(桑)을 ...조하방에 다시 들어가 ........ 죽었다.
<사다함>은 이에 땔나무를 쌓아 ....하고자 하였다.
<금진>에게 물었다. <금진>은 울며 말하기를 " 우두머리는 .... 곧 <설성>입니다" 하였다.
왕은 그 장(長)을 취해 ....로 삼았다.
....<설성>은 인하여 또 잠자리 시중을 하였다.
이 해에 <이화>랑이 풍월주가 되고 ... 토함을 부제로 삼았다.
제(帝)는 <사다함> 또한 ...에 속하게 ....또 제(帝)의 딸을 낳았으니 이 이가 <난성暖成>공주였다.
스스로 그 도(徒)와 더불어 백제를 정벌하는데 따라가 ...이 있다.
?湌의 위(位)를 주고 <금진>을 처로 삼게 하였다.
<사다함>은 " 오히려 ...., ....색은 바로 본능입니다. 어머니는 홀로 정해진 짝이 없어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사다함.은 말하기를 " ....않는가" 하였다.
<토함>이 말하기를 " 비록 천한 어머니의 바라는 바이나 제(帝)가 이미 허락하였으니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사다함>은 이에 <금진>이 <설성.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따로 살며 사택(賜宅)과 본장(本庄)에 들어가지 않았다.
<옥진>궁주가 듣고 크게 칭찬하여 " 이 아이는 반드시 그 아버지를 귀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무관랑>
공의 신하인 <무관>랑 또항 공이 많았는데 미천하여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공이 그것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금진>낭주는 평소에 색에 빠졌다. 많이 ....<무관>랑을 몰래 들였다.
<무관>랑은 <사다함>을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사다함>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 네가 아니라, 어머니 탓이다. 나와 더불어 ... 벗으로... 어찌 작은 혐의를 문제 삼겠는가?"하였다.
<금진>이 듣게 되어 .......스스로 도리를 알았다.
나에게 너그러운 것은 바로 ......<무관>랑.. 함께 출입하였다.
낭도들 중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관>랑은 도망하고자 하여... 밤에 궁의 담을 넘다가 구지(溝池)에 떨어져 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사다함>의 죽음
공은 애통해 하였다.
공 역시 여위고 병들어 7일만에 숨이 끊어지려 하니 <금진>은 공을 품에 안고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 나 때문에 너의 마음이 상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살겠는가?" 하였다.
공이 서서히 눈을 뜨고 말하기를 "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내가 어찌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겠습니까?
살아서 어머니의 큰 은혜를 갚을 수 없었는데 죽어서 저 세상에서 갚겠습니다." 하였다.
斯多含 十二能撃劍愛人 十六 率精兵五千 馳入旃檀門竪白旗 大破加耶軍 以功賜田 則分給部下 所虜生口尽放為良人.
<사다함斯多含>은 12살에 <문노>를 따랐는데 격검에 능하였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16살에 정병 5천을 거느리고 전단문(旃檀門)으로 달려 들어가 백기를 세웠다.
가야군을 대파하여 그 공으로 전(田)을 받았으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포로로한 생구는 모두 풀어 주어 양인으로 만들었다.
호조(선혜) - 비조부(문화) - 문노(538-606)
大王益重賜閼川地 則固辞不受. 択其不毛者数頃受之曰 此足以令人勤也.
대왕이 <사다함斯多含>을 더욱 중하게 여겨 알천의 땅을 주었으나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다가 불모지 수 백 경(頃)을 택하여 받으며 말하기를
" 이것이면 사람으로 하여금 족히 근면하게 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時二花公多上寵倦於郎徒乃以公為五世風月主.
이때 <이화二花공>은 왕의 총애를 많이 받아 낭도에 싫증이 나서 공을 5세 풍월주로 하였다.
以公胞弟薛原郎為副年十三也.
공의 포제(胞弟) <설원薛原>랑을 부제로 삼았는데 나이 13살이었다.
설성(금진) - 설원(549-606)
公臣武官郎多功以微賎不報而卒. 公哀之痛亦痩盧而尽.
공의 신하인 <무관武官>랑 또한 공이 많았는데 미천하여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공이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公素愛未珍夫公女美室. 美室亦好公 而以太后命嫁于世宗公 以此竟不娶而卒.
공은 평소 <미진부未珍夫>공의 딸 <미실美室>을 사랑하였다.
<미실美室> 또한 공을 좋아 하였으나 태후의 명으로 <세종世宗>공에게 시집을 갔다.
이로써 끝내 장가들지 않고 죽었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616?)
<사다함>과 <미실>은 나이가 같다.
태종(지소) - 세종(545?- )
<사다함>은 564년, 18살의 어린나이에 자결하였다.
郎徒請复立二花公. 二花公曰無如世宗殿君也 乃立世宗為主.
낭도들이 <이화二花>공을 풍월주로 다시 세울 것을 청하니 <이화二花>공이 말하기를
" <세종世宗> 전군 같은 이는 없다." 라고 하니 <세종世宗>을 세워 풍월주로 하였다.
賛曰 : 比梁遺気 魏花之孫 征虜功高 自居不毛 青鳥山中 松栢長青
찬하여 말한다.
<비량比梁>이 물려준 정기이고 <위화魏花>랑의 손자이라 적을 친 공이 높은데 스스로 불모지에 머물렀다.
푸른 새가 산중에 있어 송백(松栢)같이 푸르도다.
6. 6세 풍월주(562-571) <세종世宗(545?- )>
世宗者苔宗公子也. 母曰只召太后也. 與眞興大王同胞弟也. 世宗殿君初名義宗
<세종世宗>은 <태종苔宗>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只召>태후이다. 진흥대왕과 더불어 어머니가 같다.
<세종世宗>전군의 초명(初名)은 <의종義宗>이다.
입종(지소) - 삼모진(534 - 576)
태종(지소) - 숙명(543? - 603)
세종(545? - ) <6세 풍월주(562 - 571)>
端雅美風儀孝于太后 忠于大王 大王亦極愛之曰 是吾末弟也
단아한 아름다움과 멋진 풍채를 가졌다. 태후에게 효성스럽고 대왕에게 충성하였다.
대왕 또한 매우 사랑하여 말하기를 " 나의 막내 아우다." 라고 하였다.
常命侍側 少不禁束而公天姿極好無有失焉
항상 곁에 있으며 대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조금도 금지하고 묶어두지 않아도 공의 타고난 바탕이 극히 좋아 잘못됨이 없엇다.
<태종공>
<태종>공이 일찍이 일이 있어 사사로이 帝를 찾아뵐 때 공이 시측(侍側)하였다.
<태종>공은 帝에게 먼저 절하고 공에게 다음 절을 하였다.
공은 황망하여 나아가 부축하며 감히 절을 받지 않았다.
제가 말하기를 " 이 노인은 비록 중신(重臣)이기는 하나 나의 신하이다. ... 몸으로 너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공이 울며 말하기를 " 아버지는 ... 입니다. 어찌 신(臣)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덕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 하였다.
<태종>공이 놀라 말하기를
" 태후는 신성하여 지아비 없이도 전군(殿君)을 신화(神化)할 수 있다. 전군(殿君)은 신자(神子)이다.
어찌 감히 신하가 아버지가 되겠는가" 라 하였다.
<세종>은 <태종>공을 안고 울며 말하기를
" 일찍이 모후에게 ....나의 ...를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하였다.
제는 " ...태후의 신성(神性)과 예덕(譽德)으로 중신을 총애함으로써 나의 ...이 있으니 또한 나의 집의 경사스러운 행운이다.
늙은 신하는 어찌 반드시 피하는가... 나의 아우이다." 하였다.
또한 공에게 허락하여 ...에게 아버지라 부르도록 하였다.
공은 처음으로 부자의 상견레를 ...왕의 은혜가 끝이 없음을 감사하였다.
太后択公卿之美女聚于宮中 而観公最喜美実娘主
태후는 공경의 미녀들을 택하여 궁중에 모아두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美實>낭주를 가징 좋아 하였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616?)
而欲戯之太后大喜使美室入宮中事之
태후가 크게 기뻐하며 <미실美實>로 하여금 그를 섬기도록 하였다.
事之不數日 而與公相通 情意繆密
섬긴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과 더불어 상통하였고 정의(情意)가 얽혀 깊어졌다.
時太后愛淑明公主 張以承統 欲廢皇后 皇后乃美室之叔母也
그때 태후는 <숙명叔明>공주를 사랑하여 장차 진골정통을 잇고자 황후를 폐하려고 하였다.
황후는 <미실>의 숙모이다.
영실(옥진) - 묘도(525- )
사도(534- )
<미실>의 어머니 <묘도>는 황후 <사도>의 언니이다.
<숙명>은 <태종>과 <지소>의 딸로 <세종>의 누나이다.
乃洩其謨于皇后 皇后乃泣訴于帝
이같은 계책이 <사도思道>황후에게 누설되니 황후는 울면서 제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帝素愛后 故(不) ? 太后譖言 而益愛皇后
제는 본래 황후를 사랑했기 때문에 태후의 헐뜯음을 듣지 않고 황후를 더욱 사랑하였다.
이에 태후가 <미실美實>을 불러 꾸짖기를
" 너로 하여금 전군을 받들게 한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色事)로 전군의 마음을 어지렵혔으니 죄를 용서 할 수 없다."라 하고 출궁을 명하였다.
진흥대제의 황후 <사도>는 <묘도>의 동생으로 <미실>의 이모이다.
<미실>이 이모 <사도>에게 일러 바친것이다.
<진종眞宗>전군의 딸 <용명用明(545?- )>을 <세종世宗>전군의 정비(正妃)로 삼았다.
<미실美實>이 말하기를
" 일찍이 지아비를 맞는데는 마땅히 <사담함斯多含>과 같아야 한다. 무릇 부귀라는 것은 한때이다.
나는 한때 왕자와 전군을 모두 앞에서 배견하였으나 지금은 홀로 되었다."
이에 <사다함斯多含>공을 불러 위로하니 정분이 일어나 서로 기뻐하였다.
출정할 때에 이르러 풍랑가를 지어 보냈다.
風只吹留如久爲都 郞前希吹莫遺
浪只打如久爲都 郞前打莫遺
早早歸良來良 更逢叱那抱遺見遺
此好 朗耶 執音乎手乙 忍麽等戶理良奴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야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斯多含>은 이에 온갖 방법으로 위로하고 갔다.
전군이 듣고 몹씨 괴로워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상신할까 염려하여 <미실美實>을 다시 입궁시키자 전군은 기뻐 미친듯이 달려갔다.
태후는 부득이 다시 섬기도록 명하였다.
<미실美實>은 원비(元妃)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色供)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전군은 태후에게 명하여 <미실美實>을 전군 부인으로 삼고 <용명用明>은 차비(次妃)로 삼았다.
<용명用明>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 뜻을 비쳤다.
<미실美實>은 전군과 더불어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마침내 <용명用明>을 내쫓았다.
<사다함斯多含>이 돌아 왔을 때 <미실美實>은 이미 궁중에 들어 가 전군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까닭에 <사다함斯多含>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내용이 몹씨 구슬퍼 그때 사람들이 서로 암송하여 전하였다.
해(解)하여 이르기를
靑鳥 靑鳥 彼雲上之靑鳥
胡爲乎 止我豆之用
靑鳥 靑鳥 乃我豆田靑鳥
胡爲乎 更飛入雲上去
旣來不須去 又去爲何來
空令人淚雨 腸爛瘦死盡
(吾)死爲何鬼 吾死爲神兵
飛入(殿主護) (神)
朝 暮 保護殿君夫妻
萬年千年 不長滅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여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될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되리
전주(殿主)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臨卒二花公抱而哀之曰 爾弟尚幼而爾若不起誰為之継乎
죽음에 임하여 <이화二花>공이 감싸안고 슬퍼하며
" 그대 아우는 아직 어린데, 그대가 만일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계승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斯曰臣妹美室之夫依毛郎公故事則不亦可乎
이에 <사다함斯多含>이
" 신의 누이인 <미실美實>의 남편이 <모랑毛郞>공의 고사에 의거하면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二花公乃奏太后請立之太后不肯曰 吾子幼弱安能為乎
이에 <이화二花>공이 태후에게 정하기를 청하니 태후가
" 나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다. 어찌 능히 될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美室乃勧世宗曰従兄慕我而死臨死一言不聴則非丈夫也
<미실美實>이 <세종世宗>에게 권하기를
" <사다함斯多含> 종형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 마디를 들어주지 않으면 장부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世宗然之乃説太后得旨乃為六世風月主仍以薛花郎副之
<세종世宗>이 옳게 여기고 태후를 설득하여 허락을 얻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인하여 <설화薛花>랑을 부제로 삼았다.
천주사에서 <사다함斯多含>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 날 밤 과연 <미실>의 꿈에 <사다함斯多含>공이 품에 들어오며
"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너의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미실>이 <세종>공에게 아뢰니 <세종>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을 낳았다.
<하종>공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 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세종(미실) - 하종(564- )
<세종>은 금지옥엽의 귀한 왕족이었지만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을 이루었고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미실>이 실로 대궐에 거하며 이끌어 준 것이다.
時銅輪太子已長 太后乃以万呼公主欲配之以続真骨正統
그 때 <동륜>태자가 이미 장성하였다.
태후는 <동륜>태자를 <만호>공주와 짝지어 진골정통을 잇고자 하였다.
思道皇后欲続大元神統陰与相議曰 吾児善子可与太子相親有子則当以汝為后也
<사도>황후는 대원신통을 잇고자 하여 몰래 <미실>과 의논하여
" 나의 아들은 좋은 아이이니, 태자와 더불어 서로 친하여 아들을 갖게 되면 곧 너를 후로 삼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美室大喜与太子相通有娠 大王不知之使美室入侍承寵以為皇后宮殿主
<미실>이 크게 기뻐하고 태자와 상통하여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이를 알지 못하고 <미실>을 들어오게 하여 색공으로 모시도록하였다.
<미실>은 음사를 잘 하였기 때문에 총애가 날로 중하여져 황후궁 전주(殿主)에 발탁되었는데 그 지위가 황후와 같았다.
世宗乃求出征美室恃寵放蕩乃通薛原郎
<미실>은 사람을 시켜 <세종>이 밖에서 공을 세우도록 설득하였다.
<세종>은 이에 출정할 것을 구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으로 하여금 머물러 있으며 세종의 일을 대신토록 하였다.
설성(금진) - 설원(549-606)
及其弟美生大王不知之奉為源花使二郎統率郎徒而朝之大王与殿主受朝于南桃源花之制廃二十九年而复興乃改元大昌
총애를 받고 방탕하여 <설원>랑과 그의 동생 <미생>과 정을 통했으나 대왕은 이를 알지 못 하였다.
<미실>은 <설원>랑과 의논하여
"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가졌는데 만약 낭도들의 우러러봄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세종>에게 알려 풍월주를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았으며
<설원>랑과 <미생>을 봉사랑으로 삼고 <금진>을 화모로 삼았다.
이에 <세종>은 낭도를 모두 해산하고 돌아와서
" 새 원화는 나의옛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낭도들은 눈물을 흘리고 물러가지를 못 하였다.
제가 명하여 <설원>과 <미생> 두 화랑이 낭도의 많은 무리를 통솔하여 조하토록하였다.
대왕과 전주는 함께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나와 남도에서 조하를 받고 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원화 제도는 폐한 지 29년 만에 다시 부활하였다.
원화는 진흥대제가 즉위한 540년에 지소태후가 폐지하였다.
이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 하였다.
대창 원년은 진흥대제29년 568년이다.
이 날 밤 제와 <미실>은 남도의 정궁에서 합환을 하였다.
이때 미실 22세, 진흥대제 35세이다.
낭도와 유화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만중이었다.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의 물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제와 원화가 난간에 다달아 구경을 하였다.
낭도들이 각각 한 명의 유화를 이끌고서 손뼉치고 춤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는데 그 때마다 만세 소리가 진동하였다.
제의 기쁨이 매우 커서 월화와 함께 채전을 무리에게 던져 주며 말하기를
" 저들도 각기 자웅이고 나와 너도 또한 자웅이다." 라고 하였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파고들며 말하기를
" 비록 숙모{사도}의 존귀함이라도 이 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의 기풍을 크게 가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斯多含>의 영혼이 늘 <미실>의 가슴 안에 있으며
좋은 계책으로 도와 주는때문이라고 하였다.
태자가 밖으로 나가 놀 때 유화 중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천거 하였다.
태자와 더불어 <미생>의 낭도가 날마다 황음한 짓을 일삼았다.
홍제(鴻濟)원년(572) 3월 <동륜>태자가 큰 개에 물리는 일로 인하여 죽었다.
태자의 종인(從人)을 가려 보니 <미실>의 낭도에 속한 자가 많았다.
<미실>이 원화에서 물러나는 것을 승인하고 <세종>이 다시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이 이에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 내가 이미 원화를 물러났고 전주(殿主)가 그대와 함께 조용히 머물러 있기를 원하니
그대는 어찌 다시 풍월주가 되려 하는지요?
빨리 <설원>랑에게 물려 주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세종>은 이에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여 주었다.
그 때 <금륜>태자 또한 <미실>을 좋아하여
<설원>, <미생> 등과 서로 사귀어 정을 맺고방외우(方外友)가 되었다.
<미실>이 비록 이미 출궁하여 깨끗하게 살 것을 공언하였으나,
가만히 있지 않고 <금륜>태자와 더불어 후사(後事)를 약속하였다.
제(帝)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제하지 못하고 <미실>을 다시 불러 들여 의논하였다.
제(帝)가 죽고 <금륜>태자가 즉위 하였다.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금륜(552-582, 25대진지대제 재위 576-578)
인하여 <미실>을 받아 들였는데 세상의 여론으로 황후로 봉하지 못하였다.
진지왕은 또 다른 사람에게 빠져 <미실>을 심히 총애하지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낸 <사도>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페하고 아들 <백정>공을 즉위시키니 이이가 진평대제이다.
제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의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이때 미실 37세, 사도태후 46세, 진평대제 백정 13세이다.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켰다.
비록 <미실>의 뜻에 따라 출장입상(出將入相)하였으나,
깨끗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미실> 또한 감동하여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들어 다시 서로 화합하였다.
아! <세종>공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황후의 아들로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스스로 그것을 일생의 일로 삼았다.
평생토록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한 소송도 그릇되게 판단하지 않았다.
진실로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賛曰太后私子相国寵胤清雅高標花郎典型
찬하여 말한다.
태후의 사자(私子)이고 상국(相國)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청아하고 높은 표상은 화랑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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