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郞世紀
花郞者仙徒也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我國 奉神宮 行大祭于天 如燕之桐山 魯之泰山也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桐山), 노(魯)의 태산(泰山)과 같다.
昔燕夫人 好仙徒 多畜美人 名曰國花
옛날 연(燕)나라 부인(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國花)라 하였다.
其風東漸 我國以女子爲源花
그 풍속이 점차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源花)라 하였다.
只召大后廢之 置花郞 使國人奉之 先是 法興大王愛魏花郞 名曰[花郞] 花郞之名始此
<지소只召>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魏花>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불렀다.
화랑(花郞)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모진(보도) - 지소(515- )(모진) - 삼모진(534-576, 24대 진흥대제 재위540-575)
古者 仙徒以奉神爲主 國公列行之後 仙徒以道義相勉 於是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花郞之史 不可不知也
옛날에 선도는 신을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國公)들이 무리에 들어간 후 선도는 도의(道義)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1. 1세 풍월주(540-543) <위화魏花(487- ? )>
魏花郞者剡臣公子也 母曰碧我夫人 以母寵 爲毗處王摩腹子 世所謂摩腹七星也
<위화魏花>랑은 <염신剡臣>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벽아碧我> 부인이다.
어머니가 총애를 받아 <비처毗處>왕의 마복자(摩腹子)가 되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마복칠성(摩腹七星)이다.
염신(벽아) - 위화(487- ) <1세풍월주(540-543)>
阿時公 父曰善牟 母曰寶兮 守知公 父曰伊欣 母曰俊明 伊登公 父曰叔欣 母曰洪壽
苔宗公 父曰阿珍宗 母曰寶玉公主 比梁公 父曰比知 母曰妙陽 ?吹公 父曰德智 母曰加耶國??公主
<아시阿時>공의 아버지는 <선모善牟>이고 어머니는 <보혜寶兮>이다.
<수지守知>공의 아버지는 <이흔伊欣>이고 어머니는 <준명俊明>이다.
<이등伊登>공의 아버지는 <숙흔叔欣>이고 어머니는 <홍수洪壽>이다.
<태종苔宗>공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고 어머니는 <보옥寶玉>공주이다.
<비량比梁>공의 아버지는 <비지比知>이고 어머니는 <묘양妙陽>이다.
<융취肜吹>공의 아버지는 <덕지德智>이고 어머니는 가야국의 <융융肜肜>공주이다.
선모(보혜) - 아시(481- )
이흔(준명) - 수지(482- )
숙흔(홍수) - 이등(483- )
아진종(보옥) - 태종(484- )
비지(묘양) - 비량(488- )
덕지(융융) - 융취(490- )
或曰 法興大王居七星之首 魏花郞則以母微不參云
혹은 말하기를 법흥대왕은 칠성의 우두머리이며 <위화魏花>랑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도로(연제) - 모진(480-540, 23대법흥대제 재위 514-539)
而七星録 及宝兮記 皆無伊登公 載魏花公 則未詳孰是也.
그런데 칠성록(七星錄)과 보혜기(寶兮記)에는 모두 <이등伊登>공이 없고 <위화魏花>랑을 기재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公面如白玉唇若赤脂明眸皓歯談下生風.
공은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는데, 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
碧我夫人 在捺已 生一女 乃 毗処后碧花夫人也.
<벽아碧我> 부인이 날이(捺已)에 있을 때 한 딸을 낳았는데 곧 <비처毗處>후인 <벽화碧花> 부인이다.
손동(벽아) - 벽화(485- )
碧花夫人入宮 而公以私弟 出入有寵.
<벽화碧花>부인이 입궁하자 공은 사제(私弟)로서 출입하여 비처왕의 총애를 받았다.
法興大王 時 以副君之子 位在国公 而寵不及焉.
법흥대왕은 그 때 부군(副君) <지도로>의 아들로 국공(國公)의 지위에 있었는데 총애가 공만 못하였다.
阿時公乃勧大王下拝于公. 公告于剡臣公曰 国公 下拝于汝者 欲以汝為臣也.
今王老 国公有大望 汝其事之. 公乃詣為臣事. 多称旨. 法興曰吾鄧通也.
<아시阿時>공이 이에 법흥대왕에게 권하여 공에게 하배(下拜)를 하게 하였다.
공이 그것을 <염신剡臣>공에게 말하였다. <염신剡臣>공이 말하기를
" 국공이 너에게 하배를 하는 것은 너를 신하로 삼기 위한 것이다.
지금 왕은 늙었고 국공은 대망을 가지고 있다. 너는 그를 섬겨야 한다" 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찾아가 신하가 되어 섬기니 많은 것이 국공의 뜻에 맞았다.
법흥이 말하기를 " 나의 <등통鄧通>이다." 라고 하였다.
등통(鄧通) : 중국 한나라 문제의 총애를 받던 신하
未幾 毗処果崩 智証大王即位 以法興為太子. 公勧碧花后 事太子 生女 是曰三葉宮主也.
얼마 지나지 않아 <비처毗處>가 과연 붕 하였다.
지증대왕이 즉위하고 법흥을 태자로 삼았다.
공이 <벽화碧花>후에게 태자를 섬기도록 권하여 딸을 낳으니 바로 <삼엽三葉>궁주이다.
모진(벽화) - 삼엽(507- )
時 太子妃 保道夫人 乃毗処女 而無寵.
그 때 태자비인 <보도保道>부인은 곧 <비처毗處>의 딸인데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保道之弟 吾道者 妙心 私通 善兮后 而生者. 故甚美 有寵於太子.
<보도保道>의 아우 <오도吾道>는 <선혜善兮>후와 <묘심妙心>이 사통하여 낳았다.
그러므로 매우 아름다워 태자{법흥}에게 총애를 받았다.
비처(선혜) - 보도(485-528)
묘심(선혜) - 오도(487-539)
媚于三葉 而深結于公 潜相通焉. 乃生玉珍宮主.
<오도吾道>는 <삼엽三葉>에게 아양을 떨어 공과 깊이 사귀고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그리하여 <옥진玉珍>궁주를 낳았다.
이때 <삼엽三葉>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삼엽三葉>은 <벽화碧花>의 오기 인듯
위화(오도) - 옥진(505- )
太子知之 以吾道 賜阿時公 以碧花 賜比梁公.
태자가 알고 <오도吾道>를 <아시阿時>공에게 내리고 <벽화碧花>를 <비량比梁>공에게 내렸다.
乃寵正妃保道夫人 黜公疎之.
이에 정비(正妃) <보도保道>부인을 좋아하고 공을 물리치고 멀리 하였다.
雖然保道徳之 請于智証大王 封于天柱 而主祀.
그러나 <보도保道>부인은 공이 덕이 있다고 여기고 지증대왕에게 청하여
공을 천주(天柱)에 봉하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延帝太后亦幸之. 及玉珍入幸 乃复如初寵之. 遂居伊飡之位.
<연제延帝>태후 또한 공을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
<옥진玉珍>이 궁에 들어가 법흥왕의 잠자리 시중을 들자 곧 다시 처음과같이 공을 총애하게 되었다.
마침내 공은 이찬의 직위에 있게 되었다.
玉珍専寵法興 使保道為尼 以公為臣. 以故只召太后当国. 而置花郎 以公為其首 号曰風月主.
<옥진玉珍>이 법흥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자 <보도保道>를 비구니가 되게 하고 공을 신하로 삼았다.
그런 연유로 <지소只召>태후가 국정을 맡자 화랑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공을 그 우두머리로 삼아 이름하여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
只召者 保道女也. 為立宗公夫人 生真興大王 而 法興大王 愛玉珍宮主 無立意. 只召憂之.
<지소只召>는 <보도保道>부인의 딸인데 <입종立宗>공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을 낳았다.
그러나 법흥대왕이 <옥진玉珍>궁주를 사랑하여
진흥대왕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뜻이 없었기에 <지소只召>는 걱정이 되었다.
公乃暁大義 于玉珍 而立之. 時人莫不義之. 以此思道太后亦無事. 公之徳大矣.
공이 이에 대의로서 <옥진玉珍>을 깨닫게 하여 <진흥眞興>을 태자로 삼게 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사도思道>태후 또한 무사하였다. 공의 덕이 컸다.
公之子孫 甚繁 長女玉珍宮主 次女金珍夫人 乃吾道夫人生也.
공의 자손은 매우 많았다
장녀 <옥진玉珍> 궁주와 차녀 <금진金珍>부인은 곧 <오도吾道>부인이 낳았다.
위화(오도) - 옥진(505- )
금진(519- )
玉珍初嫁英失公未幾受幸 于法興大王生比台公.
<옥진玉珍>은 처음에 <영실英失>공에게 시집을 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법흥대왕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 <비대比臺>공을 낳았다.
모진(옥진) - 비대(522- )
大王欲立為太子. 公諫之曰 臣女無骨品 而 且与英失混処 恐未可也.
대왕이 <비대比臺>공을 태자로 삼으려고 하자 공이 간하여 말하기를
" 신의 딸은 골품이 없고 또 <영실英失>과 함께 살았으니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法興崩 只召太后 降比台公 王子位 以奉公祀.
법흥이 붕 하자 <지소只召>태후는 <비대比臺>공의 왕자의 지위를 낮추어 공사(公祀)를 받들게 하였다.
比台公女 開元宮主 事銅輪太子 有子.
<비대比臺>공의 딸 <개원開元>궁주는 <동륜銅輪>태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비대(흠리) - 개원(548?- )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公子 二花郎 乃 俊室夫人生也.
공의 아들 <이화二花>랑은 <준실俊室>부인이 낳았다.
위화(준실) - 이화(537-603)
俊室者 守知公妹也. 慈悲王外孫也. 有美色 善文章
<준실俊室>부인은 <수지守知>공의 누이이고 <자비慈悲>왕의 외손인데 아름다웠고 문장도 잘 하였다.
자비(파호) - 준명(462?-522)
이흔(준명) - 수지(482- )
준실(490?- )
初為法興大王後宮 無子帰于公 而生. 亦貌美而善文章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공에게 시집을 가서 <이화二花>랑을 낳았는데
또한 모습이 아름답고 문장을 잘 하였다.
只召太后 寵愛之 常侍左右.
<지소只召>태후가 총애를 하여 늘 좌우에서 모시게 하였다.
太后女 叔明宮主悦之 逃出生子 是為圓光祖師 我東方大聖人也.
태후의 딸 <숙명叔明>궁주가 좋아하여 도망가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원광圓光>조사(祖師)로 우리 동방의 대성인이다.
태종(지소) - 숙명(543?-603)(이화) - 원광(560?- )
보리(573- )
圓光之弟曰 菩利沙門 即予曾祖也.
<원광圓光>의 동생 <보리菩利>사문(沙門)은 곧 나의 증조이다.
보리(만룡) - 예원(607-673)(우야) - 오기(633- )(운명) - 대문
賛曰 : 花郎之祖 沙門之? 青我之孫 碧我之子 在地則仙 在天則仏 圓満常住 功徳無欠.
찬하여 말한다.
화랑의 시조이고 사문(沙門)의 아비이며 <청아靑我>의 손자이고 <벽아碧我>의 아들이다.
생시에는 선(仙)이고 죽은 후에는 부처로서 원만하게 늘 존재하니 공덕이 모자람이 없도다.
미해(청아) -백흔(조리) - 염신(벽아) - 위화
2. 2세 풍월주(544-547) <미진부未珍夫(525- )>
未珍夫公者 阿時公子也. 母曰三葉宮主 乃法興大王女也.
<미진부未珍夫>공은 <아시阿時>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삼엽三葉>궁주이니곧 법흥대왕의 딸이다.
아시(삼엽) - 미진부(525- ) <2세 풍월주(544-547)>
夢見白鶴 而生. 公貌美而多才. 法興大王愛之. 与比台公等 長于宮中.
궁주는 꿈에 백학을 보고 공을 낳았다.
공은 모습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법흥대왕이 사랑하였다.
<비대比臺>공 등과 더불어 궁중에서 자랐다.
모진(옥진) - 비대比台(522- )
時 玉珍宮主 寵隆 只召太后 以正統難立. 三葉与阿時護之. 以此太后愛三葉及公 及太后聴政以公 為嬖臣.
時公年十六能称旨. 先是 三山公女 俊貞 為源花 多置郎徒.
이때 법흥대왕은 <옥진玉珍>궁주에 대한사랑이 극진하여 <비대比臺>공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지소只召>태후가 진골정통으로는 세우기 어렵다 하고 <삼엽三葉>과 <아시阿時>공이 태후를 지지하였다.
이로써 태후가 <삼엽三葉>과 공을 사랑하였다.
태후가 정치를 맡자 공을 폐신(嬖臣)으로 삼았다.
이 때 공의 나이가 16살로 능히 태후의 뜻에 부합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삼산三山>공의 딸 <준정俊貞>이 원화가 되었는데 많은 낭도를 두었다.
삼산(준답) - 준정(521- )
至是 法興大王女 南毛公主者 乃百済宝果公主生也. 亦以絶色 与公篤好 太后愛公 而右南毛 欲立為 源花.
그때 법흥대왕의 딸 <남모南毛>공주는 백제 <보과寶果> 공주의 소생으로
또한 뚸어난 미인이엇으며 공과 더불어 도탑게 좋아하였다.
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남모南毛>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모진(보과) - 남모(524- 540?)
先是 法興大王 以玉珍宮私夫英失公 為竜陽君. 寵居上位 命破源花 故俊貞事之 勤沮破南毛.
이에 앞서 법흥대왕은 <옥진玉珍>궁주의 사부(私夫)인 <영실英失>공을
용양군(龍陽君)으로 삼아 총애하여 높은 직위에 있게하고 원화를 파하도록 명하였다.
그런 연유로<준정俊貞>은 <영실英失>공을 섬겨 <남모南毛>가 원화가 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수지(보현) - 영실(498?- )
太后雖 以遺命 以英失為継夫 而実不悦 乃命公破之. 太后又慮 郎徒不足 使属魏花公 郎徒倍之.
태후는 비록 왕의 유언으로 <영실英失>을 계부(繼夫)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공에게 명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태후는 또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魏花>공의 낭도를 소속하게 하여 더하여 주었다.
俊貞妬之 乃誘以酒 害之水上. 毛徒発之. 太后乃廃源花 以仙花為花郎 号其衆曰風月 号其頭曰風月主.
<준정俊貞>이 투기하여 술로 유혹하여 <남모南毛>를 물에서 죽였는데 <남모南毛>의 낭도들이 그것을 고발하였다.
이에 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하였다.
그 무리를 일러 풍월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하였다.
魏花公主之 公副之. 未幾公主之 公自失南毛以後無 以為配公 以外孫 嘗侍法興大王 於宮中 与後宮 妙道夫人 有私 而不敢言.
위화공이 풍월주가 되고 공이 부제(副弟)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공이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남모南毛>를 잃은 이후 아내를 맞지 않았다.
공은 외손으로서 일찍이 법흥대왕을 모셨는데 궁중에서 후궁인 <묘도妙道>부인과 사통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영실(옥진) - 묘도(525- )
太后知之 許之. 公乃娶妙道 生美室娘主 及美生郎.
태후가 이를 알고 허락하였다.
공은 이에 <묘도妙道>에게 장가들어 <미실美室>낭주와 <미생美生>랑을 낳았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616?)
미생(550-609)
미화(553?- )
美室才色絶人 事真興真平受特寵.
<미실美室>은 재색이 뛰어났는데 <진흥>과 <진평>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동륜(만호) - 백정(567-631, 26대 진평대제 재위 579-631)
美生郎亦入花郎. 公事只召太后 尽其忠寵衰願 以身殉国 率郎徒赴戦 累建大功.
<미생>랑 또한 화랑에 들어갔다.
공은 <지소只召>태후를 섬기며 충성을 다했는데 총애가 줄어들자
몸을 나라에 바치기를 원하여 낭도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과연 큰 공을 세웠다.
及 美室得寵 進爵角干夫人 妙道亦至宮主 以続大元神統. 於戯盛矣.
그 뒤 <미실美室>이 왕의 총애를 얻자 공은 작위가 각간으로 오르게 되었다.
부인인 <묘도妙道> 또한 궁주에 이르러 대원신통을 잇게 되었으니 아! 성대하다.
賛曰 : 以色事之 極尽其忠 以勇奉公 又尽其效 夫人妙道 魏公之孫 配生美花 天道攸長
찬하여 말한다.
색(色)으로 섬기어 충성을 다했으며, 용맹으로 나라를 받들고 또한 그 공을 다 하였다.
부인 <묘도妙道>는 <위화>랑의 손녀인데 배필로 삼아 <미화美花>를 낳으니 하늘의 도(道)가 아득하고 오래도다.
위화(오도) -옥진(영실) - 묘도
3. 3세 풍월주(548-555) <모랑 毛郞(526-555) >
毛郎者南毛之弟也.
<모랑毛郞>은 <남모南毛>의 아우이다.
先是 法興大王 以国公 入百済 与宝果公主有私 後宝果逃帰入宮 生南毛 毛郎 皆有美色.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서 백제에 들어가 <보과寶果>공주와 더불어 사통하였다.
후에 <보과寶果>가 도망을 하여 입궁하여 <남모南毛>와 <모량毛郞<을 낳았다. 모두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모진(보과) - 모랑(526-555) <3세 풍월주(548-555)>
未珍夫為花郎 以毛郎為副 有寵於太后.
<미진부未珍夫>가 화랑이 되자 <모랑>을 부제로 삼았다. <모랑毛郞>은 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모랑毛郞>은 <지소>태후의 배다른 동생이다.
真興大王九年 太后命為三世風月主. 以慰南毛之霊.
진흥대왕 9년{548} 태후가 명하여 3세 풍월주로 삼아 <남모南毛>의 혼백을 위로하였다.
<남모南毛>는 <준정>이 투기하여 540년에 물에 빠져죽었다.
이로써 <지소>태후가 540년에 원화를 폐지하였다.
魏公 妻以女俊花 即二花郎之女兄也. 生一女俊毛而早卒 遂以二花郎継之.
<위화>랑이 그의 딸 <준화俊花>를 <모랑>의 처로 하였으니 곧 <이화二花>랑의 누나였다.
<모랑>은 딸 하나만 낳고 일찍 죽었다. 마침내 <이화二花>랑이 뒤를 이었다.
위화(준실) - 준화(535- )
이화(537-603)
賛曰 : 東城之美 魏花之婿 大王之子 太后之好
찬하여 말한다.
<동성東城>왕의 아름다움이요 <위화魏花>의 사위다. 대왕의 아들이고 태후의 사랑이다.
<모랑>은 백제 동성왕 <모대>의 외손자이고 법흥대제 <모진>의 아들이고 <지소>태후의 배다른 동생이다.
4. 4세 풍월주(556-561) <이화 二花(537-603) >
二花郎者 魏公之子也.
<이화二花>랑은 <위화>공의 아들이다.
위화(준실) - 이화(537- 603) <4세 풍월주(556-561)>
膚如玉膏眼如笑花善音律文章. 以十二歳能副毛郎公. 太后極愛之. 時黄華淑明松花等公主皆従公学公
피부가 옥과 같이 부드럽고, 눈은 미소 짓는 꽃과 같고, 음율과 문장을 잘 하였다.
12살에 능히 <모랑毛郞>공의 부제가 되었다. <지소>태후가 몹씨 사랑하였다.
이때 <황화黃華>, <숙명淑明>, <송화松花> 공주가모두 공을 따라 배웠다.
영실(지소) - 송화(539?- )
황화(541?- )
입종(지소) - 삼모진(534-576, 24대 진흥대제 재위 540-575)
태종(지소) - 숙명(543?-603)
以此得通. 淑明宮主 時太后欲専上寵 皆以公主奉之. 上以為其胞妹不甚愛 公主亦然. 公主之父乃苔宗公也.
時以上相為国柱石 上以此 不敢忽公主. 公主恃寵自蕩 及生太子封為皇后益無忌憚.
공은 이에 <숙명淑明>공주와 정을 통 할 수 있었다.
그때 태후는 왕의 총애를 홀로 받게 하고자 모든 일을 공주에게 받들게 하였는데
왕은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하여 매우 사랑하지는 않았다.
<숙명>공주 또한 그러하였다.
<숙명>공주의 아버지는 곧 <태종苔宗>공인데 그때 상상(上相)으로서 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신하였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하였다.
태자를 낳고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꺼림이 없었다.
삼모진(숙명) - 정숙貞肅
上素愛思道皇后 欲以其子銅輪公為太子 而不得
왕은 평소에 <사도思道> 황후를 사랑하여 그 아들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영실(옥진) - 사도(534- )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至是 淑明后与公相通益甚累為上見. 上欲廃之. 太后泣諫之 不得.
이에 이르러 <숙명淑明>후는 공과 더불어 정을 통함이 더욱 심하여졌고 여러번 왕에게 들켰다.
왕이 황후를 페하려 하자 태후가 울면서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上不幸淑明 而淑明自有娠乃与公 逃出. 群臣疑太子非上子 乃以銅輪公為太子.
왕이 <숙명淑明>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숙명淑明>은 스스로 임신하여 공과 더불어 도망하여 나갔다.
군신들이 태자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을 하였다. 이에 <동륜銅輪>공을 태자로 삼았다.
公雖有罪而有寵於太后且還為銅輪公一幸故思道皇后勧上力保 以安太后之心
공은 비록 죄가 있으나 태후에게 사랑을 받았고 또한 도리어 <동륜銅輪>공에게는 하나의 행운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사도思道>황후가 왕에게 권하여 힘써 보호하여 태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遂許淑明為夫婦 乃生 圓光 菩利 亦非天意乎.
마침내<숙명淑明>에게 허락하여 부부가 되게 하였다.
이에 <원광圓光>과 <보리菩利>를 낳았으니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開国五年 毛郎公 遊比斯伐 得疾途卒.
개국(開國)5년{555} <모랑毛郞>공이 비사벌(比斯伐)을 순시하다가 병을 얻어 도중에 죽었다.
비사벌은 지금의 경남 창녕이다.
郎徒乃願奉公. 時公 以太后寵 常居宮中 欲辞之. 郎徒曰 魏公之子不居而誰可居乎. 太后乃命居之 以為四世風月主 使巡郡県.
낭도들이 공을 받들기를 원하였다.
그때 공은 태후의 총애로 늘 궁중에 머물렀기에 사양하고자 하였다.
낭도들이 말하기를
" <위화>공의 아들이 앉지 않으면 누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에 명하여 오르게 하여 4세 풍월주로 삼고 군현을 순행케 하였다.
時 太后方娠 万呼娘主 故其産而行也.
그때 태후가 바야흐로 <만호萬呼>낭주를 임신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 출산을 기다려 떠났다.
진종(지소) - 만호(556- )
<이화>가 4세 풍월주가 된 것은 556년이다.
동륜(만호) - 백정(567-631, 26대 진평왕 재위 579-631)
<만호>는 진평왕 <백정>의 어머니로 556년에 출생하여 진평왕을 12살에 낳았다.
玉珍宮主之妹 曰金珍 亦魏女也.
<옥진玉珍>궁주의 동생은 <금진金珍>인데 또한 <위화>공의 딸이다.
위화(오도) - 옥진(505- )
금진(519- )
事法興大王無子. 大王崩 退居蚊上.
법흥대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다. 대왕이 죽자 문상(蚊上)에 물러나 살았다.
법흥대왕이 죽은 해는 540년이다.
南毛初害郎徒欲奉之 太后不許.
<남모南毛>가 처음 해를 당하였을 때 낭도들이 원화로 받들고자 하였으나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모진(보과) - 남모(524-540?)
법흥대제와 백제 동성왕의 딸인 <남모>가 <준정俊貞>의 유인에 빠져죽은 해는 법흥대제가 죽은 540년경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소>태후는 원화를 폐지하였다.
仇利知公潜通之 生兎含公. 極精妙
<구리지仇利知>공과 몰래 정을 통하여 <토함兎含>공을 낳았는데 극히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비량(벽화) - 구리지(519- )(금진) - 토함(545?- )
사다함(547-564)
새달(555?-603)
早属郎籍至是奉為副之.
일찍 낭적(郞籍)에 소속되었는데 이 때 부제로 삼았다.
太后召見宮中曰此児 不下比梁叔公 美過碧母 可賀得人.
태후가 궁중으로 불러 보고 말하기를
" 이 아이는 <비랑比梁> 숙부 보다 못하지 않고 아름다움은 <벽화> 숙모보다 나으니.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할 만하다."
라고 하였다.
公亦酷愛兎含公起居必同. 金珍娘主感而寿之
공 또한 <토함兎含>공을 심히 사랑하여 기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금진金珍>낭주가 고맙게 여겨 공을 축복하였다.
兎含公有弟斯多含公. 大有妙梁之風郎徒多帰之.
<토함兎含>에게는 동생 <사다함斯多含(547-564)>공이 있었는데
<묘량妙梁>의 풍모를 크게 가지고 있어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時有武官郎者亦有人望 多畜私徒 聞斯多含公 年少好義 求与相見 大悦曰
公子誠古之信陵孟嘗也. 願事之. 斯曰 我何敢有乎
乃帰于公. 公乃奏太后曰 兎含之弟斯多含 年未免艾 而自有郎徒殆所謂国仙者乎.
太后乃召宮中賜食問其懐人之道. 斯曰 愛人如己而已善其善而已
太后奇之 言於大王 以為貴幢 以掌宮門. 其徒千人莫不尽忠.
이때 <무관武官>랑이 있었는데 또한 인망이 있어 사도를 많이 거느렸다.
<사다함斯多含>공이 나이는 적으나 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청하여 서로 보고 크게 기뻐 말하기를
" 공자는 실로 옛날의 <신릉信陵>과 <맹상孟嘗>이니 섬기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니
<사다함斯多含>이 대답하기를
" 제가 감히 어찌 거느리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래서 <무관武官>랑은 공에게 귀의하였다.
공은 이에 태후에게 아뢰기를
" <토함兎含>의 아우 <사다함斯多含>은 나이가 아직 장년에 이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낭도를 거느렸으니 자못 국선(國仙)이라고 이를 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에 궁중에 불러 음식을 내리며 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을 물으니 <사다함斯多含>이 말하기를
" 사람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할 따름입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좋다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왕에게 말하여 귀당(貴幢)을 삼아 궁문을 관장케 하였다.
그 낭도 천 명도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전국시대의 4公子 : 제의 <맹상孟嘗>君, 조의 <평원平原>君, 위의 <신릉信陵>君,초의 <춘신春申>君을 말한다.
時比助公子文弩亦豪傑善撃劍.
이때 <비조比助>공의 아들 <문노文弩> 역시 호걸로 격검을 잘하였다.
비조(문화) - 문노(538-606)
公使斯多含学劍于文弩. 弩曰劍是一人敵何用高貴知
公曰不敵一人則安能敵万人乎 此児好侠雖曰多衆不無其敵汝其保之.
文弩乃以其徒五百随之 其威盛於兎含
時. 銅輪公漸長大王憂輔導之無人使兎含輔之. 兎含曰是吾職也.
공은 <사다함斯多含>으로 하여금 <문노文弩>에게 검을 배우게 하였다.
<문노文弩>가 말하기를
" 검은 곧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한 사람을 대적하지 않으면 곧 어찌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는 호협을 좋아하니 비록 무리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네가 그를 보호하라." 라고 하였다.
<문노文弩>가 이에 낭도오백으로 따르니 그 위세가 <토함兎含>보다 컸다.
그 때 <동륜銅輪>공이 점차 장성하였는데 대왕이 보익하는 사람이 없음을 염려하여
<토함兎含>으로 하여 보익하도록 하였다.
<토함兎含>이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임무이다." 라고 하였다.
乃以花郎之位辞其弟公
이에 화랑의 지위를 그 아우에게 넘겨 주었다.
乃以斯多含為副. 愛之如兎含
공은 이에 <사다함斯多含>을 부제로 삼았는데 그를 사랑함이 <토함兎含>과 같았다.
時人賀公得人 未幾加耶反斯多含請従軍得勝.
그때 사람들이 공이 인재를 얻었음을 축하하였다.
얼마 있어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다함斯多含>이 종군을 청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公乃以主位譲之乃与兎含公 専務宮中 輔養太子於糸盛矣. 公之清徳栄名万世不絶
공은 이에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주고 <토함兎含>공과 더불어 오로지 궁중에서 태자를 보양(輔養)하는데 힘썼다.
아! 성대하다.
공의 맑은 덕과 영화로운 이름은 만세에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사다함이 풍월주가 된 해는 562년이다.
이때 <이화> 26세, <문노> 25세, <사다함> 16세이다.
公与淑明公主 出居永興寺 専心仏道.
공은 <숙명淑明>공주와 더불어 영흥사(永興寺)에 나가 살며 불도에 전심하였다.
太后亦為之帰依粛 太子亦落彩受戒.
태후 또한 뒤따라 귀의하였고 <정숙貞肅>태자 또한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았다.
公子 圓光法師 淑明公主所生也.
공의 아들 <원광圓光>법사는 <숙명淑明>공주 소생이다.
受娠時公主慕公不能自抑恐有禍而欲自殺. 忽有金仏来告曰 我乃薬師仏也 欲借公主之腹而居之.
公主乃?其前 而合掌拝礼 仏乃抱公主 而臥?若入之.
時公亦慕公主不禁 乃犯宮中 見公主仰臥若失抱 而問故 乃喜曰 是乃仏力也.
交歓生之果大聖如来也. 淑明又生公二女曰花明玉明皆入真平大王後宮.
임신할 때 공주는 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화가 공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자살을 하려 하였다.
갑자기 금불(金佛)이 와서 고하기를
" 나는 약사불(藥師佛)인데 공주의 배를 빌려 머물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공주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 배례하니 부처가 공주를 안고 엎드려져 마치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때 공 또한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고 궁중으로 침범하였는데
공주가 바로 누워 마치 품고 있는 것을 잃은 것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부처의 원력이다."라고 하였다.
기쁨을 나누고 <원광圓光>을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大聖如來)이다.
<숙명淑明>은 또 공의 두 딸을 낳았는데 <화명花明>과 <옥명玉明>이다.
모두 진평대왕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이화(숙명) - 원광(560?- )
화명(564?- )
옥명(566?- )
보리(573- )
<필사본 화랑세기>
당시 공보다 더한 미남자는 없었다.
건복(建福)7년(600) <원광>이 신라로 돌아왔다.
공은 주위를 넘겨주고 <숙명> <새달>과 더불어 제손(諸孫)을 거느리고 국내의 승지(勝地)를 두루 돌아다녔다.
하루는 조용히 공주에게 말하기를
"신은 공주와 더불어 시측(侍側)한 지 40년이고 어수(魚水)의 낙이 지극한 까닭에
태후와 대왕을 따라 옥경(玉京)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공주가 말하기를 " 낭군이 향하는 바를 첩은 마땅히 따라야지요" 하였다.
마침내 나란히 누워 죽었다. <새달> 역시 따랐다. 때는 건복(建福) 20년(603) 3월이었다.
애공사(哀公寺) 북쪽 <지소>태후 능에 장사 지냈으니 유명(遺命)이었다. 아! 성대하다.
공의 한마디 말은 백세의 사표(師表)이다. 공은 말이 적었고 정행(淨行)을 하였다.
송(宋)의 <다도多道>태후가 화랑을 많이 거느리고 여러번 사랑하여 .....가 말하기를
누이가 욕심이 많아 낭郎이(면치 못하였다. ....공은 태.... ....후가) 술로서 머물게 하여 장차 ... 하려 하였다.
태후는 또 .... 지켰다. 지금 왕 ... 신은 마땅히 신궁(神宮_에서 발원하여... 그런즉 맹세하여 얻지 못하여 ....
궁은 무릇 17....신에게 고하여 ... 좌우 공... 지엄하게 거하여 ... 위에...공의 일족의 무리가 공을 다시 세우려 하였다,
공이 궁중의 뜻을 알고 마침내 ...응하였다. 공의 충직함이 이와 같았다.
圓光之弟菩利 娶粛太子女万竜生礼元角干即予祖也.
<원광圓光>의 동생 <보리菩利>는 <정숙貞肅>태자의 딸 <만룡萬龍>에게 장가들어
<예원禮元> 각간을 낳으니 나의 할아버지이다.
정숙(만호) - 만룡(579- )(보리) - 예원(607-673)(우야) -오기(운명) - 대문
公又娶兎含公妹生庶子七人皆貴
공은 또 <토함>공의 여동생 <새달塞達>에게 장가들어 서자 7명을 낳았는데 모두가 귀하게 되었다.
賛曰 : 二花風流 鶏林清談 華冑宝眷 聘王公主 金仏来依 薬師如来 花郎之門 法師之親 振振公族 万世無窮
찬하여 말한다.
<이화二花>의 풍류는 계림(鷄林)의 청담(淸談)이라
귀족의 자손이 공주에게 장가들고 금불(金佛)이 와서 의지하니 약사여래라.
화랑의 가문이고 법사의 친족이니 위엄있는 공족(公族)이여, 만세에 무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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