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

화랑세기(花郞世紀) 完譯(3)

지보고 2023. 12. 4. 18:05

 

7. 7세 풍월주(572-578) <설원薛原 (549-606)>

 

薛花郎初名薛原郎 金珍娘主之私子也

<설화薛花>랑은 처음 이름이 <설원薛原>랑이다.  <금진金珍>낭주의 사자(私子)이다.

 

其父薛成以郎徒美貌善媚為仇利知竜陽臣 仍通于娘主而生也

그 아버지인 <설성薛成>은 낭도로서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구리지仇利知>의 용양신(龍陽臣)이 되었다.

이에 낭주와 사통하여 <설원>랑을 낳았다.

 

구리지(금진) - 사다함(547-564) <5세 풍월주(562)>

설성(금진) - 설원(549-606) <7세 풍월주(572-578)>

 

美風采善玉笛而出微之故郎徒無奉意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玉笛)을 잘 불었으나 출신이 한미하여 낭도들이 받들 생각이 없었다.

 

而美室以上寵号令郎徒 故郎徒不敢多言 乃為七世風月主

그런데 <미실>이 임금의 총애로써 호령하여 낭도들을 예속시켰다.

낭도들은 감히 여러 말을 못하였다. 이에 7세 풍월주가 되었다.

 

以美室為副原乃屈折下士散財懐人郎徒咸服之而猶有未洽

<미실>은 늘 진귀한 하사품을 보내 주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 너와 낭도를 잘 타일러 보겠다" 라고 하였다.

<설원>은 이에 몇 명을 얻어 심복으로 삼았다.

7세 풍월주가 됨에 이르러 <미생>을 부제로 삼고 아랫 사람에게 몸을 굽히고

재산을 풀어 주어 사람을 위로하니 낭도들이 모두 복종하였으나 아직 미흡함이 있었다.

 

美室乃勧原娶毛郎公寡妻俊華娘主 娘主時年三十八寡居十八年

<미실>은 이에 <설원>랑에게 권하여 <모랑毛郞>공의 과처(寡妻)인 <준화俊華>낭주를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낭주는 그 때 나이가 38살이었고 과부로 산 지 18년이었다.

 

复得花郎為夫遂生子薛雄

다시 화랑을 얻어 지아비로 삼아 마침내 아들 <설웅薛雄>을 낳았다.

 

於是諸徒賀之曰魏公之孫 無复有不服之人

이에 여러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 위화랑공의 손자이다." 라고 하였다.

다시 불복하는 사람이 없었다.

 

위화(준실) - 준화(535- )

설원(준화) - 설웅(573?- )

 

<설웅>을 낳았을 때 <설원> 25세, <준화> 39세이다.

 

原乃与美室相通益無忌憚 俊華知之而不能禁

<설원>랑은 평소 <미실>과 더불어 사통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더욱 꺼리고 삼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준화>가 이를 알았으나 금할 수 없었다.

 

<설원>은 <미실>보다  2살 어리고 <세종>은 <미실>보다 2살 많다.

 

先是俊華女俊毛因美室得通于銅太子 至是又欲金太子

이에 앞서 <준화>의 딸 <준모俊毛>가 <미실>을 통하여 <통륜>태자와 사통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금륜>태자에게 몸을 바치려고 하였다.

 

모랑(준화) - 준모(550?- )

 

薛原沮之曰 事銅太子之事聖上知之今 又納金太子則上知之則必不悦于吾夫妻矣 俊華曰郎君之言善矣

<설원>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 <동륜>태자를 섬긴 일을 성상(聖上)이 아는데 또 <금륜>태자에게 바친 것을 알면

반드시 우리 부처(夫妻)를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니

<준화>가 말하기를 " 낭군의 말이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乃名俊毛為尼毛不肯

이에 <준모>에게 명하여 여승이 되게 하였으나 <준모>는 따르지 않았다.

 

原乃誘以通之歳余有娠 俊華知之怒曰 沮納太子而自私之是何道乎

<설원>랑이 꼬여 정을 통하였는데 1년 정도 지나 임신을 하였다.

<준화>가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 태자에게 바치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가 갖는 것은 무슨 도리인가?"라고 하였다.

 

原乃求乞于美室 美室乃使美生娶之 而事平

<설원>랑은 이에 <미실>에게 구걸하였다.

<미실>은 <미생>에게 <준모>를 아내로 맞도록 하여 일이 평온하여 졌다.

 

俊毛乃生薛原女于美生名美毛郎徒不知之

<준모>는 곧 <미생>에게 가서 <미모美毛>라는 이름의 <설원>랑의 딸을 낳았는데 낭도들은 알지 못하였다.

 

설원(준모) - 미모(575?- )

 

時文弩一派従世宗于外有戦功 而不得位不服於薛原郎 自立一門於是郎徒遂分

그 때 <문노> 일파가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직위를 얻지 못하여 <설원>랑에게 불복하고 일문(一門)을 스스로 세웠다.

이 때에 낭도들이 마침내 나뉘었다.

 

薛派以為正統在我而文波以為清議在我互相上下美室憂之使世宗和之不得

<설원>랑의 파는 정통(正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고

<문노>의 파는 청의(淸議)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며 서로 상하를 다투니

<미실>이 걱정을 하여 <세종>에게 화합하도록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而真興大王崩 美室雖有寵於新主 而未若知道夫人

그런데 진흥대왕이 죽자 <미실>이 비록 새로운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지도知道>부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知道之父起烏公 与文弩為従兄弟 故知道素服於文弩

<지도知道>의 아버지 <기오起烏>공은 <문노>와 종형제(從兄弟) 간이었다.

그러므로 본래 <지도>는 <문노>를 따랐다.

 

호조(선혜436-501) -비조부(494- )(문화) - 문노(538-606)

홍기(선혜436-501) - 기오(499- )(홍도) - 지도(555?- )

<기오>와 <문노>는 종형제가 아니고 <기오>는 <문노>의 삼촌 뻘이다.

<문노>와 <지도>는 <선혜>의 손자와 손녀이다.

 

乃勧王立文弩為国仙以秘宝郎副之

이에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으로 삼고 <비보>랑을 부제로 삼았다.

 

<문노>가 풍월주가 된 해는 579년 진평대제 원년이다.

 

文弩之徒好武事多侠気 薛原之徒善郷歌好清遊 故国人指文徒為護国仙指薛徒為雲上人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다.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 하고 유람을 즐겼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문노>의 낭도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 하였고

<설원>랑의 낭도를 가리켜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다.

 

骨品之人多従薛徒草沢之人多従文徒互相磨義為主

골품이 있는 사람들은 <설원>의 낭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草澤)의 사람들은 <문노>의 낭도를 많이 따랐다.

서로 의(義)를 갈고 닦음을 주로 하였다.

 

真智大王以美室之故得立而好色放蕩

진지대왕은 <미실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思道太后憂之乃与美室議廃之 乃使弩里夫公行之 弩里夫公乃思道之兄也

<사도>태후가 걱정을 하다가 이에 <미실>과 폐위 할 것을 의논하였다.

<노리부>공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였다. <노리부>공은 곧 <사도>의 오빠이다.

 

영실(사도미) - 노리부(525- )

영실(옥진) - 사도(534- )

 

与美室之夫世宗公将挙大事恐文弩之徒不服以太后命合両徒為一

<미실>의 남편인 <세종>과 더불어 장차 대사를 일으키려 할 때

<문노>의 낭도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태후의 명령으로 두 개의 낭도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

 

复奉美室為源花 世宗為上仙 文弩為亜仙 薛原秘宝為左右花郎 美生為前方花郎以鎮之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우 봉사화랑, <미생>을 전방 봉사화랑으로 삼아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以此文弩之徒多以微賎之人擢為高官 草沢之人降順之徒以為出身之門而奉文弩如神

이로써 <문노>의 낭도는 미천한 사람으로 고관에 발탁되는 사람이 많았다.

민간의 사람과 투항하고 귀순한 무리는 출세하는 문으로 삼았기에 <문노>를 신과 같이 받들었다.

 

美室乃知薛原之不及文弩乃命薛原師事文弩

<미실>은 이에 <설원>랑이 <문노>에 미치지못하는 것을 알고

<문노>로써 선도의 스승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리고 <설원>랑과 <미생>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薛原之徒多有不平原曰寵主之命不可抗也乃屈服事之

<설원>랑의 낭도 중에 불평하는 자가 많았으나 <설원>이 말하기를

" 총주(寵主){미실}의 명을 거역힐 수 없다."라고 하므로 무릎을 굽혀 섬겼다.

 

以此文弩之徒亦善服於薛原 美室喜之使譲其位於文弩

이로써 <문노>의 낭도 또한 <설원>에게 기꺼이 복종하였다.

<미실>이 기뻐하며 그 직위를 <문노>에게 물려 주도록 하였다.

 

文弩曰国仙不下風月主且子為我弟既有以師受弟乎

이에 <문노>가 말하기를

" 국선(國仙)은 풍월주(風月主)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한 그대는 나의 아우인데

어찌 스승으로 아우에게 받을 수 있는가?" 라고 하니

 

<문노>는 <설원>보다 11살 나이가 많다.

 

薛原曰国仙雖是前王所立非風月正統也且世宗殿君以王子之貴尚継斯多含公?

我奉事師兄以美室宮主之命也今宮主又命譲位故不敢背也

<설원>이 말하기를

" 국선이 비록 전 왕{진지}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의 정통은 아니다.

또 <세종>전군이 왕자의 귀함으로 오히려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으니

하물며 내가 사형{문노}을 받들어 섬긴 것은 <미실>의 명이 있었던 까닭인데

지금 <미실> 궁주가 다시 양위를 명하므로 감히 거역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文弩曰宮主既有命則臣亦何敢反乎乃継之

<문노>가 말하기를

" 궁주가 이미 명령했는데 신 또한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뒤를 이었다.

 

화랑의 법에는 후계자가 전주(前主)에게 하배(下拜)를 올리고 칭신을 한다.

양위하는 날 <미실>과 더불어 <세종>이 수레를 같이 타고 이르렀다.

<설원>랑이 옷을 갖추어 입고 인부(印簿)와 검장(劒仗)을 받들어

<미실>과 <세종>에게 바치고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으로 <세종>에게 절하고 물러났다.

이때 <세종>이 <미실>에게 묻기를

" <문노>는 <설원>에게 도맥(道脈)으로는 스승이고 통맥(統脈)은 아우인데 어느 자리에 앉아야 마땅한가?" 라고 하였다.

<미실>이 말하기를

" <설원>은 나의 총신(寵臣)이고 또 정통(正統)의 형입니다.어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명하여 <미실>의 옆에 앉도록 하였다.

<문노>가 옷을 갖추어 입고 무릎으로 걸어 나아가서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에 <세종>에게 절하고,

다음에 <설원>에게 절하고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자질이 없다." 라고 하며 사양하였다.

<미실>이 이에 인부(印簿)를 주며 말하기를 " 네 형{설원}을 욕되게 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문노>가 인부(印簿)를 받았다. <세종>이 이에 부서(簿書)를 주고 <설원>이 검장(劒仗)을 주었다.

옛날에는 반드시 공주 중 혼인하지 않은 자를 택하여 인부(印簿)를 전하였다.

이에 이르러 <미실>이 천지인(天地人)의 삼재지법(三才之法)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그 이후 <문노>는 <설원>에게 하배를 하고 칭신을 하였다.

<미실>이 듣고 기뻐하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굽히게 한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니

<설원>이 절하여 감사드리며 말하기를

" 신의 머리카락 하나의 살갗 하나도 총주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건원(建元)14년(549)에 태어나서 건복(建福)23년(606) 7월에 죽었다.

그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서 슬퍼하여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말하기를

"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때 나이가 58세였다.

공은 5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있었다.

정궁부인 <준화>낭주는 장자인 <설웅薛雄>, 차자인 <잉피仍皮>, 적녀인 <정금淨金>낭주를 낳고 죽었다.

 

설원(준화) - 설웅(573?- )

                    잉피(575?- )

                    정금(577?- )

 

미실궁주가 <개원開元>낭주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아들 <충죽忠竹>과 <선죽善竹>을 낳았고

딸 <개암開岩>과 <개천開川>, <선월善月>, <양월良月> 6명을 낳았다.

 

설원(개원) - 충죽

                    선죽

                    개암

                    개천

                     선월

                     양월

 

<미실>궁주가 낳은 <난야蘭若>는 진평대제를 모시어 <우야雨若>공주를 낳고

<미실>궁주가 낳은 <보종宝宗>전군은 공의 소생으로 되었다.

 

설원(미실) - 난야(572?- )

                    보종(580- )

 

<우야雨若>공주는 곧 나의 조모이시다.

 

백정{진평대제}(난야) - 우야(예원) - 오기(운명) - 대문

 

<잉피仍皮>는 <원효元曉>의 할아버지이다.

 

잉피(?) - 담날(녹주) - 원효(617- )

 

설씨는 이 때에 크게 창성하였다.

 

賛曰美室之臣仙花之始托于仏門以令其美盛矣清名長在青史終始一忠開天福祉

찬하여 말한다.

<미실>의 신하이고 선화(仙花)의 시작이다.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훌륭하도다! 깨끗한 이름은 청사(靑史)에 길이 남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인 충성은 하늘의 복을 열었다.

 

<世系>

아버지는 <설성>공이며 그 출신을 알지 못한다. 그 선조는 고야촌장 <호진虎珍>공의 후손이다.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어머니는 빼어난 미녀로서 일찍이 남도(南桃)에서 유화(遊花)로 있었는데

우연히 좋은 낭도를 만나 상통하여 잉태를 하였는데 그대로 서로 헤어졌다.

공이 자라서 화랑의 놀이를 좋아하여 매일 냇가에서 아이들과 화랑의 놀이를 익혔다.

<구리>공이 지나다가 그것을 보고 그 아이의 생김새를 기특하게 여겨 불러 그 집을 물었더니 곧 한 작은 민가였다.

그 어머니는 천복(賤服)을 입고 보리를 찧고 있었다. 맨발을 손으로 가리며 감히 쳐다 보지 못하였다.

<구리>공이 가까히 가서 위로하며 그 남편에 대하여 물었다.

목이 메어 울며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절구공이를 적시었다.

한참 후에 " 첩은 나이 16살에 유화로서 좋은 낭도를 만나 한번 관계를 가져 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관계를 가질 때 그 낭도가 말하기를 부모에게 물어서 결혼을 하는데, 다만 출정을 하면 3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습니다.

첩은 따르지 않고 무릇 14년 동안 믿음을 지켰습니다. 부모 또한 죽고 모자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구리>공이 " 너는 아직 나이가 적은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고 스스로 고생을 하는가?" 하니

그 어미가 말하기를 " 30살된 여자가 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직 아이가 자라는 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다.

<구리>공이 다시 " 너를 보니 천한 옷은 비록 더럽지만 얼굴이 수려하며 살결이 부드럽고 희니

더러운 곳에 있을 인물이 아니고 마치 먼지더미에 있는 백옥과 같아서 도리어 사랑할 만 하다.

네가 말한 좋은 낭도는 그 아름다움이 나와 비교하여 어떤가?" 하니

어미가 말하기를 " 귀인께서는 농담하지 마십시오. 첩의 추함이 어찌 감히 고귀한 분을 평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좋은 낭도라는 사람 역시 평범한 낭도에 불과하니... 귀인과 비교하여 만 분의 일이라도 되겠습니까? 하였다.

<구리>공이 " 나는 ... 그 좋은 낭도인 즉 그 낭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내가 마땅히 ....라 " 하니

.... " 귀하신 분이 어찌 농담을 하십니까? 첩은 이것이 무엇... 그 낭도가 살았다면 반드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지 않은 것이 오래된 것은 ....정征에서 죽은 것입니다. 첩은 기다리지 않은 지 오래됩니다." 하였다.

<구리>공이 말하기를 " 오늘은 곧 너의 길일이다. 보리밥을 지어 올 수 있는가?" 하니

어미가 기뻐 말하기를 " 천한 음식을 받들어 올리기에 부족하지만 감히 명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공이) 한 상에서 야채로 된 음식을 다 먹고 말하기를 " 우리 부인의 음식이 심히 맛있다." 하였다.

마침내 이끌어 사랑을 하려고 하니 어미가 간하여 멈추게 하며

" 첩은 몸을 깨끗히 한 지 14년이 되었습니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범하고자 하였는데 첩의 의지와 기개를 굴복시키기 어려워 서로 경게하여 보호하여준 까닭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것을 그르치면 마을의 무뢰한 자들이 당연히 ....이르면

내일 어떤 놈의 소유가 될 지 모릅니다. 이와같이 되면 모자의 관계는 끊어집니다.

귀한 분이 비록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감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불쌍히 여겨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구리>공이 웃으며

" 나는 곧 <비량比梁>공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를 첩으로 삼는데 감히 누가 나를 범하겠는가?" 하니

어미가 크게 놀라 " 뜻하지 않게 오늘 이같이 큰 경사가 있습니다. 첩은 감히 여러 말을 않겠습니다.

바라건데 우리 어르신 스스로 좋을대로 하십시오" 하였다. 곧 목욕을 하고 사랑을 받았다.

<구리>공은 새로운 집을 짓고 그 향(鄕)을 봉하여 주었다.

향인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그 향을 대행(大幸)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하여 <설성>공은 <구리>공의 신하의 지위를 얻었다.

<구리>공은 그 출신이 한미한 것을 염려하여 급간 <설우휘薛優暉>의 가문에 소속시켜 벼슬길을 열고 ㅁ知로 발탁하였다.

<구리>공이 <금진>낭주와 사통하게 되자 <설성>공은 그 사이에서 명을 받들었다.

<금진>낭주가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몰래 사통하였다. 

<구리>공이 전쟁에서 죽자 곧 더불어 함께 살아 공을 낳았다.

<설성>공의 어머니 또한 <구리>공의 서자 3인을 낳았다.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금진>의 아버지는 <위화>랑이고 어머니는 <오도>낭주이다.

<오도>의 어머니는 <선혜>황후이고 아버지는 <묘심>랑인데 곧 <천주天柱>공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답고 색사를 잘하여 후궁들과 더불어 상통을 많이 하였다.

<선혜>황후가 복을 빌러 절을 찾아 법에 따라 약속하여 .... 삼생三生.....<묘심>이 복주(伏誅)되었다.

<선혜>황후는 진골정통으로 ....제주(祭主)로 삼았다.

<묘심>랑이 ...에서 먼저 나오고.....남해왕의 종자(從子)의 후손이다.
 

 

※ 미실(547-616?)의 자녀

 

미실(세종) - 하종(564- )

                    옥종(574?- )

미실(동륜) - 애송(566- )

미실(삼모진) - 반야(568?- )

                       수종(572?- )

미실(설원) - 난야(570?- )

                    보종(580- )

미실(금륜) - 후실(576?- )

                    비담(578?- )

미실(백정) - 보개(582?- )

                    보화(584?- )

미실(제문) - 보림(586?- )

                    애함(588?- )

 

<제문帝文>은 법흥대제 <모진>의 손자이다.

모진(백란) - 란공(유문) - 제문

 

 

 

8. 8세 풍월주(579-582) <문노文弩(538-606)>

 

文弩者比助夫公子也 母曰加耶国文華公主也

<문노文弩>는 <비조부比助夫>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文華>공주이다.

혹은 <문화文華>공주는 야국 왕이 바친 여자라고 한다.

<호조好助>공기에는 북국왕녀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라고 말하였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비조부(문화) - 문노(538-606) <8세 풍월주(579-582)>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북으로 하였는데 <이뇌>를 북국 왕으로 삼고

<양화兩花>공주로 처를 삼았으며 <청명靑明>은 남국 왕으로 삼았다.

 

눌지(혜밀) - 청화(457-524)(찬명) - 청렵(476- ) <눌지의 외손녀>

                                                       찬실(479- ) <눌지의 외손자>

눌지(혜밀) - 청화(457-524)(성명) - 청명(483- ) 남국왕 <눌지의 외손자>

                                                       청렵(성국) - 이뇌(494- ) 북국왕 <눌지의 증외손자>

                                                       찬실(野女) - 문화(500?- )

 

얼마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인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 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컨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것이다.

처음에 <호조>공의 첩이 되었는데 <비조부>공과 더불어 몰래 사통하여 공을 낳았다.

 

自幼善撃劍好義気 及加耶反斯多含請同行

공은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 하였고 의기(義氣)를 좋아하엿다.

가야가 반기를 들자 <사다함>이 동행을 청하였다.

 

弩曰安有以母之 困其外朝之民者乎遂不行

<문노>가 말하기를

"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내 가지 않았다.

 

国人有非之者斯多含曰吾師義人也 及入加耶戒妄殺以報其意

나라 사람 중에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말하기를 " 나의 스승은 의인(義人)이다." 라고 하였다.

가야에 들어가서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주의를 주어 그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를 잇자 그 낭도가 그에게 속하였다.

 

앞서 <호조>공이 가야의 일을 잘하여 자주 사신으로 갔다.

 

<비조>공 역시 그 뒤를 이었는데 공을 세워 <청화靑華>공주의 딸 <청진靑珍>공주에게 장가 들었다.

 

호조(선혜) - 비조(494- )

모진(청화) - 청진(495- )

 

<청진>공주가 법흥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비조>공은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 권세가 일곱 총신과 더불어 막상막하였다.

<비조>공은 형세를 잘 엿보아 몰래 <영실>공을 따랐으며 신하로서 섬겼다.

 

수지(보현) - 영실(498?- )

 

건원 2년(537) 제가 장차 <영실>공을 부군으로 삼아 왕위를 넘겨 주려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비조>공을 병부령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총신 중에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아 일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지소>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비조>공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모진(보도) - 지소(515- )

 

<비조>공은 이에 <영실>공과 더불어 물러나 머무는 곳에서 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이화>공이 공을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말하기를

" 천자에게 아직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신하가 있는데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풍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입니다." 라고 하였다.

 

개국(開國)4년(554) 공이 17세에 <무력武力>을 따라 백제를 쳤다.

 

구형(개화) - 무력(524- )

 

이때 백제는 위덕왕 원년이다.

 

공이 있었는데 보답을 받지 못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5년(555) 북한산에 나가 고구려를 쳤다.

 

이때 고구려는 양원대제 11년이다.

 

7년(557) 국원에 나가 북가야를 쳤다.

 

이때 북가야는 찬실의 아들 도설지(524- )33년이다.

 

모두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부하 중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위로하여 말하기를

"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 주시오." 라고 하였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공이 이에 굽혀 섬겼다.

 

<세종>은 이에 진흥제에게 말씀을 드려 이르기를

" <비조부>의 아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데 여러번 공이 있었으나

어미로 인하여 영달하지 못하였으니 나라를 위하여 아까운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진흥제가 이에 급찬의 직위를 내렸는데 받지 않았다.

 

낭도 중에 <금천金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백운白雲>과 <제후際厚>를 위하여 사사로이 사람을 죽였다.

 

조정에서 벌주려고 하자 <세종>공이 이르기를

"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상은 가하나 벌은 불가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작위를 주어 기렸다.

 

이로써 공의 낭도들이 많이 <세종>공에게 귀의하였다.

 

<사도>황후 역시 이름을 듣고 몰래 도우며 이끌어 자기 편을 삼았다.

 

<세종>공이 출정하자 북한산에 따라가 고구려병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미실>궁주가 불러서 봉사로 삼으려 하였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진지가 즉위하자 <지도>황후가 일을 꾸미고 발탁하여 일길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세종이 <사도>의 밀조(密詔)를 받고 공과 의논하여 진지가 폐위됨에 이르러

공은 아찬으로 진급했고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직위를 얻게 되니 곧 8세 풍월주였다.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 처럼 하였으며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

사풍(士風)이 이로써 일어나 꽃피었다.

통일 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때에 낭도의 부곡(部曲)을 두었다.

좌우봉사랑을 좌우대화랑으로 만들고 전방봉사랑을 전방대화랑으로 만들어서 각기 3부(部)의 낭도를 거느리게 하였다.

또 진골화랑, 귀방화랑, 별방화랑, 별문화랑을 두었고

12.3살의 빼어난 진골 및 대족(大族)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삼았다.

좌화랑 2인 우화랑 2인을 두었으며 각기 소화랑 3인 묘화랑 7인을 거느렸다.

좌삼부는 도의, 문사, 무사를 맡았고, 우삼부는 현묘, 악사, 예사를 맡았으며 전삼부는 유화, 제사, 공사(供事)를 맡았다.

이에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졌다.

3년간 재위하고 <비보>랑에게 전하였다.

공은 오랫 동안 아내를 맞지 않았다.

국선이 됨에 이르러 <윤궁允宮>낭주를 받들어 내원(內援)으로 삼았다.

윤궁은 황종공{거칠부}의 딸이다.

그 어미는 곧 미진부공의 친누이였으니 미실공주와는 종형제간이 되었다.

 

아시(삼엽) - 미진부(묘도) - 미실(547- 616?)

아시(삼엽) - 말보(황종) - 윤궁(548-606)

아시(삼엽) - 실보(비대) - 비보(549- )

 

함께 <동륜>태자를 섬겨 <윤실允實>공주를 낳았다.

과부로 5년을 살았다.

 

동륜(윤궁) - 윤실(568?- )

 

홍제(鴻濟)5년(576) 10월 공이 <지도> 황후의 명으로 국선이 되고 <윤궁>을 받들어 선모(仙母)로 삼았다.

 

문노가 국선이 된 때는 41살인 진지대제 원년 576년이고

풍월주가 된 때는 44살인 진평대제 원년 579년이다.

 

이에 앞서 공이 <세종>공을 모시고 출정했다가 돌아왔다.

<세종>공은 공이 아내를 맞지 않는 것을 근심하였다.

<미실>이 말하기를

" 나의 동생인 <윤궁>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데,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 라고 하였다.

<윤궁>이 듣고 말하기를

" 그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位品)을 논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 또한 듣고 기뻐하였다.

공의 부제 <비보>랑 또한 <윤궁>과 종형제였는데

공을 위하여 공을 계부(繼夫)로 맞이하도록 힘써 <윤궁>에게 권하였다.

공이 장차 크게 기용되려 하자 <윤궁>의 뜻이 자못 기울었다.

공이 말하기를

" 우리 낭주가 아니면 선모는 없으니 내가 국선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라고 하니

<윤궁>이 말하기를

" 내가 군을 그리워한지 오래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을 더럽힌다고 해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선모의 귀함입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 사람들이 나에게 국선이 영예롭다고 하나 나는 스스로 선모의 영예를 가집니다." 라고 하였다.

<윤궁>은 이에 공에게 몸을 허락해 3자와 3녀를 낳았다.

<대강大剛>, <충강充剛>, <금강金剛>이라 하였다.

윤궁은 밖으로는 비록 선모였으나 안으로는 실제 부인이 되어 공의 일을 힘써 도왔다.

공이 평소에 <미실>과 맞지 않았다.

이에 <윤궁>이 간하기를

" 군은 <세종>전군의 신하인데 <미실>공주를 반대함은 옳지 않습니다.

전군이 궁주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군이 나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군의 낭도가 만약 군을 옳다고 하고 나를 그르다고 하면 군은 어떻겠습니까?" 라고하니

공이 말하기를

" 선모는 궁주와 같이 잘못이 없으니 낭도들이 어찌 비난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윤궁>은 이에 힘써 <미실>의 잘못을 감싸며 말하기를

" 사람이 모두 장단과 과실이 있는 것은 형세가 부득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이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어서 오직 강철같은 심장만을 법으로 삼고

처자의 즐거움이 없는 것은 세상과 통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군의 아들을 가졌는데 군이 한 마음으로 뜻을 굳게 지키고

권문에 거스른다면 이 뱃속의 아이는 장차 어떤 처지에있겠습니까?

아이의 좋은 아버지로서 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 나는 의지와 기개로 선모를 받든는데 선모는 세상일로 나를 감싸는 것입니다.

자손은 사사로움입니다.

정이 사사로이 행해지게 되면 의리가 감추어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나의 선모가 신에게 허락한 뜻은 가히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낭도의 무리를 배신할지언정 선모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야 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윤궁>은 웃으며 말하기를

" 정(情)이 아니면 군과 내가 어찌 색사(色事)로써 서로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情)은 지(志)에서 나오니 세 가지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 정은 의가 되고 큰 사사로움은 공(公)이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무리에게 사사롭지 않으면 무리를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군은 어찌 일찍이 사사로움이 없겠습니까?

군과 더불어 동침한 밤에 나는 대철우(大鐵牛)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호랑이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그대의 영웅스러움으로서 어찌 좋은 씨앗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대중 또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남의 자식은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 자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자기를 손상시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사사로움에서 나옵니다.

군과 더불어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情)의 순수함입니다.

무리들이 군에게 의지하는 것은 정(情)이 섞인 것입니다.

청컨대 내 아이의 좋은 아버지가 되어 나의 말을 들어 주시오" 라고 하였다.

공이 크게 깨달아서 말하기를

" 선모는 진실로 성인입니다.신은 어리석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공은 굽혀 <미실>을 섬기고 <설원>을 받아들여 주었다.

과연 <대강>을 낳았는데 후에 재상에 이르렀다.

<충강> 역시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금강>은 가장 귀하게 되어 백성과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금강>은 태종 무열왕 2년(655) 정월에 이찬으로 상대등이 되었다.

<금강>을 이어 태종 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상대등은 군신회의인 대등회의의 의장으로 가장 높은 관직이다.

 

<윤강允剛>, <현강玄剛>, <신강信剛>은 모두 귀한 집안에 시집가서 영화롭고 귀하게 되었다.

 

문노(윤궁) - 대강(578?- )

                    충강(580?- )

                    금강(582?-660)

                    윤강(584?- )

                    현강(586?- )

                    신강(588?- )

 

<윤궁>의 말이 과연 들어 맞았다.

공은 <대강>을 낳고 사사로운 정이 진실됨을 더욱 크게느끼고 모든 일을 번번이 <윤궁>에 물어서 행하였다.

혹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 라고 하면

공은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 나도 지난날 전군이 궁주의 말을 따르는 것을 보고 흉을 보았는데

내가 스스로 그렇게 되고 보니 알겠구나. 너희들 또한 스스로 당하면 알 것이다." 라고 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공이 진지왕을 페위하는데 참여한 공으로 선화(仙花)가 되기에 이르렀다.

모두 <윤궁>의 내조가 많았다.

관위가 이찬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을 얻으니 <윤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미실>이 과연 제(帝)에게 청하여 조서를 내려 <윤궁>을 공이 정처로 삼았다.

진평대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에 나아가 공과 <윤궁>의 혼인을 축하하였다.

<윤궁>이 말하기를

" 첩은 이제 같은 골의 남편을 얻었습니다.

어제 이전에 낭군은 첩의 신하였으므로 첩을 따르는 것이 많았으나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서 마땅히 낭군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감히 다시 공과 다투지 않고 공의 명령을 힘써 따랐다.

검소하고 무리를 사랑하며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낭도에게 주었다.

공이 종양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 낳게 하였다.

공은 풍월주로서 유화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집에 있으며 마음이 화락하고 조용한 모습이 마치 물수리와 원앙 같았다.

양위함에 이르러 공은 <윤궁>과 더불어 수레를 같이 타고 야외로 나가 노닐고 돌아왔다.

공은 본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윤궁>이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 첩이 듣건대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낭군은 술을 안 마시고 색을 절제하니

첩이 속으로는 부끄러워합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를 할 것이며 술을 좋아하면 그대의 일이 많아 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윤궁>이 말하기를

" 장부는 마땅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어찌 한 여자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잠자리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저의 일을 대신하게 되니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지아비를 위하여 일이 많은 것은 처의 영광입니다.행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술을 조금씩 마시고 침첩 한 명을 두었으나 난잡한 적이 없었다.

젊어서 지극히 방정하고 빈틈이 없었는데 <윤궁>을 처로 맞이 한 후로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부부를 말 할때는 반드시 공의 부처를 들며 말하기를

" 지아비를 택하는 데는 마땅히 문선화와 같아야 하고,

처를 얻는 데는 마땅히 윤낭주와 같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포석사에 화상을 모셨다.

<유신>이 삼한을 통일하고 나서 공을 사기(士氣)의 으뜸으로 삼았다.

각간으로 추증하고 신궁의 선단(仙壇)에서 대제를 행하였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공은 건복 23년(606)에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가 69세였다.

낭주는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

 

賛曰加耶外孫義気之宗以仙為花振我国風

찬하여 말한다.

가야의 외손이고 사기의 으뜸으로 선(仙)의 꽃이 되니 우리나라의 위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