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9세 풍월주(582-585) <비보秘寶(549 - ?)>
秘宝郎者比台殿君之子也 母曰実宝娘主乃未珍夫公之妹也
<비보秘寶>는 기사년(549)생이고 임인년(582)에 화랑의 주가 되었다.
<비보>랑은 <비대比臺>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실보實寶>낭주인데 곧 <미진부未珍夫>공의 누이였다.
모진(옥진) - 비대(522- )(실보) - 비보(549- ) <9세 풍월주(582-585)>
아시(삼엽) - 미진부(525- )
실보(532?- )
与薛原公同年生 同学歌不及 学笛又不及
공은 <설원薛原>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함께 노래를 배웠으나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피리를 배웠으나 역시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乃投文弩而学劍 遂為高弟力輔 文弩為仙花以功公為其副 至是為九世風月主
이에 <문노>에게 나아가 검을 배우고, 마침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어<문노>를 힘써 보좌하였다.
<문노>가 선화(仙花)가 되자 그 공으로 그의 부제(副弟)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9세 풍월주가 되었다.
<문노>의 법제를 힘써 따르고 미천한 자를 발탁하고 약한 자를 구하는데 힘썼다.
낭도를 나누어 보내어 변방을 지키는 이들을 위로하였다.
당시 <미생>공은 <설원>공의 부제로서 오랫 동안 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문노>공이 이에 양위를 명하였다.
공이 또한 3년간 재위하니 낭도들이 아까워 하였다. 건복(建福)2년(585) 춘정월이었다.
공은 <노리부弩里夫>공의 딸 <세진細珍>낭주를 아내로 맞아
아들 <세호細好>랑을 낳고 딸 <세미>와 <세신>을 낳았는데 병으로 죽었다.
비보(세진) - 세호(570?- )
세미(572?- )
세신(574?- )
다시 진흥대왕의 딸 <덕명德明>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덕명>공주의 어머니는 곡 가야국 <월화月華>공주이다.
삼모진(월화) - 덕명(560?- )
세아들과 다섯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붕부朋夫>, <보부宝夫>, <석부石夫>이고
딸은 <보주宝珠>, <진주眞珠>,<홍주紅珠>, <녹주綠珠>, <명주明珠>였고
서자는 <유오柳五>랑, <유매柳梅>, <가기賈奇>, <수동水同> 등인데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고 명성이 있었다.
비보(덕명) - 붕부(582?- )
보부
석부
보주
진주
홍주
녹주
명주
비보(유지) - 유오
유매
비보(가씨) - 가기
비보(호동) - 수동
<유오>랑은 공의 첩 <유지柳枝>의 소생이다.
<유지柳枝>는 검술을 잘 하였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난도(亂徒)를 많이 모아 소요를 일으켰다.
조정에서 군사를 모아 잡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18세 나이에 그 굴을 찾아가 생포하였다.
아마 <유지柳枝>가 미모에다 뜻이 높아 공의 높은 풍모를 보고 스스로 항복하였을 것이다.
공은 그 사람들을 가련하게 여겨 모두 풀어 주었다.
<유지柳枝>는 홀로 가지 않고 말하기를
" 다만 그대를 쫓아 죽기를 원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하여 살기를 원치 않는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첩이 되었다.
<유오>랑은 어머니의 풍모를 갖추어 용모가 맑고 빼어났고.....
또한 ....18살의 나이에 지명법사(智明法師)를 따라 진(陳)에 들어가 불법을 구하고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후진 사문을 가르쳤으니 그 공 또한 크다.
.... 국가가 태평하고 곡식이 익고 백성이 배부르게 되었다. 모두 공이 ....의 주主라고 생각하였다.
<미생>공이 취임함에 이르러 곧 봄에 가물어 곡식의 씨를 뿌리지 못하였다.
제(帝)가 반찬의 수를 줄이고 죄수를 풀어주자 비가 왔다.
사람들이 <미생>공이 욕심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처음에 공은 <동대冬臺>공의 아들 <대세大世>가 뛰어난 재주가 있으므로 전방대화랑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 <대세>의 어머니는 곧 <실보>의 손아래 누이인 <골보>였으니 <대세>는 공의 종제가 되었다.
아시(삼엽) -실보(비대) - 비보(549- )
아시(삼엽) - 골보(동대)- 대세(560?- )
사람들이 불평을 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양위함에 이르러 <미생>공에게 부탁하여 <대세>에게 전방대화랑을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미생>의 첩의 동생인 <제문諸文>랑이 그 자리를 원하여
<대세>가 유화를 탐했으며 술을 마시고 행동이 거칠었다는 것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대세>는 이에 노하여 곧 들에 나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세>와 <덕명>은 같은 나이로 몹시 그리워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공은 알면서 꾸짖지 않았다.
<대세>는 그 은혜에 감동하여 마침내 <덕명>과 관계를 끊었다.
스스로 <모랑毛郞>과 <완적阮籍>에 비교하였고 술을 마시면 울었다.
완적阮籍 :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죽림 칠현의 한 사람
사마의 종사중랑으로 술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유화들 중에 그를 사모하는 자가 많았다. <대세>는 자기를 사모하는 자를 거절하지 않았다.
공은 그 아픔을 알고 가엾게 여겨 좌방화랑으로 삼았다.
얼마 안되어 다시 우방화랑으로 삼아 장차 세상에 크게 쓰일 것임을 보여 주고 술에 빠짐을 절제토록 권하였다.
잠시 괜찮게 되는것 같았다.
전방대화랑에 처음 발탁하고 나서 <대세>에 권한을 주지 않았다.
<대세>는 본디 <미생>공에게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에 술을 마시고는 <미생>이 탐욕스럽고어리석어 가뭄을 불러 왔다고 욕하였다.
<미생>공은 이에 심복 낭도를 시켜 그 황란(荒亂)한 것을 공격하였다.
공은 곧 사문(沙門) <담수>로 하여 <대세>를 보살피게 하고 때때로 술을 보내어 위로 하였다.
<대세>는 이에 발분하고 힘써 공부하여 신선의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하였다.
친우인 <구칠>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구칠> 또한 공의 화랑이었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공의 심복 낭도들이 많이 불안해 하였다.
공이 힘써 달래었지만 마침내 당파가 나뉘었다.
공은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며 상선(上仙)의 지위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문노>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 선도의 우두머리는 오직 두 사람인데 그대가 만약 물러나면 무사의 씩씩한 기운을 장려할 수 없다." 라고 하며
<제문>랑을 해직 하였다.
얼마 안되어 <미생>공 또한 어려운 것을 알고 풍월주에서 물러 났다.
<하종夏宗>공이 풍월주가 되자 선정(仙政)을 모두 <미실>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미실> 또한 파의(派議)를 염려하여 여러 상선(上仙)과 상화(上花)를 회합하여
열선각(列仙閣)을 짓고 대의(大議)를 통과시켜 결단하였다.
그러므로 파의(派議)가 비록 많았으나 또한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
공 또한 <미실>의 신하로 배반할 수 없었으나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투었다.
<미실>이 <비보>랑공을 위로하기 위하여 공이 추천한 자를 많이 뽑았다.
<보리菩利>공, <서현舒玄>공, <용춘龍春>공 등은 모두 공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이화(숙명) - 보리(573- )
무력(아양) - 서현(576?- )
금륜(지도) - 용춘(578-647)
공의 아들 <세호(細好>랑은 오랫동안 화랑으로 있었는데뽑히지 않았다.
비보(세진) - 세호(570?- )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선로(仙路)는 나의 가물(家物)이 아니다.
단지 공을 세워 백세에 이르는 것이 옳고 아비로서 명위를 더럽히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였다.
공은 끝내 <세오>랑을 중요한 자리에 오르지 않게 하였다. 사람들이 공을 어렵게 여겼다.
건복 20년(603) 8월 고구려가 침범하여 왔다.
제가 친히 정벌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공과 <세호>랑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여 한수(漢水)에서 맞아 크게 이겼다.
영양왕 14년(603),
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왔다.
그 때 북한산성의 신라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신라군의 함성과 호응하였다.
<고승>이 상대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帝)가 공에게 보답코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 신은 어리석고 겁이 많아 한 일이 없습니다. 곧 제(帝)의 힘으로 이룬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帝)는 이에 <세호>랑을 발탁하여 아찬의 직위를 주고 대당(大幢)을 장악토록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 오늘에야 비로소 나의 아들이다. 또한 너의 어머니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라고 하였다.
대개 <세진(細珍>은 늘 공에게 검을 배워 <세호>랑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 처는 지아비의 일을 알지 않으면 안 되고 아들은 아버지의 업을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노리부(세화) - 세진(550?- )
공은 죽을 때까지 검도를 버리지 않았다.
문하에서 나온 무리 중에 출세한 사람이 많아 사방으로 나아가 다스렸는데 공은 늘 정사(政事)에 삼가할 것을 경계하였다.
공이 죽자 모인 자가 만여 명이 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다!
공의 별전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이 많은데 거짓된 것이 많아 다 기록하지 않는다.
賛曰法興之孫真興之婿 位至上仙 劍道大擅 士氣以興 百世以師
찬하여 말한다.
법흥의 손자이고 진흥의 사위다.
직위가 상선에 이르렀고 검도로 크게 떨쳤다.
무사의 기풍이 일어났고 백세의 스승이다.
모대(옥진) - 비대(실보) - 비보(덕명)
덕명은 진흥대제 삼모진의 딸이다.
10. 10세 풍월주(585-588) <미생美生(550-609)>
美生者未珍夫公之子也 母曰妙道夫人也
<미생美生>은 경오년(550)생이고 을사(585)에 화랑의 주가 되었다.
<미생>랑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묘도>부인이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 616?)
미생(550 - 609) <10세 풍월주(585-588)>
公之妹曰美実宮主有寵于真興大王 公亦被上寵
공의 손위누이는 <미실>궁주라고 하는데 진흥대왕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공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累召入宮与銅太子金太子等同学于兎含公
왕이 여러번 불러 입궁하여 <동륜>태자, <금륜>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웠다.
구리지(금진) - 토함(545?- )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하였다.
<만덕萬德>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사도>황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공주들이 많이 사사로이 관게를 가졌는데 제가 문초하려 한즉 후{미실}가 말하기를
" 이는 우리 집의 풍류나비입니다.어찌 모름지기 문초를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는 또한 <미실>에세 빠져 있던 까닭에 마침내 문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을 못하였다.
<미실>이 공에게 명하여 <사다함>의 낭도가 되었다.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는데 말에 오를 수가 없었다.
<미진부>공이 쫓아 내려 하자 <미실>이 말하기를
" 어찌 나의 아우를 한번에 내칩니까?" 라고 하였다.
<사다함> 또한 부득이 받아들였다.
<문노>가 꾸짖어 말하기를
" 무릇 낭도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 아침에 일이 생긴다면어디에 쓸 것인가?" 라고 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에 받아 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문노>가 다시 따지지 않았다.
공은 검도를 좋아 하지 않았다.
속으로 <문노>를 꺼려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았으므로 <사다함>이 곤란해 하였다.
<세종>공이 풍월주의 대를 잇자 공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그 직위를 전하여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문노>가 간하여 이룰수 없었다.
<미실>은 이에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공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미실>이 <설원>랑을 총애하게 되자 공에게 그를 섬기도록 하였다.
그 까닭에 공은 부제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곧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공의 나이 이미 36살이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사다함>공이 열 여섯살에 풍월주가 되자 천하가 명예롭게 여겼는데 내가 열 세살에 전방화랑이 되자
천하가 더욱 명예롭게 여겨 나이 열 여섯살 이전에 반드시 풍월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서른 여섯살에 된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 내가 총애를 받을 때 네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에 대한 총애가 식으면 누가 <하종>을 위한 계책을 마련할까?
라고 하였다. 이에 <하종>을 부제로 삼았다.
그 때에 낭도간에는 아직도 쟁론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귀천에 거리끼지 않고 내외에서 인재를 뽑아 등용하여 국력을 강하게 하려는 자들로 통합원류라 불렀다.
<임종林宗>, <대세大世>, <수일修日> 등이 중심이었는데 대개 문노파 중 가장 정예들이었다.
대원신통을 받들려고 하는 자들은 곧 <미실> 일파인데 <하종夏宗>, <구륜仇輪>공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두번째이다.
진골 정통을 받들려고 하는 자들이니 곧 <문노> 일파로 <지소>태후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다.
가장 권력이 있으며 옛 규정을 지키는 자들이다. <보리菩利>랑, <숙리부叔里夫>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세번째이다.
노리부(숙진) - 숙리부
그렇지만 <문노> 또한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하종>과 감히 다투지 않았다.
통합파는 <하종>이 재주가 없다고 하고 또한 <미생>공에게 불복하였으나 공은 이를 진압하지 못하였다.
또 한 파가 있어 <정숙貞肅>태자를 풍월주로 세우고 <원광圓光>을 부제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이는 <문노> 정파와 통합파 중에서 혼성된 자들로서 <이화二花>류라 하였다.
또 한 파는 <천주天柱>공을 풍월주로 세우고 <서현舒玄>랑을 부제로 삼으려 하였는데 곧 통합파 중 가야파이다.
삼모진(월화) - 천주
공은 3년 동안 풍월주 직위에 있었는데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상선(上仙)이 많이 걱정하였다.
이에 <하종>공에게 양위하고 물러나 천성을 길렀다.
공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 아랫사람의 마음을 몰랐다.
또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 까닭에 뭇 사람들의 신망이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선문에 있어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공은 처첩이 많았고 아들이 백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모두 기억할수 없었다.
<미생>기에 " 공의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다." 라고 하였다.
남도(南桃)에 갈 때마다 유화로서 목숨을 바차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
공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공을 천간성(天奸星){하늘의 간사한 별}이라고 하였다.
평상시에 시첩의 수가 수십명인데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다.
그 향락함이 천자보다 더하였다.
진(陳)나라 사신이 상국에도 또한 이와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상국의 사절이 되어 그 제도를 두루 수집하여 왔다.
공은 어머니와 손위 누이에게 효도하기를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의 종이 공의 옥배를 훔쳤다.
공이 막 처벌하려고 하자 종이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공의 어머니가 보고 공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 노비는 수족과 같고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찌 물건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손위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의 재물을 가졌으면서도
사대부에게 겸손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니내가 매우 부끄럽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마루에서 내려가 종을 풀어주고 친히 스스로 보살펴 병을 고쳐 주었다.
그 후 무릇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문제삼지 않고 말하기를
" 내가 그 다리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 라고 하였다. 도둑질은 이내 그쳤다.
공은 일찍이 <동륜>태자와 더불어 여색을 탐하려 다녔다.
그 때 나마 <당두唐斗>의 처가 아름다움이 있다고 공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태자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가 불러서 관계를 맺었다.
태자가 죽고 나서 공은 첩으로 삼고자 하여 저택에 불러 들였다.
<당두>는 이에 <미실>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 아이가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미실>이 곧 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 태자의 사건이 있은 후 나 또한 두려워하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 보냈다.
여자는 공을 잊을 수 없어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왔다.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
<당두>가 다시 호소할까 염려하여 여러번 <당두>를 조주(祖主)에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아내를 바치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감히 그럴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당두>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사람들은 공이 색을 밝힌다고 말들을 하지만 나는 공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여 공이 조부(調府)에 들어가자 <당두>를 사부(司簿)로 하여 정치를 크게 바로 잡았다.
제가 이에 훌륭하게 여겨 술을 내렸다.
공이 말하기를
" 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두>의 공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는 이에 <당두>에게 대나마를 특별히 주고 조부의 우경(右卿)으로 삼았다.
그의 처는 공의 세 아들을 낳았다.
공은 모두 거두지 않고 <당두>의 아들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당두> 또한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 그 때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오랫동안 조부에 있으면서 누만금의 재물을 모은 것은 <당두>의 힘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너의 처와 더불어 천하와 국가를 위하여 인물을 번성케 하겠다." 라고 하였다.
대개 <당두>의 처가 아들을 잘 낳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당두>는 이내 틈을 타서 물러나 그 처로 하여금 공에게 사랑을 받고 아양을 떨게 하였다.
그의 처남 <만세萬世> 또한 공으로 인하여 발탁되었다.
공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당두>는 나의 <자방子房>이고 <만세>는 나의 <진평陳平>이다." 라고 하였다.
<자방>과 <진평>은 西漢 초기의 대신이다.
<만세>의 처제 또한 공의 첩이 되어 총애를 받았고 노래를 잘 하였다.
공의 아들인 <백생白生>공과 사통하였다.
공이 <백생>공에게 주려고 하자 <만세>가 그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간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 그녀와 내 아이는 나이가 서로 같아서 다시 해로할 수 있으니 나에게는 큰 기쁨이다."라고 하며 마침내 주었다.
공은 아들이 많았는데 아들을 사랑하는 정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다.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 성격에 맡길 따름이었다.
매번 명절에는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대당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어머니가 아이들의 어미를 다 구별하기 힘들었다.
공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곧 "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 라고 물었다.
공은 번번히 닮은 바를 대답하여 감싸 주었다. 그러므로 여러 아들이 공을 사모하여 따랐다.
공은 매번 출근할 때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조부에 이르러 종일 그 아이들과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다.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관리도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 역시 좋은 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건복 26년(609)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60이었다.
공의 아들 <백생白生>, <월생月生>, <발생發生> 등은 모두 공주의 소생이다.
미생(백화) - 백생
미생(월륜) - 월생
미생(반야) - 발생
<묘도>는 <사도>의 손위 언니로 얼굴이 근엄하고 마음이 부처와 같아서
공과 공의 누이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
영실(옥진) - 묘도(525- )
사도(534- )
<사도>는 진흥대제 <삼모진>의 후로 동륜태자와 금륜태자의 어머니이다.
한 번은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 우리 집은 대대로 색을 바치는 신하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
아직 네가 누리는 부귀와 같은 것이 없었다. 너는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는냐?"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제가 숙모에 대하여는 <화문和文>만 못하고 누이에 대하여는 <설원>만 못하고 낭도에 대하여는 <문노>만 못합니다.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묘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 이 세 사람 또한 너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 라고 하였다.
대개 그 부유함과 첩이 많고 자녀가 많음을 말한 것인데 풍자하여 훈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묘도>의 아버지 <영실>공은 법흥왕의 누이 <보현>공주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는 <수지>공이니 곧 <등흔>공의 손자가 된다.
賛曰 玉珍之孫 大元神通 有子百人有徒万衆 食肉富貴 花柳一生
찬하여 말한다.
<옥진>의 손자이고 대원신통이다.
아들이 백 명이고 낭도는 만 명이다. 풍족하고 부귀로운 아름다운 일생이다.
아시(삼엽) - 미진부(묘도) - 미생
영실(옥진) - 묘도(미진부) - 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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