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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도호부 90년의 변천사

지보고 2023. 11. 2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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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중국인과 강단사학자가 주장하는 안동도호부 변천도

 

-  안동도호부 변천사(AD 668 - AD 758)

 

년도   안동도호부 위치   명칭 변화      관련 인물  관련 고구려인
668  평양성 안동도호부 이세적 남건(男建)  남생(男生)
669  신성(新城) 안동도호부 설인귀  
670  요동주(遼東州) 안동도호부 고간(高侃) 검모잠 vs 안순(安舜)
676  요동군 옛성 안동도호부    
   요동 : 구당서 본기 안동도호부    
677 신성(新城) 안동도호부   고장(高藏) 보장왕
696 신성(新城) 안동도호부 배현규 vs 이진충  
698 신성(新城) 안동도독부 유주도독, 안동도호 설눌薛訥  
699 신성(新城) 안동도독부   덕무德武 : 藏의 아들 ~818
704 신성(新城) 안동도독부 兼幽營二州都督 당휴경唐休璟  
705 신성(新城) 안동도호부    
714 평주 북평군 노룡현 안동도호부    
725 평주 북평군 노룡현 안동도호부 설태薛泰 흑수말갈 黑水軍  
727 평주 북평군 노룡현 안동도호부 평로군절도대사 영왕담潁王潭  
743 요서 고군성(故郡城) 안동도호부 평로절도사 안록산安祿山  
758      폐 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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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안동도호부 변천도

 

 

 

分五部 百七十六城 六十九萬餘戶 爲九都督府 四十二州 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統之 

擢我將帥有功者 爲都督刺史縣令 與華人叅理 以右威衛大將軍薛仁貴 檢校安東都護 摠兵二萬人 以鎭撫之

是高宗摠章元年戊辰歲也

고구려 지역의 5부, 1백76성(城),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의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아,

중국인들(華人)과 함께 이 지역을 다스리는데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를 삼아,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도와주고 위로하게 하였다. 

이때가 고종 총장(摠章) 원년(668) 무진년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至咸亨元年庚午歲 夏四月 劒牟岑欲興復國家 叛唐 立王外孫安舜[羅紀作勝]爲主

唐高宗遣大將軍高侃 爲東州道行軍摠管 發兵討之 安舜殺劒牟岑 奔新羅

함형(咸亨) 원년(서기 670) 경오 여름 4월,

<검모잠劒牟岑>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나라를 배반하고 임금의 외손 <안순安舜>

[『신라본기』에는 <승勝>으로 되어 있다.]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儀鳳二年丁丑歲 春二月 以降王爲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安輯餘衆 東人先在諸州者

皆遣與王俱歸 仍移安東都護府新城 以統之 王至遼東 謀叛 潛與靺鞨通

의봉(儀鳳) 2년(서기 677) 정축

봄 2월, 항복한 우리의 임금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요동으로 돌려보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이때, 동방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 있던 자들을 모두 임금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게 하였다. 

임금은 요동에 도착하여 배반을 도모하고자 몰래 말갈과 내통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開耀元年 召還卬州 以永淳初死 贈衛尉卿 詔送至京師 葬頡利墓左 樹碑其阡 散徙其人於河南隴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舊城 往往沒於新羅 餘衆散入靺鞨及突厥 高氏君長遂絶

개요(開耀) 원년(서기 681),

임금이 앙주(卬州)로 소환되었다가 영순(永淳) 초(서기 682)에 돌아가셨다.

당 고종이 위위경(衛尉卿)으로 품계를 높여주고,

조서를 내려 서울로 옮겨오게 하여 힐리(頡利, 돌궐의 왕)의 무덤 왼편에 장례를 지냈으며, 묘 앞에 비를 세웠다. 

임금의 휘하 사람들은 하남(河南)과 농우(隴右)의 여러 주에 분산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부근의 옛날 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垂拱二年 以降王()孫寶元 爲朝鮮郡王 至聖曆初 進左鷹揚衛大將軍 更封忠誠國王 使統安東舊部 不行

明年 以降王()子德武 爲安東都督 後稍自國 至元和十三年 遣使入唐 獻樂工

수공(垂拱) 2(서기 686),

항복한 임금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聖曆) (서기 698)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부()들을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699)에 항복한 임금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원화(元和) 13(서기 818)에 이르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악공(樂工)을 바쳤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儀鳳中 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 遣歸國 安輯餘衆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時 新羅强 隆不敢入舊國 寄理高句麗死 武后又以其孫敬襲王 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 國系遂絶

당 의봉(儀鳳) 년간(서기 676~8)에 <부여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게 하고, 곧이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해져서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다시 그의 손자 <경敬>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ㆍ발해ㆍ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끊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摠章元年 命英公李勣 破高句麗 置安東都督府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隴右

高句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爲渤海 開元二十年 怨恨天朝 將兵掩襲登州 殺刺史韋俊

於是 明皇帝大怒 命內史高品何行成太僕卿金思蘭 發兵過海攻討

총장(摠章) 원년(서기 668)에는 영공(英公)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격파케 하고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의봉(儀鳳) 3년(서기 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隴右)에 옮겼다.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그들은 개원(開元) 20년(서기 732)에 당에 원한을 품고 불시에 등주(登州)를 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다.

이에 명황제(당 현종)가 크게 노하여 내사 <고품高品>ㆍ<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바다를 건너 토벌하게 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總章二年二月 前司空兼太子太師英國公李勣等奏稱 奉勅高麗諸城 堪置都督府及州郡者

宜共男生商量准擬 奏聞件狀如前 勅 依奏

其州郡應須隸屬 宜委遼東道安撫使兼右相劉仁軌 遂便穩分割 仍摠隸安東都護府

총장(總章) 2(서기 669) 2월 전사공겸태자태사영국공(前司空兼太子太師英國公) <이적李勣>등이 아뢰었다.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 및 주, 군을 설치하는 건은 마땅히 <남생男生>과 함께 의논하여 승인받으라 하셨기에,

이상과 같은 문건을 올려 아뢰나이다.”

당 황제가 칙명을 내려 말하기를

상주한 대로 하되 그 주, 군은 모름지기 중국에 예속시켜야 하겠으므로

요동도안무사겸우상(遼東道安撫使兼右相) <유인궤劉仁軌>에게 위임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지역을 적당히 분할하여 모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예속시켰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

十年 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至西海史冶島

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 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告曰 興滅國 繼絶世 天下之公義也

惟大國是望 我國先王以失道見滅 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永世盡忠 王處之國西金馬渚

670년,  6월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나,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임금은 그들을 서쪽 지방인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總章二年 五月 庚子移高麗戶二萬八千二百車一千八十乘牛三千三百頭馬二千九百匹駝六十頭將入內地

營二州般次發遣量配于江淮以南及山南涼以西諸州空閒處安置。 

上元三年 二月 甲戌移安東都護府於遼東

儀鳳二年 二月 丁巳工部尚書高藏授遼東都督封朝鮮郡王遣歸安東府安輯高麗餘眾

司農卿扶余隆熊津州都督封帶方郡王令往安輯百濟餘眾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

669년 5월 고구려 백성 28,200호(戶) 수레 1,080승(乘), 소 3,300마리, 말 2,900마리.

낙타(駝) 60마리를 내지(內地)로 반입하려 래주(萊州) 영주(營州)에서 차례대로 출발시켰다.

양자강(江)과 회수(淮) 남쪽 그리고 태산의 남쪽(山南), 량주(涼) 서쪽 지역의 빈 공간이 있는 곳에 안치했다.

676년 2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遼東, 遼東州)으로 옮겼다.

677년 2월 공부상서(工部尚書) <고장高藏, 보장왕>을 요동도독(遼東都督)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해서

안동부(安東府)로 돌려보내고 고구려 유민을 붙들고 위로하게 하였다.

사농경(司農卿) <부여 융扶余隆, 의자왕의 3자>을 웅진주도독(熊津州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에 봉해서

백제 유민을 붙들고 위로하게 하였다.

그리고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으로 옮기고 그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구당서 고종본기>

 

薛仁貴絳州龍門人... 乾封初(666-668)高麗大將泉男生率眾內附高宗遣將軍龐同善高等迎接之

男生弟男建率國人逆擊同善等詔仁貴統兵為後援同善等至新城夜為賊所襲

仁貴領驍勇赴救斬首數百級同善等又進至金山為賊所敗高麗乘勝而進

仁貴橫擊之賊眾大敗斬首五萬餘級遂拔其南蘇木底蒼岩等三城始與男生相會

高宗手敕勞之曰金山大陣凶黨實繁卿身先士卒奮不顧命左衝右擊所向無前諸軍賈勇致斯克捷

宜善建功業全此令名也

仁貴乘勝領二千人進攻扶餘城諸將鹹言兵少仁貴曰在主將善用耳不在多也

遂先鋒而行賊眾來拒逆擊大破之殺獲萬餘人遂拔扶餘城扶餘川四十餘城 乘風震懾一時送款

仁貴便並海略地與李勣大會軍於平壤城

高麗既降詔仁貴率兵二萬人與劉仁軌於平壤留守仍授右威衛大將軍封平陽郡公

兼檢校安東都護移理新城撫恤孤老有幹能者隨才任使忠孝節義鹹加旌表高麗士眾莫不欣然慕化

咸亨元年(670)吐蕃入寇又以仁貴為邏娑道行軍大總管 率將軍阿史那道真郭待封等以擊之

설인귀(薛仁貴)는 강주(絳州) 룡문(龍門) 출신이다. ...

건봉년간(666-668)에 고구려 <천남생泉男生>이 무리를 이끌고 내부 하려는데

당고종(高宗)은 <방동선龐同善>과 <고高>를 보내 영접하는데,

<천남생>의 동생 <천남건泉男建>이 백성을 이끌고 <방동선>에게 역습을 하려했다.

조서를 내려 <설인귀>에게 병사를 통솔하여 후원하라 하였다.

<방동선>이 신성(新城)에 이르니 야밤에 적의 습격을 받았다.

<설인귀>는 날랜 병사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니 수백명을 참수하였다.

<방동선>이 나아가 금산(金山)에 이르러 적에게 패배하였는데 고구려는 승기를 잡고 진격해왔다.

<설인귀>가 그 옆구리를 공격하니 적의 무리가 크게 패하여 5만여명을 참수했다.

마침내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岩) 3성을 빼앗고 처음으로 <천남생>과 서로 만나게 되었다.

당고종이 그 일에 대해 조서를 내려 말하되

[金山大陣,凶黨實繁。卿身先士卒,奮不顧命,左衝右擊,所向無前,諸軍賈勇,致斯克捷。宜善建功業,全此令名也。] <설인귀>는 승세를 이어 2천명으로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려 진군하려는데

여러 장수들이 병력이 적다고 쓴소리를 했다.

<설인귀>는 [在主將善用耳,不在多也。]라고 했다.

마침내 선봉에 서니 적의 무리가 와서 막아섰다. 공격하여 크게 깨트리고 만여명을 죽이고 포획하여 부여성을 빼앗았다.

부여주(扶餘川) 사십여성은 두려워 떨며 송관(送款)하였다.

<설인귀>는 편히 물길로 공략하여 평양성(平壤城)에서 <이세적(李勣)>과 군사들이 모였다.

고구려가 이미 항복하였기에 조서를 내려 <설인귀>가 병사 2만으로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평양에 남아서 지키게 하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하였고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를 겸하게 하였다.

치소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홀로된 노인을 구휼하고, 능력있는 인재를 관리로 임용하고,

충효(忠孝)와 의리(節義)에 정표(旌表)를 더하니 고구려 백성들이 감화(慕化)되어 기뻐하지 않는자가 없었다.

670년(咸亨元年) 토번(吐蕃)이 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설인귀>를 라사도행군대총관(邏娑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장군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真>과 <곽대봉郭待封>으로 공격 하였다.

<구당서 설인귀 열전>

 

總章二年徙高麗民三萬于江淮山南

大長鉗牟岑率衆反立藏外孫安舜爲主

詔高偘東州道李謹行燕山道並爲行軍總管討之遣司平太常伯楊昉綏納亡餘

舜殺鉗牟岑走新羅偘徙都護府治遼東州破叛兵于安市又敗之泉山俘新羅援兵二千

李謹行破之於發廬河再戰俘馘萬計

於是平壤痍殘不能軍相率奔新羅凡四年乃平

謹行留妻劉守伐奴城虜攻之劉擐甲勒兵守賊引去帝嘉之封燕郡夫人

669년 고구려 백성을 양자강과 회수(淮), 태산 남쪽으로 옮겼다.

(670년) 대장(大長) <겸모잠鉗牟岑 검모잠>이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보장왕(藏)의 외손자 <안순安舜>을 군주로 즉위시켰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간高侃, 高偘>을 동주도행군총관,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으로 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사평태상(司平太常) <백양방伯楊昉>을 보내어 도망친 무리를 정리하게 하였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은 (안동)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주(遼東州)로 옮기고

안시주(安市州)에서 반란병을 부수고 또 천산(泉山)에서 패주시키고 사로잡은 신라의 병사가 2천이었다.

<이근행>은 발려하(發廬河)에서 반군을 깨트리고 다시 전투하여 사로잡고 참한 자가 만명이나 되었다.

이때에 평양(平壤)은 상처가 심해서 군사를 능히 부리지 못하니 서로서로 신라(新羅)로 달아났다.

4년이 지나서 (고구려가) 평정되었다.

애초에 <이근행>은 부인 류씨(劉)에게 벌노성(伐奴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류씨가 갑옷을 입고 병사를 독려하여 수비를 하니 적병이 물러갔다.

황제는 기뻐하며 (그녀를) 연군부인(燕郡夫人)에 봉했다.

<新唐書 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 高麗>

 

安東大都護府舜分青州為營州置牧宜遼水之東是也已具注序篇春秋及戰國並屬燕

二漢曰遼東郡東通樂浪樂浪本朝鮮國

漢元封三年朝鮮人斬其王而降以其地為樂浪玄菟等郡後又置帶方郡並在遼水之東浪音郎

晉因之兼置平州領郡國五州理於此

自後漢末公孫度自號平州牧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東夷九種皆服事之

魏置東夷校尉居襄平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後還合幽州

及文懿滅後有護東校尉居襄平

晉咸寧二年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以慕容廆為刺史遂屬永嘉之亂為眾所推及其孫俊移都於薊

其後慕容垂子寶又遷於和龍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大唐摠章元年 李勣平高麗 得城百七十六 分其地為都督府九 州四十二 縣一百

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以統之 用其酋渠為都督刺史縣令

上元二年675 徙遼東故城 儀鳳二年677又徙新城 聖曆元年698更名安東都護府 神龍元年705復故名

開元二年714徙於平州 天寶二年743又徙於遼西故郡城 至德758後廢 領羈縻州十四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순임금(舜)이 청주(青州)를 분할하여 영주(營州)를 두고 관리를 두었는데

마땅히 요수(遼水)의 동쪽이 맞는 것이다. (已具注序篇)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에 속하였고 진나라/한나라의 요동군이며 동쪽으로 낙랑과 통하였다.

낙랑은 본래 조선국(朝鮮國)인데 B.C 108년(元封三年) 조선 사람이 그 왕을 죽이고 항복하였는데

그 땅을 낙랑, 현도군으로 하였다. 이후 또 대방군(帶方郡)을 두었는데 요수의 동쪽이다.

진나라(晉)도 그리하였는데 평주(平州)를 겸치하고 군국(郡國)을 5개로 하고 주(州)의 치소를 이곳으로 하였다.

후한말에 공손탁(公孫度)은 자칭 평주목(平州牧)이라 했고 아들 공손강(康),

그 아들 공손문의(文懿 공손연) 모두 요동을 점거하였고 동이(東夷) 9종(九種)이 모두 복종하고 따랐다.

조위(魏)때에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양평(襄平)에 두었고 분할하여

요동(遼東)、창려(昌黎)、현도(玄菟)、대방(帶方)、낙랑(樂浪) 5군으로 하여 평주(平州)를 두었다가

후에 과거처럼 유주(幽州)와 합쳤다.

공손문의가 멸망하고는 호동교위(護東校尉)를 양평에 두었다.

276년(咸寧二年) 창려, 요동, 현도, 대방, 낙랑 5군에 평주를 두었고

모용외(慕容廆)는 영가지란(永嘉之亂 307~312)때에 무리의 추대를 받아서 자사(刺史)가 되었다.

그 손자 모용준(俊)은 도읍을 계현(薊)으로 옮겼다.

그후 모용수(慕容垂)의 아들 모용보(寶)는 또 화룡(和龍)으로 천도하였다.

북위(後魏)때에 고구려가 그 땅에 도읍하였고 668년 이세적이 고구려를 평정했다.

1백76성(城)을 취하고 고구려를 분할하여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성(平壤城)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그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현지인) 추거(酋渠)를 발탁하여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았다.

675년(上元二年) 요동 옛 성(遼東故城)으로 옮겼다.

677년(儀鳳二年) 또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698년(聖曆元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라고 이름을 바꿨다.

705년(神龍元年) 다시 옛 이름으로 하였다.

714년(開元二年) 평주(平州)로 옮겼다.

743년(天寶二年) 요서고군성(遼西故郡城)으로 옮겼다.

758년(至德) 이후에 폐했다.

관할 기미주(羈縻州)는 14주이다.

<두우杜佑(735 ~ 812)의 통전通典>

 

十年 春正月 高宗許欽純還國 留囚良圖 終死于圓獄 以王擅取百濟土地遺民 皇帝責怒 再留使者

三月 沙飡薛烏儒與高句麗太大兄高延武 各率精兵一萬 度鴨淥江 至屋骨 □□□靺鞨兵先至皆敦壤待之

문무왕 10년(서기 670)

봄 정월, 당 고종이 <흠순>은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끝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우리 임금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기 때문에

황제가 질책하고 성을 내어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옥골(屋骨)[원문에 3글자 빠져 있음]에 이르렀는데,

말갈의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