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대제는 414년부터 491년까지 78년간 재위에 있었던 고구려의 왕이다.
그 기간동안 백제는 전지로부터 모대까지 7명의 왕의 교체가 있었고
신라는 보금으로부터 소지(비처)까지 4명의 왕의 교체가 있었다.
중원에서는 풍발의 북연이 436년에 북위에게 멸망하여 북위와 남송-남제가 있었고
왜는 인덕으로부터 현종까지 8명의 왕의 교체가 있었다.
장수대제가 천도한 평양이 북한의 평양인지? 평주의 평양(今 보정시 정흥현 고성진)인지?
장수대제 78년간의 대외관계를 살펴보자
장수대제2년{AD415}을묘,
정월, <보금>·<전지>·<풍발> 등이 사신을 보내 와서 공물을 바쳤다.
상이 진남루에서 접견하고, <춘>태자에게 명하여 즐겁게 하여주고 동명력을 나누어주게 하였다.
2월, 네 명의 후들과 함께 묘당을 찾아 즉위하였음을 고하고,
나라 안{직할지}과 맥{貊}·부여{余}·신라{羅}·백제{濟}·왜{倭}·가야{耶} 등의 나라에까지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위(魏)의 <嗣>가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이때 위(魏)나라의 수도는 산서성 평성(平城)이다.
장수대제6년{AD419}기미,
4월, 왜가 아들을 학문하러 보내왔기에 이불란사에 머물게 하였다.
장수대제7년{AD420}갑인,
5월, <풍발>이 인삼 100근, 호피 20장, 면포 50필을 바쳐왔다. 상은 목화씨를 구하라 명하였다.
7월, 위(魏)의 사자가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는 연(燕)을 토벌하여 그 땅을 나누어 갖자고 의론하였다.
이에 상은 “연(燕)과 위(魏) 모두는 선비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서로 화목해야 함인데, 어찌 서로를 토벌하려 하는가?
만약 <하란>이 평성(平城)에서 벗는다면 그 일을 함께 해볼 만하겠소.”라 일렀더니, 그 사자는 입 다문 채 한참을 있더니만
“나이 드신 후께서는 몸이 쇠하시어 폐하를 찾아 뵐 수 없으시옵니다.”라 아뢰니,
상은 웃으며 이르길 “그대는 농담 한 마디에 무얼 그리 긴장하는가?”라 하였다.
상은 <유유劉裕>가 진(晉)을 찬탈하였음을 듣고는 <춘>태자에게 이르길;
“<우금牛金>은 음흉하고 더러운 인간이지만 진{晋}을 100여년을 훔친 것으로 보면
<마의원馬懿遠>보다는 현명해보입니다.”라 하였더니, <춘>태자가 아뢰길;
“<여불위呂不韋>·<이원李園>·<동탁董卓>·<왕망王莽> 등은 모두 음흉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공적을 상주하여 하늘을 가리고 화{禍}를 입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간사한 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인군 된 자는 마땅히 그것을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라와 조정들 중에도 그러한 예가 있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습니다.”라 하였다.
<유유>가 동진(東晉)을 멸하고 송(宋)을 세운 것을 말한다.
장수대제8년{AD421}신유
4월, 위(魏)의 <사嗣>가 <하란賀蘭>의 딸 <탁발拓跋>씨를 바쳐왔다.
<경鯨>태자가 선사(仙師) <절우折雨>와 <봉의封蟻>를 데리고 가서 <하란賀蘭>에 답을 주도록 하였다.
<하란賀蘭>은 해대할{허리띠를 풀 또는 冠帶관계를 풀} 의향이 있는 것 같았으며, 해막(海漠)에서 제와 만나기를 바랐다.
이에 상이 허락하고자 하였다. <춘>태자가 말렸더니,
상은 “주(周) 목(穆)왕도 단기로 가서 곤륜(崑崙)에서 왕모(王母)를 만났소.
이번엔 해막(海漠)의 문 앞에서 볼 것이오. 8월에 만나자고 약속하시오.”라 하였다.
군신들은 위험하다 하였고, 상 혼자서만 느긋하였다.
8월, 상이 <화덕華德>과 함께 개마(盖馬)에서 구려(勾麗)로 들어가
<하란 賀蘭 >을 월해(月海)에서 만나고 돌아와, <춘>태자에게 이르길;
“<사嗣>가 마음에 병{또는, 심장병}이 있어서, <하란 賀蘭 >과 표리를 이룬다면 정벌할 수 있을 것 같았소.”라 하였더니,
<춘>태자가 아뢰길;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사嗣>가 비록 쾌차하지 못하여도, 그의 아들 <초稍>가 치욕을 씻으려 할 것입니다.
색두(索頭)는 족속 아끼기를 명확히 하는지라 멸망하지 않아왔으니, 섣불리 도모하기 어려우며,
뿐만 아니라 빼앗았다 하여도 밖으로부터 많은 적을 마주해야 할 것이니 지키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신라와 백제 그리고 <풍발>도 면전에서는 따르는듯하나 속으로는 따르지 않아서,
어느 날에 변고가 생길 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밖으로 골칫거리를 만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며, 안에서도 그리 해야 할 것입니다. 정경도 말하지 않습니까?
멀리 있는 자와는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자는 쳐야 하며,
붙어있는 이들은 떼어놓고 멀리 있는 자들과는 가까이 지내야 하며,
잘 지키고 나서 정벌하고 잘 타일러서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동명(東明)께서 정벌하여 얻으신 것을 광명(光明)께서는 지켜내셨습니다.
폐하 역시 응당 선제께서 이루신 땅을 지켜내시고 남방의 불을 끄고 나신 후에 서쪽으로 가심이 좋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숙부의 말씀이 옳으십니다.”라 하고는 일어나서 <천을天乙>전으로 가서 <춘양春羊>을 안아주었다.
장수대제 9년{AD422}임술
4월, 위(魏)가 <경鲸>태자를 천사(天師)로 삼고 도장을 열었으며, 사신을 보내서 자기들의 선대에 대하여 물었다.
<탁발십익건>과 <탁발규>시절 동안엔 대략 꾸려가진 바 있었으나, 난리로 인하여 또다시 잃은 것이었다.
애초에, <섭신涉臣>은 딸 <고두臯頭>를 <을두지>에게 처로 주었으며,
나중에 <고두臯頭>가 낳은 딸 <을乙>을 증(蒸)하여 <섭득涉得>을 낳았다.
<섭득涉得>이 <사만射滿>을 낳았고, <사만射滿>이 <응점應點>을 낳았다.
<응점應點>은 <수건樹健>을 낳았으며, 신명제(神明帝)의 딸 <적 >공주를 취하여 <적인 荻 >도 낳았다.
<적인荻仁>은 <수산樹山>을 낳았고, <수산樹山>은 태조(太祖)의 딸 <비裶>공주를 취하여 <수진樹真>을 낳았으며,
<수진樹 >은 <섭인涉仁>을 낳았다. <섭인涉仁>은 <섭진涉真>을 낳았고, <섭진涉真>은 <응발應勃>을 낳았으며,
<응발應勃>은 <이록비伊鹿肥>를 낳았다. <이록비伊鹿肥>는 <노율奴律>을 낳았고,
<노율奴律 >은 <의이倚이>와 <의로倚盧>를 낳았다.
<이록비伊鹿肥>는 또 중천(中川) 의 딸 <운雲>공주를 취하여 <실록관悉祿官>을 낳았고,
<노율奴 >의 처와의 사이에서는 <불弗>을 낳았다. <불弗>은 <울률鬱律 >을 낳았고, <울률鬱律 >은 <건犍 >을 낳았으며,
<건犍>은 <식 >을 낳았고, <식寔>이 <규 >를 낳았던 것이다.
<섭신涉臣>이 귀화한 이래 조정의 은혜를 받아왔는데, 한 자리에서 만나면
서열로는 백제의 다음이었고 신라와는 동등하였다.
세세토록 장인과 사위의 사이로 있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섭득涉得>시절부터 이미 선사(仙師)를 받들어오더니, 지금에 와서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5월, <유유{<宋>高祖, 都<建康>}>가 죽자, 남쪽 사람들이 찾아와서 항복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명을 내려서 모두에게 집을 주고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다.
<탁발사嗣>는 아들 <탁발도燾 >를 시켜 감국하게 하였다.
장수대제 12년{AD425}을축
정월, 위(魏)가 <을필乙苾>과 <최원崔元>을 시켜서 입조하고 토산물을 헌상하였다.
5월, 하(夏)주(主) <혁연발발赫連勃勃>이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는데, 얼마 후에 죽었다.
하(夏)나라는 산서성 유림시(楡林市)에 흉노가 세운 나라이다.
장수대제 16년{AD429}기사
4월, 송(宋)의 사신이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고는 백제로 갔다.
장수 2년{AD434}갑술
4월, 상이 남소로 가서 무력 검열을 실시하였다.
<풍홍>이 사자를 보내어 칭신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상은 “위(魏)의 <탁발도>가 내게는 그대의 땅을 침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뒷구멍으로는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니, 그렇다면 쥐새끼나 고양이와 무엇이 다르다 하겠소.
요수{遼隧)의 서쪽은 짐이 알아야 할 바 아니겠으나, 만약 용성(龍城)을 침입하면 짐이 맡아서 토벌할 것이오.”라 일렀다.
7월, 선선(鐥善)의 사신이 래조하여 말과 낙타 및 공작을 바쳤고, 후하게 위안하여 돌려보냈다.
위(魏)가 침입할 뜻이 있음에, 우리가 위(魏)에게 형이 되는 나라임을 알고, 찾아와 구원하여주기를 청하였던 것이었다.
8월, 위(魏)가 찾아와서 불로주를 바쳤다. 서역의 포도즙을 천 년 동안이나 익힌 것이라 하였다.
상이 <최호崔浩>의 율령을 보더니만; “가혹하다. <최호崔浩>도 오래가긴 어렵겠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송(宋)이 <사령운謝霊運>과 <도잠陶潛>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탄하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르길;
“<도잠陶潛>은 탐내지도 않았는데 주살됨을 면치 못하였단 말인가? 필시 이런 이치는 없는 것이야.”라 하였다.
후에 잘못된 보고였음이 밝혀졌다.
9월, <풍홍馮弘>이 여인 둘을 바쳐오면서 아뢰길; “이 여인 <고>씨의 후예이어서 마땅히 상국에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를 물리치려 하자, 주빈대가 <사만의謝萬義>가 아뢰길;
“두 나라는 화친하는 사이인데 혼인하기를 물리친다면 예의가 아닙니다.
청컨대 떨어진 궁에 두고 찾아보시지요.”라 하였고,
상은 위(魏) 또한 딸을 바치고 찾아와서 의논하려 할 것이오.
<홍弘>의 청을 받아주면 위(魏) 의 청도 받아주어야 할 것이고, 위(魏) 의 청을 받아줌도 당연할 것이니,
이 여인들을 돌려보내 답하는 것이 양쪽에게 곤란하지 않게 함일 것이오.”라 이르고는,
삼보들과 열 대가들에게 어찌해야 할지를 의론하라 명하였더니,
여러 날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고, 여인은 끝내 안으로 들어왔다.
10월에 위(魏)가 찾아와서 여인을 바치겠다고 청해왔다. 상은 신마 50필과 양 천 마리를 주어서 돌려보냈다.
<눌[기]>가 황금과 밝은 구슬을 보내주고 <비유>의 딸을 맞았더니, <비유>는 흰 매{해동청 또는 보라매}를 보내주었다.
이해에 선선{鄯善}과 북량{北凉} 또한 여인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혼인하여 화친하는 풍속이 차츰 잦아졌다.
선선(鐥善)은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동쪽 끝에 있는 흉노가 세운 나라이고
북량(北凉)은 감숙성 장액, 돈황, 고창 부근의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다.
장수 3년{AD435}을해,
정월, 위(魏)가 자기들 선대의 역사를 꾸미고자 그들이 {우리 조정에} 래조하였던 사실{歷史的 事實}을 물어왔고,
휘명{임금의 이름 글자를 다른 사람 이름에 쓰지 않는 것}에 대하여도 물었다.
답하기를, 나라의 조정이 임금의 이름을 피하지 않은 것은 그대 나라의 일이니, 우리가 알 바 아니라 하였다.
그랬더니, 위(魏)가 자기들 선대의 이름을 피하긴 하였으나, 자기들 멋대로 이름을 고치거나 바꾼 것이 많았다.
이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옛적에 어떤 사람이 부유해져서 어미를 수레 안에 모셨더니, 그 불편함이 빈한하였던 때 보다 더 심하였다 한다.
색두의 <[두]건> 등도 필시 어미를 수레 안에 모시는 것이 금륵지치{金勒之雉; 금으로 만든 새장 안의 꿩;
호화로운 곳에 가두어 모시어서 오히려 불편한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라 하였다.
6월, 위(魏)가 산기시랑 <이오李敖 > 등을 시켜서 <탁발사>의 딸 <가란嘉>을 보내왔다. <하란賀蘭>의 딸이라 하였다.
상이 <담윤談允>을 영접대사자로 삼아 서하(西河)를 나가서 맞이하게 하고, 창수궁(淌水宮)으로 들여서 근례를 행하였다. <이오李敖 > 등에게는 수림( 獣林) 의 온궁(溫宮) 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이오李敖 >는 부마대왕 금인과 대선우의 옥새 등을 바쳤다.
상이 웃으며 <이오李敖 > 등에게 이르길;
“그대의 나라는 여러 차례 불사약과 불로주를 보내어 짐의 장수하기를 축원하였으며,
청평(淸平)공주{=하란}를 시켜 나를 섬기게 하였소.
평생을 같이 할 양국 간의 우의가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오.”라 하였더니,
<이오李敖 >는 “소국은 폐하를 성심으로 섬기고 있음에 흠결 하나 없어 왔사옵니다.
근자에 들으니, 풍(馮)적이 상국과 밀통하고 사신을 보내어 신 등이 어찌 하였는지를 염탐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심히 놀랐습니다.”라 아뢰었다.
이에 상은; “이간하려는 말일 것이오. <풍홍>이 여러 번 사람을 보내와서 구원을 청하긴 하였으나,
짐은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대들은 마음을 놓으시오.”라 하였다.
이에 <이오李敖 >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떠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풍홍>이 과연 상서 <양이陽伊>를 보내 와서 오얏을 따고{오해 살 짓을 하고} 있었다.
찾아와서 정탐할 뿐만 아니라 만일의 경우에 대한 구원을 청하기도 하였는바, 심히 간절하였다.
장수 4년{AD436}병자,
4월, 위(魏)가 <풍홍>의 백랑성(白狼城)을 쳐서 빼앗았다.
이에 용성(龍城)은 큰 혼란에 빠졌고, 짐을 꾸려 지고서 동쪽으로 내빼는 이가 수십 리를 연이었으며,
<양이陽伊>가 또 찾아와 구원해달라고 애걸하였다. <양이陽伊>는 선대가 우리나라의 사람이었다.
상은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2만병을 이끌고 가서 용성(龍城)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서 낡은 털옷을 벗고 그곳의 무고에 있는 좋은 병장을 취하여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성 안을 대대적으로 노략질하게 하였다.
5월, <풍홍{弘}>이 위{魏}가 점점 압박하여 옴을 듣더니만, 궁전에 불을 지르니 그 불은 열흘이 되어도 꺼지질 않았고
영을 내려서 부인들은 갑옷을 입혀 가운데에 있게 하고, <양이{陽伊}>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 밖에 있게 하였다.
이에 <갈로>와 <맹광>이 기병을 후방에다 펼쳐서, 길을 따라 나아갔더니, 그 전후가 80여 리가 되었다.
<홍弘>을 평곽(平郭)에 있게 하였다.
위(魏)의 사자인 산기상시 <봉발封撥>이 찾아왔다.
<봉발封撥>은 <봉시封時>의 아들이었는데, <풍홍>을 내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풍홍>이 비록 위(魏)에게는 죄를 지었다하여도, 나의 신민이 되어 있으니, 그를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위(魏)가 이윽고 화평을 깨고서라도, 롱우(隴右)의 기졸을 발병하여 침입하려 하였는데,
낙평왕 (楽平王) <비丕>가 간하여 그만두었다 한다
<유혈劉絜>은 롱{隴; 陝西南部} 땅의 백성들은 새로이 찾아온 이들이어서 졸지에 싸움터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 하였고,
<비丕 >는 {<고구리>는} 조상의 나라여서 설사 속마음이 다르다 하여도 힘들여서 싸움은 불가하며,
농경과 잠사를 진작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여 풍족해지길 기다린 연후에 다시 도모함이 마땅하다 하였음이었다.
겨울에 <풍홍>을 북풍(北豊)으로 옮아가게 하였다.
장수 5년{AD437}정축
7월, <의륭義隆>이 비단과 채단으로 말과 바꾸자고 청을 하였더니,
평곽 앞{에서 잡히는} 물개 500필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의륭義隆>은 송(宋) 문제를 말한다.
장수 6년{AD438}무인,
3월, <홍弘>과 <의륭義 >이 상통하였다.
<의륭義隆>이 <백구白駒>·<차흥次興>·<구의具義> 등을 보내어 무리 수천을 이끌고
평곽 앞의 바다{또는, 너른 물}에 큰 배를 정박하였다.
<용기龍杞>와 <손인수孫人漱> 등에게 명하여 그들을 격살하고 그들의 배 78소{척}를 빼앗았다.
5월, 상이 <위(魏>와 함께 <의륭>을 정벌하려 하자 <서구>가 말려서 멎었다.
장수 7년{AD439}기묘,
정월, 송(宋)사람 <도연陶堧>과 <손개만孫介万>이 찾아와 투항하였다.
<눌기>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개마(盖馬) 사람 <포득布得>이 3층으로 만들어진 황금 잔 세 개를 바쳐왔다.
<원상袁尙>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수 8년{AD440}경진,
8월, <의륭>이 찾아와 약재와 의원{의술}을 바치고 화의를 청하고서 백제로 향하였다.
백제 또한 <의륭>에게 사신을 보냈다.
장수 10년{AD442}임오,
2월, <경鲸>태자의 딸 <탁발拓跋>씨가 제5황후가 되어서 위(魏)의 도성으로 맞아 들여졌다.
4월, 선선(鄯善)의 사신이 낙타와 공작 및 타조 등을 바쳐왔기에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이때 위(魏)의 도성(都城)은 장안(長安)이다.
장수 11년{AD443}계미,
정월, <경鲸>태자가 사람을 보내 은밀히 알려오길;
“위(魏)가 저를 왕으로 내세우고 침입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사오니, 국경을 튼튼히 방비하심이 마땅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박거위(駁居位){座原}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란嘉蘭>에게도 잘 대하여 주십시오.
탁발(拓跋)이 <거배渠輩>를 시켜서 선처하게 말하였더니, 위(魏)주가 그러겠다고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형님은 참 나의 고지식한 신선이시오. 어찌 형님이 동생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처가 지아비를 아끼지 않고, 임금이 나라를 아끼지 않겠소?
<탁발도>가 비록 허황된 수고를 하더라도 자신이나 죽지 않으면 즉 다행일 것이오.
어느 겨를에 우리를 도모하겠소?”라 하였다.
개략 <도>가 처자식들의 뜻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지칭함이었다.
상의 형제 모두가 우애 있고 충성을 다하며, 후와 비 모두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따르고 있고,
황상의 자식 중에는 효도하지 않는 이가 하나도 없었으니, 상은 이리도 자신만만하였었다.
3월, <탁발{<하란>의 딸}>후가 <발跋>태자를 낳자, 사람을 보내서 위(魏)에 알려주었다.
이에 <경 >태자는 위(魏)주에게 말하길;
“제가 왕을 하지 않더라도, <발跋>은 응당 왕을 할 것이고, 그 세상은 폐하와는 장인과 사위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계{仙界}에서는 이미 천상{天上}께서 정하였으니, 인간들이 어찌 할 수는 없음입니다.”라 하였더니,
<도>는 그렇겠다고 여기고 쳐들어갈 계획을 잠재웠다.
상은 <탁발>후를 위무하여 “그대가 낳은 아들은 실로 나라의 보배요.”라 이르고는, <보궁>태자로 부르라 명하였다.
7월, 위(魏)의 사신이 와서, <탁발>후에게 적복{깃털 옷}을 전해주고, 상에게는 불로주 및 낙타와 소금을 전하였는데,
상에게 명하길 <가란{<탁발사>의 딸}>과 <탁발{<하란>의 딸}> 두 후와 함께 입조하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가란>후가 지금 임신 중인데 어찌 먼 길을 갈 수 있겠소.
아들 낳기를 기다렸다가, 짐이 서쪽 집안을 웃게 해 줄 계획이오.”라 하였더니, 사신은 몹시 즐거워하며 떠나갔다.
장수 13년{AD445}을유,
정월, 왜의 사신이 찾아와서 진주와 어피{물개 등의 가죽} 및 산호 등을 바치면서 청혼하였다.
이에 상은 “당신네 나라의 왕자는 찾아와서 공부하고 돌아가더니만 영영 소식도 없었고,
게다가 백제 또는 신라와는 싸우고 화친하길 무상케도 되풀이 하니,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짐은 한 무리의 군대를 보내서 누란 밟듯이 하고 싶었으나, 허물없는 백성들에게 잔인하게 할 수는 없었소.
돌아가거든 당신 주인이 알아듣게 하시오.”라 하였다.
3월, 선선(鄯善)의 사신이, 돌아가더니, 다시금 찾아와서 낙타와 좋은 말 50필을 바치면서 청혼하였다.
<해달>의 딸을 딸려 보내라 명하면서, 이르길;
“그대의 왕은 성심으로 사대하며 멀리에서 찾아와 조공하니, 짐이 어찌 한 여인만을 아낄 수 있겠소?”라 하였다.
6월, 위(魏)가 선선(鄯善)을 병합하였다.
장수 17년{AD449}기축,
9월, 위(魏)가 <유연柔然>을 대파하고 기세가 오르더니 점점 기고만장하여졌다.
유연(柔然)은 북방유목민족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인 타림분지에 세운 나라이다.
장수 19년{AD451}신묘,
3월, 황산엘 갔더니, 송(宋)의 사람인 <동등董騰> 등 100여 호가 투항하여 왔다.
상이, 송(宋)에 사는 사람들의 참상을 듣더니, 좌우들에게 이르길;
“그대들은 위(魏)의 강성함만을 얘기하고 그들의 취약함은 보지 못하고 있소.
어찌 아이를 꿰뚫은 창이 춤을 춘단 말이오.
연(燕)이 오갈 곳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은 장차 어디로 가야한단 말이오?”라 하였다.
장수 23년{/AD455}을미
3월, 미천릉에 갔다가 <비유>가 한산(漢山)에서 사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군 <풍돈風豚>이 기습하여 사로잡자고 청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불의에 나가는 것이 비록 좋은 계책 같긴 하나, 그들도 대비함이 없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잖소?
대저 일을 함에 는 항상 먼저 계획을 세운 연후에 행하여야만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손실이 크지 않은 것이거늘,
철저함 없이 임의로 일을 벌여서는 설혹 성사하여도 이롭지 않게 될 것이오.
더구나 <비유>는 사람됨이 말 많고 사람들을 가벼이 여기며 도리에 어긋나고 놀기를 좋아하니, 능히 오래가기나 하겠소?
기다리기만 하여도 나라와 자신을 좀먹을 것이고, 그대로 놔두어도 저절로 상할 것인데,
무엇하러 쓸데없이 힘들인단 말이요?”라 하였다.
과연 이해 9월에 <비유>가 갑자기 죽었고, 그 아들 <경사{부여경=개로왕}>가 섰다.
한산(漢山)은 대륙에 있는 산이다.
장수 28년{AD460}경자,
9월, 유연(柔然)이 사신을 보내 낙타를 바쳐왔다.
장수 31년{AD463}계묘,
4월, 송(宋)이 <번운藩雲>을 시켜 찾아와서 옥기와 약재 70 가지를 바쳤다.
장수 37년{AD469}기유,
8월, <경사>가 대방에 쳐들어왔다가 패하여 물러갔다.
10월, <경사>가 쌍현성 (﨎峴城)을 고쳤으며, 또한 청목령(靑木嶺)에 큰 책을 설치하고
북한산(北漢山)의 수졸의 나누어다 지키게 하였다. 상은 내버려두고 그 동정을 살피라고 명하였다.
장수 42년{AD474}갑인,
7월, 상은, <화덕華德>에게 명하여, 3만병을 이끌고 먼저 떠나라 하였다.
이때, 신라는 일모(一牟) ・사시(沙尸) ・광석(廣石) ・답달(沓達) ・구례(仇禮) ・좌라(坐羅) 등의 성을 쌓아서
백제를 대비하고 있었다.
신라가 쌓은 성은 대륙에 쌓은 성이다.
.....
장사 長史 <어진 箊真 >을 송(宋)으로, <을장 乙荘 >을 위(魏)로 보냈다.
상은 <경 慶 >이 놈에게 곧 베풀 생각이 있어서, 이 두 나라를 살핀 것이었다.
8월, <화덕>이 연전연승하여 도성을 포위하였고, <경>이 놈은, 오래도록 지켜낼 수 없음을 알았던지라,
먼저 처자들에게는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도망치게 하였는데, 장군 <풍옥>이 이들을 잡아서 바쳤다.
<경 慶 >이 놈의 처인 <아오지阿吾知>와 <가마지加馬只>, <문주文周>의 처 <오로지吾魯知>,
<곤지昆支>의 처 <자마紫麻> 등은 곱게 차리고 술을 따랐는데, 슬프고 애통한 기색이 없었다.
9월, 상은 북쪽의 성을 차지하였다는 얘길 들었기에,
<가加>와 <자紫>를 데리고 그 성중으로 들어가려고, 먼저 길을 깔끔히 정리하라 명하였다.
......
군신들은 거둥길이 더렵혀졌다 하여 상께 북쪽 성으로 들어가도록 간하였다.
아단성(阿旦城)으로 들어가서 포로들을 접수하였다.
9월 5일에 <재증걸루>가 <경사>를 함거에 싣고 도착하였고,
상은 <경사>를 살려주고 싶었으나, 군신들은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국강릉에 바치길 청하였다.
사로잡은 8천 명은 5부에 나누어 주어 노비로 삼았으며,
<경사>의 처첩과 궁인들은 공경들과 공을 세운 모든 장수들에게 비첩으로 삼게 하사하였다.
개로왕을 처형한 아단성(阿旦城)은 어디인가?
고이23년 병오(AD.286)
2월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대방왕 건虔}이 구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대방을 구하도록 명하였다.
고구려가 우리를 원망하여, 장차 변경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과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선하고 지붕을 이어 대비하였다.
342년 고연전쟁시 적들이 사천(蛇川)과 니하(泥河)로 다가왔고 대군이 꼬리를 물고 밀려오니,
아단(阿旦)과 안평(安平)성 등이 모두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고국양대제 6년 389년 9월에 아단성(阿旦城)에서 백제의 <두지豆知>를 크게 깨뜨렸다고 하였다.
필자는 아단성은 대륙의 사천(대방) 인근에 안평성은 니하(패수, 평양)인근에 있었다고 본다.
장수 43년{AD475}을묘,
정월, <자비>가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이미 명활성(明活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10월, <자비>가 웅진(熊津) 땅을 <문주>에게 빌려주어 남은 무리를 수습하게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유비>가 형주를 빌리더니 오와 서로 다투었소.
<자비>는 필시 <문주>에게 잠식당할 것이오.”라 하였다.
장수 48년{AD480}경신,
11월, 말갈에 명을 내려서 <신라>의 비열홀(比列忽)을 쳤다.
장수 49년{AD481}신유,
2월, <비처>가 비열홀로 가서 군사들에게 안부를 묻고 군포도 내려주었다.
<양덕陽德>이 말갈 병 2천을 이끌고 <창昶>태자와 함께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쳐서 취하고
미질부(彌秩夫)로 진군하였더니, 신라・백제・가야 등의 군대가 와서 니하(泥河)를 막아섰다.
니하(泥河)의 서쪽에서 싸워 천여 급을 베거나 사로잡았더니, <덕지>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물리쳤다.
장수 50년{AD482}임술
9월, <양덕陽德>이 말갈 병을 이끌고 한산성(漢山城) 을 쳐서 깨뜨리고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장수 52년{AD484}갑자,
7월, <양덕>이 관산성(毌山城)을 빼앗았더니, 신라와 백제가 병력을 합쳐서 쳐들어오기에,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장수 53년{AD485}기축,
2월, 신라가 구벌성(仇伐城)을 쌓았다.
5월, <모대牟大>는 <백가苩加>를 <비처毗処>에게 보내서 북쪽의 계책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였다.
장수 54년{AD486}병인,
정월, <비처毗処>가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아서 일선(一善)의 장정 3천을 징발하여
삼년(三年)과 굴산(屈山) 두 성을 고쳐 쌓았으며, <선혜>의 아비 <내숙>을 이벌찬・참국정으로 삼았다.
이에 상이 “<선혜>가 여우같이 음탕한 계집으로 정권을 틀어쥐었으니,
비록 성을 쌓았다고는 하나 무슨 소용 있겠는가?” 라 일렀더니,
황손이 “계집이 비록 여우같이 음탕하여도, 군왕이 곧게 서있다면야, 어찌 감히 나라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부황께서도 조금만 흔들리셨더라면 궁중은 <선혜>로 가득했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상은, 크게 웃으며,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7월, <모대>는 궁실을 고치고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쌓았다.
장수 55년{AD487}정묘,
2월, <비처>가 나을신궁(奈乙神宮)을 세웠다.
7월, 신라가 월성(月城)의 지붕을 수리하였다.
장수 56년{AD488}무진
<비처>는, 거처를 월성으로 옮기고 나서, 사궁{四窮 =鰥寡孤獨}들을 진휼하고, 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었더니,
눈이 여섯인 거북을 얻게 되었는데 복부에 해득하기 어려운 문양이 있어 그것을 풀어줄 사람을 찾는다 하였다.
<모대>는 위(魏)와 단교하고, 위(魏)의 악행을 남제(南齊)에 까발렸다.
그랬더니, 등주{登州}를 지키던 장수 <이연李延 >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섬 중에 있다가
<모대>가 사냥하러 왔음을 듣게 되어, 그를 사로잡고자 하였다.
<모대>는 이를 알아차리고 군병을 보내서 맞싸웠더니, <이연>은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되돌렸고,
<모대>는 점차로 땅을 되찾으며 북진하였다. 감국황제는, 상이 노심할까를 걱정하여, 불문에 부쳤다.
<모대>가 글을 올려 스스로 하소연하길;
“신의 조상 <온조>는, <동명>의 친아들이고 <유리>의 의붓아들이어서, 한남 땅과 구다국에 봉함을 받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사이가 벌어지더니, 두 분 황제께서 뜻하신 바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뉘어져서 땅과 경계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패하(浿河) 참사는 실로 황구할 따름이며, 이전의 신하 <개로>가 머리를 바쳐 더러움을 씻었음인즉,
형제의 나라들이 오래도록 서로의 직분에 흠결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감국황제폐하께서는, 지극히 어지시며 올바름을 널리 펴고 계시니,
위로는 조종님들이 베푸신 은덕을 한번 생각하여 주시고,
아래로는 큰 나라가 자식을 기르는 은택을 베풀어 <한남{汗南}>땅을 돌려주시어서
이 골육이 그 땅에 발붙이고 근본께 보답할 수 있게 하여주신다면,
신은 우익{羽翼=輔佐}이 되어서 동명{東明}의 큰 꿈을 좇아 서쪽 중원으로 들어가
버릇없는 싹수들{魏등}을 주살하고 참할 것입니다.
이리 할 수 있다면, 천손의 후예는 무지무지한 행운일 것입니다.”라 하였다.
필자는 <모대>가 올린 글은 야마토를 떠나 대륙에 진출한 <사마>가 올린 글이라고 본다.
감국이 웃으며 이르길;
“<비처>가 삼모성을 고쳤으며 월성으로 이사하였으니, 놈{=<모대>}은 편안히 웅진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오.
기회를 살피다가 꼬여내어서 그놈들을 사로잡아도 늦지 않으니, 잠시 그놈들이 하는 대로 두고 봅시다”라 하였다.
7월, <비처>가 도나성(刀那城)을 쌓았다.
장수 57년{AD489}기사
7월에 <호용好勇>이 칠중성(七重城){백제}>을 빼앗았다.
9월엔 <양덕陽德>이 호산성(狐山城){신라}>을 함락시키고는 <실죽>의 군대와 서로 대치하였다.
<비처>가 사신을 보내어 보옥을 바치고 옛날과 같이 공물을 바치고 영원토록 사위나 아들로 돌아가게 하여주길 청하였다. 이에 감국은 상에게 주청하여 아뢰길; “<비처>가 비로소 알아들었으니, 잠시 그 청을 들어주어서, 나라를 안일하게 하고, 부황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렸으면 합니다. 어찌 생각하시는지요?”라 하였더니,
상이 답하길; “세상사 모두를 일찍이 너에게 맡겼거늘, 하필이면 내게 묻느냐?
나는 네 어미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죽고만 싶구나.”라 하였고,
감국은 “아우들을 무수히 낳아주시면서 천년만년 누리시길 원하옵니다. 어찌 죽겠다는 말씀을 하시옵니까?”라 아뢰었다.
장수 58년{AD490}경오,
7월, <모대>는 북부의 15살 이상 백성을 징발하여 사현(沙峴)과 이산(耳山)의 두 성을 쌓았다.
장수홍제호태열제는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바꾸고,어질고 정의로운 정치를 펼쳐 강역을 더욱 넓혔다.
웅진강의 이북이 고구려에 속하였고, 북연과 그에 속해있던 나라들이 모두 서족(叙族)으로 복속시켰다.
또 신라의 왕(매금)과 백제의 왕(어하라)을 남평양으로 불러들여
납부해야할 조공의 양과 수비를 위한 최소한의 군사의 수를 정하도록 하였다.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북한의 평양을 남평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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