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高唐전쟁(647-8년)(3)

지보고 2023. 11. 16. 11:43

 

 

1. 제 2차 고당전쟁(647-8년)

 

보장왕 6년(647)

 [봄 2월에] [당나라] 태종이 다시 군대를 보내려 하니 조정의 의논이 이러하였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전에 황제께서 친히 정벌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우리가] 이긴 성에서도 실로 그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백성들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적은 군대를 자주 보내 번갈아서 그 강토를 어지럽혀, 그들을 명령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게 해서 피곤하게 하면,

[그들은] 쟁기를 놓고 보(堡)로 들어갈 것이며, 수 년 동안 천리가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떠날 것이니,

압록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태자 첨사(詹事)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朗>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의 군사를 앞세우고  신성도로부터 들어오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어서 잘 싸우는 자들을 골라 배치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고구려의 산성을 갑자기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고구려를 공격하는 방안으로 압록수 북쪽 지역에

적은 부대를 자주 보내 고구려의 영토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끔 논밭을 망가뜨리거나

마을을 불태우는 등의 방법으로 강토를 어지럽히는 방안을 제시한다.

 

황제가 이 말에 따라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만여 명을 파견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래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하였다.

  

당나라는 만 여명의 군사를 누선에 태워 요동으로 보낸다.

 

보장왕 6년(647)

[여름 5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를 건너 남소(南蘇) 등 몇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대는] 모두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이]세적이 이를 격파하고 그 나성(羅城)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요수를 넘은 3천명의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 산성을 지나가면서 외성인 나성(羅城)을 불지르고 돌아간다.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를 막기위해 성밖에 나와서 싸웠으나

수성전(守城戰)에 달인인 고구려는 성밖의 전투에서는 당나라를 당해내지 못한다. 

  

보장왕 6년(647)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무릇 백여 차례나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아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만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3천 명이었다.

 

보장왕 6년(647)

[8월에] 태종이 송주(宋州) 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하고 우리를 치려 하였다.

 

보장왕 6년(647)

겨울 12월에 왕은 둘째 아들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보장왕 7년(648)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래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보장왕 7년(648)

여름 4월에 오호진(烏胡鎭)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공해 와서

우리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들을 깨뜨렸다.

그날 밤에 우리 군사 만여 명은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고]신감의 복병이 나와 [우리가] 패하였다.

3만의 당나라 군대가 압록강으로 가는 동안 역산(易山)에서 고구려 군대와 만났다.

 

보장왕 7년(648)

가을 7월에 태종이 좌령좌우부(左領左右府) 장사(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劍南道)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은 길이가 100자나 되고 넓이는 그 반이나 되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 수로로 가서 무협(巫峽)으로부터 강주(江州)·양주(楊州)에 이르러 래주(萊州)로 가게 하였다.

 

보장왕 7년(648)

9월에 (중략)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작성(泊灼城)은 산에 의지하여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무너졌다.

   

당나라군이 박작성을 포위하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3만명의 구원군을 보내준다.

하지만 고구려 구원군은 <설만철>에게 패한다. 

당나라군은 압록강까지 진출하였고 래주에서 압록강으로 가는 길을 완성시킨다. 

 

649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무너뜨리려고 한 해에 사망하였다.

 

<이세민>의 사망으로 전쟁이 중단되었지만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로를 완성시켰으며 평양을 사정권으로 두게 되었다

 

고구려는 점차 무너져 가고 있었다

 

 

 

2. <연개소문>이 쌓았다는 천리장성의 실체

 

정관 5년(631) 광주도독부 사마 <장손사>를 보내어 수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수습하고

고구려가 세웠던 경관을 헐어 버렸다.

<건무>는 그 나라가 정벌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장성을 쌓으니

동북 부여성(夫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니 1천여 리가 되었다. 

五年詔遣廣州都督府

司馬長孫師往收瘞隋時戰亡骸骨毀高麗所立京觀

建武懼伐其國乃築長城東北自扶余城西南至海千有余裡

<구당서 열전 제149 동이>

 

14년(서기 631), 당나라에서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어

수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가서 제사 지내고, 당시에 세웠던 경관(京觀)을 헐어 버렸다.
봄 2월, 임금이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다.

동북 부여성(扶餘城)에서 부터 동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

이 성은 16년 만에 준공되었다.
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瘞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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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삼국사기 631년 기사

 

 

及高成卽位 盡棄前帝之遺法 遣唐求老子像 使國人 聽講道德經

又動衆數十萬 築長城 自扶餘縣 至南海府 千有餘里

마침내 (영양왕이 죽고 후사가 없어) <고성高成 (건무建武 제 27대 영류왕, 재위 AD 618 - AD 642)>이 즉위하였다. 

<고성>은 전 황제의 모든 유법(遺法, 정책)을 폐기하였다.

그리고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노자상(도교)을 받아들이고,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하도록 하였다.

또 수십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에서 남해부에 이르는 1천여 리다.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 나라가 들어서자 고구려는 당의 침공에 대비하여 631-647년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구당서는 부여성으로 부터 서남쪽으로 1천여리라 하고 삼국사기는 동남쪽으로 1천여리라 한다.

그리고 태백일사는 부여현에서 남해부에 이르는 1천여리라고 한다.

 

고수전쟁과 고당전쟁 양상을 보면 사뭇 다르다. 

 

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끌고 온 제2차 전쟁(612년) 때, 

수나라의 <우문술> 부대는 살수를 지나 평양의 서쪽 30리 황산(黃山)까지와서 주둔하고

<내호아>의 부대는 평양의 남쪽 60리 까지 와서 주둔하였다.

 

반면 제1차 고당전쟁의 경우 당나라는 돌파구를 찾으려 계속 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을 두들겼지만 실패했다.

두 나라가 같은 지역에서 싸웠으면서 다른 전쟁을 보였다는 것은,

고수 전쟁 후 축조된 천리장성이 역할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이때 천리장성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면, 전쟁이 끝난 647년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시황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만리장성은 훗날 여러 왕조를 거치며 개축되고 또 개축되었다가 

명나라 때 와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면 진시황이 쌓았다는 만리장성은 어떤 모습일까?

섬서성에서 요녕성성까지 장성을 쌓았다하여도 5천리도 채 되지않는다.

그런데 왜 그들은 지금도 진시황이 쌓은 장성을 만리장성이라고 할까?

필자는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후 중원에 있는 모든 장성과 새로 신축한 장성의 폭원(幅員)을 합한 것이 만리라고 본다.

 

그리고 물리적인 장성의 방어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이민족이 중원을 침략할 때 물리적인 장성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반면 개별 성들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경우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한 성이 공격 받을 때 다른 성에서 지원을 할 수 있으며, 성과 성이 적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다.

또 어느 한 성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성이 있으므로 방어선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방벽과 같은 구조는 한 곳만 무너지면 그냥 뚫릴 수밖에 없다.

645년 4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 개모성을 공격할 때 개모성 주변에 있는 가시성에서 지원군을 보내 

당나라 군대를 공격한 사례가 있다.

백암성이 공격 당할 때 오골성에서 1만의 지원군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요동성이 포위 되었을 때  신성과 국내성에서 4만명의 보병과 기병을 보내기도 하였다.

 

소규모 요새들은 아군 성을 공격하는 적의 배후를 기습 타격하는 것은 물론

아군의 주요 성을 공격하는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작은 요새라도 공격 측에서는 주둔 병력보다 최소 2배의 병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점령전이 가능했다.

게다가 중소 규모 성들이나 보루는 아군의 휴식처나 물자 보관소 역할도 했다.

방어선에서 적의 발을 묶거나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적고 분산되어 있는 고구려가 오랜 세월 축적한 방어 노하우였다.

이렇듯 고당전쟁에서 고구려 성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적의 침입에 맞섰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에 이런 성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구려의 성은 총 176개이다.

이 중 80%는 요동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

그야말로 한정된 지역에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성이 요동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고구려는 만리장성과 같은 장벽 방어망보다 요새 네트워크 방어망을 천리 구축했다는 이야기이다.

 

부여성에서 비사성까지는 대략 백리의 거리이다.

백리의 거리에 천리장성을 구조물로 쌓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고구려의 요동에 있는 기존의 성과  새로 쌓은 성을 연결하여

방어망을 구축한 성의 폭원(幅員)의 합계가 천여리에 달하였다고 본다.

비사성은 대략 폭원 9리이고, 요동성은 대략 폭원 20리의 내성과 외성(外城, 羅城)으로 지었을 것으로 본다.

폭원 10리의 성 100개 정도를 수리하고 신축하였던 것을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을 볼 때,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편견처럼 만리장성과 같은 연결된 구조물이 아니라

오늘날 GOP 비슷한 개념의 전선(戰線) 내지는 요새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천 리에 이르는 구간에 길게 성을 쌓았다는 것은

기존에 있던 성들을 증축, 보수하거나 새로운 성들을 쌓아 서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무용지물이 아니었으며 임시로 대충 만든 것도 아니었으며 만리장성과 같은 장벽 구조가 아니었다.

 

천리장성의 문헌 출현이 적다는 지적 역시 고수전쟁 고당전쟁의 차이를 살펴보면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수나라의 침공 당시 수나라군은 통상적으로 임유관→영주  통정진 요하를 거치는 루트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고구려군의 첫 번째 주 저항선 역시 통정진 요하 루트의 도하 지점에 있었다. 

 

고당전쟁시에는 침공 루트와 방식이 다양해졌는데, 바로 천리장성의 축성으로 인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시 당나라군은 통정진뿐 아니라  요하 하구와 다양한 지역에서 도하 작전을 수행했다.

 

이는 우월한 기동력을 갖춘 군대가 장성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통상적인 작전으로,

여러 장소가 일거에 공격을 받으면 수비 전력은 자신의 수비 범위에서만 수비가 가능해

상호 지원이 불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방어선에 구명이 나면 수습이 힘들어 지기 때문이다.

1차 고당전쟁 시의 천리장성의 존재는 간접적으로 확인이 되지만 당나라의 후속 침공 시 천리장성의 기록 부재는

당 원정군의 성격 변화에서 해답을 도출할 수 있다.

 

2차 고당전쟁 시에는 산성의 함락이 어려워 평지의 외성인 나성(羅城)을 불태우고 노략질하여

고구려의 수비를 어렵게 하였다.

 

구당서에 따르면 666년 경 요하에는 약 15만의 고구려군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요동성과 같은 고구려 거점성의 병력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그러나 1차 침공 이후 고구려에 소규모 공격을 가했던 이세적의 군에 '물에 익숙한 자'들로 구성된 부대가 배치되었고

1차 침공 이후에 당군이 요동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가하지 않았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차 고당전쟁 이후 고구려가 당군의 동시다발적인 도하에 대응하고자 요하 유역에 방어군을 대폭 전진 배치 했고,

이 때문에 당군 수뇌부는 요동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따라서 당군은 소규모 습격 시에도 도하 작전에 유용한 부대를 투입했으며

상대적으로 고구려의 후방인 패수에 우회 상륙하는 방식을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연남생>의 항복으로 고구려의 심장부인 국내성 일대가 당군에 넘어간 상태에서 시작된 고당전쟁에서는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 방어선에 전방위적인 대규모 공세를 가하게 되고

요동 방어선 북방의 최고 요충지인 신성의 함락을 시작으로

방어선이 우후죽순으로 와해되면서 고구려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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