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 양제의 2차 침공(613년)
冬,十月,甲寅,工部尚书宇文恺卒。
겨울 10월 갑인일(8일)에 공부상서 <우문개>가 죽었다.
十一月,己卯,以宗女为华容公主,嫁高昌。
11월 기묘일(3일)에 종실의 딸을 화용(華容)공주라 하고
고창(高昌, 신간성 트루판시 동쪽)에 시집을 보냈다.
宇文述素有宠于帝,且其子士及尚帝女南阳公主,故帝不忍诛。
<우문술>은 평소에 황제에게 총애를 입으며,
또한 그의 아들 <우문사급>은 황제의 딸 남양(南陽)공주를 모시고 살았으므로 황제는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甲申,与于仲文等皆除名为民,斩刘士龙以谢天下。
萨水之败,高丽追围薛世雄于白石山,世雄奋击,破之,由是独得免官。
以卫文昇金为紫光禄大夫。
诸将皆委罪于于仲文,帝既释诸将,独系仲文。
仲文忧恚,发病困笃,乃出之,卒于家。
갑신일(8일)에 <우중문> 등과 더불어 모두 제명시켜서 백성으로 만들고,
<유사룡>의 목을 베어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하였다.
살수(薩水)에서 패배하자 고구려는 추격하여 <설세웅薛世雄>을 백석산(白石山)에서 포위하니
<설세웅>은 분발하여 공격하여 그들을 깨뜨렸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홀로 관직만 면제될 수 있었다.
<위문승>을 금자광록대부로 삼았다.
제장들이 모두 <우중문>에게 죄를 씌우니, 황제는 이미 제장들을 석방하였지만 홀로 <우중문>만 가두었다.
<우중문>이 근심하며 화를 내다가 병이 발생하고 어려운 것이 심해지자 마침내 그를 내보내었는데 집에서 죽었다.
백석산은 지금의 보정시 래원현의 백석산이다.
是岁,大旱,疫,山东尤甚。
이 해에 크게 가물어 역병이 돌았는데 산동(山東)이 더욱 심하였다.
张衡既放废,帝每令亲人觇衡所为。
帝还自辽东,衡妾告衡怨望,谤讪朝政,诏赐尽于家。
衡临死大言曰:“我为人作何等事,而望久活!”
监刑者塞耳,促令杀之。
<장형張衡>이 이미 추방되고 나자 황제는 매번 친한 사람으로 하여금 <장형>이 하는 짓거리를 엿보게 하였다.
황제가 요동에서 돌아오자 <장형>의 첩이 <장형>이 원망하여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였다고 고발하니,
조서를 내려서 집에서 자진(自盡)하도록 하였다.
<장형>이 죽음에 임하여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였다고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형벌을 감독하는 사람이 귀를 막고 그를 죽이도록 재촉하였다.
<장형>은 수 문제 <양견>을 눌러 죽였는데 수 양제 <양광>이 <장형>을 죽여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며,
이 일은 수 문제 인수 4년(604년) 7월의 일이므로 8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형벌을 감독하는 사람이 8년 전 사건을 듣는다면
수 양제는 다시 그 입을 막으려고 죽일 것이므로 귀를 막은 것이다.
24년(서기 613) 봄 정월, 수나라의 양제가 조서를 내려 전국 군사들을 탁군(涿郡)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驍果, 군직명)로 삼아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2월, 양제가 신하들에게 말했다.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는데,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리고 양제가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이 간언하였다.
“오랑캐가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들이 처리할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양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름 4월, 양제는 요수를 건넜다.
그는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에게 평양으로 향하게 하고,
<왕인공王仁恭>은 부여를 경유하여 신성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수만 명의 우리 병사들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왕인공>의 강한 기병 1천여 명에게 패하였다.
우리의 군대는 성을 굳게 지켰다.
양제가 모든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을 치게 하고,
그들에게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비루동(飛樓橦), 운제(雲梯), 지도(地道)를 이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였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수나라에서 길이가 열댓 길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驍果) <심광沈光>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보며
우리의 군대와 짧은 병기를 가지고 접전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우리의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밀었는데, 그는 땅에 채 닿기 전에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다.
양제가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그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자, 양제는 1백만 여 개의 자루를 만들어 보냈다.
그는 자루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둑길을 쌓게 하고,
병사들에게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또 한편으로 성보다 훨씬 높은 여덟 개의 바퀴 달린 고공 수레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둑길에 세워 성 안을 내려다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공격하려고 하자 성 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수나라에서 <양현감楊玄感>이 반역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양제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또한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양현감>의 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이때 수나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본래부터 양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쳐왔다.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군수 기자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대는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였다.
다만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午時)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수나라의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병사를 내어 추적해 갔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십 리에서 9십 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의 군대가 따라 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 수 양제의 3차 침공(614년)
25년(서기 614) 봄 2월, 양제가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제가 조서를 내려 다시 전국 병사를 소집하여 여러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군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제가 회원진(懷遠鎭)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수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병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나라도 역시 지치고 쇠약한 상태였다.
수나라의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의 병사가 맞이하여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斛斯政>을 돌려보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를 가진 사절을 보내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회원진은 곡양(曲陽) 인근이고 비사성은 남옥저 인근으로 훗날 발해의 남경인 남해부가 있던 곳이다.
8월, 양제가 회원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겨울 10월, 양제가 서경(西京)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또한 우리의 임금에게 수나라의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양제가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嬰陽武元好太烈帝 時 天下大理 國富民殷 隋主 楊廣 本 鮮卑遺種 統合南北之域 以其餘勢 侮我高句麗
以爲小虜 侮慢上國 頻加大兵 我旣有備 而未嘗一敗也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때에 천하를 크게 잘 다스려, 국가는 부강하고 백성들은 번성하였다.
수나라 왕 <양광楊廣>은 본래 선비(鮮卑)에서 흘러온 종족인데, 남북(南北)지역을 통합하고,
기세등등하여 우리 고구려를 작은 나라(小虜)라고 업신여기고,
상국(上國)을 기만하며 얕잡아 보고는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우리는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싸움에서 한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양광楊廣>은 AD 597년 중국의 남북조를 통일한 수문제(隋文帝, 양광의 父)가 AD 598년 고구려와의 1차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양광(楊廣)의 난'을 일으켜 태자인 형과 아버지인 수문제를 죽이고 양위를 탈취한 패륜아다.
<양광>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이연(李淵)의 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결국 역사속에서 사라진다.
弘武二十五年 廣 又復東侵 先遣將兵 重圍卑奢城 官兵戰不利 將襲平壤 帝聞之 欲圖緩兵
執遣 斛斯政 適有 皂衣一仁者 自願請從 而偕到 獻表於楊廣 廣 於舡中手表 而讀未半 遽發袖中小弩 中其胸
廣 驚倒失神 右相羊皿 使負之 急移於小船而退 命 懷遠鎭撤兵
홍무 25년(614년)에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하였다.
먼저 장병들을 보내 비사성(卑奢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관병들이 나아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장차(將) 평양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열제(帝)는 완병술(緩兵, 기만전술)을 쓰기로 하고,
곡사정(斛斯政)을 보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조의(皂衣) <일인一仁>이 자원하여 (곡사정을) 따라갈 것을 청하여 함께 적진으로 들어갔다.
<곡사정>은 <양광楊廣>에게 표(表, 서장(書狀))를 전하였다.
<양광>이 배(舡)에서 서장(表)을 손에 받아 들고 채 절반도 못 읽었는데
(일인은) 소매 속에 감추었던 소뇌(小弩, 작은 활)를 꺼내 양광의 가슴 한복판을 명중시켰다.
<양광>은 기절하여 넘어져 실신하였다.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그를 업게 하고, 급히 작은 배(小船, 쾌속선)로 옮긴 후 도망치며,
회원진(懷遠鎭)에서 철병할 것을 명하였다.
廣 謂左右曰 予爲天下主 親伐小國而不利 是非萬世之所嗤乎 羊皿等面黑無答 後人歌之 曰 嗟汝蠢蠢漢家
兒 莫向遼東浪死歌 文武我先號桓雄 綿亘血胤英傑多 朱蒙太祖廣開土 威振四海功莫加 紐由一仁楊萬春
爲他變色自靡踒 世界文明吾最古 攘斥外寇保平和 劉徹楊廣李世民 望風潰走作駒過 永樂紀功碑千尺 萬旗一色太白峨
(후에) 양광(廣)은 좌우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소국(고구려)을 정벌하려 나섰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어찌 만세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양명羊皿> 등은 얼굴색이 똥색(黑)으로 변하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고 한다.
후세인들은 이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
그 내용인 즉
嗟汝蠢蠢漢家兒 어리석고 둔한 한족의 어린애들아, 너희들은 정말로 한심하구나!
莫向遼東浪死歌 이제는 더이상 요동을 넘나들지 말거라, 죽음 소리만 있을 뿐이다.
文武我先號桓雄 문무백관들을 우리 선조들은 환웅이라 불렀으니
綿亘血胤英傑多 그 정신과 피가 면면히 이어져 우리에겐 영웅호걸이 많단다.
朱蒙太祖廣開土 주몽과 태조대왕과 광개토대왕은
威振四海功莫加 그 위세를 온누리에 떨쳤으니 그 공은 더할 나위 없단다.
紐由一仁楊萬春 유유와 일인과 양만춘은
爲他變色自靡踒 다른 사람을 위해 변색(위장)하여 스스로 몸을 바쳤단다.
世界文明吾最古 세계에서 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되었고
攘斥外寇保平和 오랑캐(외적)와 도적떼들을 모두 물리쳐 평화를 지켜왔단다.
劉徹楊廣李世民 유철(한무제)과 양광(수양제)과 이세민(당태종)도
望風潰走作駒過 바람 소리만 듣고도 궤멸되어 망아지처럼 도망쳤단다.
永樂紀功碑千尺 영락기공비가 우뚝 서 있고
萬旗一色太白峨 만 가지 깃발이 한 색으로 태백의 봉우리를 덮고 있단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전쟁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高唐전쟁(645년)(2) (1) | 2023.11.15 |
---|---|
高唐전쟁(645년)(1) (1) | 2023.11.14 |
高隋전쟁(598년, 612-4년)(2) (0) | 2023.11.11 |
高隋전쟁(598년, 612-4년)(1) (0) | 2023.11.10 |
高燕전쟁(407년, 광개토호태왕 vs 모용희) (0) | 2023.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