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년 정월 드디어 수양제 <양견>은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7) 세계 최대의 전쟁 발발
壬午,诏左十二军出镂方,长岑、溟海、盖马、建安、南苏、辽东、玄菟、扶馀、朝鲜、沃沮、乐浪等道,
右十二军出黏蝉、含资、浑弥、临屯、候城、提奚、蹋顿、肃慎、碣石、东施、带方、襄平等道,骆驿引途,总集平壤,
凡一百一十三万三千八百人,号二百万,其馈运者倍之。
宜社于南桑干水上,类上帝于临朔宫南,祭马祖于蓟城北。
帝亲授节度:每军大将、亚将各一人;
骑兵四十队,队百人,十队为团,步卒八十队,
分为四团,团各有偏将一人;
其铠胄、缨拂、旗幡,每团异色;
受降使者一人,承诏慰扶,不受大将节制;
其辎重散兵等亦为四团,使步卒挟之而行;进止立营,皆有次叙仪法。
임오일(2일)에 조서를 내렸는데,
좌익 12군은 누방(鏤方), 장령(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夫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등으로 가는 길로 출발하고,
우익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蹋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시(東施), 대방(帶方), 양평(襄平) 등으로 가는 길로 출동하게 하며,
서로 끊임없이 길을 이어 평양(平壤)에 모두 집합하게 하였는데,
무릇 1백13만3천800명이었고, 2백만 명이라고 불렀으며, 군량미를 수송하는 사람은 그에 두 배가 되었다.
남상간수(南桑干水)에서 토지신에게 의제(宜祭)를 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게 유제(類祭)를 지냈으며, 계성(薊城)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를 지냈다.
황제가 친히 지휘를 하였는데, 매 군(軍)마다 대장(大將)과 아장(亞將)이 각각 1명이었고
기병은 40대(隊)로 하였으며, 대(隊)는 100명으로 하여 10대(隊)를 단(團)으로 하였으며,
보병 80개의 부대는 4개의 단(團)으로 나누었으며, 단에는 각기 편장(偏長) 1명씩을 두었으며,
그 개주(鎧胄, 갑옷), 영불(纓拂, 갓끈), 기번(旗旛, 깃발)은 매 단(團)마다 색깔을 달리하였다.
수항사자(受降使者) 1명은 조서를 받들어 위무하게 하고, 대장의 통제를 받지 않게 하였다.
그들의 치중(輜重)과 산병(散兵) 또한 네 개의 단(團)으로 하였으며, 보병으로 하여금 그들을 끼고 행군하게 하였으며,
전진하고 머무르며 군영을 세우는 일은 모두 순서와 규정이 있었다.
1군단은 기병 4,000명, 보병 8,000명, 치중병 8,000명, 산병 8,000명 도합 28,000명이다.
24군단 x 28,000명 = 672,000명, 군량미 수송 인원 461,800명 합계 1,133,800명이 참전한 인원이다.
모두가 평양의 남쪽과 서쪽에 있는 지명으로
좌익 12군은 내부 깊숙히 침공하고 우익 12군은 외곽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 됨
癸未,第一军发;日遣一军,相去四十里,连营渐进;
终四十日,发乃尽,首尾相继,鼓角相闻,旌旗亘九百六十里。
御营内合十一卫、三台、五省、九寺,
分隶内、外、前、后、左、右六军,次后发,又亘八十里。
近古出师之盛,未之有也。
계미일(3일)에 제1군이 출발하였는데,
매일 1군씩을 보내는데 서로간의 거리는 40리였으며, 군영을 연결하며 조금씩 전진하였고,
40일을 끝내자 출발하는 것이 마침내 다하였으며,
선두와 후미가 서로 이어져서 북소리와 호각소리가 서로 들렸으며 정기(旌旗)가 뻗은 것이 960리였다.
어영(御營)안에는 12위(衛) 3대(三臺) 5성(五省) 9시(九寺)를 합쳤으며,
내외전후좌우 6군(軍)으로 나누어 예속시켰으며, 차례로 출발하니, 또한 80리에 걸쳐 있었다.
근고 이래로 군사를 출동하는 방대한 규모로는 아직 있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612년 1월 3일 제1군이 정주에서 출발하고 차례로 줄을 이어 출병하여 2월 11일(40일 후)에 모든 출병이 끝난다.
甲辰,内史令元寿薨。
갑진일(24일)에 내사령 <원수元壽>가 죽었다.
二月,壬戌,观德王雄薨。斋
2월 임술일(12일)에 관덕왕(觀德王) <양웅楊雄>이 죽었다.
北平襄侯段文振为兵部尚书,上表,以为帝
“宠待突厥太厚,处之塞内,资以兵食,戎狄之性,无亲而贪,异日必为国患。
宜以时谕遣,令出塞外,然后明设烽候,缘边镇防,务令严重,此万岁之长策也”
兵曹郎斛斯政,椿之孙也,以器干明司,为帝所宠任,使专掌兵事。
文振知政险薄,不可委以机要,屡言于帝,帝不从。
及征高丽,以文振为左候卫大将军,出南苏道。
文振于道中疾笃,上表曰:
“窃见辽东小丑,未服严刑,远降六师,亲劳万乘。
但夷狄多诈,深须防拟,口陈降款,毋宜遽受。
水潦方降,不可淹迟。
唯愿严勒诸军,星驰速发,水陆俱前,出其不意,则平壤孤城,势可拔也。
若倾其本根,馀城自克;如不时定,脱遇秋霖,深为艰阻,兵粮既竭,
强敌在前,靺鞨出后,迟疑不决,非上策也。”
북평양후(北平襄侯) <단문진段文振>이 병부상서가 되어 표문을 올려서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 돌궐을 총애하고 대우하는 것이 대단히 두터워서 그들을 요새 안에 거처하게 하여
무기와 양식을 공급해 주는데, 융적의 성격은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탐욕스러워서
먼 훗날에 반드시 나라의 걱정이 될 것이니,
때때로 유시(諭示)하여 보내어 요새 밖으로 나가게 해야 하며,
그런 연후에 봉화대를 설치하여 살피면서 변경을 따라 진압하고 방어하며
엄중하게 경계하는데 힘써야 하니, 이것이 만 년이 나갈 좋은 계책입니다.”
병조랑(兵曹郞) <곡사정斛斯政>은 <곡사춘斛斯椿>의 손자인데,
그릇이 단단하고 총명하여 황제에게 총애와 신임을 받았으므로 군사에 관한 일을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다.
<단문진>은 <곡사정>이 험악하고 경박함을 알고 기밀에 관한 중요한 일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황제에게 여러 차례 말하였으나 황제는 좇지 않았다.
고구려를 정벌하게 되자 <단문진>을 좌후위대장군으로 삼아 남소(南蘇)로 가는 길로 출동하게 하였다.
<단문진>은 도중에 병세가 위독하자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요동의 소추(小醜, 고구려)가 아직 엄한 형벌로도 굴복하지 않아
먼 곳까지 육사(六師)가 내려왔으며 친히 만승(萬乘)을 수고롭게 하였습니다.
다만 이적들은 속이는 일이 많으니 깊이 조심하여 막아야 하며,
입으로 항복하겠다는 정성을 진술하여도 급히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장맛비가 바야흐로 내리게 돌 것이니, 머물러 지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여러 군영을 엄중히 챙겨가지고 별같이 달리고
신속히 출발하여 수륙(水陸)으로 함께 전진하여 그들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나오면
평양은 고성(孤城)이 되어 기세로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의 근본이 기울어지면 나머지 성들은 자연히 이기게 되니,
만약 때에 맞추어 평정해지지 않고 가을 서리를 만나고 깊이 들어가서
어려운 장애를 만나게 되면 무기와 양식이 이미 고갈되고
강한 적군은 앞에 있게 되며 말갈이 배후에서 출동할 것이어서
지연하고 의심하여 결정하지 아니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三月,辛卯,文振卒,帝甚惜之
3월 신묘일(12일)에 <단문진>이 죽자 황제는 심히 그를 애석해 하였다.
<단문진>은 병부상서 좌후위 대장군으로 남소로 출발하는 부대의 대장군이었다.
癸巳,上始御师,进至辽水。
众军总会,临水为大陈,高丽兵阻水拒守,隋兵不得济。
左屯卫大将军麦铁杖谓人曰:
“丈夫性命自有所在,岂能然艾灸頞,瓜蒂歕鼻,治黄不差,
而卧死儿女手中乎!”
乃自请为前锋,谓其三子曰:
“吾荷国恩,今为死日!我得良杀,汝当富贵。”
帝命工部尚书宇文恺造浮桥三道于辽水西岸,
既成,引桥趣东岸,桥短不及岸丈馀。
高丽兵大至,隋兵骁勇者争赴水接战,高丽兵乘高击之,
隋兵不得登岸,死者甚众。
麦铁杖跃登岸,与虎贲郎将钱士雄、孟叉等皆战死。
乃敛兵,引桥复就西岸。
诏赠铁杖宿公,使其子孟才袭爵,次子仲才、季才并拜正议大夫。
更命少府监何稠接桥,二日而成,诸军相次继进,大战于东岸,
高丽兵大败,死者万计。
诸军乘胜进围辽东城,即汉之襄平城也。
车驾渡辽,引曷萨那可汗及高昌王伯雅观战处以慑惮之,
因下诏赦天下。
命刑部尚书卫文昇、尚书右丞刘士龙抚辽左之民,
给复十年,建置郡县,以相统摄。
계사일(14일)에 황상은 비로소 군사들이 있는 곳에 가서 전진하여 요수(遼水)에 도착하였다.
3월 신사일 (612.3.2음), 황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거동하였다.
무자일 (612.3.9음), 요수의 다리에서 진영에 임하였다.
신묘일(612.3.12음), 대군이 적의 저항을 받아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우둔위대장군‧좌광록대부 맥철장, 무분랑장 전사웅, 맹금의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계사일(612 3.14음) 수 양제의 거가가 요수에 도착하였다.
갑오일(612.3.15음) 거가가 요수를 건넜다.
수 양제의 거가가 음력 3월 2일에 탁군(정주)을 출발하여 8일만인 음력 3월 9일에 요수에 다다른다.
탁군에서 요수까지는 100km 미만의 거리이다.
많은 군대들이 총집합하여 물가에 가서 크게 벌려 놓았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강에서 저지하고 방어하며 지키니 수의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좌둔위대장군 <맥철장麥鐵杖>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 장부의 목숨은 스스로 있을 곳이 있는데, 어찌 쑥으로 콧대에 뜸을 뜨고 참외 꼭지를 코에 뿜으며
열병을 치료하여도 차도가 없다하여 아이새끼들의 손아귀에서 누워 죽을 수가 있겠는가?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겠다고 요청하고 그의 세 아들에게 말하였다.
“ 내가 나라의 은전을 입었는데 지금이 죽는 날이다.
내가 아름답게 죽을 수 있다면 너희들은 부귀를 누리게 될 것이다.“
황제는 공부상서인 <우문개于文愷>에게 명령하여
요수(遼水)의 서쪽기슭 세 길에 부교를 설치하게 하였는데,
이미 완공되자 부교를 끌고서 동쪽기슭으로 가게 하였으나 다리가 짧아서 1여 장(丈) 정도가 미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대규모로 도착하자 수의 군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사람들은
다투어 강물에 뛰어들어 맞붙어 싸웠으며,
고구려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 그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수의 군사들은 언덕을 오를 수 없었고 죽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맥철장>이 기슭으로 올라가서 호분낭장 <전사웅錢士雄>과 <맹차孟叉>등과 더불어 모두 싸우다 죽었다.
마침내 군사들을 거두어 다리를 끌어다가 다시 서쪽기슭으로 갔다.
조서를 내려 <맥철장>을 숙공(宿公)으로 추증하고,
그의 아들 <맥중재麥仲才>와 <맥계재麥季才>도 나란히 정의(正議)대부로 제수하였다.
다시 소부감(小府監) <하주何椆>에게 명령하여 부교를 잇도록 하여 이틀이 되어 완성되자
각 부대는 서로 순차적으로 계속 전진하게 하여 동쪽기슭에서 크게 싸우니
고구려의 군사들이 대패하여 죽은 사람들이 1만을 헤아렸다.
각 부대에서는 이긴 기세를 타고 전진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는데, 바로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다.
거가가 요수를 건너 <갈살나曷薩那, 아사나달만> 가한과 고창왕 <백아伯雅>를 접견하고
싸우는 것을 관망하는 곳으로 이끌어다가 그들을 두렵고 떨게 하고, 이어서 조서를 내려서 천하를 사면하게 하였다.
형부상서 <위문승衛文昇>과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에게 명령하여
요좌(遼左, 요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의 부세를 면제하고 군현을 설치하고서 관할하게 하였다.
갑오일(612.3.15음), 황제의 수레가 요수를 건넜다.
대전(大戰)이 [요수] 동쪽 연안에서 벌어져, 적을 격파하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한다.
요동 정벌에 {<우작>이}따라갔다.
황제가 임해돈(臨海頓)에 머물다가 큰 새를 보았다.
황제는 기이하여 <우작>에게 글을 한 편 지을 것을 명했다.
내용은 이렇다. 「대업8년 임신년 여름 4월 병자일 (612.4.27음)에
황상께서 요수와 갈석산 일대를 평정하시어 위세를 떨치고 군사를 거두어 되돌렸다.
황상의 수레가 남쪽으로 출발하고, 난새가 그려진 깃발은 서쪽으로 나아갔다. 행궁은 유성현의 임해돈이었다. ....」
황제는 읽고 칭찬하며 담당 관리에게 돌에 새겨 바닷가에 세워 두게 했다.
요수를 건너는데 공이 있다 하여 건절위 직위를 주었다.
從征遼東, 帝舍臨海頓, 見大鳥, 異之, 詔綽爲銘. 其辭曰: 維大業八年, 歲在壬申, 夏四月丙子, 皇帝底定遼碣, 班師振旅, 龍駕南轅, 鸞旗西邁, 行宮次于柳城縣之臨海頓焉 ....」 帝覽而善之, 命有司勒於海上. 以渡遼功, 授建節尉.
『隋書』 권 76 열전 虞綽
그런데 같은 《隋書》의 '우작(虞綽)열전'에는
612년4월27일(음) 양제가 요동의 군사를 거두어 되돌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군사를 거두어 되돌렸다」는 것은 곧 '철군'을 의미한다.
요동성 함락에 실패한 수 양제는 음력 4월 27일에 유성현으로 철군한다.
夏,五月,壬午,纳言杨达薨。
여름 5월 임오일(4일) 납언(納言) <양달楊達>이 죽었다.
诸将之东下也,帝亲戒之曰:
“今者吊民伐罪,非为功名。诸将或不识朕意,欲轻兵掩袭,
孤军独斗,立一身之名以邀勋赏,非大军行法。
公等进军,当分为三道,有所攻击,必三道相知,毋得轻军独进,以致失亡。
又,凡军事进止,皆须奏闻待报,毋得专擅。”
辽东数出战不利,乃婴城固守,帝命诸军攻之。
又敕诸将,高丽若降,即宜抚纳,不得纵兵。
辽东城将陷,城中人辄言请降;诸将奉旨不敢赴机,
先令驰奏,比报至,城中守御亦备,随出拒战。
如此再三,帝终不悟。既而城久不下,
제장들이 동쪽으로 내려가는데, 황제가 친히 그들을 경계하여 말하였다.
“ 지금 백성들을 조문하고 죄지은 자를 토벌하려는 것이지 공명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제장들이 혹 짐의 뜻을 알지 못하여 경무장하여 갑자기 엄습하거나
고군(孤軍)으로 홀로 싸워서 일신의 명예를 세우고 훈상을 기다리는 것은 대군이 가는 법이 아니다.
공 등은 진군하되 당연히 세 길로 나누며
공격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세 길에서 서로 알게 하고
경무장한 군사로 독단적으로 진격하여 실패하여 죽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 무릇 군대가 전진하고 머무르게 되면
반드시 보고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회보를 기다려야하지 오로지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요동성에서는 자주 나와서 전투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마침내 농성하며 굳게 지켰고,
황제는 여러 군영에 명령하여 그곳을 공격하게 하였다.
또 제장들에게 칙령을 내려서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즉시 의당 위무하여 받아들일 것이며, 마음대로 군사를 풀어 놓을 수 없다고 하였다.
요동성이 곧 함락되려 하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제장들은 성지(聖旨)를 받들어서 감히 기회에 따라서 부응하지 않고
먼저 달려와서 아뢰고 보고가 도착하도록 하니,
회보가 도착할 때쯤에는 성안에서 지키고 방어하는 것 또한 갖추어졌고 수시로 나와서 막으며 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 세 번 하였는데도 황제는 끝내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미 그렇게 하고 나니 성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六月,己未,帝幸辽东城南,观其城池形势,因召诸将诘责之曰:
“公等自以官高,又恃家世,欲以暗懦待我邪!
在都之日,公等皆不愿我来,恐见病败耳。
我今来此,正欲观公等所为,斩公辈耳!
公今畏死,莫肯尽力,谓我不能杀公邪!”诸将咸战惧失色。
帝因留止城西数里,御六合城。
高丽诸城各坚守不下。
右翊卫大将军来护儿帅江、淮水军,舳舻数百里,浮海先进,
入自浿水,去平壤六十里,与高丽相遇,进击,大破之。
护儿欲乘胜趣其城,副总管周法尚止之,请俟诸军至俱进。
护儿不听,简精甲四万,直造城下。
高丽伏兵于罗郭内空寺中,出兵与护儿战而伪败,
护儿逐之入城,纵兵俘掠,无复部伍。
伏兵发,护儿大败,仅而获免,士卒还者不过数千人。
高丽追至船所,周法尚整陈待之,高丽乃退。
护儿引兵还屯海浦,不敢复留应接诸军。
6월 기미일(11일)에 요동성 남쪽에 행차하여 그 성지(城池)의 형세를 관망하고서
이어서 제장들을 소집하여 그들을 힐책하여 말하였다.
“ 공 등은 스스로 관직이 높고 또한 가세(家勢)를 믿고서 어둡고 나약함을 가지고 나를 기다리려고 하였소?
도성에 있을 때 공 등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병폐와 실패함을 보일까 두려워하였을 뿐이었소.
내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공 등이 하는 것을 보고 공들의 목을 베려고 할 뿐이오.
공들은 지금 죽는 것이 두려워서 힘을 다하지 않으면서, 내가 공들을 죽이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제장들이 모두 두려워서 떨면서 안색이 변하였다.
황제는 이어서 성의 서쪽 몇 리 지점에 머무르면서 육합성(六合城)으로 나아갔다.
고구려의 여러 성에서 각기 견고하게 지켜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는 강(長江)과 회(淮水)의 수군을 인솔하였는데,
축로(舳艫)가 수백 리였으며 바다에 떠서 먼저 전진하여 패수(浿水)에 들어가니
평양까지60리였는데, 고구려와 서로 만나서 나아가서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내호아>는 이긴 기세를 타고 그 성으로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그것을 중지시키고
여러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진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내호아>는 듣지 않고 정예의 갑병 4만을 선발하여 곧장 성 아래까지 도달하였다.
고구려는 나곽(羅郭) 안에 있는 빈 사찰 속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군사를 내보내어
<내호아>와 더불어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배하니, <내호아>가 그들을 추격하여 성으로 들어가서
군사들에게 마음대로 약탈하게 하자 다시는 대오가 없게 되었다.
복병이 일어나자 <내호아>는 대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며, 사졸들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 군사들이 추격하여 선박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주법상>이 진영을 정돈하고 그들을 기다리자 고구려는 마침내 퇴각하였다.
<내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서 해포(海浦)에 주둔하니 감히 다시는 남아서 여러 부대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冊府元龜(책부원귀)》에 의하면 수(隋)군은 612년3월15일(음)에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포위하였으나 점령에는 실패한 채 거의 1개월 반동안 요동성에서 고구려군과의 성과 없는 공성전(攻城戰) 벌인 뒤, [《隋書》 '우작(虞綽)열전'에 기록된 바]
4월27일(음) 수(隋)군측의 어떠한 사정으로 인한 철군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첫 요수 도하 과정에서의 치열한 접전 및 그 후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 공성전에서
양측 간에 치고받는 전투로 인한 고구려와 수(隋)군 모두에 상당한 병력 손실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수(隋)군의 퇴각은 그때까지 온전히 남아 있던 병력에 대한 추가 손실 방지와 더불어
재정비를 위한 '작전상 후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수(隋)군이 어디까지 후퇴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불과 1개월 반 뒤인
612년6월11일(음) 양제가 요동에 행차한 전후로 수(隋)군이 전장에 다시 나온 사실로 미루어 보아 멀리 후퇴하지 않고
[양제의 행궁이 자리잡았던] 유성현(柳城縣) 일대에 머무르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左翊卫大将军宇文述出扶馀道,
右翊卫大将军于仲文出乐浪道,
左骁卫大将军荆元恒出辽东道,
右翊卫将军薛世雄出沃沮道,
左屯卫将军辛世雄出玄菟道,
右御卫将军张瑾出襄平道,
右武候将军赵孝才出碣石道,
涿郡太守检校左武卫将军崔弘昇出遂城道,
检校右御卫虎贲郎将卫文昇出增地道,皆会于鸭绿水西。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로 출발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출발하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荆元恒>은 요동도로 출발하고
우익위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로 출발하고
좌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로 출발하고
우어위장군 <장근張瑾>은 양평도로 출발하고
우무후장군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로 출발하고
탁군 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로 출발하고
검교우어위 호분랑장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로 출발하였는데 모두 압록강 서쪽에 모이게 하였다.
요동성 함락에 실패한 수 양제는 유성으로 철군한 뒤 다시 9군(30만 5천명)을 편성하여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압록강을 건너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곧장 평양으로 진군하고자 한다.
요동성 전투에서 이미 병력의 절반을 잃은 상태이다.
述等兵自泸河、怀远二镇,人马皆给百日粮,
又给排甲、枪槊并衣资、戎具、火幕,人别三石已上,重莫能胜致。
<우문술> 등의 군사들은 노하(瀘河)와 회원(懷遠) 두 진(鎭)에서부터 사람과 군마에게 모두 1백일 분의 양식을 지급하였고,
또한 배갑(排甲)과 창삭(槍槊)을 지급하고 아울러 옷감과 전투도구, 그리고 불과 장막을 지급하였는데,
사람마다 3석(石) 이상이 되니 무게를 이기지 못하였다.
下令军中:
“遗弃米粟者斩!”
士卒皆于幕下掘坑埋之,才行及中路,粮已将尽。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렸다.
“ 사졸들 가운데 미속(米粟)을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목을 벨 것이다.”
군사들이 모두 장막 아래에 땅을 파고 그것을 묻고 겨우 떠났더니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는 양식이 이미 곧 다 떨어지려고 하였다.
高丽遣大臣乙支文德诣其营诈降,实欲观虚实。
고구려는 대신인 <을지문덕>을 파견하여 그 군영에 가게 하여서는 거짓 항복하였는데,
실제로는 허실을 관망하려고 하였다.
于仲文先奉密旨:“若遇高元及文德来者,必擒之”
<우중문>이 밀지를 받들었다.
“ 만약 <고원>과 <을지문덕>이 오는 것을 만나면 그들을 생포하라.”
仲文将执之,尚书右丞刘士龙为慰抚使,固止之。
<우중문>이 곧 그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였는데 그것을 굳게 중지시켰다.
仲文遂听文德还,既而悔之,遣人绐文德曰:“更欲有言,可复来”
<우중문>이 마침내 <을지문덕>이 돌아가겠다는 말을 들어주고 나서
그것을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을 속여서 말하였다.
“ 다시 하고자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시오.”
文德不顾,济鸭绿水而去。
<을지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서 가버렸다.
仲文与述等既失文德,内不自安,述以粮尽,欲还。
<우중문>과 <우문술>은 이미 <을지문덕>을 놓치고 나자 안으로 스스로 불안해하였고
<우문술>은 양식이 다 떨어지자 돌아오려고 하였다.
仲文议以精锐追文德,可以有功。述固止之,仲文怒曰:
“将军仗十万之众,不能破小贼,何颜以见帝!
且仲文此行,固知无功,何则?
古之良将能成功者,军中之事,决在一人。
今人各有心,何以胜敌!”
<우중문>이 정예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공로를 세우고자 논의하였으나
<우문술>은 굳게 저지하니 <우중문>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 장군께서 십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작은 적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무슨 얼굴로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겠소.
또한 나 <우중문>이 이번의 출행에서 진실로 아무런 공로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왜 그러하오?
옛날에 훌륭한 장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중(軍中)의 일이 한 사람에게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사람들이 각기 제 마음을 갖고 있으니 어찌 적을 이길 수 있겠소?”
时帝以仲文有计划,令诸军咨禀节度,故有此言。
당시에 황제는 <우중문>이 가지고 있는 계획을 가지고
여러 부대로 하여금 통제를 받도록 하였던 것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由是述等不得已而从之,与诸将渡水追文德。
이 일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은 마지못해 하며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文德见述军士有饥色,故欲疲之,每战辄走。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곤케 하려고 매번 싸우면서 도주하였다.
述一日之中,七战皆捷,既恃骤胜,
又逼群议,于是遂进,东济萨水,去平壤城三十里,因山为营。
<우문술>은 하루 중에 일곱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므로 이미 신속히 승리할 것을 믿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이 제출하는 의견에 압박을 받아서 이에 드디어 전진하여
동쪽으로 살수(薩水)를 건너서 평양성 30리 떨어진 지점까지 가서 산을 이용하여 진지를 만들었다.
<을지문덕>은 적들을 깊숙히 끌어들인다.
文德复遣使诈降,请于述曰:“若旋师者,当奉高元朝行在所”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하고 <우문술>에게 요청하며 말하였다.
“ 만약 군사를 되돌려 가신다면 마땅히 <고원>을 받들고 행재소에 가서 조현하게 하겠습니다.”
述见士卒疲弊,不可复战,又平壤城险固,度难猝拔,遂因其诈而还。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곤하고 지치어서 다시 싸울 수 없는 것을 보았고,
또한 평양성은 험준하고 견고하여 창졸간에 뽑아버리기가 어렵다고 헤아리고서 드디어 거짓말로 인하여 돌아왔다.
<을지문덕>은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적을 몰살시키기 위하여 거짓 항복을 한다.
述等为方陈而行,高丽四面钞击,述等且战且行。
<우문술> 등이 방진(方陣)을 이루며 행군하는데 고구려 군사가 사면에서 노략질하며 공격하니,
<우문술> 등은 싸우다가 가다가 하였다.
秋,七月,壬寅,至萨水,军半济,
高丽自后击其后军,左屯卫将军辛世雄战死。
가을 7월 임인일(24일)에 살수에 도착하여 군사들이 절반 정도 건널 즈음에
고구려 군사들이 뒤에서 그 후군(後軍)을 공격하여 좌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于是诸军俱溃,不可禁止。
이에 여러 군영이 함께 궤멸되어 제지할 수 없었다.
将士奔还,一日一夜至鸭绿水,行四百五十里。
장수들과 사졸들이 도망하여 돌아올 때에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압록강에 도착하였는데 간 것이 450 리였다.
将军天水王仁恭为殿,击高丽,却之。
장군인 천수(天水) 사람 <왕인공王仁恭>이 후방을 맡아서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来护儿闻述等败,亦引还。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唯卫文升一军独全
오직 <위문승>의 한 군영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初,九军渡辽,凡三十万五千,及还至辽东城,唯二千七百人,
资储器械巨万计,失亡荡尽。
애초에 아홉 개의 부대가 요하를 건널 때에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요동성까지 도착한 사람은 오직 2천 7백 명뿐이었으며,
군용물자와 무기가 거만(巨萬)으로 헤아렸는데 잃어버리고 없애서 다 없어졌다.
帝大怒,锁系述等。
황제가 크게 화가 나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었다.
癸卯,引还。
계묘일(25일)에 이끌고 돌아왔다.
수 양제 <양견>은 장병이 거의 전멸한 채 612년 음력 7월 25일에 철군한다.
初,百济王璋遣使请讨高丽,帝使之觇高丽动静,璋内与高丽潜通。
隋军将出,璋使其臣国智牟来请师期。
帝大悦,厚加赏赐,遣尚书起部郎席律诣百济,告以期会。
及隋军度辽,百济亦严兵境上,声言助隋,实持两端。知鑫淅是行也,
唯于辽水西拔高丽武历逻,置辽东郡及通定镇而已。
애초에 백제왕 <장璋, 무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토벌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황제가 그로 하여금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더니, <부여장>이 안으로 고구려와 몰래 내통하고 있었다.
수의 군사가 장차 출동하려고 하자 <부여장>은 그의 신하 <국지모國智牟>로 하여금 와서
군사를 출동할 시기를 알려달라고 요청하였고,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더하여 내리게 하고,
상서기부랑 <석율席律>을 파견하여 백제에 가도록 하고, 날짜를 기약하고 만나자고 하였다.
수의 군사가 요하를 건너게 되자 백제도 경계에서 또한 군사를 엄하게 단속하며
겉으로 수를 원조한다고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이번 원정에서는 오직 요수 서쪽에서 고구려의 무려나(武廬邏)를 뽑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 뿐이다.
八月,敕运黎阳、洛阳、太原等仓谷向望海顿,
使民部尚书樊子盖留守涿郡。
8월에 칙령을 내려서 여양(黎陽, 하남성 준현 경계), 낙양(洛陽). 태원(太原) 등
창고의 양곡을 운반하게 하여 망해돈(望海頓)을 향하게 하였고
민부상서 <번자개樊子蓋>로 하여금 탁군(涿郡)에 남아서 지키게 하였다.
九月,庚寅,车驾至东都。
9월 경인일(13일)에 거가가 동도(東都, 낙양)에 도착하였다.
612년 음력 7월 25일 후퇴하여 음력 9월 13일에 낙양에 도착한다.
요수에서 낙양까지 후퇴하는데 48일이 걸렸다.
요수에서 낙양까지의 거리는 대략 600km 내외이다. (48일 x 12km= 576km)
낙양에서 보정까지의 직선거리가 500km이고 낙양에서 요령성의 요동까지는 직선거리가 1,000km가 넘는 거리이다.
이 당시 요수는 지금의 조하(漕河)인 것이다.
우리측 사서인 태백일사를 살펴보자
乙支文德 高句麗國 石多山人也 嘗入山修道 得夢天神 而大悟 每當三月十六日 則馳往摩利山 供物敬拜而歸 十月三日 則登白頭山祭天 祭天乃神市古俗也 弘武二十三年 隋軍一百三十餘萬 竝水陸而來攻 文德 能以奇計 出兵鈔擊之 追至薩水遂大破 隋軍 水陸俱潰 生歸遼東城者 僅二千七百人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
일찍이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天神)을 만나 뵙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매년 3월 16일이면 마리산(摩利山)으로 달려가 제물을 올리고 경배하였고,
10월 3일에는 백두산(白頭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은 신시(神市, 단군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옛 풍속이다.
홍무 23년(영양왕 23년, AD 612, 수나라 2차 침입) 수나라 군사 130여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공격해 왔다.
문덕은 솔선(能)하여 기이한 계략을 짜 출병하였고, 그들의 군수물자들을 약탈하고 격퇴시켰다.
마침내 살수(薩水)에 이르러 수군을 대파하였다. 수나라 군사(隋軍)는 수군과 육군이 모두 궤멸되었다.
살아서 요동성(遼東城)으로 돌아간 자가 겨우 2700명 정도였다.
廣 遣使乞和 文德 不聽 帝 亦嚴命追之 文德 與諸將乘勝直驅 一 自玄菟道至太原 一 自樂浪道至幽州
入其州縣 而治之 招其流民而安之
<양광>은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할 것을 구걸하였으나 <문덕>은 듣지 않았다.
제(영양왕) 역시 그들을 계속 추격할 것을 엄히 명하였다.
<문덕>은 제장들과 더불어 승승장구하며 곧바로 몰아부쳤다.
일진(一)은 현토도(玄菟道)로부터 태원(太原)까지,
또 다른 일진(一)은 낙랑도(樂浪道)로부터 유주(幽州)까지 추격하였다.
그리고 그 주현으로 들어가 그 지역의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於是 建安 建昌 白岩 昌黎 諸鎭屬於安市 昌平 涿城 新昌 桶道 諸鎭屬於如祈 孤奴 平谷 造陽 樓城 沙溝乙 屬於上谷
和龍 汾州 桓州 豊城 鴨綠 屬於臨潢 皆仍舊而置吏 至是 强兵百萬 境土益大
이에 건안(建安) , 건창(建昌) , 백암(白岩) , 창려(昌黎)의 모든 진(鎭)은 안시(安市)에 속하게 하였고,
창평(昌平) , 탁성(涿城) , 신창(新昌) , 통도(桶道)의 모든 진은 여기(如祈)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노(孤奴) , 평곡(平谷) , 조양(造陽) , 루성(樓城) , 사구을(沙溝乙)은 상곡(上谷)에 속하게 하였고,
화룡(和龍) , 분주(汾州) , 환주(桓州) , 풍성(豊城) , 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하게 하였다.
모두 다 옛날처럼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
이 때에 이르러 군사는 백만에 달하였고, 강토는 더욱더 넓어졌다.
楊廣 壬申之寇也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以我皂衣 二十萬 滅其軍 幾盡 此 非乙支文德將軍 一人之力乎若 乙支公者
乃萬古造時勢之 一聖傑也哉 文忠公趙浚 與明使 祝孟 共登百祥樓 賦詩 曰 薩水湯湯樣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語 不滿征夫一哂餘
<양광楊廣>은 임신년(AD 612)의 오랑캐다.
그의 출병은 매우 성대하여 고금에 그런 출병이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 조의(皂衣) 20만에 의하여 그 군대는 궤멸되어 소진되었다.
이것을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만고의 세상 흐름을 바꾸어 놓은 성스러운 영웅호걸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문충공 <조준趙浚 (AD ? - 1405>은 명나라 사신과 축배를 들고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시를 지어 읊었는데,
그 내용인 즉
"살수의 물은 도도히 흘러 그 푸르름이 더하고 광활하도다.
수나라 병사 백만이 모두 물고기가 되었었지,
지금 잠시 머물러 어부와 나무꾼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위대한 정복자의 호탕한 웃음의 여운이 가시지를 않는다."
(8) 살수는 어디에 있는 강인가?
- 살수는 압록수 동쪽, 평양성 서쪽에 있었다.
<남건>이 5만의 병사로 부여성을 엄습하자 [이(李)]적이 살하수(薩賀水)에서 쳐부수었다.
수급 5천을 베고 3만명을 사로잡았다. [노획한] 병기와 우마도 이에 걸맞았다.
男建以兵五萬襲扶餘,勣破之薩賀水上,斬首五千級,俘口三萬,器械牛馬稱之。
『新唐書』 권 220, 東夷列傳 高句麗, 乾封3년(668)
살수는 압록강 동쪽, 평양성 서쪽에 있었다. 수(隋)의 장수 신세웅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薩水在鴨渌江東平壤城西 隋將辛世雄戰死于此
『明一統志』 권 25
.살수 : 《新唐書(신당서)》에 「남건이 5만의 병사로 부여성을 엄습하자 이적이 살하수(薩賀水)에서 쳐부수었다.」하였다.
《明一統志(명일통지)》에 「살수(薩水)는 압록강 동쪽, 평양의 서쪽에 있다.」하였다.
생각컨대 살수(薩水) 즉 살하수(薩賀水)는 응당 [평양의] 변두리에 있어야 한다.
薩水 新唐書男建以兵五萬襲扶餘李勣破之薩賀水上. 明一統志薩水在鴨渌江東平壤城西. 按薩水即薩賀水應在邉界
『欽定盛京通志』 권 28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대장군 우문술이 9군과 압록수를 지나,
또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고구려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隋煬帝征高麗,大將宇文述與九軍過鴨綠水,又東濟薩水,去高麗平壤城三十里,因山為營。
『通典』 권 162
고구려와 수(隋)•당(唐) 전쟁 당시의 압록수는 백랑산(白狼山) 부근의 폭하(瀑河) 상류,
그리고 부여성(夫餘城)은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鄕) 일대이다.
- 살수(薩水)는 청하(靑河)이다.
‘압록(鴨綠)강’을 한역한 것이 ‘청하(靑河)’이다.
‘청하’는 고구려어로 ‘살하수(薩賀水)’라 불렸다.
청천(靑川)강은 고구려어로 ‘살수(薩水)’라 했다.
‘靑’의 뜻을 갖는 고구려어는 ‘살’이었다.
충북 괴산 청천(靑川)면의 옛 이름은 ‘살매(薩買)’였다.
『언어사적 측면에서 본 고구려어의 뿌리』 도수희, 신동아 2004년 5월호
살매(薩買)란 이두자로 푸른물, 즉 청천(靑川)이란 뜻이다.
청천현(淸川縣)은 원래 살매현(薩買縣)인데 경덕왕이 고쳐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경덕왕이 고유한 우리식 이름을 버리고 한자로 번역하여 모든 이름을 고쳐서
지금 살수(薩水)라는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는 어려우나
위 기록을 볼 때 “맑은 하천” 또는 "푸른 하천"이라고 할 수 있다.
"매"란 "물"이란 뜻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와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멱 감는다"라는 것의 "멱"이란 바로 고대어 "매"의 전음인 것이다.
이 살수(薩水)가 흐르는 곳에 옛 북부여의 제후국인 청하국(靑河國)이 있었으며
이 청하국에 고구려인의 마음의 고향인 고국원과 웅심산이 있었다.
《欽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에 살수(薩水)는 곧 살하수(薩賀水)라 하였고,
살하수'는 동시에 '청하(靑河)' 즉 압록수(鴨綠水)를 의미한다.
또한 흑룡강는 살합련강(薩哈連江)이라 하였는데,
똑같이 강이름에 '薩'자를 썼고 음운적으로도 '살하'와 '살합[련]'은 확연히 유사하다.
아울러 '살합련(薩哈連)'은 검은색, '살(薩)'은 푸른색을 각각 뜻하므로,
흔히 쓰는 '검푸르다'는 표현을 감안하면, 역시 상통함을 알 수 있다.
(9) 살수 부근에서 죽어 묻힌 수양제의 비(妃) 반희(班姬)
반비산(班妃山), 《도경(圖經)》에 이르기를
「수양제(隋煬帝)가 동쪽을 정벌하였다. 산위에 반희(班姬)의 사당을 세웠다.」고 했다.
班妃山 圖經云 隋煬帝東征 於山上置班姬廟
『元豊九域志』 1080년 간행 (사고전서本) 권2 '安肅軍' '遂城縣'
반희산(班姬山) 일명 반비산(班妃山), 안숙현(安肅縣) 서쪽 40리에 있다. 수성현(遂城縣)에 반희산(班姬山)이 있다.
구역지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정벌에 비(妃) 반(班)씨가 따라나섰다가 죽었다. 장사지내어 묻고 그 위에 사당을 지었다. 주민들이 누에의 여신으로 삼아 매년 봄에 제례를 올렸다.
班姬山 一名班妃山 安肅縣西四十里 遂城縣有班姬山 九域志 隋煬帝征髙麗 有妃班姓 經此而薨 遂葬焉 建祠於上
嵗春居民以蠶姑禮祀之 名勝志
『畿輔通志』 권18 '保定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홍치 보정군지(弘治 保定郡志)》 1494, 《안숙현지(安肅縣志)》 1778 등에도
대동소이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 蠶姑(잠고) : 누에의 여신. 좋은 비단을 얻기 위해 잠고에게 제사를 지냄.
위 《기보통지(畿輔通志)》 및 《원풍구역지(元豊九域志)》 등의 기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원정에 따라나섰던 수양제의 비(妃) 반희(班姬)가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에서 죽어 반희산(班姬山, 일명 반비산班妃山)에 묻혔다.
반희산은 지금도 서수구 상산(象山) 동북쪽 기슭의 고속도로변,
대왕점진(大王店鎮) 서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서 확인된다. (그림 3 참조)
청(淸)대의 명사(名士) 여세렴(余世廉, 1753~?)은 반희산(班姬山)에 직접 찾아와서 둘러보고
아래의 시를 지어 남기기도 하였다.
班姬何自到天涯 반희가 어디로부터 하늘 끝에 이르렀던가?
大業東征扈翠華 대업(大業)의 동정(東征)에 뒤따르던 취화개로다.
獨向燕山留寸土 좁은 땅뙈기에 홀로 머물러 연산(燕山)을 향하였으니
免教人指玉鉤斜 기운 그믐달이 되어 손가락질 받을 일은 면하였구나.
『保定府志』 권18, 山川1 (1886년 간행)
** 大業(대업) : 수양제(隋煬帝) 때의 연호, 사용 기간 605년 1월 1일 ~ 618년 3월 11일 (음력)
** 翠華蓋(취화개) : 임금의 나들이 때 비 또는 햇빛 가리개의 용도로 쓰인 왕실 의장의 한 가지,
** 玉鉤(옥구) : 초승달, 그믐달 같이 생긴 모양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燕山(연산) : 즉 수양제의 1, 2차 고구려 원정 당시 수군(隋軍)의 집결지인 탁군(涿郡) 계현(薊縣)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통상적으로 연산(燕山)은 今 북경(北京, 베이징)에 비정되지만,
보정의 서수(徐水)에 묻힌 반희(班姬)가 중원의 반대편 방향인 동북쪽의 북경(北京)을 향할 리는 없으므로,
여세렴(余世廉)은 수나라 탁군 계현의 위치를 今 보정시 당현(唐縣)으로 올바르게 인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희(班姬)가 주목을 끄는 이유는 그녀가 죽어 묻혔다는 반희산(班姬山)의 위치가
고구려의 평양성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직선거리 25킬로미터)이고,
살수대첩의 살수로 확신하는 폭하(瀑河)로부터는 불과 5, 6킬로미터 내외의 매우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황실 여성의 몸으로 반희(班姬)가 그 위험한 전쟁터에 무엇하러 따라갔으며, 또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반희의 기록이 여러 믿을만한 사서들에서 확인되고 반희산(班姬山)이 실재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대업(大業)년간 수차례에 걸쳐 시도된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당시의 어느 시점에선가
수양제(隋煬帝)와 반희가 보정의 서수(徐水)에 와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사서에 보이는 기록들만으로는 수양제가 최종 목적지인 고구려 평양까지 아직 가야 할 먼길을 남겨두고
서수를 잠시 지나치는 동안에 반희가 비명횡사한 것인지,
아니면 서수 일대가 실은 평양성에 근접한 고구려-수(隋) 전쟁터였던 것이고,
양측간에 치고받는 교전이 이어지는 와중에 희생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수서(隋書)》 '우문술전(宇文述傳)'에, 서초패왕 항우(項羽)의 애첩 우희(虞姬)의 경우를 선례로 들어
고구려 원정에 부인을 동반해도 좋다고 우문술에게 말한 것으로 미루어
자신의 비(妃) 반희(班姬)를 데리고 간 점 역시 수양제에게는 별스러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황제의 비(妃)가 불의의 사고 또는 질병 등으로 객사하였다면
마땅히 일단 시신을 도읍으로 옮긴 다음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였을 것이다.
반희(班姬)의 경우가 예외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사정 때문이었을 터인데,
전쟁 중의 급박함이 한 이유일 수 있다.
수양제(隋煬帝)가 가령 통설대로 한반도의 평양을 치러 가는 길이었다면 서수(徐水)를 지날때는 목적지 평양까지
아직 1,000킬로미터 이상의 행군을 남겨둔 시점이었고,
고구려와의 (통설상) 국경인 지금의 요하(遼河)로부터도 역시 700킬로미터 안쪽이었다.
따라서 수양제와 반희(班姬)가 지나치던 서수는 평상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이
평범한 수나라의 안정된 영역이었을 것이다.
전쟁길 가기 바빳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시켜 반희를 낙양(洛陽)으로 돌려 보냈으면 될일이었다.
즉 통설대로라면, 여세렴(余世廉)의 표현대로 수나라의 수도 낙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곳의 좁은 땅뙈기에
황제의 비(妃)가 홀로 묻혀 있게 둘 수 밖에 없었을 만큼 다급했던 까닭을 서수에서는 찾을 수 없다.
고구려-수(隋) 전쟁의 중심지를 서수(徐水) 일대로 보면 반희(班姬)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죽은 것이 분명하고,
당시 급박히 돌아가는 전장의 사정상 수양제(隋煬帝)에게는
반희의 시신을 낙양(洛陽)으로 옮기는 등의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아마도 수양제는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전쟁이 끝나면 변방에 임시로 묻어둔 반희를 다시 거둘 생각이었을 것이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양제는 곧 파멸하고 수나라는 망함으로서 반희는 영영 낙양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으로 본다.
(10) 살수에서 압록수까지의 거리는 450리인가?
가을 7월 임인일, 살수에 이르러, 군대의 반이 건넜을 때, 고려가 뒤로부터 후군을 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군대가 모두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장수와 사졸들이 달아나 돌아갔는데, 하루낮 하룻밤에 압록수에 이르니, 450리를 행군하였다.
秋, 七月, 壬寅, 至蕯水, 軍半濟, 高麗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資治通鑑』 권181 隋紀5 煬皇帝
군대가 [하루에] 걷는 30리가 1사(舍)이다. 軍行三十里爲一舍
『呂氏春秋』 권15, 慎大覽 제3 不廣 (高誘注)
《資治通鑑》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서에 살수에서 대패한 수(隋)군이 하루낮, 밤으로
450리를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보병의 평균 행군속도가 '하루에 30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려 그의 15배가 되는 450리는 터무니없는 수치로서, 객관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군사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적들이 후군을 공격했다.
이에 손쓸 틈도 없이 크게 패하고 말았다. 9군은 패하고 낮밤으로 4, 50리를 걸어 압록수에 이르렀다.
眾半濟,賊擊后軍,於是大潰不可禁止。九軍敗績,一日一夜還至鴨綠水,行四五十里。
『太平御覽』 권313 兵部44 決戰下
한편 이와 달리 《太平御覽(태평어람)》에 수(隋)군이 살수에서 4, 50리를 걸어서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이는 평균의 1.5배 정도에 달하는 행군 속도로서,
수(隋)군이 고구려군에 쫓기는 입장이었을 것을 고려하면 적절하고 현실감 있는 수치이다.
따라서 타 사서들에 적힌 '450리'는 본래 '4, 50리'였던 기록이 후대에 이르러
한반도 청천강과 압록강의 지리적 정황에 맞추어 와전 또는 변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제로, 살수대첩의 현장으로 추정되는 서수구(徐水區) 해촌(解村)에서
당시의 압록수로 비정되는 역현(易縣) 폭하 상류 부근까지의 도보거리는 18.9킬로미터인데,
「1리 당 1,500 당대척(唐大尺, 0.2955미터)」의 표준을 적용하면 해당 수치는
42.64리로서 《太平御覽》에 기록된 '4, 50리'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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