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高隋전쟁(598년, 612-4년)(1)

지보고 2023. 11. 10. 09:44

 

세계 최초의 전쟁이 BC 2690년경에 일어난 치우와 헌원의 탁록전쟁이라면

세계 최대의 전쟁은 612년에 일어난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일어난 살수대첩이다.

 

우리는 이 세계 최대의 전쟁이 지금의 요동에서 일어난 전쟁이며 살수는 북한의 청천강이라고 알고 있다.

 

그림 1 高隋전쟁시 좌우익12군(중국인과 강단사학자의 주장)

 

612년 고수전쟁 시 수나라의 좌익12군(붉은 원) 중 건안, 남소, 부여와 

우익 12군(푸른 원) 중 임둔, 답돈, 숙신, 갈석은 지도에 지명이 없어 표시하지 못하였음.

 

 

 

우선 598년에 일어난 제 1차 고수전쟁부터 살펴보자

 

舊史 曰 嬰陽武元好太烈帝 弘武九年 帝遣 西部大人淵太祚 往討登州 擒殺 摠管韋沖

구사(舊史)에 이르기를 '영양무원호태열제 홍무 9년(AD 598)에 황제가 서부대인 <연태조>를 파견하여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사로잡아 주살하였다.

 

先是 百濟以兵 平定 齊魯吳越之地 設 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戍險塞軍 征賦調 悉準內地

이에 앞서 백제는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였으며 빼앗은 땅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에게 작위를 내렸다.

또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세를 부과하였는데 모든 것은 내지(한반도의 본백제)의 제도를 기준으로 하였다.

 

明治年間 百濟 軍政衰頹 不振 權益執行 盡 歸聖朝 劃定城邑 文武置吏 及隋作兵 有事 南北騷擾 四起 害及民生

帝 威赫怒 恭行天討 四海之內 莫不聽命也

명치 연간(AD 492 - AD 519, 백제 동성왕과 무령왕 시대)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권익집행(국가관리)이 부진하여, 그 존폐가 위급하자 고구려가 백제를 접수하고(고구려 백제 정벌, AD 502, AD 512),

성읍(행정구역)을 다시 획정(재정립)하여 문무관리를 배치하였다.

그런데 수나라가 군대를 일으켜(AD 598) 남북(황하의 남과 북)이 소요하고 사방이 시끄러웠으니,

그 피해가 백성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이에 황제(영양대제)가 몹시 노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 그들을 모두 토벌하니,

사해(발해만을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 천하)에서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문자제 명치 11년(A.D 502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서,

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 진평,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문자왕21년 가을 9월, 백제를 침공하여 가불·원산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然 隋主楊堅 陰藏禍心 敢出讐兵 密遣 韋沖 摠管爲名 潰破官家 焚掠邑落 乃遣將兵 擒殺賊魁 山東平服 海城謐然

그런데 <양견>이 또 은밀히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일으켜 <위충>을 총관으로 명하여 은밀히 잠입시켰다.

그들은 관가를 부수고, 읍락을 불지르며, 노략질을 하였다.

마침내 (영양대제가) 장병을 파병하여 적의 괴수(위충)를 사로잡아 죽이고,

산동지방을 평정하고 회복하니 바닷가의 모든 성들이 조용해졌다.

 

是歲 堅 又遣 楊諒王 世績 等 三十萬 來與戰 纔發定州 未至遼澤 値水亂 而饋轉杜絶 癘疫幷熾 周羅緱以兵據登州

徵集戰艦數百 自東萊泛航 趣平壤 爲我所覺 殿而拒之以進 忽遭大風 而全軍漂沒

이 해에 <양견>은 또 군대를 파병하였다.

<양량楊諒 >왕 <세적世績> (양견의 넷째 아들)  30만 대군이 쳐들어왔다.

그러나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요택(遼澤)에 못 미쳐 물난리를 만나 식량 공급이 끊어졌고, 역병과 전염병까지 돌았다.

<주라구周羅緱>의 병사들은 등주에 웅거하며, 전함 수백척을 징집시켜 동래를 출항하여 평양으로 향하였는데,

고구려는 이를 알아차리고, 진을 펼쳐 그들의 진출을 막았다.

그런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 적군의 배가 표류하며 침몰하였다.

 

時 百濟 請隋 爲軍導 受我密諭 而未果 左將高成 密有親隋之心 陰壞莫離支 北伐之計

至是 屢請遣師 攻破百濟 有功 獨莫離支 力排衆議 强執以南守北伐之策 屢陳利害以從

당시 백제가 수나라의 요청을 받고, 군사를 일으키려 하자,

고구려는 백제에 비밀 특사를 보내 백제를 회유함으로써 백제의 실행을 막았다.

좌장군 <고성>(영양대제의 이복 동생)은 은밀히 수나라와 선린외교를 펼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막리지(연개소문)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막리지는 여러 차례 장수를 파견하여 백제를 공파하는 공을 세웠다.

막리지는 독선이 강해 대중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남수북벌(南守北伐)의 정책을 고수하였다.

남수북벌정책의 이해관계를 여러 차례 상소(陳)하자 막리지의 의견을 따랐다.

 

及高成卽位 盡棄前帝之遺法 遣唐求老子像 使國人 聽講道德經 又動衆數十萬 築長城 自扶餘縣 至南海府 千有餘里

마침내 (영양대제가 붕하고 후사가 없어) <고성高成 (제 27 대 영류대제, AD 618 - AD 642)>이 즉위하였다.

<고성高成>은 전 황제의 모든 유법(遺法, 정책)을 폐기하였다.

그리고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노자상(도교)을 받아들이고,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하도록 하였다.

또 수십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에서 남해부에 이르는 1천여 리다.

 

時 西部大人 淵蓋蘇文 請罷講道敎 又 以停長城之役 極陳利害 帝甚不悅 奪蘇文之兵 命監築長城之役 密與諸大人 議誅滅之 蘇文 先得聞知 乃嘆 曰 豈有身死 而國全之理乎 事急矣 時不可失也 悉集部兵 若將閱武者 盛陳酒饌 召諸大臣 共臨視之 皆至 蘇文勵聲 曰 門近虎狼而不救 反欲殺我乎 遂除之 帝聞變以 微服潛逃 至松壤 而下詔招募 國人無一人至者

自不勝愧汗 遂自殞碎而崩

당시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도교를 강독하는 것과 장성을 쌓는 것을 중지하라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제(영류대제)는 이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연개소문>의 병사들을 빼앗고,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은밀히 뭇 대인들과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하고자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 소문을 미리 듣고 개탄하여 다짐하기를

'어찌 이 몸이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킬 수 있으리오, 일이 급하게 되었도다, 때를 놓치면 안되겠다.'라고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 휘하에 있는 모든 제장들을 불러 모아 열병 준비를 시켜 놓고,

진수성찬을 마련한 후 뭇 대신들을 열병식에 초청하였다.

모든 대신들이 도착하자, <연개소문>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기를

'대문 앞에 호랑이와 여우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하니

내 이들을 모두 제거하리라.'라고 하였다.

제(영류대제)는 정변이 일어났음을 듣고, 미복으로 갈아입고 몰래 송양(松壤)으로 도망쳤다.

송양(松壤)으로 간 영류왕은 조서를 내려 대신(國人)들을 불러 모았으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영류왕은 부끄러움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고 말았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이듬해에 원(영양왕)이 말갈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입하였는데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이 물리쳤다. 

고조(高祖)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을 원수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의 작위를 삭탈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고려

 

 

영양왕 9년 왕이 말갈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입하니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冲>이 쳐 물리쳤다.

수 문제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으로 원수를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케 하였다.

여름 6월 수제는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박탈하였다.

한왕(漢王)  <양諒>의 군사가 임유관에 당도하자 장마비를 만나 수송이 계속되지 못하여

진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또 유행병이 돌았다.

<주라후周羅喉>는 동래로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수의 군사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왕도 또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를 올리어

"요동 미천한 곳의 신하 아무개"라고 일컬으니 수 문제는 이에 군사를 철회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백제왕 <昌>이 수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군도를 하겠다고 청하니 수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므로 이미 용서해 주었으니 다시 칠 수는 없다"하고 그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경계를 침략하였다.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冲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渝關 値水潦 餽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睺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秋九月 師還 死者十八九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 諭以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우리의 사서 태백일사는 <연개소문>의 부친인 <연태조>가 말갈기병 1만을 이끌고 영주총관 <위충>을 죽이고

등주를 평정하였다 하고 수서(隋書) 동이열전과 삼국사기는 영양왕이 말갈기병을 이끌고 요서를 침입하여

<위충>이 요서에 침입한 말갈기병을 물리쳤는데

수 문제 <양견>이 노하여 수육군 30만명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렸다는 것이다. 

 

수나라를 세운 <양견>은 영주총관 <위충>을 요서(遼西)에 몰래 파견해

고구려의 관가를 부수고 읍락을 불 지르고 노략질했다.

이에 홍무 9년(598)에 영양대제는 서부대인 <연태조淵太祚>를 보내 영주총관 <위충>을 죽이고

등주(登州)를 토벌하니 산동지방이 다시 평정되었다.

이에 분노한 <양견>이 <왕세적> 등 30만 군사를 파견해 싸우려고 출병했으나

물난리,유행병 등과 고구려군의 저항에 의해서 패전하고 말았다는 것이 제1차 고수전쟁이다.

 

 

 

 

수(隋) 양제의 제 1차 침입(612년)

 

제 1차 전쟁에서 패한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

 

(1) 배구의 유세와 동돌궐 <계민>가한의 굴복

 

黄门侍郎裴矩说帝曰

高丽本箕子所封之地晋皆为郡县

令乃不臣别为异域

先帝欲征之久矣但杨谅不肖师出无功

当陛下之时安可不取使冠带之境遂为蛮貊之乡乎

今其使者亲见启民举国从化可因其恐惧胁使入朝

帝从之敕牛弘宣旨曰

朕以启民诚心奉国故亲至其帐

明年当往涿郡尔还日语高丽王

宜早来朝勿自疑惧存育之礼当如启民

苟或不朝将帅启民往巡彼土

高丽王元惧籓礼颇阙帝将讨之课天下富人买武马匹至十万钱

简阅器仗务令精新或有滥恶则使者立斩   

<자치통감>

황문시랑 <배구裴矩>가 황제에게 유세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책봉 받은 땅으로 한(漢)과 진(晋)이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은 마침내 신하 노릇을 아니하고 별도의 이역(異域)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황제께서 이를 정벌하려고 한 지도 오래 지났으나

다만 <양량楊諒>이 불초하여 군사들이 출정하였다가 공로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시대를 맞이하여 어찌 빼앗지 못하여

관대(冠带)의 경계를 드디어 만맥(蠻貊)의 고향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들의 사자가 친히 <계민> 가한이 거국적으로 교화를 좇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고 위협하여 들어와서 조현하게 하소서.”

황제가 이를 좇았다.

 <우홍牛弘>에게 칙서를 내려서 황제의 뜻을 선포하였다.

 짐은 <계민> 가한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들었으니 그러므로 친히 그 장막에 이르렀다.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에 갈 것인데, 너는 돌아가는 날로 고구려왕에게 말하여라.

 ‘ 스스로 의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지 말고

길러 주는데 대한 예의를 가지고서 마땅히 <계민> 가한처럼 할 것이다.’

진실로 혹 조현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 가한을 인솔하고 그 땅에 가서 순시할 것이다.”

고구려 왕 <고원高元>은 두려워하였으나 번례(籓禮)가 자못 빠졌다.

황제는 장차 그를 토벌하려고 하여 천하의 부자들에게 부과하여 군마를 사들이게 하니  한 필당 10만 전에 이르렀다.

병장기를 뽑아서 검열하고 날카롭고 새롭게 하는데 힘쓰게 하였으며,

혹시라도 함부로 조악하게 만들면 사용자는 즉시 목이 베어졌다. 

 

영양왕 18년(서기 607) 初

수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의 사신이 마침 <계민>과 함께 있었다.

<계민>이 우리의 사신을 감히 숨길 수 없어서, 우리의 사신과 함께 양제를 참배하였다.

이때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裴矩>가 양제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箕子)를 봉했던 땅으로, 한나라와 진나라가 모두 군, 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 황제께서는 오랫동안 그들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량楊諒>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어리석고 못나서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폐하의 시대인데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교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제가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우홍牛弘>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내년에는 응당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자마자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나를 조알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을 보호하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의 왕이 내게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공격하리라.”
임금이 제후의 나라로써의 예절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양제가 장차 침범해 올 것을 걱정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可汗), 즉 추장이다.
여름 5월, 임금이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석두성(石頭城)을 습격하여 3천 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관대(冠带)는 중원 지방에 사는 사람의 옷차림으로 관대의 경계는 중원의 경계를 말한다.

번례(籓禮)는 종주국에 대하여 울타리 역할을 하는 주변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를 말한다.

607년 초 수양제 <양광>이 동돌궐의 <계민> 가한의 장막에 이른다.

<계민>가한은 수나라와 고구려의 눈치를 보며 수 양제에게 고구려전에 참전할 의시를 밝힌다.

 

突厥启民可汗卒,上为之废朝三日,立其子咄吉,是为始毕可汗;

表请尚公主,诏从其俗。

동돌궐의 <계민> 가한이 죽자 황상은 그를 위하여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그의 아들 <아사나돌길>을 세우니, 이 사람이 <시필始畢> 가한이다.

표문을 올려 공주를 아내로 모시기를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서 그들의 풍속을 좇았다.

 

여기서 공주는 <의안義安> 공주로 <아사나돌길>의 서모(庶母)인데

609년 <계민> 가한이 죽자 돌아가신 아버지의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맞이하려는 것이다.

 

 

 

(2) 수 양제(煬帝) <양광楊廣(569-618)>이 뚫은 영제거(永济渠)

 

大業 四年 春正月乙巳

诏发河北诸军五百馀万众穿永济渠引沁水南达于河北通涿郡

<자치통감>

대업 4년(608년) 봄 정월 을사일(1일)

조서를 내려서 하북(河北)에 있는 여러 군사 5백여만 명을 징발하여 영제거(永济渠)를 뚫었는데,

심수(沁水)의 물을 끌어서 남쪽으로 황하에 도달하게 하고, 북쪽으로 탁군(涿郡)으로 통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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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대청광여도의 요양, 안평, 심택

 

608년 음력 1월 1일 수 양제 <양광 楊廣(569-618)>은 영제거(永济渠)를 뚫는다.

영제거(永济渠)는 지금의 하남성 무척현(武捗縣)에서 심수(沁水)를 끌어다가

지금의 하북성 탁군(涿郡) 심택현(深澤縣)까지 통하게 한 것이다.

 

饒陽前漢屬涿後漢屬安平晉屬有魯口城博陵城三良神饒陽城

安平前漢屬涿後漢屬安平晉屬治安平城有樓女貴人神

深澤前漢屬涿後漢屬安平晉屬二漢晉曰南深澤後改有女蝸神祠

<북위서>

요양(饒陽)은 전한 때 탁군에 속하고 후한 때 안평(安平)에 속하고...

안평(安平)은 전한 때 탁군에 속하고 후한 때 안평(安平)에 속하고...

심택(深澤)은 전한 때 탁군에 속하고 후한 때 안평(安平)에 속하고....

 

요양(饒陽), 안평(安平), 심택(深澤)이 탁군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요양(饒陽), 안평(安平), 심택(深澤)은 지금도 그 지명이 남아 있다.

 

보정시와 형수시 사이로 호타하의 남변에 위치하고 있다.

 

탁군은 지금 정주(定州) 인근으로 수양제와  당 태종의 정벌군 군사의 집결지이다.

 

수 양제는 영제거를 뚫어 강남지방에서 건조한 선박을 동원하여 군수물자(식량과 치중)를 탁군으로 이동코자 한 것이다. 

 

 

 

(3) 서돌궐 <아사나달만> 가한을 회유함

  

裴矩闻西突厥处罗可汗思其母请遣使招怀之

<자치통감>

<배구裴矩>는 서돌궐의 처라(處羅) 가한이 그의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불러서 회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처라 가한은 서돌궐의 1대 가한인 <아사나달만>을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향부인(向夫人)으로 漢人이다.

608년 1월에 서돌궐의 <아사나달만>을 회유하여 수나라의 배후를 방비한다.

 

 

(4) 백제 의자왕이 수 양제에게 서신을 보냄

 

三月壬戌倭王多利思比孤遣使入贡遗帝书曰

日出处天子致书日没处天子无恙

帝览之,不悦,谓鸿胪卿曰:“蛮夷书无礼者,勿复以闻。”

<자치통감>

 3월 임술일(19일) 왜왕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가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황제에게 편지를 남겨서 말하였다.

 “ 해가 뜨는 곳에 사는 천자가 해가 지는 곳에 사는 천자에게 편지를 보내노니 별탈이 없으신가?”

황제가 그것을 보고서 기뻐하지 않고 <홍려경鸿胪卿>에게 말하였다. 

“ 만이(蠻夷)의 편지들 가운데 예의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다시는 보고하지 마라.” 

  

608년 음력 3월 19일

왜왕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 훗날 백제의 의자왕 義慈王(593-660)>가 수 양제 <양광>에게 사신을 보낸다.

의자왕의 어릴 때(16세) 기개가 느껴진다.

 

 

(5)  항악(恒岳)에서 천제를 지냄

 

八月辛酉上亲祠恒岳赦天下

<자치통감>

8월 신유일(21일)에 황상이 친히 항악(恒岳)에서 제사를 지내고 천하를 사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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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대청광여도의 항산, 곡양, 정주, 고양

  

 

608년 음력 8월 21일에 항악에서 천제(天祭)를 지낸다.

 

乃录齐王暕携皇甫诩从驾及前幸涿郡祠恒岳时

父老谒见者衣冠多不整谴衡以宪司不能举正出为榆林太守

<자치통감>

마침내 제왕(齐王) <양간>이 <황보후皇甫诩>를 이끌고 거가를 좇아서 앞서 탁군(涿郡)에 행차하여

항악(恒岳)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부로들 가운데 알현한 사람들의 의관이 대부분 정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끄집어내어

<장형>을 견책하여 헌사(憲司)로서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내쳐서 유림(榆林) 태수로 삼았다.

 

610년 3월 수 양제는 또 다시 항악에 천제를 지내려 순유한다.

제왕 <양간>이 거가가 항산에 도착하기 전 탁군에 먼저 마중을 나갔다.

탁군은 항산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탁군이 북경이라면 항산은 북경의 북쪽에 있어야 한다.

탁군은 지금의 정주(定州)이고 항산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곡양현 북쪽의 대무산으로 산서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그리고 탁군은 호타하 남변에 위치한 중하류 지역이므로 항악에 갈려면

석가장의 정형관(낭자관)을 지나야 항악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탁군이 수.당의 동북방 최전초기지이므로  수 양제와 당 태종은 이 탁군에서 고구려 정벌군을 출발시켰다.

또한 양곡을 곡양(曲陽)에 치중은 고양(高陽)에 집결하여 출발시켰다.

항산은 피휘하여 상산으로도 불리었고 별칭으로 신선산으로도 불리었으며,

중원의 황제들이 봉선한 오악 중 북악이며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대무산이다.

명나라가 북경을 수도로 삼자 북악인 항산(대무산)이 수도의 남쪽에 위치하여

북악을 현 산서성 대동시 혼원현에 위치한 현무산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다.

명나라 홍치 6년(1493)에서 청나라 순치 17년(1660)까지 168년간의 치열한 논쟁을 거쳐서

항산이 현 하북성 보정시 곡양현에 있는 대무산에서 산서성 대동시 혼원현에 있는 현무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대무산과 백석산의 줄기인 낭아산이 황하의 하류에 위치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으로 여기까지 장성을 쌓아

秦.漢 시대에는 조선과 隋.唐 시대에는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수나라 인구는 4천6백여만 명이며 고구려의 인구는 10분의 1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607년 초 수양제 <양광>이 동돌궐의 <계민> 가한의 장막에 이른다.

번례(籓禮)는 종주국에 대하여 울타리 역할을 하는 주변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를 말한다.

수 양제 <양광>이 실성을 하여 고구려가 주변국으로서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고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전쟁을 준비하였겠는가?

 

수 문제 <양견>이 중원을 통일하였으나 하북성 북부는 여전히 고구려의 영토이고

백제의 제후들이 다스리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일부가

백제 동성왕이 시해된 후 무령왕이 한반도의 공주에서 즉위하니

AD 500년 이후 백제의 제후들이 고구려에 귀복함으로서 고구려가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에

역사상 세계 최대의 전쟁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일 후 군벌 호족세력이 된 관농집단의 세력을 잠재우하게 하는 것이

고구려 정벌의 제 1차적 목적이었다.

 

<최치원>은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 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와 월(越)의 나라를 침략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와 연(燕)과 제(齊), 노(魯)를 휘어잡아  중원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이 말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기란 5세기 중국의 5호16국시대와 위진 남북조시대를 말하며

이때 고구려와 백제의 인구는 7-8백만으로 그중 군사가 백만이었으며 중원의 동해안을 고구려와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민족적으로 수. 당의 왕족은 트루크(돌궐)계이고, 고구려의 왕족은 몽골계이므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일종의 트루크계와 몽골계의 민족 전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6) 수 양제의 고구려 토벌 조서

 

壬午下诏讨高丽

임오일(26일)에 고구려를 토벌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611년  음력 2월 26일 드디어 수 양제는 고구려 정벌 조서를 내린다.

  

敕幽州总管元弘嗣往东莱海口造船三百艘官吏督役

昼夜立水中略不敢息自腰以下皆生蛆死者什三四

유주(幽州) 총관 <원홍사元弘嗣>에게 칙서를 내려서 동래(東萊)에 있는 바다 입구로 가서

배 300척을 건조하게 하고 관리들은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밤낮으로 물속에 서 있었지만 대략 감히 휴식하지 못하였으므로

허리 아래로는 모두 구더기가 생겨나서 죽은 사람이 열에 서너 명이었다.

 

四月庚午车驾至涿郡之临朔宫

文武从官九品以上并令给宅安置

여름 4월 경오일(15일)에 거가가 탁군에 있는 임삭궁(臨朔宫)에 도착하였는데,

따라온 9품 이상의 문무관(文武官)에게 집을 공급하여 안치하였다.

 

先是诏总征天下之兵无问远近俱会于涿

이에 앞서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들을 모두 징소하여 멀거나 가까움에 관계없이 모두 탁(涿)에 집합하게 하였다.

 

수 양제가 실성을 하여 지금의 요양에 있는 요동성을 공격하는데

1500리 이상이나 떨어진 탁군에 군사들을 집합하게 하였겠는가?

그 군사들이 요동까지 가는 데만 50일 이상이 걸린다.

중국인과 강단사학자가 주장하는 탁군이 설사 지금의 북경이라고 하더라도

북경에서 요동성까지 직선거리가 1000리이며 난하와 대릉하를 지나 요동에 도착할려면 1개월 이상을 행군하여야 한다. 

다시말해 부산에서 전쟁을 하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행군하여 부산에서 전쟁을 하였다는 것이다.

전쟁도 치루기 전에 모든 장병들이 기진할 것이다.

 

탁군은 지금의 하북성 정주 인근이고,

고구려의 요동성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의 수성진(遂城鎭)이고

고구려의 평양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진(固城鎭)인 것이다.

 

정주(定州)에서 요동성(수성진)까지는  직선거리 대략 73km(200리 미만)로

軍行一日一舍(一 舍는 30리, 12km)라 하였으니  6일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又发江淮以南水手一万人弩手三万人岭南排镩手三万人

于是四远奔赴如流

또 강{장강}과 회{회수}이남에 있는 수수(水手) 1만 명, 노수(弩手) 3만 명,

영남{남령 이남}의 배찬수(排镩手) 3만 명을 징발하니,

이에 사방 먼 곳에서 분주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았다.

 

五月敕河南淮南江南造戎车五万乘送高阳供载衣甲幔幕

令兵士自挽之发河南北民夫以供军须

5월에 하남(河南), 회남(淮南), 강남(江南)에 칙서를 내려 융거(戎車) 5만 승(乘)을 건조하여

고양(高陽)으로 보내도록 하여  갑옷, 휘장과 장막을 수례에 싣는데 제공하게 하였는데,

병사들에게 스스로 그것을 끌고 오게 하여 하남과 하북의 민부(民夫)들을 징발하고

군대에서 필요한 곳에 제공하게 하였다.

  

융거(戎車)는 치중(輜重, 무거운 짐)을 운송하는 수레를 말한다.

수 양제는 융거 5만 승을 건조하여 고양(高陽)으로 보내게 하였는데

고양현(高陽縣)은 하북성 보정시 남동쪽으로 탁군의 동쪽에 있는 현이다. 지금도 그 지명이 남아있다.

수 양제는 군사는 정주에 집결시키고 융거는 호타하 북변의 고양에 집결시키고 양곡은 곡양(曲陽)에 집결시켰다.

  

七月发江淮以南民夫及船运黎阳及洛口诸仓米至涿郡

舳舻相次千馀里载兵甲及攻取之具往还在道常数十万人

填咽于道昼夜不绝死者相枕臭秽盈路天下骚动   

가을 7월에는 강과 회 이남의 민부와 배를 징발하여 배로 여양(黎阳)과 낙구(洛口)에 있는

모든 창고의 미곡을 운송하여 탁군(涿郡)에 도착하게 하였는데,

축로(舳艣)가 서로 이어진 것이 1천여 리가 되었고, 병기와 갑옷, 공격하여 빼앗는 도구를 싣고

길에서 가고 돌아오는 사람이 항상 수십만 명이어서 길은 꽉 막히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으며,

죽은 사람도 서로 베개를 베니 악취가 도로에 가득차서 천하가 시끄럽게 움직였다.

 

十二月己未处罗来朝于临朔宫帝大悦接以殊礼

12월 기미일(8)<처라> 가한이 와서 임삭궁에서 조현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특별한 예의로 접대하였다.

 

임삭궁은 탁군(정주)에 있는 궁궐이다.

 

帝自去岁谋讨高丽诏山东置府令养马以供军役

황제가 스스로 지난해부터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모의하고서

산동에 조서를 내려서 관부를 설치하고 군마를 길러 군역에 공급하게 하였다.

 

又发民夫运米积于泸河怀远二镇

또한 민부를 징발하여 미곡을 운송하여  노하(瀘河)와 회원(懷遠) 두 진(鎭)에 축적하게 하였다.

 

 

 

營州上都督府 隋柳城郡 武德元年 改爲營州總管府 領遼燕二州 領柳城一縣

遼州 隋太原郡之遼山縣 武德三年 分並州之樂平, 和順, 平城, 石艾四縣置遼州

燕州 隋遼西郡 寄治于營州 武德元年 改爲燕州總管府 領遼西,

瀘河,懷遠三縣 其年廢瀘河縣

<구당서>

영주(營州)상도독부는 수나라 유성군(柳城郡)인데 무덕원년(618년)에 영주총관부로 바꾸고

요주(遼州)와 연주(燕州) 두 주와 유성현(柳城縣)을 다스리게 하였다.

요주(遼州)는 수나라 태원군의 요산현(遼山縣)인데

무덕3년(620년)에 병주(並州)의 낙평, 화순, 평성. 석애 4현을 요주에 두었다.

연주(燕州)는 수나라 요서군인데 영주(營州)에서 다스린다.

무덕원년(618년)에 연주총관부를 두어 요서, 노하, 회원 3현을 다스리게 하고 그 해에 노하현을 폐지하였다.

 

영주(營州), 유성(柳城), 요주(遼州), 연주(燕州), 요서(遼西), 노하(瀘河), 회원(懷遠) 유주(幽州)가

하북성 보정시 인근이라는 것이다.

태원시 양곡현에 석령관, 천문관, 적당관의 삼관이 있었는데

지금은 천문관과 적당관은 사라지고 석령관만 그 자취가 남아있다.

태원시 북쪽 양곡현에 노하진, 회원진이 있었으며

이곳이 자형관과 도마관을 지나 유주(幽州)와 연주(燕州)에 이른다고 한 곳이며 한나라의 연국(燕國)이 있던 곳이다.

중국역사지도집은 일개 주(州)에 불과한 유주(幽州)를

하북성에서 한반도 중부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지역을 차지한다고 그려놓았는데,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러한 역사지도를 우리의 강단 식민사학자는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四方兵皆集涿郡帝征合水令庚质问曰

高丽之众不能当我一郡今朕以此众伐之卿以为克不

对曰伐之可克然臣窃有愚见不愿陛下亲行

帝作色曰朕今总兵至此岂可未见贼而先自退邪

对曰战而未克惧损威灵

若车驾留此命猛将劲卒指授方略倍道兼行出其不意

克之必矣事机在速缓则无功

帝不悦汝既惮行自可留此

右尚方署监事耿询上书切谏帝大怒命左右斩之何稠苦救得免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涿郡)에 집합하니,

황제가 합수(合水, 감숙성 경양현)현령 <유질庾質>을 징소하여 물었다.

“ 고구려의 무리들은 우리의 한 군(郡)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인데,

지금 짐이 이 무리들을 가지고서 그들을 정벌하려고 하니, 경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 그들을 정벌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가만히 어리석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폐하께서는 친히 가시지 않기를 원합니다.“

황제가 안색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 짐은 지금 군사를 총괄하여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어찌 아직 적을 보지도 않고 먼저 스스로 물러나라는 것이오?”

대답하였다.

“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위엄을 가진 명망에 손상을 입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거가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맹렬한 장수들과 굳센 사졸들에게

명령하고 방략을 지시하여 주셔서 두 배나 빠른 속도로 밤낮으로 전진하여

그들이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출동한다면 승리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일의 기회는 신속함에 달려있으니 늦으면 골로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기뻐하지 않고 말하였다.

“ 너는 이미 가는 것을 꺼리고 있으니 스스로 이곳에 머물러 있어도 좋다.”

우상방서감사(右尙方署監事) <경순耿詢>이 편지를 올려서 간절히 간언하였으나

황제는 크게 화를 내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여 그의 목을 베려고 하였으나

<하조何稠>가 어렵게 구명하여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