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 1차 고당전쟁 발발(645년)
庚戌,上自将诸军发洛阳,以特进萧瑀为洛阳宫留守。
경술일(12일)에 황상은 스스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낙양을 출발하였는데
특진(特進)인 <소우萧瑀>를 낙양궁 유수로 삼았다.
645년 음력 2월 12일 당 태종은 낙양을 출발한다.
乙卯,诏:“朕发定州后,宜令皇太子监国。”
을묘일(17일)에 조서를 내렸다.
“ 짐이 정주(定州)를 출발한 다음에 의당 황태자로 하여금 감국(监国)하게 한다.”
정주(定州)가 탁군이며 수와 당의 동북방 최전방이다.
开府仪同三司致仕尉迟敬德上言:
“陛下亲征辽东,太子在定州,长安、洛阳心腹空虚,恐有玄感之变。
且边隅小夷,不足以勤万乘,愿遣偏师征之,指期可殄。”
上不从。
개부의동삼사로 치사(致仕)한 <위지경덕尉遲敬德>이 말씀을 올렸다.
“ 폐하께서 요동으로 친히 정벌을 떠나시고 태자는 정주(定州)에 있게 되면
장안과 낙양의 심복 같은 지구가 텅 비게 되어 아마도 <양현감>의 변고 같은 일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또한 변방지역 귀퉁이에 사는 작은 이적(夷狄)은 만승(萬乘)을 수고롭게 하기에는 부족하니
원컨대 한쪽에 있는 군사를 파견하시어 이를 정벌하시어도 기한을 정해 놓고 없앨 수 있습니다.”
황상은 좇지 않았다.
以敬德为左一马军总管,使从行。
<위지경덕>을 좌일마군 총관으로 삼아 좇아가게 하였다.
丁巳,诏谥殷太师比干曰忠列,
所司封其墓,春秋祠以少牢,给随近五户供洒扫。
정사일(19일)에 조서를 내려서 은(殷)나라의 태사였던 <비간比干>에게 시호를 내려서
충열이라 하고 담당부서에서 그의 묘에 분봉을 만들게 하였으며
봄 가을에 소뢰(少牢)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부근에 있는 500호를 딸려 주어서 물 뿌리고 청소하는데 쓰게 하였다.
낙양을 출발하여 8일 만에 은(殷)나라의 태사인 <비간比干>의 릉에 도착한다
비간(比干)의 묘역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신향(新乡)시 웨이후이(衛輝)에 있다.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대략 140km 떨어진 곳이다.
당 태종의 거가가 하루에 대략 17.5 km를 행군한 것이다.
上之发京师也,命房玄龄得以便宜从事,不复奏请。
황상이 경사를 출발할 때에 <방현령>에게 명령을 내려서 편리한대로 일을 처리하고 별도로 주청을 하지 말게 하였다.
或诣留台称有密,玄龄问密谋所在,
对曰:“公则是也。”
어떤 사람이 유대(留臺)에 가서 비밀스러운 모의가 있었다고 말하니
<방현령>이 비밀리에 모의한 곳을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 공(公)이 바로 그 사람이오.”
玄龄驿送行在。
<방현령>은 역참을 통하여 행재소로 압송하였다.
上闻留守有表送告密人,上怒,使人持长刀于前而后见之,
问告者为谁,曰:“房玄龄。”
황상은 유수(留守)가 표문을 올려서 비밀 모의한 사람을 고발한 사람을 호송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황상이 화가 나서 사람을 시켜서 앞에서 장도(長刀)를 가지고 있게 하고
그 다음에 그를 만나서 고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더니 말하였다.
“ <방현령>이요.”
上曰:“果然。”叱令腰斩。
황상이 말하였다. “ 과연 그렇군.” 나무라며 요참(腰斩)하게 하였다.
玺书让玄龄以不能自信,“更有如是者,可专决之”
새서를 써서 <방현령>에게 스스로 믿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나무라며 말하였다.
“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전결할 수 있을 것이요.”
癸亥,上至鄴,自为文祭魏太祖,曰:
“临危制变,料敌设奇,一将之智有馀,万乘之才不足。”
계해일(25일)에 황상이 업(鄴)에 도착하니 스스로 제문을 지어서 위나라의 태조에게 제사를 지내며 말하였다.
“ 위험을 만나서 변화를 제압하시고, 적을 헤아리고 기이한 계책을 만드시니
한 명의 장수로서는 넘치지만 만승으로서의 재주는 부족하였습니다.”
업(鄴)은 하북성 한단시 임장현 서북쪽이다. <조조>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당 태종 이세민의 거가가 2/12에 낙양을 출발하여 14일 만인 2/25일에 한단에 도착하였다.
낙양에서 한단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50km이다. 250km/14일 = 약 18km
보병의 이동속도는 보통 1일 12-15km이다. 강행군하여 하루에 약 18km를 이동한 셈이다.
是月,李世勣军至幽州。
이달에 <이세적>의 군사들은 유주(幽州)에 도착하였다.
유주(幽州)의 치소는 보벙시 당현이다.
三月,丁丑,车驾至定州。
3월 정축일(9일)에 거가가 정주(定州)에 도착하였다.
한단을 출발하여 14일 만에 정주(定州)에 도착한다.
한단의 업에서 정주까지는 직선거리 대략200km이다.
하루에 약 14km 정도로 이동한 셈이다.
丁亥,上谓侍臣曰:
“辽东本中国之地,隋氏四出师而不能得;
朕今东征,欲为中国报子弟之仇,高丽雪君父之耻耳。
且方隅大定,惟此未平,故及朕之未老,用士大夫馀力以取之。
朕自发洛阳,唯啖肉饭,虽春蔬亦不之进,惧其烦忧故也。”
정해일(19일)에 황상이 시중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 요동지역은 본래 중원에 있는 나라의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 군사를 내었으나 얻을 수가 없었다.
짐이 지금 동방 정벌하는 것은 중원지역에 있는 국가를 위하여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이며,
고구려를 위하여 군부(君父)의 치욕을 갚으려고 하는 것뿐이다.
또한 사방이 대체적으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아직 평정되지 아니 하였으니
그러므로 짐이 아직 늙지 않았을 때에 사대부들의 남은 힘을 이용하여 이를 빼앗고자 한다.
짐이 낙양에서 출발하여서부터 오직 다만 고기와 밥만을 먹었을 뿐이고
비록 봄채소도 역시 올리지 않게 하였으니 그들이 번거러울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上见病卒,召至御榻前存慰,付州县疗之,士卒莫不感悦。
황상이 병든 병사를 보고 불러서 어탑 앞으로 오게 하여 위로하고
주현(州县)에 보내어 그를 치료하게 하였더니 사졸들 가운데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有不预征名,自愿以私装从军,动以千讨,皆曰:
“不求县官勋赏,惟愿效死辽东!”上不许。
정벌군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사사롭게 장비를 만들어 가지고 종군하려고 하니
움직였다하면 천명을 단위로 계산하게 되었는데 모두 말하였다.
“ 현관에게 공훈과 상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요동지역에서 죽음을 무릅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황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上将发,太子悲泣数日,上曰:
“今留汝镇守,辅以俊贤,欲使天下识汝风采。
夫为国之要,在于进贤退不肖,赏善罚恶,至公无私,
汝当努力行此,悲泣何为!”
황상이 곧 출발하려고 하는데 태자가 슬피 울며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리니 황상이 말하였다.
“ 지금 너를 남겨 두어서 진수(镇守)하게 하고 뛰어난 사람으로 보필하게 하여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너의 풍채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은 현명한 사람을 올리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치는데 있고,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되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
너는 마땅히 노력하여 이것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하는데 슬피 눈물을 흘려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命开府仪同三司高士廉摄太子太傅,与刘洎、马周、
少詹事张行成、右庶子高季辅同掌机务,辅太子。
개부의동삼사 <고사염高士廉>에게 명령하여 태자태부의 업무를 총괄하게 하여
<유계劉洎> <마주馬周>와 소첨사 <장행성张行成> 우서자 <고계보高季辅>와 더불어
기밀에 속한 업무를 장악하게 하면서 태자를 보필하게 하였다.
长孙无忌、岑文本与吏部尚书杨师道从行。
<장손무기長孫無忌(594-659)>와 <잠문본岑文本>은 이부상서인 <양사도杨師道>와 더불어 출정하게 하였다.
壬辰,车驾发定州,亲佩弓矢,手结雨衣于鞍后。
命长孙元忌摄侍中,杨师道摄中书令。
임진일(24일)에 거가가 정주를 출발하였다.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시중의 업무를 총괄하고 <양사도>는 중서령의 업물를 총괄하게 하였다.
당 태종은 정주에서 보름을 머물다가 645년 음력 3월 24일 정주(定州)를 출발한다.
李世勣军发柳城,多张形势,
若出怀远镇者,而潜师北趣甬道,出高丽不意。
<이세적>의 군사가 유성(柳城)을 출발하였는데 형세를 많이 벌려 놓아서
마치 회원진(懷遠镇)으로 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용도(甬道)로 나아가서 고구려가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나아갔다.
夏,四月,戊戌朔,世勣自通定济辽水,至玄菟。
高丽大骇,城邑皆闭门自守。
여름 4월 무술일(1일)에 <이세적>은 통정(通定)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니
고구려에서는 크게 놀라서 성읍에서 모두 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壬寅,辽东道副大总管江夏王道宗将兵数千至新城,
折冲都尉曹三良引十馀骑直压城门,城中惊扰,无敢出者。
임인일(5일)에 요동도부대총관인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도착하였고,
절충도위 <조삼랑曹三良>이 1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곧바로 성문을 압박하니
성안에서는 놀라고 시끄러워져서 감히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营州都督张俭将胡兵为前锋,进渡辽水,
趋建安城,破高丽兵,斩首数千级。
영주도독 <장검>이 흉노 사람으로 구성된 병사를 선봉으로 삼고 나아가서
요수를 건너서 건안성(建安城)으로 향하여 고구려 병사를 깨뜨리고 목을 벤 것이 수천 급이었다.
丁未,车驾发幽州。
정미일(10일)에 거가가 유주(幽州)를 출발하였다.
4월 6일 당 태종은 유주성(幽州城) 남쪽에서 6軍에게 잔치를 베풀고 4월 10일 유주(幽州)를 출발하기 전
1舍(30리)마다 봉화대를 설치하여 정주(定州)에 머물고 있는 태자에게 승전고를 알리도록 한다.
유주(幽州)의 치소는 현 보정시 당현(唐縣)으로 유주에서 요수까지의 거리는 약 80km이다.
대략 6개의 봉화대를 임시로 설치하였을 것이다.
壬子,李世勣、江夏王道宗攻高丽盖牟城。
임자일(15일)에 <이세적>과 강하왕 <이도종>이 고구려의 개모성(盖牟城)을 공격하였다.
丁巳,车驾至北平。
정사일(20일)에 거가가 북평(北平)에 도착하였다.
4월 10일 유주(幽州)를 출발하여 10일 만에 북평(北平 지금의 보정시 순평현(順平縣)에 도착한다.
유주의 치소인 당현과 순평현은 10km이내의 거리지만 당태종의 거가는 고구려 경내에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癸亥,李世勣等拔盖牟城,获二万馀口,粮十馀万石。
계해일(26일)에 <이세적> 등은 개모성(盖牟城)을 뽑아버리고 2만여 명과 양곡 10여 만석을 얻었다.
张亮帅舟师自东莱渡海,袭卑沙城,其城四面悬绝,惟西门可上。
程名振引兵夜至,副总管王大度先登,
<장량>은 수군을 인솔하고 동래성에서부터 바다를 건너서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그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오직 서문으로만 올라갈 수 있었다.
<정명진>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고 부총관인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올라갔다.
五月,己巳,拔之,获男女八千口。
5월 기사일(2일)에 그 곳을 뽑아버리고 남녀 8천 명을 붙잡았다.
分遣总管丘孝忠等曜兵于鸭绿水。
총관인 <구효충丘孝忠> 등을 나누어 파견하여 압록수(鸭绿水)에서 요병(曜兵)을 하였다.
압록수는 지금의 남역수(南易水)이다.
645. 4~5월 사이 고구려 수군이 묘도로 진격하였으나 패퇴하자 <연수영淵秀英>이 구원을 나간다.
李世勣进至辽东城下。
<이세적>은 나아가서 요동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요동성은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이다.
庚午,车驾至辽泽,
泥淖二百馀里,人马不可通,将作大匠阎立德布土作桥,军不留行。
경오일(3일)에 거가는 요택에 도착하였는데,
진흙 벌판이 2백여 리여서 사람과 말이 지나갈 수 없게 되자
장작대장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덮어서 다리를 만들어 군사들은 머물러 있지 않고 갔다.
4월 21일 북평(北平 今보정시 順平縣)을 출발하여 5월 3일에 요택에 도착한다.
壬申,渡泽东。
임신일(5일)에 소택지대의 동쪽을 건넜다.
5월 3일에 요택에 도착하여 5월 5일에 요택을 건넌다.
乙亥,高丽步骑四万救辽东,江夏王道宗将四千骑逆击之,
军中皆以为众寡悬绝,不若深沟高垒以俟车驾之至。
을해일(8일)에 고구려의 보명과 기병 4만 명이 요동을 구원하니
강하왕 <이도종>이 4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맞아 치니
군중(軍中)에서는 모두가 무리가 적고 떨어져서 매달려 있는 상태이니 깊이 해자를 파고 성루를 높게 쌓고
거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道宗曰:“贼恃众,有轻我心,远来疲顿,击之必败。
且吾属为前军,当清道以待乘舆,乃更以贼遗君父乎!”
<이도종>이 말하였다.
“ 도적들은 무리가 많다는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멀리서 와서 피곤할 것이니 이들을 치면 반드시 패배시킬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선봉부대이니 마땅히 길을 깨끗이 하여 놓고 승여(乘輿)를 기다려야 마땅한데
마침내 다시 도적들을 군부(君父)에게 남겨 둘 것인가?
李世勣以为然。
<이세적>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果毅都尉马文举曰:“不遇劲敌,何以显壮士!”
과의도위 <마문거馬文擧>가 말하였다.
“ 노략질하는 적군을 만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장사(壯士)임을 드러내겠는가!”
策马趋敌,所向皆靡,众心稍安。
말에 채찍을 치며 적을 향해 달려가는데 가는 곳에서는 모두가 쓰러지니
무리들의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既合战,行军总管张君乂退走,唐兵不利,
이미 만나서 전투를 하였는데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물러나서 달아나자 당나라 군사들은 불리해 졌다.
道宗收散卒,登高而望,见高丽陈乱,与骁骑数十冲之,左右出入;
李世勣引兵助之,高丽大败,斩首千馀级。
<이도종>은 흩어진 병사를 모아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다가
고구려의 진지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효기(驍騎) 수십 기와 더불어 그들에게 충격을 가하며 좌우에서 들락날락 하였다.
<이세적>이 병사를 이끌고 그를 도우니 고구려는 크게 패배하였고 목을 벤 것이 1천여 급이었다.
丁丑,车驾渡辽水,撤桥,以坚士卒之心,军于马首山,
劳赐江夏王道宗,超拜马文举中郎将,斩张君乂。
정축일(10일)에 거가가 요수를 건너서 다리를 치워버리고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서 마수산(馬首山)에다 진을 치고 강하왕 <이도종>을 위로하며 상을 내리고
<마문거>를 중랑장으로 순서를 뛰어 넘어 임명하고 <장군예>의 목을 베었다.
5월 10일에 당 태종은 요수를 건너 마수산에 진을 친다.
上自将数百骑至辽东城下,见土卒负土填堑,
上分其尤重者,于马上持之,从官争负土致城下。
황상은 스스로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도착하여
사졸들이 흙을 져다가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황상은 그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의 것을 나누어서 말 위에다 싣게 하였고,
좇았던 관원들도 다투어 흙을 져다가 성 아래로 갔다.
李世勣攻辽东城,昼夜不息,旬有二日,
上引精兵会之,围其城数百重,鼓噪声震天地。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는데 밤낮으로 쉬지 않기를 12일이 되었을 때에
황상이 정예의 병사를 인솔하고 그와 만나서 그 성을 수 백 겹으로 포위하였고 북치는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다.
甲申,南风急,上遣锐卒登冲竿之末,爇其西南楼,火延烧城中,
因麾将士登城,高丽力战不能敌,
遂克之,所杀万馀人,得胜兵万馀人,男女四万口,以其城为辽州。
갑신일(17일)에 남풍이 급하게 불자 황상은 정예의 병사를 파견하여 충간(衝竿)의 끝에 오르게 하여
그 서남쪽에 있는 누각에 불을 지르게 하니 불꽃이 성안을 다 태웠다.
이 기회에 장군과 사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니 고구려는 힘써 싸웠으나 대적 할 수가 없었고
드디어 그곳에서 승리하고 죽인 사람이 1만여 명이고
정예의 병사 1만여 명과 남녀 4만여 명을 붙잡고서 그 성을 요주(遼州)라 하였다.
5월 17일 요동성을 점령한다.
乙未,进军白岩城。
을미일(28일)에 군사를 백암성(白岩城)으로 진격시켰다.
丙申,右卫大将军李思摩中弩矢,上亲为之吮血;
将士闻之,莫不感动。
병신일(29일)에 우위대장군 <이사마李思摩>가 강노(强弩)의 화살에 맞았는데 황상이 친히 그를 위하여 피를 빨았다.
장군과 사병들이 이 소식을 듣고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乌骨城遣兵万馀为白岩声援,将军契苾何力以劲骑八百击之,
何力挺身陷陈,槊中其腰;
尚辇奉御薛万备单骑往救之,拔何力于万众之中而还。
何力气益愤,束疮而战,从骑奋击,
遂破高丽兵,追奔数十里,斩首千馀级,会暝而罢。
万备,万彻之弟也。
오골성(烏骨城)에서 군사 1만여 명을 파견하여 백암성을 성원하자
장군인 <계필하력契苾何力>이 강한 기병 8백 명을 데리고 이들을 쳤는데,
<계필하력>은 몸을 던져서 그들의 진지에 빠졌다가 창에 허리를 맞았다.
상연봉어 <설만비薛萬備>가 단기(單騎)로 달려가서 그를 구하여 <계필하력>을 많은 무리 속에서 뽑아내어 돌아왔다.
<계필하력>은 기분이 더욱 분하여져서 상처를 묶고는 싸웠고,
좇는 기병들도 분발하여 쳐서 드디어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수 십 리를 추격하여 목을 벤 것이 1천여 급이었는데 어두워지자 그만 두었다.
<설만비>는 <설만철薛萬徹>의 동생이었다.
六月,丁酉,李世勣攻白岩城西南,上临其西北。
6월 정유일(1일)에 <이세적>이 백암성 서남쪽을 공격하고 황상은 그 서북쪽으로 갔다.
城主孙代音潜遣腹心请降,临城,投刀钺为信,
且曰:“奴愿降,城中有不从者。”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그의 심복을 파견하여 항복을 받아 달라고 청하면서
성에 도착하면 칼과 도끼를 던져버리는 것을 신표(信標)로 하겠다고 하며 또 말하였다.
“ 소인은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는 좇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上以唐帜与其使,曰:“必降者,宜建之城上。”
황상은 당나라의 기치(旗幟)를 그 사자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 반드시 항복할 것이라면 이것을 성 위에다가 꽂으시오.”
代音建帜,城中人以为唐兵已登城,皆从之。
<손대음>이 기치를 꽂으니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올라 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그를 좇았다.
上之克辽东也,白岩城请降,既而中悔。
황상이 요동지역에서 승리하니 백암성에서도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하였는데 그렇게 하고 나서 도중에 후회하였다.
上怒其反覆,令军中曰:“得城当悉以人、物赏战士。”
황상이 그들이 반복하는 것에 화가 나서 군중(軍中)에다 명령을 내려서 말하였다.
“ 성을 얻게 되면 마땅히 사람과 물자를 모두 전사(戰士)들에게 상으로 줄 것이다.”
李世勣见上将受其降,帅甲士数十人请曰:
“士卒所以争冒矢石、不顾其死者,贪虏获耳;
今城垂拔,奈何更受其降,孤战士之心!”
<이세적>은 황상이 그들의 항복을 받아 주는 것을 보고 갑사 수십 명을 인솔하여가지고 가서 청하며 말하였다.
“ 사졸들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그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까닭은
포로와 물건을 획득하려고 탐내는 것뿐입니다.
지금 성이 뽑혀지게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다시 그들의 항복을 받아 주시어서 전사들의 마음을 외롭게 하십니까?”
上下马谢曰:
“将军言是也。然纵兵杀人而虏其妻孥,朕所不忍。
将军麾下有功者,朕以库物赏之,庶因将军赎此一城。”世勣乃退。
황상이 말에서 내려서 사과하며 말하였다.
“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군사를 멋대로 풀어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포로로 잡는다면 짐은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요.
장군의 휘하에 공로를 세운 사람이 있다면 짐이 부고(府庫)에 있는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니,
이로써 장군은 이 한 성(城)을 대속(代贖)해 주시오.”
<이세적>이 마침내 물러났다.
得城中男女万馀口,上临水设幄受其降,
仍赐之食,八十以上赐帛有差。
성안에서 남녀 1만여 명을 얻었는데, 황상은 물 근처에다가 장막을 만들어 놓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주고,
이 기회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내려 주었고 80세 이상의 사함들에게는 비단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他城之兵在白岩者悉慰谕,给粮仗,任其所之。
다른 성의 군사들도 백암성에 있던 사람은 모두 위로하고 효유하면서
양식과 무기를 주면서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을 맡겨버렸다.
先是,辽东城长史为部下所杀,其省事奉其妻子奔白岩。
이에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죽인 바 되어
그 성사(省事)가 처자를 받들어 가지고 백암성으로 도망하여 왔다.
上怜其有义,赐帛五匹,为长史造灵舆,归之平壤。
황상은 그가 의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비단 다섯 필을 하사하고
장사(長史)를 위하여 영여(靈輿)를 만들어 그를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以白岩城为岩州,以孙代音为刺史。
백암성을 암주(岩州)라 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契苾何力疮重,上自为傅药,
推求得刺何力者高突勃,付何力使自杀之。
<계필하력>의 상처가 심하여서 황상이 스스로 약을 발라 주고
<계필하력>을 찌른 사람 <고돌발高突勃>을 조사하여 잡아오게 하여
<계필하력>에게 주어서 스스로 그를 죽이게 하였다.
何力奏称:
“彼为其主冒白刃刺臣,乃忠勇之士也,与之初不相识,非有怨仇。”遂舍之。
<계필하력>이 상주하여 말하였다.
“ 저들은 그 주인을 위하여 번득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신을 찔렀으니 충성스럽고 용감한 병사입니다.
그와 더불어 처음에는 서로 알지를 못하였으니 원망하고 원수질 일이 아닙니다.“ 드디어 그를 용서하였다.
初,莫离支遣加尸城七百人戍盖牟城,
李世勣尽虏之,其人请从军自效。
애초에 막리지가 가시성(加尸城)에 사는 7백 명을 파견하여 개모성(盖牟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이들을 모두 포로로 잡으니 그 사람들이 종군하여 스스로 온 힘을 다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上曰:“汝家皆在加尸,汝为我战,莫离支必杀汝妻子。
得一人之力而灭一家,吾不忍也。”
황상이 말하였다.
“ 너희들의 집은 모두 가시(加尸)에 있으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운다면
막리지는 반드시 너의 처자를 죽일 것이니 한 사람의 힘을 얻고자 한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은 내가 차마 못하겠다.”
戊戌,皆廪赐遣之。
무술일(2일)에 모두 양식을 주어서 그들을 보냈다.
己亥,以盖牟城为盖州。
기해일(3일)에 개모성을 개주(盖州)라 하였다.
丁未,车驾发辽東
정미일(11일)에 거가가 요동을 출발하였다.
6월 11일 당 태종은 요동성을 출발한다.
丙辰,至安市城,进兵攻之。
병진일(20일)에 안시성(安市城)에 도착하여 군사를 내어 보내어 그곳을 공격하였다.
6월 20일 당 태종은 안시성에 도착한다.
안시성(今 보정시 鳳凰山에 축조한 성)은 평양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다.
6월 초 : <연수영>이 창려에서 <설만철>의 보급수군에 타격을 가함(설만철 견책)
6월 말 : 성산 해양도에서 <구효충>의 2만이 넘는 수군과 2백여척의 함대를 전멸시킴
丁巳,高丽北部耨萨延寿、惠真帅高丽、靺鞨兵十五万救安市。
정사일(21일)에 고구려의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고헤진<高惠真>이
고구려와 말갈의 병사 15만 명을 인솔하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上谓侍臣曰:
“今为延寿策有三:
引兵直前,连安市城为垒,据高山之险,食城中之粟,
纵靺鞨掠吾牛马,攻之不可猝下,欲归则泥潦为阻,
坐困吾军,上策也;
拔城中之众,与之宵遁,中策也;
不度智能,来与吾战,下策也。
卿曹观之,彼必出下策,成擒在吾目中矣。”
황상이 시중을 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 지금 <고연수>의 계책은 세 가지기 있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곧장 앞으로 나와서 안시성과 연계하여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곳을 점거하고 성 안에 있는 곡식을 먹다가
말갈 사람들을 풀어서 우리들의 소와 말을 약탈하게 하는 것인데
이를 공격하여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고 돌아가려고 하여도 진흙 벌판이 막혀 있어서
앉아서 우리 군사를 어렵게 하는 것이니 제일 좋은 계책이다.
성안에 있는 무리를 뽑아내어 이들과 더불어 숨어버리는 것이 중간정도의 계책이다.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이 제일 하급 계책이다.
경들이 그를 보건대 반드시 제일 하급 계책을 낼 것이고, 내 눈 앞에서 서로 잡힐 것이다.”
高丽有对卢,年老习事,谓延寿曰:
“秦王内芟群雄,外服戎狄,独立为帝,此命世之材,
今举海内之众而来,不可敌也。
为吾计者,莫若顿兵不战,旷日持久,分遣奇兵断其运道;
粮食既尽,求战不得,欲归无路,乃可胜也。”
고구려에는 대로(對虜)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나이는 많고 일을 잘 익혔는데 <고연수>에게 말하였다.
“ 진왕(秦王)은 안으로 여러 영웅들을 잘라 버리고 밖으로는 융적들을 복종시키고서
홀로 서서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천명을 받은 인재인데,
지금 해내에 있는 무리를 들어가지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을 위하여 계책을 세운다면 군사를 주둔시켜서 싸우지 않고 날짜를 허송하게 하여 오래 버티면서
기습병을 나누어 파견하여 그들의 운반로를 잘라 버리는 것만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고 싸우려 해도 싸울 수가 없게 되면 돌아가려고 해도 길이 없으니 마침내 승리할 수 있습니다.”
延寿不从,引军直进,去安市城四十里。
<고연수>는 좇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上犹恐其低徊不至,命左卫大将军阿史那社尔将突厥千骑以诱之,
兵始交而伪走。
황상은 오히려 그가 머리를 숙이고 배회하며 오지 않을까 걱정하여
좌위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尔>에게 명령을 내려서
돌궐사람으로 구성 된 1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유인하게 하고
군사들이 처음에 접전하다가 거짓으로 도망하게 하였다.
高丽相谓曰:“易与耳!”
고구려 사람들은 서로 말하였다. “ 더불어 하기가 쉬울 뿐이군!”
竞进乘之,至安市城东南八里,依山而陈。
다투듯 이 기회를 타니 안시성 동남쪽으로 8리 된 지점에 도착하여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上悉召诸将问计,长孙无忌对曰:
“臣闻临敌将战,必先观士卒之情。
臣适行经诸营,见士卒闻高丽至,
皆拔刀结旆,喜形于色,此必胜之兵也。
陛下未冠,身亲行陈,凡出奇制胜,皆上禀圣谋,诸将奉成算而已。
今日之事,乞陛下指踪。”
황상은 여러 장수를 불러서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가 말하였다.
“ 신이 듣건대 적을 만나서 장차 싸우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이 여러 진영을 거쳐서 돌아보니 사졸들이 고구려 사람들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칼을 뽑고 깃발을 묶으며 안색에는 기뻐하는 모습을 띄었으니 이는 반드시 승리할 군대입니다.
폐하께서는 관례를 아직 치르시기 전에도 친히 군진에서 생활하시면서
무릇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제압하고 승리하였으니
모두가 황상께서 성스러운 꾀를 내려 주시면 여러 장수들은 받들어 처리할 뿐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폐하께서 쫓아가야 할 것을 지적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上笑曰:“诸公以此见让,朕当为诸公商度。”
황상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 여러분들이 이렇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시니 짐이 당연히 여러 분들을 위하여 생각해 보겠소.”
乃与无忌等从数百骑乘高望之,观山川形势,可以伏兵及出入之所。
마침내 <장손무기> 등과 더불어 수백 명의 기병으로 좇게 하면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들을 바라보고
산천형세와 군사를 매복할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高丽、靺鞨合兵为陈,长四十里。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가 합하여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 리였다.
江夏王道宗曰:
“高丽倾国以拒王师,平壤之守必弱,
愿假臣精卒五千,覆其本根,则数十万之众可不战而降。”
上不应,
강하왕인 <이도종>이 말하였다.
“ 고구려는 온 나라를 다 기울여서 왕사(王師)를 막고 있으니 평양의 수비는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예의 군사 5천 명을 빌려주시면 그들의 본거지가 되는 뿌리를 뒤집어엎는다면
수십만 명의 무리들은 싸우지 않고도 항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황상은 호응하지 않았다.
遣使绐延寿曰:
“我以尔国强臣弑其主,故来问罪;至于交战,非吾本心。
入尔境,刍粟不给,故取尔数城,俟尔国修臣礼,则所失必复矣。”
사신을 파견하여 <고연수>에게 거짓으로 말하게 하였다.
“ 나는 너희 나라의 강한 신하가 그 주군을 시해하였으므로
와서 그 죄를 묻고자 하는 것이니, 교전하는데 이르는 것은 나의 본 마음이 아니요.
너의 나라 경계지역에 들어와서 말의 꼴과 양식이 보급되지 아니하였던 연고로
너희 몇 개의 성을 빼앗았지만 너희 나라에서 신하로서의 예의를 닦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니
잃은 것은 반드시 회복시켜 줄 것이다.”
延寿信之,不复设备。
<고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대비하지 않았다.
上夜召文武计事,命李世勣将步骑万五千陈于西岭;
长孙无忌将精兵万一千为奇兵,自山北出于狭谷以冲其后。
황상이 밤중에 문무관원들을 불러서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서령(西嶺)에 진을 치게 하였다.
<장손무기>는 정예의 병사 1만 1천 명을 거느리고 기습병으로 삼아서
산의 북쪽에서부터 좁은 골짜기를 나와서 그들의 배후를 치게 하였다.
上自将步骑四千,挟鼓角,偃旗帜,登北山上,
敕诸军闻鼓角齐出奋击。因命有司张受降幕于朝堂之侧。
황상은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전고(戰鼓)와 호각(號角)을 가지고
기치를 뉘어가지고 북쪽 산에 올라가 여러 부대에 칙령을 내려서
전고와 호각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분발하여 치라고 하였다.
그 기회에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조당(朝堂)의 옆에 항복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장막을 치게 하였다.
上望见无忌军尘起,命作鼓角,举旗帜,诸军鼓噪并进,
延寿等大惧,欲分兵御之,而其陈已乱。
황상이 멀리서 <장손무기>의 군사들이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고
전고를 치고 호각을 불며 기치를 들어 올리게 명령하니 여러 부대가 전고를 울리며 나란히 전진하였다.
<고연수> 등은 크게 두려워하여 병사를 나누어 이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진지는 이미 혼란에 빠졌다.
会有雷电,龙门人薛仁贵著奇服,大呼陷陈,所向无敌;
高丽兵披靡,大军乘之,高丽兵大溃,斩首二万馀级。
마침 우레와 번개가 치는데 용문(龍門) 사람인 <설인귀薛仁贵(613-683)>가
기이한 복장을 입고 큰 소리를 지르며 진지를 함락시키니 향하는 곳에서는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구려의 병사들은 쓰러지고 대군은 이 기회를 타니 고구려의 군사들이 크게 무너졌고 목을 벤 것이 2만여 급이었다.
上望见仁贵,召见,拜游击将军。
황상이 <설인귀>를 멀리서 바라보고 불러서 유격장군으로 삼았다.
仁贵,安都之六世孙,名礼,以字行。
<설인귀>는 <설안도薛安都>의 6세손이고 이름은 예(禮)인데 자(子)를 사용하여 활동하였다.
延寿等将馀众依山自固,上命诸军围之,
长孙无忌悉撤桥梁,断其归路。
<고연수> 등이 나머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니,
황상은 여러 군사들에게 그들을 포위하고 <장손무기>에게는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그들이 돌아갈 길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己未,延寿、惠真帅其众三万六千八百人请降,
入军门,膝行而前,拜伏请命。
기미일(23일)에 <고연수>와 <고혜진>은 그들의 무리 3만 6천 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받아 달라고 청하였고,
군문에 들어와서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와서 절하고 엎드려서 명령을 내려 달라고 청하였다.
上语之曰:
“东夷少年,跳梁海曲,至于摧坚决胜,
故当不及老人,自今复敢与天子战乎?”
皆伏地不能对。
황상이 그에게 말하였다.
“ 동이(東夷)족의 어린아이가 바다 근처에서 뛰어 돌아다니다가
견고하게 해 놓은 것이 부러지고 결승(決勝)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노인을 못 감당하는 것이니 지금부터 다시 감히 천자와 싸우겠는가?”
모두가 땅에 엎드려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上简耨萨已下酋长三千五百人,授以戎秩,迁之内地,
馀皆纵之,使还平壤;皆双举手以颡顿地,欢呼闻数十里外。
황상은 욕살이하 추장 3천 5백 명을 뽑아서 융질(戎秩)을 주고 이들을 내지(内地)로 옮겨 버리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어서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모두가 두 손을 들고서 땅에 이마를 대고 환호하니 그 소리가 10 리 밖까지 들렸다.
收靺鞨三千三百人,悉坑之。
获马五万匹,牛五万头,铁甲万领,他器械称是。
말갈 사람 3천 3백 명을 붙잡아서 모두 묻어 버리고
획득한 말이 5만 필이고 소는 5만 두이며 철갑은 1만 벌이고 다른 기계도 이와 같았다.
高丽举国大骇,后黄城、银城皆自拔遁去,数百里无复人烟。
고구려에서는 온 나라가 크게 놀랐고 후황성(后黄城)과 은성(銀城)은
모두 스스로 뽑아 버리고 숨어 달아나니 수백 리에는 다시 사람과 연기가 나지 않았다.
上驿书报太子,仍与高士廉等书曰:“朕为将如此,何如?”
更名所幸山曰驻骅山。
황상이 역참으로 글을 써서 태자에게 알리고 인하여
<고사렴高士廉> 등에게도 글을 보냈다.
“ 짐이 장수가 되어 이와 같이 하였는데 어떠한가?”
행차하였던 산의 이름을 바꾸어 주필산(駐彃山)이라고 하였다.
秋,七月,辛未,上徙营安市城东岭。
가을 7월 신미일(5일)에 황상이 군영을 안시성(安市城)의 동쪽 고개로 옮기었다.
己卯,诏标识战死者尸,俟军还与之俱归。
기묘일(13일)에 조서를 내려서 전사한 사람의 시신에다 표시를 해 두었다가
군대가 돌아갈 때를 기다려서 그것을 가지고 함께 돌아가도록 하였다.
戊子,以高延寿为鸿胪卿,高惠真为司农卿。
무자일(22일)에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삼고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张亮军过建安城下,壁垒未固,士卒多出樵牧,
高丽兵奄至,军中骇扰。
<장량>의 군대가 건안성(建安城) 아래를 지날 때에 성벽이나 보루가 아직 단단하지 못하였지만
사졸들이 대부분 나가서 풀을 뜯어 말먹이를 준비하였는데, 고구려의 군사들이 습격하여 군대가 놀라고 소란스러웠다.
亮素怯,踞胡床,直视不言,将士见之,更以为勇。
<장량>은 평소에 겁이 많아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곧게 앞을 보면서 말을 하지 아니하였는데,
장군과 사병들이 이를 보고 다시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었다.
总管张金树等鸣鼓勒兵击高丽,破之。
총관인 <장금수張金樹> 등이 북을 치고 군사를 챙겨서 고구려를 쳐서 그들을 깨뜨렸다.
7월 초~중순 : <연수영>이 가시성에 주둔한 <염입덕>의 군대를 격퇴시킴
가교포(혹 광륵도)에서 <염입덕>의 보급부대와 주둔군 격퇴
7월 중순~말 : <연수영>이 묘도의 당 수군기지 공격함(<장금수>견책 당함)
八月,甲辰,候骑获莫离支谍者高竹离,反接诣军门。
上召见,解缚问曰:“何瘦之甚?”
8월 갑진일(8일)에 후기(候骑)가 막리지의 첩자인 <고죽리高竹離>를 붙잡아서
양손을 묶어 가지고 군문에 데리고 왔는데 황상이 불러서 보고 결박을 풀어 주면서 말하였다.
“ 어찌하여 마른 것이 그리 심한가?”
对曰:“窍道间行,不食数日矣。”
대답하였다 “ 숨어가며 샛길을 가다가 먹지 못한 지 며칠이 되었습니다.”
命赐之食,谓曰:
“尔为谍,宜速反命。为我寄语莫离支:
欲知军中消息,可遣人径诣吾所,何必间行辛苦也!”
竹离徒跣,上赐屩而遣之。
그에게 먹을 것을 내려 주게 하고 말하였다.
“ 너는 첩자이니 의당 돌아가서 속히 보고해야 하겠구나.
나를 위하여 막리지에게 말을 전하라.
군중(軍中)의 소식을 알고자 한다면 사람을 파견하여 지름길로 내가 있는 곳에 오게 하라,
왜 반드시 샛길로 보내어 고생을 하게 하는가?“
<고죽리>는 맨발이었으므로 황상은 그에게 짚신을 내려 주었다.
丙午,徙营于安市城南。
병오일(10일)에 군영을 안시성의 남쪽으로 옮기었다.
上在辽外,凡置营,但明斥候,不为堑垒,虽逼其城,
高丽终不敢出为寇抄,军士单行野宿如中国焉。斋
황상은 요하의 밖에 있으면서 무릇 군영을 설치하면서 다만 척후만을 밝혀두고
참호나 보루를 만들지 아니하여 비록 그들의 성에 가까이 갔지만,
고구려는 끝내 감히 나와서 침구하지 못하여 군사들도 혼자서 중국에서처럼 야숙(野宿)을 하였다.
上之将伐高丽也,薛延陀遣使入贡,上谓之曰:
“语尔可汗:今我父子东征高丽,汝能为寇,宜亟来!”
황상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설연타>는 사자를 파견하여 들어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황상이 그에게 말하였다.
“ 너의 가한에게 말하라. 지금 우리 부자(父子)는 동쪽으로 가서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너희가 침입할 수 있다면 의당 빨리 와야 할 것이다.”
真珠可汗惶恐,遣使致谢,且请发兵助军;上不许。
<진주> 가한은 황공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사과하며 또한 군사를 발동하여 군사를 돕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황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及高丽败于驻骅山,莫离支使靺鞨说真珠,啖以厚利,
真珠慑服不敢动。
고구려가 주필산에서 패배하게 되자 막리지는 말갈 사람들로 하여금
<진주> 가한에게 유세하며 많은 이익을 가지고 유혹하였지만
<진주> 가한은 두려워 복종하면서 감히 움직이지 아니 하였다.
8월 초~중순 : <왕대도>의 광록도, 대흠도의 고구려 수군 전진기지 공격 실패로 요동으로 돌아감
8월 중순~말 : <연수영>의 장산군도 해전의 승첩과 영. 협. 강, 회지역 수군 궤멸(당 수군과 함선 절반이상이 궤멸당함)
9월 초~중순 : 흑산해전, 비사성 공격, 당의 수로퇴각차단. 당군 2만~3만여명 사살, 고구려군 8천~1만여명 사상
九月,壬申,真珠卒,上为之发哀。
9월 임신일(7일)에 <진주> 가한이 죽자 황상은 그를 위하여 애도하는 의식을 차렸다.
初,真珠请以其庶长子曳莽为突利失可汗,居东方,统杂种;
嫡子拔灼为肆叶护可汗,居西方,统薛延陀;诏许之,皆以礼册命。
애초에 <진주> 가한이 그의 서장자(庶长子) <설예망薛曳莽>을 돌리실(突利失) 가한으로 삼아
동방에 거주하면서 여러 다른 종족들을 통어(統御)하게 하고
적자인 <설발작薛拔灼>을 사엽호(肆葉護) 가한으로 삼아서 서방에 거주하면서 <설연타>를 통솔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이를 허락하고 모두 예(禮)를 갖추어서 책명(册命)을 내렸다.
曳莽性躁扰,轻用兵,与拔灼不协。
<설예망>은 성격이 조급하고 시끄럽고 가볍게 군사를 사용하여 <설발작>과 협조하지 아니 하였다.
真珠卒,来会丧。
<진주> 가한이 죽자 와서 모여서 상례를 치렀다.
既葬,曳莽恐拔灼图己,先还所部,拔灼追袭杀之,
自立为颉利俱利薛沙多弥可汗。斋
장사를 지내고 나서 <설예망>은 <설발작>이 자기를 도모할까 두려워서
먼저 거느리는 부(部)로 돌아갔는데, <설발작>이 그를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힐리구리설사다미颉利俱利薛沙多弥> 가한이 되었다.
上之克白岩也,谓李世勣曰:
“吾闻安市城险而兵精,其城主材勇,
莫离支之乱,城守不服,莫离支击之不能下,因而与之。
建安兵弱而粮少,若出其不意,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建安下,则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谓‘城有所不攻’者也。”
황상이 백암성에서 이기었을 때에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 내가 듣건대 안시성의 성은 험하고 군사도 날카로우며 그 성주도 재주와 용기가 있어서
막리지가 어지럽힐 때에도 성을 지키면서 복종하지 않자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떨어뜨릴 수가 없어서 이 때문에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에 있는 군사는 약하고 양식도 적어서
만약에 그들이 생각 못 한 곳으로 나아가서 이를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公)이 먼저 건안성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고, 건안성이 떨어지면 안시성은 우리들의 뱃속에 있게 되니
이 병법이 이른 바 ‘성 가운데는 공격하지 아니해야 할 것도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对曰:“建安在南,安市在北,吾军粮皆在辽东;
今逾安市而攻建安,若贼断吾运道,将若之何?
不如先攻安市,安市下,则鼓行而取建安耳。”
대답하였다.
“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사들의 양식은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서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에 도적들이 우리들의 운송로를 끊게 된다면 장차 어찌 합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을 울리며 가서 건안성을 빼앗을 뿐입니다.”
上曰:“以公为将,安得不用公策。勿误吾事!”世勣遂攻安市。
황상이 말하였다.
“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계책을 쓰지 않겠소?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마시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安市人望见上旗盖,辄乘城鼓噪,上怒,
世勣请克城之日,男子皆坑之。
안시성의 사람들은 황상의 깃발과 차개(車蓋)를 멀리서 보기만 하면
번번이 성에 올라가서 북을 두드리니 황상이 화가 났는데
<이세적>은 성을 이기는 날에 남자건 여자건 모두 이를 묻어버리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安市人闻之,益坚守,攻久不下。
안시성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공격하기를 오랫동안 하여도 떨어뜨리지 못하였다.
高延寿、高惠真请于上曰:
“奴既委身大国,不敢不献其诚,欲天子早成大功,奴得与妻子相见。
安市人顾惜其家,人自为战,未易猝拔。
今奴以高丽十馀万众,望旗沮溃,国人胆破,
乌骨城耨萨老耄,不能坚守,移兵临之,朝至夕克。
其馀当道小城,必望风奔溃。
然后收其资粮,鼓行而前,平壤必不守矣。”
<고연수>와 <고혜진>이 황상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 소인은 이미 몸을 대국(大國)에 맡겼으니 감히 그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일찍 위대한 공로를 성취하시어서 소인도 처자와 만나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에 있는 사람들도 그 집안을 돌아보고 애석해 하여서 사람들이 스스로 싸우니 쉽게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소인은 고구려의 10여만 명의 무리를 가지고서도
깃발을 바라보자 막히고 무너졌고 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깨졌습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은 늙은이어서 굳게 지킬 수 없으니
군사를 옮겨서 그곳에 가되 아침에 가면 저녁이면 이길 것입니다.
그 나머지 길에 있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풍문만 듣고도 달아나고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곳에 있는 자재와 양식을 거두어 북을 치고 나아가면 평양은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群臣亦言:
“张亮兵在沙城,召之信宿可至,
乘高丽凶惧,并力拔乌骨城,渡鸭绿水,直取平壤,在此举矣。”
여러 신하들이 역시 말하였다.
“ <장량>의 군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2~3일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뽑아버리고
압록수를 건너서 곧바로 평양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이번 거사에 있습니다.”
上将从之,独长孙无忌以为:
“天子亲征,异于诸将,不可乘危徼幸。
今建安、新城之虏,众犹十万,若向乌骨,皆蹑吾后,
不如先破安市,取建安,然后长驱而进,此万全之策也。”
上乃止。
황상이 장차 이를 좇으려 하는데 홀로 <장손무기>가 생각하였다.
“ 천자가 친히 정벌을 나왔으니 여러 장수가 온 경우와 달라서 위험을 타고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新城)에 있는 오랑캐들은 무리가 10만 명인데
오골성을 향한다면 모두가 우리의 뒤를 밟아 올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격파하고 건안성을 빼앗은 다음에
멀리까지 달려가서 나아가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이 만 가지가 다 안전한 대책입니다.”
황상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诸军急攻安市,上闻城中鸡彘声,谓李世勣曰:
“围城积久,城中烟火日微,今鸡彘甚喧,
此必飨士,欲夜出袭我,宜严兵备之。”
여러 군사들이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황상은 성안에 있는 닭, 돼지의 소리를 듣고서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 성을 포위한 지 오래 되었는데 성안에서는 연기와 불이 날로 미미해가고
지금에는 닭과 돼지가 심하게 시끄러우니 이는 반드시 군사들에게 잡아 먹이는 것이고
반드시 밤중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이니 의당 군사를 엄격히 하여 이를 대비하시오.”
是夜,高丽数百人缒城而下。
上闻之,自至城下,召兵急击,斩首数十级,高丽退走。
이날 밤에 고구려 사람 수 백 명이 성에 줄을 매달아 내려오니 황상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아래에 이으러 군사를 불러서 급히 쳐서 목을 벤 것이 수십 급이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물러나서 도망하였다.
江夏王道宗督众筑土山于城东南隅,浸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以拒之。
강하왕 <이도종(600-653)>이 무리를 감독하여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토산을 쌓고
그 성을 조금씩 압박하자 성 안에서는 또한 그 성을 더 높이 쌓아서 이를 막았다.
士卒分番交战,日六、七合,
冲车砲石,坏其楼堞,城中随立木栅以塞其缺。
사졸들이 차례를 나누어서 교대로 싸우는데,
하루에 여섯 번에서 일곱 번 교전하였으며 충차와 포석으로 그 성루를 파괴하였더니
성 안에서는 따라서 목책을 세워서 그 부서진 부분을 막았다.
道宗伤足,上亲为之针。
<이도종>은 발을 다쳤는데, 황상이 그를 위하여 침을 놓았다.
筑山昼夜不息,凡六旬,用功五十万,
山顶去城数丈,下临城中,道宗使果毅傅伏爱将兵屯山顶以备敌。
토산을 쌓는 일을 밤낮으로 쉬지 않아서 무릇 60일이나 되었는데 공력을 들인 것은 50만 명 분량이었다.
토산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丈)정도 떨어져 있어서 내려가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爱>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꼭대기에서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山颓,压城,城崩,
会伏爱私离所部,高丽数百人从城缺出战,遂夺据土山,堑而守之。
토산이 무너져서 성을 눌러버리니 성은 무너지고 마침 <부복애>가 사사롭게 거느리는 부대를 떠났었는데,
고구려 사람 수백 명이 성이 부서진 곳으로 나와서 싸우고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고 참호를 파가지고 이곳을 지켰다.
上怒,斩伏爱以徇,命诸将攻之,三日不能克。
황상은 화가 나서 <부복애>를 목 베어서 조리를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이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는데, 3일이 지나도 이길 수가 없었다.
道宗徒跣诣旗下请罪,上曰:
“汝罪当死,但朕以汉武杀王恢,不如秦穆用孟明,
且有破盖牟、辽东之功,故特赦汝耳。”
<이도종>은 맨발로 깃발 아래까지 가서 죄를 받게 해 달라고 청하니 황상이 말하였다.
“ 너의 죄는 마땅히 사형감이다.
그러나 짐은 한(漢)나라의 무제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이
진(秦)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을 채용한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또한 개모성과 요동성을 격파한 공이 있으니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
우리의 사서인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를 살펴보자
開化四年 唐主 李世民 謂群臣曰 遼東 本諸夏之地 隋氏 四出師
而不能得 予今出兵 欲爲報 諸夏子弟之讐
개화4년(AD 645) 당나라 군주 <이세민>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하(夏)나라의 땅이거늘 수나라가 네 번이나 출사를 하였어도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하나라 후손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世民 親佩弓矢 率 李世勣 程名振 等 數十萬 至遼澤 泥淖二百餘里 人馬不可通 都尉 馬文擧 策馬奔擊 旣合戰
行軍摠管 張君叉 大敗 李道宗 收散軍 世民 自將數百騎 與世勣會 攻白岩城 西南 城主 孫代音 詐遣請降 而實欲乘隙反擊
世民 至安市城 先自唐山 進兵攻之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메고, <이세적>, <정명진> 등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렀다.
(요택은) 진흙길이 200여 리라서 사람과 말이 다니기에 거의 불가능하였다.
도위 <마문거>가 말을 채찍하여 요택을 빠져나가 공격하였으나
앞서 전쟁을 벌이던 행군총관 <장군차(장군예)>가 대패하였다.
<이도종>에게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게 하고,
<세민>은 기병 수백 기를 이끌고 <세적>에게로 가 그와 합세하여 백암성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거짓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빈틈을 노려 반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에 진을 치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北部褥薩 高延壽 南部褥薩 高惠眞 率官兵 及 靺鞨兵 十五萬引 至直前 連安市爲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
粟 縱兵 掠其軍馬 唐奴 不敢犯 欲歸 則 泥淖爲阻 坐困必敗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관병과 말갈병 15만 명을 이끌고
안시성 바로 앞에 안시성과 연결하는 진(壘, 루)을 쳤다.
그들은 높고 험준한 산에 잠복하여 성안의 곡식을 먹어가며 병사들을 종횡무진으로 출병시켜 당나라 군마를 약탈하였다. 당나라 오랑캐들은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되돌아가려해도 진흙탕 길로 막혀 있으니 앉아서 패하는 수 밖에 없었다.
延壽 引軍 直前以進 料去 安市城 四十里 遣人 問於 對盧 高正義 以其年老 習事也
正義 曰 世民 內芟軍雄 化家爲國 亦 不凡常 今 據全唐之兵 而來 其銳 不可輕也
爲吾計者 莫若頓兵 不戰 曠日 持久 分遣奇兵 斷其糧道 糧道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也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직진하여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다.
<고정의>는 나이(경험)도 많고 노련하여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고정의>가 말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內) 군웅(영웅)들을 제거하고, 지방(태원지방) 호족 세력이었던 그가 국가를 세웠으니
그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또 지금은 당나라의 모든 병사들이 궐기하여 쳐들어왔으니 그 기세 또한 가볍게 볼 수 없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계책은 군사를 움직이지 말고 여러 날(曠日)을 버티다가
기병을 나누어 파견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적의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면 그들은 싸우고 싶어도 얻을 것이 없고,
되돌아가고 싶어도 갈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는 우둔하여 천혜의 요충지인 요택을 방어하지 않는구나!"라고 비아냥 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고구려의 유인 작전이었고, 결국 요택은 당군의 무덤이 되었다.
延壽 從其計 賊來則拒 賊去則止 又 遣奇兵 焚奪糧路 世民 百計誘之以賄 面從 而內違 數遣 陰襲陷裂 賊之之死傷 酷多
延壽等 與靺鞨 合兵爲陣 持久作戰 一夜豹變 急襲電擊 世民 幾被圍迫 始有懼色
<고연수>는 그 계략에 따라 적이 오면 막고, 적이 퇴각하면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기병대를 파견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그들의 식량과 무기를 약탈하였다.
<이세민>은 백 가지 계략과 뇌물(賄)로 회유하였다.
(고구려군은)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실속을 차렸다.
여러 차례 기병대를 파견(數遣)하여 은밀히 적을 습격하고 분열시키니 적의 사상자는 급증(酷多)하였다.
<고연수> 군대는 말갈(예족, 구 부여족)과 합세하여 진을 치고 지구전을 펼치다
어느 날 밤 표범으로 돌변하여(一夜豹變) 적을 급습하고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절박함을 느끼고 비로소 두려운 기색이 역력하였다.
世民 又復 遣使 懷財寶 謂延壽曰 我以 貴國强臣 弑其君上故 來問罪 至於交戰 入貴境 篘粟不給故 間有焚掠 幾處而已
俟 貴國 修禮納交 則必復矣
<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고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 있는 신하(왕을 살해한 연개소문)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 싸움을 벌이고 노략질을 한 것은
식량과 말 먹이를 공급 받을 수가 없어서 몇 곳에서 노략질을 한 것이다.
차후로 귀국이 예(禮)를 갖추고 수교를 받아들인다면 곧바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延壽曰 諾 退貴兵 三十里 則吾將 見帝矣 然 莫離支 爲國柱石 軍法自在 不須多言
汝君 世民 廢父弑兄 淫納弟妃 此 可問罪也 以此傳之
<연수>가 말하기를
" 좋다. 병사를 30리 뒤로 물려라. 그럼 곧 나와 장수들이 황제를 알현하고 상의할 것이다.
하지만 막리지(연개소문)는 나라의 기둥 돌(柱石)이고, 군법이 그에게 있으니 여러 말이 필요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제수를 간음하여 비(妃)로 삼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어야 함이 옳은 것이다. 이 모두를 그대로 (이세민에게) 전하여라."하고 하였다.
於是 四遣督察 益加守備 依山自固 乘虛奇襲 世民 百計無術 痛恨遼東出兵之
不利 而已悔無及焉
이에 사방으로 감시 감찰관을 파견하여 더욱더 수비를 강화하였다.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건히 지키고 허술함을 틈타 기습하였다.
세민은 백 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 수 없어 요동 출병을 통탄하며 한스러워 하였다.
모든 것이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柳公權 小說 曰 六軍 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 英公之麾 黑旗被圍 世民大恐 雖終自脫
而危懼如彼 新舊唐書 及 司馬公 通鑑 不言者 豈非爲國諱恥乎
<유공권AD1132-1196)>이 쓴 소설에 이르기를
"당나라의 여섯 군대는 고구려에 짓밟혀 더 이상 떨쳐 일어날 기미가 없었고,
척후병이 보고하기를 영공의 대장기들은 흑기에 둘러싸였다고 하자 <세민>은 공포에 떨었다.
비록 그가 탈출한다 해도 위급함과 두려움은 저들과 같았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에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은 숨기기 위함(爲國諱恥)'이 아니겠는가?
李世勣 言於世民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 早己失輸遼東(今 昌黎) 今 踰安市而攻建安
若 高句麗 斷其輸送 勢必窮矣 不若先攻安市 安市下則 鼓行而取建安耳
<이세적>이 <세민>에게 말하기를
"건안성이 남쪽에 있고, 안시성이 북쪽에 있어서 우리의 군량미를 창려로 옮기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졌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놔두고 건안을 공격하고 있는데, 만약 고구려가 (건안으로 가는) 수송로를 차단해 버리면
우리의 군세는 반드시 궁색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시성을 먼저 공격하여 안시성만 함락시킨다면
그 다음은 북치고 행군하여 건안을 쉽게 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安市城人望見世民旗蓋 輒乘城 鼓譟唾罵 世民數其罪目 以告于衆 世民怒氣極甚 以爲陷城之日 男女盡坑之
安市城人聞之 益堅守 攻之不下
안시성 사람들은 멀리서 <이세민>의 깃발이 덮여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성위에 올라 북을 치며, 침을 뱉으며 조롱하였다. <이세민>의 죄(아버지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부인을 빼앗아 비(妃)로 삼은 죄)를 조목조목 열거하며
당나라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이세민>은 화가 극에 달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날 남녀 모두 구덩이에 생매장시키겠다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더욱더 굳게 성을 지켰다.
(이세민은) 여러 차례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時 張亮兵 在沙卑城 而欲召之 未果 低回失機 張亮 將移兵 襲烏骨城 反爲官兵 所敗 李道宗 亦在遭險不振
한편 <장량>의 병사들은 사비성(비사성)에 있었다.
(이세민은) 장량의 군대를 부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러 차례 망설이다 기회를 놓친 것이다.
<장량>은 병사들을 이동시켜 오골성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관병들에게 패하였다.
<이도종> 역시 험준한 계곡을 만나 (이세민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於是 唐奴諸將 議自相歧 世勣獨以爲 高句麗 傾國救安市 不若捨安市 而直擣 平壤 長孫無忌以爲 天子親征 異於諸將 不可乘危徼幸 今 建安新城之敵衆 數十萬 高延壽所率 靺鞨 亦數十萬 國內城兵 若又回烏骨城 而遮樂浪諸路之險 如是 則 彼勢日盛 急於迫圍 而 我翫敵 悔無及焉 不如 先攻安市 次取建安 然後 長驅而進 此 萬全之計也
상황이 이에 이르자 당나라 오랑캐들은 모여 전략을 협의하였지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각기 흩어졌다.
<이세적>은 독선적(강력히)으로
"고구려가 안시성을 구하기 위하여 국력을 쏟아 붓는다면 안시성을 포기하고 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하는 것만 못하다."
고 주장하였고, 장손무기는 "천자(이세민)가 친히 정벌에 나서는 것은 일반 장수들이 정벌에 나서는 것과 다르다.
위태로움을 감수하며 요행을 바라는 것은 불가한 것이다. 지금 건안 신성에 있는 적의 무리(고구려 병력)가 수십만이고,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 역시 수십만이며, 국내성의 병력이 또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험준한 길목을 모두 차단한다면
이는 곧 저들(고구려)의 세력은 날로 번창해지고, 포위되고 핍박받는 위급한 상황을 자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우리(당나라)가 적(고구려)을 가지고 놀다(我翫敵)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따라서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성을 취한 후에 천천히 진격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만전책(萬全之計, 가장 안전한 계략)이다."라고 주장하였다.
未之決 安市 城主 楊萬春 聞之 乘夜深以 數百精銳 縋城而下 賊陣 自相踐踏 殺傷甚多 世民 使李道宗 築土 山於城東南隅
官兵 從城缺出擊 遂奪土山 塹而守之 軍勢益振 唐奴諸陣 殆失戰意 傅伏愛 以戰敗斬 道宗以下 皆徒跣請罪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은 그 내용을 듣고 야심한 밤을 이용하여 수백의 정예 부대를 적진에 낙하시켰다.
(적들은 우왕좌왕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밟고, 밟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성의 남동쪽 모퉁이에 토산을 쌓도록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들은 성벽(토산)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지키니,
고구려의 군세는 더욱 사기가 올랐다. 당나라 오랑캐들의 모든 진영은 전의(戰意)를 상실하였다.
<부복애>는 전쟁에 패한 죄로 참형을 당하였고, <도종> 이하 모든 무리들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6. 당 태종의 철군
上以辽左早寒,草枯水冻,士马难久留,且粮食将尽,
癸未,敕班师。
황상은 요좌지역에는 일찍 추워지고 풀은 마르고 물은 얼어서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며 도한 양식이 장차 떨어지려 하기 때문에
계미일(18일)에 군사를 회군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안시성(安市城)에서 공성전을 벌이며 몇달째 고구려와 대치 상태에 있던 당(唐)군은
날씨가 추워지고 군량이 고갈되는 등 여건이 불리해지자 645년 음력 9월 18일 회군을 결정한다.
先拔辽、盖二州户口渡辽,乃耀兵于安市城下而旋,城中皆屏迹不出。
먼저 요주(遼州)와 개주(盖州) 두 주의 호구를 뽑아서 요수를 건너게 하고
마침내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를 시위하면서 선회하였는데, 성안에서는 모두가 흔적을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城主登城拜辞,上嘉其固守,赐缣百匹,以励事君。
성주는 성에 올라가서 절하며 인사하니 황상은 그가 굳게 지킨 것을 칭찬하고
비단 1백 필을 내려 주면서 임금을 섬긴 것을 격려하였다.
命李世勣、江夏王道宗将步骑四万为殿。
<이세적>과 강하왕 <이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위(後衛)를 맡게 하였다.
乙酉,至辽东。
을유일(20일)에 요동에 도착하였다.
퇴각하여 음력 9월 20일에 요동에 도착한다.
丙戌,渡辽水。
병술일(21일)에 요수를 건넜다.
9월 21일에 요수를 건넌다.
辽泽泥潦,车马不通,命长孙无忌将万人,
剪草填道,水深处以车为梁,上自系薪于马鞘以助役。
요택은 진흙 벌판이어서 수레와 말이 통행하지 못하자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잘라서 길에 메우도록 하였고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를 교량으로 삼았는데,
황상은 스스로 나무를 말의 안장걸이에 묶어서 일을 도왔다.
9월 말~10월 초 : 은산, 마미, 협곡, 후황, 비사성등을 되찾아오고 당 수군을 격퇴시킴
冬,十月,丙申朔,上至蒲沟驻马,督填道诸军渡渤错水,
暴风雪,士卒沾湿多死者,敕然火于道以待之。斋
겨울 10월 병신일(1일)에 황상이 포구에 이르러서 말을 세우고
도로를 메우는 여러 군사들을 독려하여 발착수(渤錯水)를 건너게 하는데,
폭풍 속에 눈이 내리니 사졸들은 옷이 젖어서 많은 사람이 죽으니
칙령을 내려서 길에다 불을 지피면서 그들을 기다렸다.
凡征高丽,拔玄菟、横山、盖牟、磨米、辽东、白岩、卑沙、麦谷、
银山、后黄十城,徙辽、盖、岩三州户口入中国者七万人。
무릇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현토(玄菟), 황산(横山), 개모(盖牟), 마미(磨米),
요동(辽东), 백암(白岩), 비사(卑沙), 맥곡(麥谷), 은산(银山), 후황(后黄)의 열 개 성을 뽑아버리고
요주와 개주 두 주의 호구를 중원지역으로 옮긴 것이 7만 명이었다.
新城、建安、驻跸三大战,斩首四万馀级,
战士死者几二千人,战马死者什七、八。
신성(新城), 건안(建安), 주필(駐驆)에서 있었던 세 번의 큰 전투에서
목을 벤 것이 4만여 급이었고 전투하다가 죽은 병사가 거의 2천 명이었고,
전마(戰馬)로 죽은 것은 열 마리 가운데 7~8 마리였다.
上以不能成功,深悔之,叹曰:
“魏征若在,不使我有是行也!”
황상은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번 행동을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命驰驿祀征以少牢,复立所制碑,召其妻子诣行在,劳赐之。主
역마를 달려서 <위징>에게 소뢰(少牢)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고
그의 처자를 불러서 행재소로 오게 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상을 내렸다.
丙午,至营州。
병오일(11일)에 영주에 도착하였다.
9월 21일 요수를 출발하여 10월 11일에 영주에 도착한다.
诏辽东战亡士卒骸骨并集柳城东南,命有司设大牢,
上自作文以祭之,临哭尽哀。
조서를 내려서 요동에서 사망한 사졸들의 해골을 유성(柳城)의 동남쪽에 모아 놓게 하고
유사에게 명령하여 대뢰(大牢)의 제사를 마련하게 하고 황상은 스스로 글을 지어서 그들에게 제사하였으며
곡을 하게 되었을 때 애도함을 극진히 하였다.
其父母闻之,曰:
“吾儿死而天子哭之,死何所恨!”
그 부모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 내 아이가 죽었는데 천자가 그에게 곡을 하였다니 어찌 한스러워 하겠는가?”
上谓薛仁贵曰:
“朕诸将皆老,思得新进骁勇者将之,无如卿者;
朕不喜得辽东,喜得卿也。”
황상이 <설인귀>에게 말하였다.
“ 짐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늙었으니 신진(新進)의 날래고 용감한 사람을 얻어서 이를 거느리게 하려고 생각하는데,
경(卿)만한 사람이 없으니 짐이 요동지역을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지만 경을 얻은 것을 기뻐하오.“
丙辰,上闻太子奉迎将至,从飞骑三千人驰入临渝关,道逢太子。
병진일(21일)에 황상이 태자가 받들어 영접하려고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기(飛騎) 3천 명을 좇게 하고서 말을 달려서 임유관(臨渝關)으로 들어갔고 길에서 태자를 만났다.
上之发定州也,指所御褐袍谓太子曰:
“俟见汝,乃易此袍耳。”
황상이 정주를 출발할 때에 입고 있는 갈포(褐袍)를 가리키며 태자에게 말하였다.
“ 너를 볼 때까지 기다려서야 마침내 이 갈포를 바꾸어 입겠다.”
在辽左,虽盛暑流汗,弗之易。
요좌지역에 있을 때에 비록 한참 무더워서 땀을 흘렸으나 바꾸어 입지 않았다.
及秋,穿败,左右请易之,上曰:
“军士衣多弊,吾独御新衣,可乎?”
至是,太子进新衣,乃易之。
가을이 되어 구멍이 뚫리고 해어지니 주위에서 그것을 바꾸어 입도록 청하였으나 황상이 말하였다.
“ 군사들의 옷은 대부분 해졌는데 홀로 새 옷을 입어야 옳다는 말인가?”
이에 이르러 태자가 새 옷을 올리니 마침내 이를 바꾸어 입었다.
诸军所虏高丽民万四千口,先集幽州,
将以赏军士,上愍其父子夫妇离散,
命有司平其直,悉以钱布赎为民,欢呼之声,三日不息。
여러 군사들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의 백성 1만 4천 명은 먼저 유주(幽州)에 모았다가
장차 군사들에게 상을 주려고 하였지만
그들이 부자와 부부가 떨어지고 흩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유사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값을 매기게 하고
모두 전(錢)이나 포(布)를 가지고 대신 주고 풀어서 민(民)으로 삼으니 환호하는 소리가 3일 동안 쉬지 않았다.
10월 초~중순 : 청석관에서 <구행엄>, <계필하력> 등의 1만의 군대 격퇴시킴
10월 말~11월 초 : 묘도 제2차해전, <연수영> 수군의 묘도 점령(장금수 실종, 장문한 처형 됨)
十一月,辛未,车驾至幽州,
高丽民迎于城东,拜舞号呼,宛转于地,尘埃弥望。
11월 신미일(7일)에 거가가 유주에 이르렀더니
고구려의 백성들이 성의 동쪽에서 영접하며 절하고 춤추며 환호하였는데,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니 먼지가 바라 보였다.
10월 12일 영주를 출발하여 11월 7일 유주에 도착한다.
庚辰,过易州境,司马陈元璹使民于地室蓄火种蔬而进之;
上恶其谄,免元璹官。
경진일(16일)에 역주(易州) 지경을 통과하는데
사마 <진원숙>이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파고 불씨를 모아 두고서 채소를 심었다가 이를 올리었다.
황상이 그가 아첨하는 것을 싫어하여 <진원숙>의 관직을 면직시켰다.
11월 8일 유주를 출발하여 11월 16일에 역주의 경계를 통과한다
丙戌,车驾至定州。
병술일(22일)에 거가가 정주에 도착하였다.
11월 16일 역주의 경계를 출발하여 11월 22일 정주에 도착한다
丁亥,吏部尚书杨师道坐所署用多非其才,左迁工部尚书。
정해일(23일)에 이부상서 <양사도>가 채용한 사람의 대부분이
적당한 인재가 아니었다는 죄에 걸려서 공부상서로 좌천되었다.
壬辰,车驾发定州。
임진일(28일)거가가 정주를 출발하였다.
11월 28일 정주를 출발한다.
十二月,辛丑,上病痈,御步辇而行。
12월 신축일(7일)에 황상은 종기가 나는 병에 들어 보연(步辇)에 올라서 갔다.
戊申,至并州,太子为上吮痈,扶辇步从者数日。
무신일(14일)에 병주(并州)에 도착하니 태자가 황상을 위하여 종기를 빨았으며
연(辇)을 부축하여 걸어서 좇기를 며칠 동안 하였다.
11월 28일 정주를 출발하여 12월 14일 병주(并州 今 항상(대무산)인근)에 도착한다.
신해일(17일)에 황상의 병이 나아서 백관들이 모두 경하하였다.
上之征高丽也,使右领军大将军执失思力将突厥屯夏州之北,以备薛延陀。
황상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우영군대장군 <집실사력執失思力>으로 하여금
돌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하주(夏州)의 북쪽에 주둔하여 설연타(薛延陀)를 대비하게 하였다.
薛延陀多弥可汗既立,以上出征未还,引兵寇河南,
上遣左武候中郎将长安田仁会与思力合兵击之。
설연타(薛延陀)에서는 <다미多彌> 가한이 이미 즉위하였고. 황상은 출정하였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를 이끌고 황하의 남쪽지역을 노략질하니 황상은 좌무후 중랑장인 장안사람 <전인회田仁会>를 파견하여
<집실사력>과 함께 군사를 합쳐서 이들을 치게 하였다.
思力羸形伪退,诱之深入,及夏州之境,整陈以待之。
<집필사력>은 파리한 모습으로 거짓 퇴각하며 그들을 유인하여 깊이 들어오게 하였다.
하주(夏州)의 경내에 들어오게 되자 진을 정비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薛延陀大败,追奔六百馀里,耀威碛北而还。
설연타는 크게 패배하니 뒤 쫓아서 6백여 리를 달려가서 사막의 북쪽에 위엄을 빛내고 돌아왔다.
多弥复发兵寇夏州,
己未,敕礼部尚书江夏王道宗,
发朔、并、汾、箕、岚、代、忻、蔚、云九州兵镇朔州;
<다미>는 다시 병사를 발동하여 하주(夏州)를 노략질하니 기미일(25일)에 예부상서 강하왕 <이도종>에게 칙령을 내려서
삭주(朔州), 병주(并州), 분주(汾州), 기주(箕州), 남주(嵐州), 대주(代州), 흔주(忻州), 울주(蔚州), 운주(雲州)의 아홉 개 주의 병사를 징발하여 삭주(朔州)에서 진수하게 하였다.
右卫大将军代州都督薛万彻,左骁卫大将军阿史那社尔,
发胜、夏、银、绥、丹、延、鄜、坊、石、隰十州兵镇胜州;
胜州都督宋君明,左武候将军薛孤吴,
发灵、原、宁、盐、庆五州兵镇灵州;
又令执失思力发灵、胜二州突厥兵,与道宗等相应。
薛延陀至塞下,知有备,不敢进。
우위대장군 대주(代州) 도독 <설만철薛萬徹>과 좌효위 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尔>는
승주(勝州), 하주(夏州), 은주(銀州), 수주(绥州), 단주(丹州), 연주(延州), 부주(鄜州), 방주(坊州), 석주(石州), 습주(隰州)의 열 개 주의 군사를 징발하여 진수하게 하였다.
승주(勝州)도독인 <송군명宋君明>과 좌무위장군 <설고오薛孤吳>는
영주(靈州), 원주(原州), 녕주(寧州), 염주(鹽州), 경주(慶州)의 다섯 주에 있는 군사를 징발하여
영주(靈州)에서 진수하게 하였으며,
또한 <집실사력>으로 하여금 영주(靈州)와 승주(勝州)에 사는 돌궐족 군사를 징발하여
<이도종> 등과 서로 호응하게 하였다.
설연타는 요새 아래까지 왔다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감히 나오지 아니하였다.
당 태종의 철군시 우리의 사서인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를 살펴보자
莫離支 率數百騎 巡駐灤坡 詳問情形 遣 命摠攻四擊 延壽等 與靺鞨夾攻 楊萬春 登城督戰
士氣益奮 無不一當百矣 世民 憤不自勝 敢出決戰 楊萬春 乃呼聲長弓 世民出陣 矢浮半空
遂爲所中 左目沒焉 世民 窮無所措 從間道遁 命 世勣 道宗 將 步騎數萬爲殿 遼澤泥淖
軍馬難行 命 無忌 將萬人 剪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世民 自繫薪於馬鞘 以助役
막리지는 수백 기를 이끌고 난파(灤坡)를 순시하며 정황에 대하여 상세히 물은 후
사신을 보내어 사방에서 총공격할 것을 명하였다.
<고연수>등은 말갈과 협공하였고, <양만춘>은 성에 올라 전투를 독전하니 사기는 더욱 올라 일당백이 아닌 자가 없었다.
<세민>은 당군이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 감히 출전할 것을 결심하였다.
<양만춘>은 고함을 지르며 큰 활을 당겼다.
<세민>은 진을 나오다가 반공을 가르며 정중앙으로 날아오는 화살에 왼쪽 눈알이 함몰되었다.
<세민>은 허둥대다가 군사들 틈에 끼어 도망치며,
<이세적>과 <이도종> 등 장수들에게 보병과 기병 수만으로 호위하도록 하였다.
요택의 진흙뻘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하였다.
<이세민>은 <무기(장손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장병들로 하여금 풀을 베어 길에 깔도록 하였고,
수심이 깊은 곳에는 마차(수레)로 다리를 놓게 하였다.
<세민>도 말 채찍(말 꼬리)에 섶나무를 매어 그 일을 도왔다.
冬十月 至蒲吾渠駐馬 督塡道 諸軍 渡渤錯水 暴風雪 占濕 士卒 多死者 使燃火於道 以待之
時 莫離支 淵蓋蘇文 乘勝長驅追之甚急
鄒定國 自赤峰至河間縣 楊萬春 直向新城 軍勢大振
唐奴 多棄甲兵而走 方渡 易水
(이세민은) 겨울 10월에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을 메우는 일을 감독하였다.
당나라의 군대가 모두 발착수를 건넜다.
폭풍이 몰아치고 눈이 내려 옷을 적시니(濕) 사졸들이 많이 죽었다(동사(凍死)했다).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폭풍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승승장구하며 급하게 추격해 왔다.
<추정국鄒定國> 은 적봉(赤峰)으로부터 하간현(河間縣)에 이르렀고, <양만춘>은 신성(新城)으로 직행했다.
군의 사기는 매우 충천되었다.
당나라 오랑캐들은 모두 갑옷과 병기를 벗어 던지고 도주하여 사방(이곳 저곳)에서 역수(易水)를 건넜다.
時 莫離支 命 延壽 改築 桶道城 今高麗鎭也 又 分遣 諸軍 一軍 守遼東城 今昌黎也 一軍
跟隨世民 一軍 守上谷 今大同府也
당시 막리지는 <고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桶道城)을 개축하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고(구)려진이다.
또 군대를 나누어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창려다.
일군은 <이세민>을 바짝 추격하게 하고, 일군은 상곡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대동부다.
於是 世民 窮無所措 乃 遣人乞降 莫離支 率 定國 萬春 等 數萬騎 盛陳儀仗 鼓吹前導
入城長安 與世民約 山西 河北 山東 江左 悉屬於我
이에 <세민>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 궁지에 몰리자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하였다.
막리지는 <추정국>, <양만춘> 등 수만의 기병을 인솔하여 성대한 의장행렬을 갖추게 하고,
북치고 나팔 불며 길을 인도받아 장안에 입성하였다.
(막리지는) <세민>과 더불어 항복 조약을 체결하니
산서, 하북, 산동, 강좌(장강, 양자강의 북쪽)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先時 高句麗 與百濟 外競俱存 遼西地 有百濟所領 曰 遼西晉平
일찍이 고구려와 백제는 국경을 맞대고 함께 존재하였는데 (그곳은)요서땅이다.
백제령이 있던 곳을 요서진평이라 한다.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 遼西晉平等郡 百濟郡廢
이 해(AD 645)에 백제가 당나라를 치는데 협조(貢)하지 않아 병사를 파견하여
요서진평과 주변의 군들을 모두 공취(攻取, 공격하여 취함)하고, 백제군을 폐하였다.
王介甫 曰 淵蓋蘇文 非常人也 果然 莫離支 在 則高句麗與百濟俱在 莫離支 去
則百濟與高句麗俱亡 莫離支 亦 人傑也哉 莫離支 臨終 顧謂 男生 男建 曰
爾兄弟 愛之如水 束箭則强 分箭則折 須無忘 此將死之言
貽 笑於天下 隣國之人 時則 開化 十六年 十月七日也 墓在 雲山之九峰山也
<왕개보王介甫, 본명 왕안석, 송나라 사람, AD 1021-1086)>가 말하기를 연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사실(果然)이다. 막리지가 생존해 있을 때, 고구려와 백제도 함께 존재하였고, 막리지가 죽었을 때,
고구려와 백제는 함께 망하였다. 막리지는 또 인걸이었다.
막리지는 임종을 앞두고 남생과 남건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처럼 사랑해야 한다. 화살을 함께 묶으면 강하지만(束箭則强) 이를 나누면 꺾이는 것이니(分箭則折),
반드시 내 말을 잊지 마라, 이것이 죽음을 앞둔 나의 유언(言貽)이니
천하 와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때는 개화 16년(657년) 10월 7일이다. 연개소문의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의 화살을 맞고 눈알이 빠진 <이세민>이 회군하다 태자를 만난 임유관은
577년 <온달> 장군이 갈석산과 배찰산에서 북주(北周)를 토벌하고 유림관까지 추격하여 대파한 곳이며
유림관은 영주 유성의 아래에 있는 임유관(今 보정시 만성구 석정향石井鄕)을 말한다.
또한 유림관(楡林關)은 고려시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이라는 글로 우리에게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정관음유림관작(貞觀吟楡林關作) - 이색(李穡)
정관 연간, 유림관을 읊어 짓다 - 이색(李穡)
晋陽公子結豪客(진양공자결호객) : 진양공자가 호걸들과 친분 맺어
風雲壯懷滿八極(풍운장회만팔극) : 풍운의 장한 회포 우주에 가득했다.
赫然一起揮天戈(혁연일기휘천과) : 기운차게 한번 일어나 하늘 무기 휘두르니
隋堤楊柳無顔色(수제양류무안색) : 수나라 제방의 버드나무 제 빛을 잃었었다.
태종이 제위에 오르기 전에는 주로 호방한 사람들과 친분을 맺고 지냈다
그의 호방한 기운은 세상에 가득하고, 우주(八極)에 가득했다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 하늘의 뜻을 명분(天戈)으로
조금도 말설임 없이 한번에 일어나(一起) 기운차게(赫然) 바로 실천에 옮겨졌다(揮)
수나라 제방(隋堤)의 버드나무(楊柳)가 얼굴빛이 없어졌다는 것(無顔色)은
그가 수나라 앙제를 쳐부수고 황제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已踵殷周成武功(이종은주성무공) : 은나라와 주나라 본받아 무공을 세웠으니
宜追虞夏敷文德(의추우하부문덕) : 순임금과 우임금 본받아 문장의 덕을 펴야 하리라.
持盈守成貴安靖(지영수성귀안정) : 가득 찬 것 지키고, 성취 유지함에는 안정이 제일이라
好大喜功多反側(호대희공다반측) : 큰 일 즐기고, 공로 좋아하면 잘못되기 쉽도다.
당태종이 수나라를 칠 때 은나라와 주나라의 명분(殷周)을 빌어(已踵)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成武功)
따라서 당태종은 마땅히 순임금과 우임금(虞夏)을 쫓아(追) 문덕(文德)으로 정치를 천하에 펴야 했다(宜敷).
三韓箕子不臣地(삼한기자불신지) : 우리나라는 기자 때부터 중국이 신하 삼지 않던 땅이니
置之度外疑亦得(치지도외의역득) : 예외로 하여 그냥 둠이 좋았을 것을
胡爲至動金玉武(호위지동금옥무) : 어찌하여 금옥과 같은 발걸음을 일으켜
啣枚自將臨東土(함매자장임동토) : 말에 재갈 물리고, 스스로 동쪽 땅으로 몰려왔던가.
貔貅夜擁鶴野月(비휴야옹학야월) : 날쌘 군사들 달밤에 안시성을 에워싸고
旌旗曉濕鷄林雨(정기효습계림우) : 무수한 깃발은 계림에 내리는 새벽 비에 젖었다.
謂是囊中一物耳(위시낭중일물이) : 주머니 속 물건 취하듯 쉽다고 말하더니
那知玄花落白羽(나지현화락백우) : 눈동자 흰 깃에 적중될 것을 그 누가 알았을까.
중국이 우리 나라에 대해서(三韓箕子) 결코 신하의 나라로 대하지 않고(不臣地)
평등한 관계로 예의를 지켰던 사실을 말했다.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당태종도 고구려를 팽창정책의 예외로 인정하여 그냥 내버려 두었으야 마땅하다(置之度外).
그런데, 어찌(胡) 금과 옥같이 고귀한(金玉) 황제의 신분으로 침략(武)의 발걸음을 재촉하였단 말인가
그것도 은밀히 말에 제갈을 물리고(啣枚), 직접(自) 군사를 지휘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단 말인가(臨東土)
침략을 목표로 단련된 날랜 군사들(貔貅)을 이끌고 당태종은 달밤에 안시성을 포위하였다(夜擁鶴野月)
그 때 조용한 우리나라는 새벽비가 내리고 있었고
원정군인 당나라 군대의 깃발(旌旗)은 새벽비에 젖고 있었다(曉濕鷄林雨)
당태종의 팽창정책에 무고한 당나라 군사들은 타국에서 새벽비를 맞우며 생사의 싸움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인적 욕망에 눈이 먼 당태종은 안시성을 자기 주머니에 든 물건처럼(囊中一物耳) 쉽게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려는 안시성주 양만춘의 저항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지혜와 용기와 무술도 대단한 것이었다.
양만춘이 쏜 화살(白羽)은 침략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당태종의 눈(玄花)을 정확히 맞추어
태종의 눈은 떨어지고(落), 안시성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鄭公已死言路澁(정공이사언로삽) : 정공이 이미 죽어 언로가 막혔다가
可笑豊碑蹶復立(가소풍비궐복립) : 우습구나, 쓰러뜨린 큰 비석을 다시 세우다니
回頭三叫貞觀年(회두삼규정관년) : 머리 돌려 정관의 연호를 세 번 소리쳐 보니
天末悲風吹颯颯(천말비풍취삽삽) : 하늘 끝에서 슬픈 바람만 쌀쌀하게 불어오는구나
유림관을 지나는 <이색>은 과거의 역사를 생각했다
신하인 <정공鄭公>이 이미 죽어(鄭公已死) 언로가 막혀(言路澁) 태종의 성급의한 팽창정책이 무리하게 시행되었다.
그결과로 안시성주 <양만춘>에게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태종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정공鄭公>을 생각했다. 그는 정공의 비석을 다시 세웠다(豊碑蹶復立).
그는 당태종의 이러한 어리석음이 참으로 우습다(可笑)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비석을 돌아보았다 (回頭)
그리고는 정관 연간에 있었던 일(貞觀年)을 세 번이나 되새겨보았다(三叫)
하늘도 그 때의 일을 아는지, 하늘 끝 먼 곳(天末)으로부터
슬픈 바람이(悲風) 쌀쌀하게 비석에 몰아치고 있었다(吹颯颯)고 적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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