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역고/부여

북부여 불이성(不而城)을 찾아서(5)

지보고 2023. 10. 20. 08:50

11. 노룡성(盧龍城)과 노룡새(盧龍塞)

 

- 노룡(盧龍) 의 연혁

 

그림 11-1 <담기양>이 그린 요서군 노룡

 

기주(冀州) 북평군(北平郡) 노룡현(盧龍縣)

옛날에는 북평군(北平郡)을 두었었는데 신창현(新昌)과 조선현(朝鮮) 등 2개의 현을 다스렸다.

북제(北齊)에서는 조선현을 없애고 신창현으로 편입시켰고 또한 요서군의 해양현을 없애고 비여현(肥如)으로 편입시켰다. 개황(開皇) 6년(586년)에 또한 비여현(肥如)을 없애고 신창현(新昌)으로 편입시켰다가

18년(598년)에 이름을 노룡현(盧龍)으로 바꾸었다.

대업(大業) 초에 북평군(北平郡)을 설치하였다. 장성(長城)이 있다. 관관(闗官)이 있다. 임유궁(臨渝宮)이 있다.

복주산(覆舟山)이 있다. 갈석(碣石)이 있다.

현수(玄水)와 로수(盧水)와 열수(湼水) 윤수(閏水)와 용선수(龍鮮水)와 신량수(臣梁水)가 있다. 바다가 있다. 

盧龍舊置北平郡,領新昌、朝鮮二縣。後齊省朝鮮入新昌,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盧龍。大業初置北平郡。有長城。有關官。有臨渝宮。有覆舟山。

有碣石。有玄水、盧水、溫水、閏水、龍鮮水、巨梁水。有海。

<수서 지리지>

 

북평군 노룡현은 598년에 처음 생긴 현으로 그 이전의 조선현, 신창현, 해양현, 비여현을 포함하는 지역인데 

장성과 관문이 있고 임유궁과 갈석산이 있다고 한다.

노룡(盧龍)이라는 말은 598년에 처음으로 생겼다는 것이다.

 

노룡군(盧龍軍)은 평주성(平州城)안에 있다. 관하의 병졸이 10000명이고 말이 300필이다.  

盧龍軍在平州城内 管兵萬人 馬三百疋

『舊唐書』 권 38

 

평주의 치소가 평주성인데 평주성에 노룡군(盧龍軍)을 두었다고 하니 평주성이 곧 노룡성이라는 것이다.

 

평주(平州) 북평군 노룡현(盧龍縣)

후한(後漢)의 비여현(肥如縣)으로 요서군(遼西郡)에 속했으며 수(隋)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아니하였다. 

무덕(武徳) 2년에 노룡현(盧龍縣)으로 고쳤는데 개황(開皇) 년간의 옛 이름으로 되돌린 것이다. 

盧龍, 後漢肥如縣, 屬遼西郡, 至隋不改. 武徳二年, 改為盧龍縣, 復開皇舊名.

<구당서 지리지>

 

평주 노룡현은 후한의 요서군 비여현이라고 한다.

 

 

평주 북평군 노룡현(盧龍縣) 

본래 비여현(肥如)인데 무덕(武德) 2년(619년)에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무녕현(撫寧縣)을 설치했었는데 7년(624년)에 없앴다.

<신당서 지리지>

 

양평(襄平)은 현(縣)으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양평의) 옛 성이 지금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에 있다.  

襄平 縣 屬遼東郡 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後漢書』 권 104 下, 李賢 注

 

당(唐)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의 위 《후한서(後漢書)》 주석에 따르면

노룡성(盧龍城)의 서남쪽에 연(燕)장성의 동단인 양평(襄平)이 있었다. 

 

조선, 기자(箕子)를 뒤에 요(遼)의 낙랑에 봉하였다. 지금 평주(平州)의 노룡(盧龍)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다.

그런 연유로 무덕(武徳, 618~626)년간에 요(遼)를 기주(箕州)로 삼았다. 8년 고구려 역시 그 지역이다.  

朝鮮 箕子後封遼之樂浪 今平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徳以遼為箕州 八年 而髙麗亦其地

『路史』 권 27, 宋 羅泌 撰

 

평주 노룡성이 고구려 평양성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림 11-2 노룡성과 노룡새

 

노룡성이 고구려 평양에 있었다면 노룡새는 어디인가?

 

노룡새는 (노룡)성 서북쪽 200리에 있다.  

盧龍塞在(盧龍)城西北二百里

『通典』 권 178, '平州'

 

진롱(秦隴)으로부터 대하(황하)를 건너면 태화(太和)가 동쪽을 가로막고 자형(紫荊)이 노룡의 새(盧龍之塞)를 둘러싼다.

줄지은 관문이 수십이며 거용관(居庸關)이 유주의 북쪽에 있다. 가장 깊고 험하여 천하사새(天下四塞)의 하나로 불린다.  

自秦隴亂大河 東抵太和 紫荊繞出盧龍之塞 列關數十 而居庸關在幽州之北 最為深阻 號天下四塞之一

《欽定四庫全書 陵川集》 권 21 '居庸關銘'

 

그림 11-3 노룡새와 자형령

 

유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노룡새를 지난다.  濡水又東南逕盧龍塞

『水經注』 권 14 '濡水'

 

여기에는 수십개의 성이있다.

사방 천여 리에 절도사(節度使)의 주(州)가 둘, 자사(刺史)의 주(州)가 다섯,

그리고 십여 만 가구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병사 수만이 있다.

서(西)로 상산(常山)의 꼬리에 다다라 정주(定州)를 둘러싸고 지키며

좌(左)로 비호의 구(蜚狐之口)를 돌아서 동(東)으로 하간(河間)을 취하고 구하(九河)로 나간다.

남(南)에서 분야(糞野)로 들어와서 북으로 탁(涿)주와 역(易)주에 이르러

가로로 상곡(上谷)과 노룡의 새(盧龍之塞)에 이어졌는데, 그 너머에 연(燕)과 조(趙)가 있었다.

항악(恒嶽)의 진영은 호타(滹沱)하, 래(淶)수, 역(易)수에 젖어들어

뽕나무, 삼, 물고기, 소금의 이로움이 있고 대추, 밤, 오곡의 넉넉함이 있다.  

於是有城數十 地方千餘里 節度之州二 刺史之州五 勝兵數 而戸不啻十餘萬 西盡常山之尾 繞出鎮定 

左轉蜚狐之口 東包河間 出九河 南入糞野 北盡涿 易 横絡上谷 盧龍之塞 而跨有燕趙 恒嶽之鎮有滹沱淶易之浸 

有桑麻魚鹽之利 棗栗五榖之饒

『欽定四庫全書 陵川集』 권 35 '左副元帥祁陽賈侯神道碑銘'

 

<학경>은 보정에 실제로 살았던 인물이다.

가로로 상곡과 노룡새를 지나 연나라와 조나라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노룡새를 지나면 래원이 나오고 래원에서 서쪽으로 가면 연나라의  영구(靈丘)와 조나라의 삭주(朔州)가 있었다는 것이다.

 

 

12. 창려성(昌黎城)과 백랑성(白狼城)

 

- 창려(昌黎)의 연혁

 

유주(幽州) 요서군 교려현(交黎縣)

유수(渝水)가 상류에서 새(塞) 밖에서 만나서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린다.

왕망은 금로(禽虜)라고 하였다.

應劭曰今昌黎師古曰渝音喻其下並同. 應劭(응소)가 말하기를 지금 昌黎(창려)라고 했다.

師古(사고)는 말하기를 渝의 음은 유(喻)라고 했다. 

<한서 지리지>

 

창료(昌遼)는 옛 천료(天遼)로서 요서(遼西)에 속했다.  

昌遼 故天遼 屬遼西.
『後漢書』 권 33, 군국지 幽州 遼東屬國

 

「창료(昌遼)는 옛 천료(天遼)로서 요서(遼西)에 속했다.」

생각컨대 《前漢書(전한서)》  '지리지'에 천료현(天遼縣)은 없다.

고염무(顧炎武)가 옛 문서를 살펴 의심한 바가 이 기록이다.  

「昌遼故天遼」 다섯자는 마땅히 「昌黎故交黎」로 적혔어야 한다.  

昌遼故天遼屬遼西○按前志遼西無天遼縣 顧炎武考古錄疑此志 昌遼故天遼五字當作昌黎故交黎是也
『後漢書』 권 33 考證 (四庫全書本)

 

평주(平州) 창려군(昌黎郡) 

한국(漢)때에는 요동속국(遼東屬國) 도위(都尉)에 속했고, 위국(魏, 曹魏)에서는 군을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900이다.

1)창려현(昌黎縣), 2)빈도현(賔徒縣)

<진서(晉書)지리지>

 

남영주(南營州) 창려군(昌黎郡)

영흥(永興)(532년) 년간에 설치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509이며 인구수는 2,658명이다.

1)용성현(龍城縣)  2) 광흥현(廣興縣)  3) 정황현( 定荒縣)

永興中置. 領縣三 戸五百九. 口二千六百五十八. 
龍城, 永熙中置. 廣興, 永熙中置. 定荒, 興和中置. 

 

용성(龍城), 진군(真君) 8년에 유성(柳城), 창려(昌黎), 극성(棘城)을 병합하여 속하게 하였다.

요사(堯祠)와 유돈성(榆頓城)과 랑수(狼水)가 있다.  

龍城, 真君八年併桞城 昌黎 棘城 屬焉. 有堯祠 榆頓城 狼水.
『魏書』 권 106上, 지형2上 營州 昌黎郡

 

영주(營州) 창려군(昌黎郡)

진(晉)에서 요동(遼東) 을 나누어 설치하였고, 진군(真君) 8년(447년)에 기양(冀陽)을 병합하여 속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201이며 인구수는 918명이다.

1)용성현(龍城縣), 진군(真君) 8년(447년)에 유성(桞城), 창려(昌黎), 극성(棘城)을 병합하여 속하게 하였다. 

요사(堯祠)와 유돈성(榆頓城)과 랑수(狼水)가 있다

2)광흥현(廣興縣), 진군(真君) 8년(447년)에 도하(徒何) 영악(永樂) 연창(燕昌)을 병합하여 속하게 하였다.

계명산(鷄鳴山)과 석성(石城)과 대류성(大柳城)이 있다.

3)정황현(定荒縣), 정광(正光)(520-525년) 말년에 설치하였다. 록두산(鹿頭山)과 송산(松山)이 있다.

晉分遼東置, 真君八年併冀陽, 屬焉. 
領縣三, 户二百一, 口九百一十八.

龍城, 真君八年併桞城 昌黎 棘城 屬焉. 有堯祠 榆頓城 狼水. 

廣興, 真君八年併徒何 永樂 燕昌 屬焉. 有鷄鳴山 石城 大桞城. 

定荒, 正光末置. 有鹿頭山 松山. 

<위서 지형지>

 

숭주(崇州) 창려현(昌黎縣) 

정관(貞觀) 2년에 북려주(北黎州)를 두었다가 영주(營州)의 동북쪽에 폐하였던 양사진(陽師鎮)에 기치(寄治)하였다.

8년에 고쳐 숭주(崇州)라고하고 창려현(昌黎縣)을 두었는데

거란(契丹)이 영주(營州)를 함락시키자 로현(潞縣)의 옛 로성(潞城)으로 옮겨서 현(縣)으로 하였다.

昌黎. 貞觀二年, 置北黎州, 寄治營州東北廢陽師鎮. 八年, 改為崇州, 置昌黎縣, 契丹陷營州, 徙治於潞縣之古潞城, 為縣.

<구당서 지리지>

 

숭주(崇州) 창려현(昌黎縣) 

무덕(武德) 5년(622년)에 요락도독부(饒樂都督府)의 가한(可汗) 부락(部落)을 쪼개서 설치하였다. 

정관(貞觀) 3년(629년)에 이름을 북려주(北黎州)로 바꾸었으며 영주(營州)에 있던 폐한 양사진(陽師鎮)에서 다스렸다. 

8년(634년)에 다시 이름을 옛날의 것으로 되돌렸으며 

후에 선주(鮮州)와 더불어 로현(潞)의 옛 현의 성에서 교치(僑治)하였다.현은 1개로 창려현(昌黎縣)이다

<신당서 지리지>

 

해(奚)를 평정하여 설치한 현이 숭주(崇州) 창려현(昌黎縣) 이다.

 

평주(平州) 북평군(北平郡) 下, 

처음에 임유(臨渝)에서 다스리다가 무덕(武德) 원년에 노룡(盧龍)으로 옮겨 다스렸다. 

토공(土貢)으로는 곰가죽과 순비기나무열매(蔓荆實)와 인삼(人葠)이 있다. 가구수는 3113이고 인구수는 2,5086명이다. 

현은 3개이다. 부(府)가 하나인데 노룡(盧龍)이라고 한다. 노룡군(盧龍軍)이 있는데 천보(天寳) 1년에 설치하였다. 

또한 유성군(柳城軍)이 있는데 영태(永泰) 원년에 설치하였다. 

온구(温溝)와 백망(白望)과 서협석(西狹石)과 동협석(東狹石)과 녹주(緑疇)와 미부(米磗)와 장양(長楊)과 황화(黄花)와 

자몽(紫蒙)과 백랑(白狼)과 창려(昌黎)와 요서(遼西) 등의 12 수(戍)가 있다. 

애천(愛川)과 주기(周夔) 등의 2개의 진성(鎮城)이 있다. 

동북쪽에는 명질관(明垤闗)과 골호성(鶻湖城)과 우모성(牛毛城)이 있다.  

平州 北平郡 下 初治臨渝 武德元年徙治盧龍 土貢 熊鞹 蔓荆實 人葠 户三千一百一十三 口二萬五千八十六  縣三  有府一 

曰盧龍 有盧龍軍 天寳一載置 又有柳城軍 永泰元年置 有 温溝 白望 西狹石 東狹石 緑疇 米磗 長楊 黄花 紫蒙 白狼 昌黎 

遼西 等十二戍, 愛川 周夔 二鎮城 東北有 明垤闗 鶻湖城 牛毛城
『新唐書』 권 39, 지리지

 

《唐書》 '地理志'에 평주(平州)에 자몽(紫蒙), 백랑(白狼), 창려(昌黎) 등의 수(戍)가 있다고 하였다. 

모두 평주의 북쪽 지경, 거란의 남쪽 경계이다.  

唐書地理志平州有紫䝉白狼昌黎等戍 盖平州之北境契丹之南界也
『資治通鑑』 권 214, 胡三省 註

 

본래 전한(前漢)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의 속현이었던 교려현(交黎縣)은

후한(後漢)시기에 유주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창료현(昌遼縣, 즉 창려현昌黎縣),

서진(西晉) 시기에는 평주(平州) 창려군(昌黎郡)의 창려현(昌黎縣)이었다가

남북조 시기 북위(北魏)에 의하여 용성현(龍城縣)에 병합된 뒤 ['창려昌黎'란 군(郡)명은 유지되었지만]

창려현은 점차 잊혀지고, 당(唐)대에 이르러서는 결국 동북쪽 변방의 수(戍)로 잔존한 듯하다.

 

그림 11-4 <담기양>이 그린 요서군 창려현
그림 11-5 <담기양>이 그린 평주 창려군 창려현

 

그림 11-6 실제의 창려성

 

백랑수(白狼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창려현(昌黎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교려현(交黎縣)으로서 동부도위(東部都尉)에서 다스리며 왕망이 금로(禽虜)라고 바꾸었다고 했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지금의 창려(昌黎)라고 하였다.  

白狼水又東北, 逕昌黎縣故城. 西地理志曰..交黎也, 東部都尉治, 王莽之禽虜也. 應劭曰..今昌黎也.
『水經注』  권 14

 

갈석산은 [창려]현 서쪽 20리에 있었다. 

옛 부지(府志)에 이르기를

「창려현(昌黎縣)은 곧 옛 3읍(邑)의 땅으로서 류현(絫縣) 및 왕망(王莽)의 선무(選武)와 풍덕(憑德)이라 일컬었다」 하였다.

그리 된 갈석은 마땅히 창려(昌黎)와 무녕(撫寧) 모두로부터 남쪽에 있었다.  

碣石山縣西二十里 舊府志云今昌黎縣乃古三邑地謂絫縣及王莽之選武憑德也 其爲碣石當自昌黎撫寧南皆是
『昌黎縣志』 권 2, 地理 山川, 馬恂 編, 同治5년(1866) 간행

 

영평부(永平府) 옛 기록 : 유성(柳城)은 창려현(昌黎縣) 서남쪽 60리에 있다.

한(漢)시기 오랫 동안 오환(烏桓)의 근거지이었으나 조조(曹操)가 멸하였다.

[북]위(魏) 및 진(晉)시기를 지나며 모용씨(慕容氏) 부자의 근거지가 되었다.

수(隋)가 [유성]현을 설치하여 요서군에 소속시켰다.

당(唐)이 영주(營州)를 설치하였고, 원(元)이 폐하여 창려(昌黎)[현]에 편입하였다. 정안사(靜安社)가 되었다.  

永平府舊志:柳城在昌黎縣西南六十里。漢永為烏桓所據,曹操滅之。歷魏、晉為慕容氏父子所據。隋置縣,屬遼西郡。唐置營州,元省入昌黎,為靜安社。
『日知錄』  권 31

 

겨울 10월 정유(丁酉)일, 임금이 평주(平州)에 이르러 마침내 서쪽길을 좇아 장참(長塹)에 다다랐다. 

사도(司徒) 반상락(潘相樂)으로 하여금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동쪽 길로 청산(靑山)으로 달려가도록 명하였다. 

신축(辛丑)일, 백랑성(白狼城)에 도착하였다. 임인(壬寅)일, 창려성(昌黎城)을 지나쳤다. 

다시 안덕왕(安德王) 한궤(韓軌)로 하여금 정예기병 4천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려 

거란의 도주로를 차단하도록 명하였다.  

冬十月丁酉,帝至平州,遂從西道趣長塹。詔司徒潘相樂率精騎五千自東道趣青山。辛丑,至白狼城。壬寅,經昌黎城。復詔安德王韓軌率精騎四千東趣,斷契丹走路。
『北齊書』  권 4, 553년

 

백랑성과 창려성은 하루만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