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유성(柳城)
- 유성(柳城)의 연혁
장당경(대부여) → 요서군 유성현(燕) → 불이성(북부여) → 낙랑군 불이현(漢) → 비리국(북부여 末) → 부여성(고구려)
→ 부여성(서부여) → 용성(모용씨의 燕) → 상경 용천부(발해)
BC350년 신미년 여루(余婁)단제 47년(燕 文公 12년)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입조하여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燕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申不私>로 하여금 병력 1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燕나라의 상곡(上谷)을 공격하고, 그곳에 성읍을 설치하였다.
<단군세기>
BC339년 임오년 보을(普乙)단제 3년 (燕 文公 23년)
연(燕)의 文公 <배도倍道>가 침략하여 안촌홀을 공격하고 약탈하더니 험독까지 처들어왔다.
수유 사람 <기후>가 아들과 형제 등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 와 전쟁을 도와주었다.
이에 군사의 사기가 올라갔다.
마침내 진한과 번한의 두 병력이 협공함으로써 연(燕)을 대파시켰다.
또 군을 나누어 계성(연의 도성)의 남쪽으로 파견하여 진(偏)을 구축하고, 다음 전쟁을 대비하였다.
연(燕)은 겁을 먹고 사죄하며 공자(公子)를 인질로 보내며 화친하였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유성현(柳城縣), 한(漢)의 요서군(遼西郡)에 속하여 서부도위(西部都尉)의 치소가 되었다. 동한(東漢)이 없앴다.
모용황(慕容皝)은 유성(柳城)의 북쪽, 용산(龍山)의 남쪽이 덕이 있는 남쪽땅이라 하였다.
이에 도읍를 짓고 유성을 고쳐 용성(龍城)이라 하고 이곳으로 옮겨 거하였다.
이때 흑룡과 백룡 각 1마리가 용산에서 싸우므로, 황이 몸소 바라보며 태뢰(太牢)를 지냈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머리를 꼬며 희롱하다가 뿔을 풀고 가버렸다.
황(皝)이 기뻐하며 새 궁궐을 화룡궁(和龍宫)이라 불렀다.
후에 모용보(慕容寳)와 풍발(馮跋)이 서로 이어서 수도로 삼았다.
柳城縣 漢屬遼西郡為西部都尉治 東漢省 慕容皝以柳城之北 龍山之南 南徳地也 乃營建都邑 改柳城曰龍城而徙居於此 時有黒龍白龍各一 鬬於龍山 皝親觀之 祭以太牢 二龍交首嬉翔 解角而去 皝悦 號新宫曰和龍宫 後慕容寳 馮跋 相繼都焉
『輿地廣記』 卷十二 柳城郡
연왕 모용희(熙)가 왕후 부(苻)씨와 함께 수렵을 갔다.
북으로 백록산(白鹿山)에 오르고, 동으로 청령(青領)을 넘어, 남으로 창해(滄海)에 임한 후 돌아왔다.
燕王熙與苻后遊畋,北登白鹿山,東踰青領 南臨滄海而還
『資治通鑑』 권 112 晉紀 35, 東晉 元興 3년 (404년) 11월 (음)
[백랑수는] 또한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석성천수(石城川水)가 백랑수(白狼水)로 흘러든다.
[석성천]수는 석성산(石城山) 서남으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석성현(石城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우북평군(右北平郡)에는 석성현이 있다고 했다.
[석성천수는] 북쪽으로 굽어서 백록산(白鹿山) 서쪽을 지나는데, 즉 백랑산(白狼山)이다.
又西北,石城川水注之,水出西南石城山,東流逕石城縣故城南,
《地理志》:右北平有石城縣,北屈逕白鹿山西,即白狼山也。
『水經注』 권 14 '大遼水'
한(漢)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은 오호 십육국 시대 전연(前燕)의 초대 황제인 모용황(慕容皝)이
첫 도읍으로 삼아 용성(龍城)으로 개명한 곳이고,
그 뒤를 이은 후연(後燕)이 북위(北魏)의 팽창에 밀려 중산(中山)을 버리고,
397년에 천도하여 새로이 자리잡은 두번째 도읍이었던 곳이다.
따라서 모용희의 재위 기간(401년 ~ 407년) 당시 후연의 왕궁은 용성의 화룡궁(和龍宮)이었다.
《資治通鑑》의 기록에 서기 404년 11월(음) 후연(後燕)왕 <모용희慕容熙>는 왕후를 동반하여
「사냥에 나서 북쪽으로 백록산(白鹿山)에 올랐다」하였다.
따라서 백록산은 용성(龍城)의 화룡궁(和龍宮) 북쪽 그리 멀지 않은 곳 어딘가에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후연(後燕)의 도읍 용성은 한(漢)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의 유성현(柳城縣)이었던 곳이고,
그 위치는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鄕) 일대이다.
고대의 백랑산으로 지적하는 굴륭산(窟窿山)이 동부산향의 서북 방면 6.5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10. 요동군 무려현과 의무려산
요동군 무려현(無慮縣)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
應劭曰慮音閭師古曰即所謂醫巫閭.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慮의 음은 려(閭)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즉 이른바 의무려(醫巫閭)라고 했다.
<한서지리지>
<담기양>은 의무려산이 지금의 요하 서쪽 북진(北鎭)인근으로 요동군과 요서군의 경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
본래 발해의 현덕부(顯德府)가 있던 곳이다.
세종(世宗)이 설치하여 현릉(顯陵)를 섬기게 하였다.
현릉은 동단국(東丹國)의 인황왕(人皇王)의 무덤이다.
인황왕은 독서를 좋아하고 사냥은 즐기지 않았다.
책을 수만 권 구입하여 의무려산(醫巫閭山) 꼭대기에 두고, 집을 지어 당호를 망해(望海)라고 하였다.
산 남쪽에서 바다까지 130리 떨어져 있다.
대동(大同) 원년(947) 세종이 인황왕의 영구를 직접 호위하여 변경(汴京)에서 돌아왔다.
인황왕이 의무려산의 기이함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장사 지냈던 것이다.
산 형세가 여섯 겹이어서 그 안에 영정을 모신 전각을 만들었는데,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다.
현주는 산의 동남쪽에 있는데 동경의 300호를 옮겨 이곳에 채웠다.
.......
顯州 奉先軍 上節度, 本 渤海 顯徳府地. 世宗 置 以奉顯陵, 顯陵者 東丹 人皇王 墓也.
人皇王 姓 好讀書 不喜射獵, 購書 數萬卷, 置 醫巫閭山 絶頂 築 堂, 曰望海, 山南 去 海 一百三十里.
大同元年 世宗 親護 人皇王靈, 駕 歸 自 汴京.
以 人皇王 愛 醫巫閭山水竒秀 因, 葬焉. 山形 掩抱 六重, 於其中 作 影殿, 制度宏麗,
州 在 山東南, 遷 東京三百餘户以實之.
.......
<요사 지리지>
요사지리지는 의무려산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 인근에 있다고 한다.
발해의 중경 현덕부는 고구려의 평양(보정시 정흥현 고성진) 지역이다.
則紇升骨城·卒夲似一處也... 則周禮北鎮醫巫閭山也
곧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같은 한 곳이다.
곧 《주례(周禮)》에서 보이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地理 四, 高句麗」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아마도 한(漢)의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地理 四, 高句麗」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곧 우리의 조빙하는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에 의주(醫州)에 이르러,
연나라의 계(薊)로 향하였음으로 고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地理 四, 高句麗」
삼국사기는 흘승골성이 의무려산에 있다고 한다. 용산이 의무려산이라는 것이다.
입동(立冬)에 정주(定州)에서 북악(北岳) 항산(恆山)과 북진(北鎮)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나란히 제사를 지냈다.
立冬 祀北岳恆山、北鎮醫巫閭山並於定州
『宋史』 권 112, 太平興國8년(983)
항산(恆山), [한서]지리지에 상곡양현(上曲陽縣) 서북에 있다 하였다. 지금의 정주(定州) 곡양(曲陽)이다.
恆山、地志在常山郡上曲陽縣西北。今定州曲陽也。
『書經集傳』 권2, 宋 蔡沈 撰
송사는 정주에서 북악인 항산과 북진의 의무려산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입동(立冬)에 정주(定州)에서 북악(北嶽) 항산(恆山)에 제사 지내고,
광녕부(廣寧府)에서 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제사 지냈다.
立冬祭北嶽恆山于定州 北鎭醫巫閭山于廣寧府
『金史』 권 34, 大定4년(1164)
금사는 정주에서 북악 항산에 제사 지내고 광녕부에서 북진 의무려산에 제사 지냈다고 한다.
그러면 광녕부는 어디인가?
요(遼)가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을 설치하고 현릉(顯陵)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치소는 봉선현(奉先縣)이었다.
겸하여 산동현(山東縣)을 거느렸다. 금(金)이 산동현을 고쳐 광녕(廣寧)이라 하였다.
아울러 광녕부(廣寧府)를 설치하고 치소를 이곳(광녕현廣寧縣)에 두었다.
원(元)이 [광녕]현을 없애어 광령부에 편입하였다. 명(明)이 [광녕]위(衞)를 설치하였다.
청(清)이 광녕현을 다시 설치하였다. 봉천(奉天) 금주부(錦州府)에 속한다.
민국(民國) [시기에] 북진현(北鎭縣)으로 고쳤다.
遼置顯州奉先軍以奉顯陵。治奉先縣。兼領山東縣。金改山東縣曰廣寧。並置廣寧府治此。元省縣入廣寧府。
明置衞。清復置廣寧縣。屬奉天錦州府。民國改爲北鎭縣。
『中國古今地名大辭典』 '廣寧縣'
안숙(安肅),
생각컨대 《金初州郡志(금초주군지)》에 「웅주(雄州), 패주(霸州), 보주(保州), 안주(安州), 수주(遂州), 안숙주(安肅州)의
6주(州)가 모두 광녕부(廣寧府)에 속하였다」 하였다.
《太宗紀(태종기)》에 실려 있기를 천회(天會)7년(1129년)에 하북(河北)을 동(東), 서로(西路)로 나누어
[6주를] 곧 하북동로(河北東路)에 소속시켰다 하였는데,
어찌 평주가 남경(南京)에 딸리고 6주가 광녕(廣寧)에 속하였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군지(郡志 즉 《金初州郡志》)가 그릇된 것이다.
安肅 按《金初州郡志》,雄、霸、保、安、遂、安肅六州皆隸廣寧府。
《太宗紀》載天會七年分河北為東、西路,則隸河北東路,豈以平州為南京之後,以六州隸廣寧也?不然則郡志誤。
『金史』 권24, 지리上 安肅州
금나라때의 광녕부는 보정시 서수구 일대이다.
유성현(柳城縣), 중급. 서북쪽으로 해(奚)와 접하며 북쪽으로 거란과 접한다.
동북쪽의 진(鎮)으로 의무려산사(醫巫閭山祠)가 있다. 또 동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柳城. 中. 西北接奚, 北接契丹. 有東北鎮醫巫閭山祠. 又東有碣石山.
『新唐書』 지리지 營州 柳城郡
'강역고 > 부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부여 불이성(不而城)을 찾아서(5) (0) | 2023.10.20 |
---|---|
북부여 불이성(不而城)을 찾아서(3) (1) | 2023.10.14 |
북부여 불이성(不而城)을 찾아서(2) (1) | 2023.10.12 |
북부여 불이성(不而城)을 찾아서(1) (1) | 2023.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