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해모수(解慕漱)와 모수제(慕漱帝)
삼국사기는 북부여 역사 180년을 잘라 버리고 북부여의 역사를 주몽의 탄생설화로 만들어 버렸다.
모수제는 그 출자가 분명한 실존 인물이다.
북부여 4대 덕황 <고우루(BC140-BC111)>와 東胡 선우의 딸 禾태후(BC138-BC94)사이에서 BC118년에
불이성의 단궐(천안궁)에서 태어났다.
그러면 <해모수解慕漱>는 실존 인물인가?
고열가 단제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에 <해모수>가 웅심산으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槀離國) 사람이다.
<단군세기>
고열가 단제 58년,
.......
이에 앞서 종실인 대해모수께서 은밀히 수유국과 약속을 하고,
옛 도읍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거한 뒤에 스스로 천왕랑이라 칭하셨다.
사방에서 모두 사람들이 해모수의 명을 따랐다.
이때에 해모수께서 모든 장수들을 봉하면서
수유후 <기비箕丕>를 올려 세워 번조선왕으로 삼아 상하운장을 지키게 하셨다.
대개 북부여가 발흥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해모수께서 태어난 고향이므로 북부여를 또한 고구려라고도 불렀다.
<단군세기>
일찍이 <기비箕丕>가 종실 사람 <해모수>와 함께 몰래 옥새를 바꿔치려는 약속을 하고
힘을 다해 천왕이 되는 것을 도와 주었다.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잡을 수 있게 한 사람은 오직 <기비箕丕>)그 사람이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는 <해모수解慕漱(BC262-BC195)>의 출자에 대하여
<해모수>는 대부여의 종실로 대부여 제후국인 고리국(槀離國)출신인데
대부여 제후국인 수유국 <기비箕丕>와 함께 쿠데타로 대부여의 도성을 습격하여 북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대부여) → 단림산 불이성(북부여)이라는 것이다.
8. 부여 천년의 수도 부여성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여사는 우리 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부여는 BC 5세기 부터 AD 5세기까지 흥망의 성쇠는 있어도 천여 년을 지탱해 온 나라이다.
대부여 → 북부여 → 서부여로 이어지는 부여 천년의 수도는 어디인가?
우선 부여고지(夫餘故地)를 살펴보자.
부여는 바로 九夷의 하나인 부유(鳧臾)의 후예이다.
원래는 산동성 임기(臨沂) 일대에서 있었는데
뒤에 한 갈래는 서쪽으로 하남성 내향(內鄕)으로 옮겨갔고
다른 한 갈래는 동북으로 옮겨가 부여국을 건립했다.
.....
<何光岳 東夷源流史 江西敎育出版社 1990, p.398~401>
중국의 역사학자 <하광악>은 부여고지가 산동성 임기(臨沂) 일대라고 한다.
부산(鳧山)이 있는 산동성 추현(鄒縣)은 오늘날의 산동성 남쪽 끝자락 미산호(微山湖) 부근 지역으로
여기에 어대현(魚臺縣)이 있고 어대현 서남쪽에 부산(鳧山)이 있다.
부산(鳧山)을 산동성 서북부에 위치한 德州市 平元縣으로 본 것은 잘못이다.
나라의 원로들이 스스로를 옛적에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라고 맗한다.....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인장의 문안에는 濊王의 印이라고 적혀 있다.
나라에 옛 성이 있는데 濊城이라고 호칭 한다.
아마도 본래는 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하게된 것으로서
그들이 스스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예왕의 인을 사용한 부유(鳧臾)인 들이 사는 부산(鳧山)이 산동성 추현에 있다고 한다.
생각컨데 예하(濊河)는 일면 포오거(蒲吾渠)라고 한다.
「後漢書」 注에 「古今注」를 인용하여
'永平 10년{67년}에 상산(常山)의 호타하와 포오거를 내왕하는 조운선을 만들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大淸一通志>
산동성 부산(鳧山)이 부유인(鳧臾人)의 첫 출발지인 부여고지인 것이다.
<해모수>는 부여고지의 북쪽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북부여라 하였다.
그러면 북부여의 불이성은 어디인가?
낙랑군 불이현(不而縣)과 북부여 불이성(不而城)
녹주(淥州) 압록군(鴨淥軍)은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 고국(故國)이며 발해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라고 불렀다.
성의 높이는 3길이며 너비는 20리나 된다.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豐州)•정주(正州) 등 4주의 일을 관할하였다.
옛 현은 신록(神鹿)•신화(神化)•검문(劍門)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머지 잔당들을 상경으로 옮겨 역속현(易俗縣)을 두어 거주시켰다.
호구수는 2,000이며,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4주와 2현을 관할하였다.
渌州 鴨渌軍 節度, 本 髙麗 故國, 渤海 號 西京 鴨渌府, 城髙 三丈, 廣輪 二十里, 都督 神桓豐正 四州事,
故縣三, 神鹿 神化 劔門, 皆廢. 大延琳 叛, 遷 餘黨於上京, 置易俗縣居之. 在者户 二千, 隸東京留守司, 統 州四 縣二.
정주(正州)
본래 비류왕(沸流王)의 옛 지역으로 공손강(公孫康)에게 병합되었다.
발해가 비류군(沸流郡)을 설치하였다. 비류수(沸流水)가 있다.
호구수는 5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다. 서북쪽으로 38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①동나현(東那縣)
본래 후한의 동이(東暆) 불이현(不而縣)땅으로 정주正州에서 서쪽으로 70리 떨어져 있다.
正州 本 沸流王故地國, 為公孫康所併, 渤海 置 沸流郡, 有沸流水. 户五百, 隸渌州, 在西北三百八十里. 統縣一,
東那縣 本 漢 東暆 不而縣地, 在州西七十里.
<요사지리지>
요사지리지는 동경도의 녹주(淥州) 압록군(鴨淥軍)을 설명하면서
정주(正州) 동나현(東那縣)이 낙랑군 불이현(不而縣)인데 북부여의 제후국인 비류국에 있다고 하였다.
이 낙랑군 불이현(不而縣)에 북부여의 불이성(不而城)이 있었으며 이 곳이 요서군 유성현인 것이다.
요서군 유성현(柳城縣),
마수산(馬首山)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참류수(參栁水)가 북쪽으로 海로 들어간다.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
<한서 지리지>
정축(丁丑)일, 거가가 요수(遼水)를 건넜다.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
丁丑 車駕度遼水 撤橋以堅士卒之心 軍於馬首山
『資治通鑑』 권 197
秦.漢 때의 요서군 유성은 마수산의 동북에 있었는데 요수가 남역수이므로 북부여 불이성 인근(서수구 동부산향)에 있었고
隋.唐 때의 영주도독부 유성은 이치되어 마수산의 서남에 있었다. 지금의 만성구 타남향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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