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6세 풍월주(617-621) <보종宝宗(580- ? )>
<보종宝宗>공은 또한 <미실美室>궁주의 사자(私子)이다.
홍제(鴻濟) 8년(579)에 <사도思道>태후가 친정(親政)을 하였다.
<미실>궁주가 새주(璽主)가 되어 정당(政堂)에서 문서를 보다가 낮에 꿈을 꾸었는데 백양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길 한 꿈임을 알고 급히 제(帝){진평대제}를 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제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궁주의 기분에 따라 주지 못했다.
이에 금하(衿荷) <설원>랑에게 다시 들어가 모시도록 하여 공을 낳았다.
이때 미실 33세, 진평대제 백정 13세, 설원 31세이다.
공은 자라면서 모습이 <설원>랑과 같았으므로 <미실>궁주가 <설원>랑에게 내려주고 아들을 삼게 였다.
궁주는 공이 막내아들이 되기 때문에 매우 사랑하였다.
<하종>공 또한 공을 도탑게 사랑하였다.
공은 처음에는 제(帝)를 불러 아버지라고 하였다. 자라자 <설원>랑에게 돌아갔다.
제(帝)는 <보종>을 아들로 생각하여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설원(미실) - 보종(580- )<16세 풍월주(617-621)>
공의 성품은 청아하였고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정이 많았다.
사람들을 위하여 웃고 울었으며 온화함과 순량함은 마치 부녀자와 같았다.
사람들이 병들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마치 자기가 아픈 것 같았다.
새와 짐승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한 마리의 벌레나 한 포기의 풀도 해친 적이 없었다. 선과 악, 이와 해를 나누지 않았다.
늘 작은 청려(靑驪)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며 시가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공을 가리켜 진선공자(眞仙公子)라고 하였다.
얼굴은 관옥과 같았고 손은 마치 하얀 새 싹과 같았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인물과 산수의 절묘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호림>이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다.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아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호림>은 <보종>보다 1살 많다.
궁주가 일찍이 그 바라는 바를 물었더니 공이 답하기를
" 어머니와 더불어 같이 죽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궁주가 웃으며
" 네가 색은 좋아하지 않고 나와 같이 죽기를 원하니 또한 무슨 뜻인가?" 라고 하였다.
공은
"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무도 어머니만 못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살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궁주가 다시
"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없는 까닭에 오로지 어미에게 정을 쏟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택하여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찌 손자를 볼 것인가?" 하였다.
공이
" 무엇을 아름답다고 합니까?" 라고 하자
궁주가
" 너와 같은 사람이 아름답다. 얼굴은 옥과 같이 아름답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으며
눈은 아리땁게 빛나고 말에 정(情)의 뿌리가 있는 자이면 또한 가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 정의 뿌리는 갈래가 많고 아리땁게 빛나는 것은 속기 쉬우며
붉은 연지와 옥과 같은 아름다움은 몸을 지키는 보배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궁주는 이에 <윤궁允宮>의 딸 <현강玄剛>에게 공을 모시도록 하였으나
공은 접촉한 일이 없이 <호림>공을 불러 함께 살았다.
<호림>공은 이에 <현강>과 통하여 딸 <계림桂林>을 낳았다.
호림(현강) - 계림(603?- )
공은 이에 <현강>을 <호림>공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아내를 맞지 않았다.
궁주가 근심하여 종실의 여자들을 모아 말하기를
" 나의 아들과 친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주겠다." 라고 하였다.
종실의 여자들이 다투어 공을 재미있게 해 주려 하였으나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
<보명宝明>궁의 딸 <양명良明>공주가 꾀를 내어 공을 유혹하여 정을 통하였다.
백정(보명) - 양명(579?- )
공은 비로소 여색을 알게 되었다.
궁주가 크게 기뻐하며 <양명>에게 큰 상을 주었다.
<보라宝羅>와 <보량宝良> 두 딸을 낳고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보종(양명) - 보라(602?- )
보량(604- )
공은 화랑이 되어 낭두를 아재비라 불렀고 한번도 그 칭호를 바꾸지 않았다.
<염장廉長>공을 부제로 삼았는데 오히려 형과 같이 섬겼다.
천주(지도) - 염장(586-648)
얼굴이 늘 어린아이와 같았다.
늘 콩죽을 먹고 고기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원의 여러 종류의 고목을 보고 물고기를 기르고 학을 기르며 그 사이를 거닐었다.
<유신>공을 엄한 아버지와 같이 두려워하였다.
<유신>은 <보종>보다 15살 어리다.
<유신>공이 웃으며
" 형이 어찌 아우를 두려워합니까?" 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 <유신>공은 바로 천상의 일월이고 나는 곧 인간의 작은 티끌입니다.
감히 두려워하고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드디어 풍월주의 위를 물려 주었다.
<유신>공이 낭도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희들이 선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보종>형공을 따라야 하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면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미실>궁주가 일찍이 <유신>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 나의 아들은 어리석고 약하니 도와 주기를 바란다." 라고 하니
<유신>공이 말하기를
" 신이 실로 어리석습니다. 형은 비록 약하나 그 도는 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궁주가 죽자 공은 스스로 더불어 따르지 못한 것을 죄로 생각하여
문을 잠그고 홀로 거처하며 궁주가 쓴 수기(手記) 7백권을 베껴 집에 간직하였다.
또한 궁주의 초상을 그려서 걸고 아침저녁으로 절하였다.
역대 상선들의 모임에서는 번번이 아랫자리에 앉아서 '예,예'할 뿐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진기를 갚이 살펴서 어조(魚鳥)와 화목(花木)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치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유신>공이 병이 나자 공이 몸소 치료하며
" 우리 공은 국가의 보배이니 나의 의술을 숨길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그가 편작의 학을 갖추었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유신>공이 칠성회(七星會)를 열어 반드시 공에게 물었다.
공은 " 나는 물고기와 새의 벗으로 국사를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여러 공을 따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신>공은 공의 한 마디를 중하게 여겨 묻지 않는 적이 없었으니 공의 덕 또한 크다.
魚鳥爲友 達觀天理 不言而化 不謀而美 赤松之子 其唯公耳
찬하여 말한다.
어조(魚鳥)의 벗으로 천리(天理)를 달관하니 말 없이도 교화하고 도모하지 않아도아름답다.
적송(赤松)의 아들은 오직 공뿐이다.
적송자(赤松子) : 중국 전설시대 선인의 이름. 신농때의 우사로서 후에 곤륜산에 입산하여 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17. 17세 풍월주(621-626) <염장廉長(586-648)>
<염장廉長>공은 건복(建福) 병오년(586)생이고 신사년(621)에 화랑주가 되었다.
태화(太和) 원년 무신년(648)에 죽었다. 나이가 63세였다.
<염장>공은 <천주天柱>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知道>태후이다.
그러므로 공은 <용춘>공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가 된다.
삼모진(사도) - 금륜(지도) - 용춘(578-647) <13세 풍월주(596-603)>
삼모진(월화) - 천주(지도) - 염장(586-648) <17세 풍월주(621-626)>
공은 풍채가 좋고 말을 잘 하였으며 무리를 다스리고 윗 사람을 잘 섬기는 재능이 있었다.
<지도>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용춘>공에게 맡겨 <호림>공에게 속하게 하였다.
그 때 공은 나이가 14살로 <보종>공보다 6살이 적었으나 준수하기는 대체로 비슷하였다.
공은 <보종>공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자원하여 그의 아우가 되었다.
<보종>은 형으로 처신하지 않고 오히려 공을 형처럼 섬겼다.
공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정은 마치 부부와 같았다.
<호림>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공이 부제가 되었고 공은 전방대화랑이 되었다.
그 때 나이 18살이었는데 용기와 힘이 있어 능히 무리를 복종시킬 수 있었다.
키가 이미 <보종>공보다 커서 <보종>공을 아이처럼 늘 업어 주었다.
<보종>공이 부제를 <유신>공에게 양위하자 <염장>공이 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종>공을 보호하려 하였다.
<호림>공이 곤란하게 여겼다.
<미실>궁주가 이에 <염장>공을 불러 달랬다.
<유신>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을 좌방대화랑으로 삼고 <염장>공을 부제로 삼고자 하였다.
공이 <보종>공을 힘써 밀어 부제가 되게 하고 스스로는 좌방대화랑이 되었다.
<보종>공은 일을 본 적이 없고 공이 모두 대행하였다.
<보종>은 내사(內事)에 욕심이 없었다.
<양명良明>과 혼인시켰는데 <양명>은 <염장>공과 혼거하여 아들 <장명長明>을 낳았다.
염장(양명) - 장명(608?- )
<하종>공의 딸 <하희夏姬>가 <보종>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여러 차례 와서 유혹하였다.
<보종>은 " 만약 우리 <염장>과 사랑을 하면 나 또한 더불어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희>는 이에 공에게 시집가서 <하장夏長>, <윤장閏長>, <춘장春長>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염장(하희) - 하장(615?- )
윤장(618?- )
춘장(620?- )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이 부제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였다.
그 때 나이가 31살 이었는데 중망을 널리 얻었다.
<보종>이 1년 안 되어 물려주려 하자 공은 웃으며
" 내가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고 있는데 어찌 반드시 물려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보종>은 이에 그만 두었다.
공은 부제로 6년 풍월주로 6년을 있었기에 11년간 실제로 낭정(郎政)을 주관하며
3파를 화합시키는데 힘쓰고 서로 교혼을 시켜 마침내 동화(同和)를 이루었다.
그러나 낭권의 큰 것은 모두 가야파에게 돌아가고 진골과 대원은 모두 그 안에서 소멸해 버렸으니 또한 운명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공의 외척과 처족들이 청탁을 하여 3파 낭두의 딸들을 모아 첩으로 삼기를 힘썼기때문에 서자가 매우 많았다.
<보종>공의 집안일을 보아 주고 그 재물을 취하여 사용하였다.
<유신>공의 부제로서 <춘추>공을 부제로 삼아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柒宿>의 난을 다스리고 공으로 발탁되었다.
<선덕>이 즉위하자 들어가 조부(調府)의 영(令)이되어
<유신>과 <춘추>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또한 사적으로 치부를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이라 하였다.
금이 들어가는 모습이 홍수와 같은 것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공을 <미생>공과 비교한 바 있는데 <미생>은 극도로 사치를 하였으나
공은 검약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그 부유함이 <미생>공보다 훌륭하였다.
삼모진(미질) - 칠숙(565?-631)
※ 칠숙의 난
『삼국사기』 진평왕(眞平王) 53년 조에는 이찬(伊湌) <칠숙柒宿>과 아찬(阿湌) <석품石品>의 반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진평왕 53년(631) 여름 5월에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반란을 꾀하였는데,
왕이 이를 알아채어 <칠숙>을 잡아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으며,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의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자를 보고자 하여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돌아와 총산에 이르렀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어 나무꾼의 해어진 옷과 바꾸어 입고,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왔다가 잡혀 사형을 당한 사건이다.
같은 사건이『화랑세기』17세 풍월주 <염장廉長>공(公) 조에도 나와 있다.
<염장>공은 <유신>공의 부제(副弟)였는데, <춘추>공을 부제로 삼아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받았다.
<염장>공은 <선덕善德>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의 난을 다스리고, 그 공으로 발탁되었다.
선덕이 왕으로 즉위하자, 염장공은 조부(調府)의 영(令)이 되어 유신과 춘추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많은 치부를 하여, 그때 사람들이 염장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이라 하였다고 한다.
금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 홍수와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기록만 가지고는 <칠숙> · <석품>이 일으킨 반란의 원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진평왕이 <칠숙>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인 54년(632)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미루어,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일어났던 <칠숙>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선덕> 공주가 깊이 관여하였거나 어쩌면 주도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와 『화랑세기』가 전하는 내용의 차이이기도 한데,
『삼국사기』에는 <칠숙>의 난을 진압한 이가 진평왕으로 나오고 있는데 반해,
『화랑세기』에는 <선덕> 공주가 <칠숙>의 난 진압에 관여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칠숙>이 난을 일으켰을 때 진평왕은 66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선덕> 공주가 난의 진압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좀더 높다.
또한 당시 <선덕> 공주의 왕위 계승은 이미 정해진 상황이었므로,
<칠숙> 등은 여왕의 즉위 또는 <선덕>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수 있다.
여하튼 그 때 풍월주이던 <염장>공은 상선(上仙)으로서 <선덕> 공주를 도왔고,
<선덕> 공주 또한 <염장>공 등을 거느리게 되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당시 풍월주들의 정치적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염장>공은 그 공으로 발탁되어, 선덕이 즉위하자 조부(調府)에 들어가 장관인 영(令)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찬하여 말한다.
몸소 검소하여 부유하였고 <보종>공에게 충성스러웠고 칠성우와 교유하여 힘을 다하여 찬동하였다.
통일의 업적이 실로 공에게 힘입었다.
<世系>
아버지 <천주>공은 진흥대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월화>궁주로 가야 <이뇌>왕의 딸이다. 곧 우리 <양화兩花>공주의 딸이다.
진흥의 소비(小妃)로 들어가 <천주>공을 낳았다.
커다란 도량이 있어 가야파가 여러 차례 추대하려 하였으나 파가 달라 허락 받지 못하였다.
<지도>태후가 홀로 되어 신제(新帝)를 섬겼는데 총애가 쇠하자 <천주>공에게 시집가서 공의 형제 3인을 낳았다.
모두 <천주>의 풍모를 지녔다. 모계는 <용춘>공조에 상세하다.
18. 18세 풍월주(626-629) <춘추春秋(603-661)>
<춘추春秋>공은 우리 무열대왕이다.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 하였다.
커다란 뜻이 있었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다.
<유신>공이 위대한 인물로 여겨 받들어 군(君)으로 삼았으나 무열왕이 사양하여 부제가 되었다.
<유신>공이 퇴위하였으나 <보종>과 <염장> 양 공이 있었기에 <춘추>공은 양보하여 기다렸다.
이에 이르러 풍월주에 오르니 보령이 24살이었다.
<유신>공의 누이 <문희文姬>를 화군(花君)으로 삼아 장자 <법민法敏>을 낳았는데 곧 우리 문무제(文武帝)이다.
용수(천명) - 춘추(603-661)<18세 풍월주(626-629)>
춘추(문희) - 법민(626-681)
이에 앞서 <문희>의 언니 <보희宝姬>가 꿈에 서악에 올랐는데 큰 물이 경성에 가득한 것을 보고 불길하다고 생각하였다.
<문희>가 이 꿈을 비단 치마와 바꾸었다.
그 후 열흘 만에 <유신>이 공과 더불어 집 앞에서 축국을 하였는데 곧 정월 오기일(午忌日){정월 대보름}이었다.
<유신>은 일부러 공의 치마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었다. 들어가서 꿰매기를 청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이 <보희>에게 시키고자 하였는데 병 때문에 할 수 없어서 <문희>가 이에 나아가 바느질을 하여 드렸다.
<유신>은 피하고 보지 않았다.
공이 이에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1년쯤 되자 임신을 하였다.
그 때 공의 정궁(正宮)부인인 <보량宝良>궁주는 <보종>공의 딸이었다.
아름다웠으며 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古陀炤>를 낳아 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춘추(보량) - 고타소(623?- )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하였다.
<유신>은 이에 장작을 마당에 쌓아 놓고 막 누이를 태워 죽이려 하며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때 공은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공주가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사실대로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공주가 "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유신>공의 집으로 가서 구하였다.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보량>궁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이 되어 아들 <법민>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공은 이에 첩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춘추(보희) - 지원
개지문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공은 풍월주로 4년간 있다가 부제 <흠순欽純>공에게 물려 주었다.
<흠순>은 곧 <유신>공의 포제이다.
왕의 대업은 사책(史冊)에 있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찬하여 말한다.
세상을 구제한 왕이고 영걸한 임금이다.
한번 천하를 바로 잡으니 덕이 사방을 덮었다.
나아가면 태양과 같고 바라보면 구름과 같다.
19. 19세 풍월주(629-632) <흠순欽純(599-680)>
<흠순欽純>공은 <유신>의 동생이다.
처음에 <염장>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유신>공의 명으로 <춘추>공에게 양보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풍월주의 위에 올랐다.
서현(만명) - 유신(595-673)
흠순(599-680)<19세 풍월주(629-632)>
그 해에 공의 아버지 <서현>공과 형 <유신>이 낭비(娘臂)를 쳐서 큰 공을 세웠다.
공은 분명히 말하기를
" 나로 하여 이 같은 빈 그릇만 지키라고 하니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 나도 또한 지금부터 나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대개 그 때 사람들이 공 세우기를 좋아하고 선도를 탐구하지 않았는데 공 또한 그런사람이었다.
이로써 공의 재위 4년 동안 한결같이 낭정을 돌보지 않고 낭도를 거느리고 지방에 머물렀다.
부제 <예원禮元>공이 낭정을 대행하였다.
공은 이에 <예원>공에게 물려주며
" 실제로 낭정을 행하는 사람이 풍월주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공은 성품이 활달하였고 청탁에 구애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유신>공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으나 공은 홀로 그러지 않고
" 어리석은 형이 어찌 두려운가?" 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신>공의 우애는 지극히 돈독하여 공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랑하였다.
공은 나이 18살에 전방화랑이 되어 상선(上仙)을 두루 배알하였다.
나의 <보리菩利> 할아버지를 찾았을 때 <예원>공의 서자(庶姉) <보단菩丹>낭주는
바야흐로 나이가 16살이었고 <예원>공은 9살이었다.
공은 <보리> 할아버지를 정자 위에서 배알하고 <보단>이 <예원>공을 데리고 정자 아래 연못가에 있었는데
그윽한 아름다움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은 곁눈으로 오랫동안 보다가 갔다.
수일 만에 와서 <보리> 할아버지를 만나 뵙고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보리 할아버지는 그를 장하게 여겨 말하기를
" 남자가 삼가야 할 것은 색이다.
네가 나의 딸을 사랑하되 다른 여자들을 많이 거느리지 않는다면 줄 수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공이 맹세를 하였다.
<보리> 할아버지는 이에 <보단>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보단>은 <보리> 할아버지의 풍모가 있어 재능과 아름다움이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났고 미덕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공은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 <보단>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아름답고 용감하며 아버지를 닮아서 집에 돌아오면 단란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있었다.
공은 늘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 내가 능히 국가를 위하여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처가 뒤에서 도운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유신>공은 큰 일이 있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문을 그냥 지나갔는데
공은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집에 이르러 낭주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 갔다.
공은 늘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지방에 많이 있었는데 낭주는 원망하지 않고 집에 있으며 기도드렸다.
집에 돌아오면 한집안 식구들이 떠들며 좋아하였다.
공은 젊어서 술을 즐겼다. 낭주가 친히 술을 빚어 다락 위에 두고 드렸다.
하루는 공이 술을 찾자 낭주가 다락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공이 이상하게 여겨 다락에 올라가니 큰 뱀이 술독에 들어가 취하여 있고 낭주는 놀라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이에 낭주를 업고 내려왔다. 마침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보리> 할아버지가 듣고
" 처를 사랑함이 이와 같으면 곧 둘째 딸을 주어도 좋다." 라고 하였다.
이에 낭주의 동생 <이단利丹>을 공에게 시집보내어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형제가 한 지아비를 섬긴 까닭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은 집에 있으면 오직 좋은 아버지가 되어 두 낭주 및 자녀들과 노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으니
그가 삼한의 대영걸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전쟁에 임하면 초목이 모두 떨고 집안에서는 닭과 개가 모두 업신여긴다고 한 것은 공을 두고 한 말이다.
공은 재물에는 어두워 늘 <염장>공에게 구하였다.
<염장>공은 웃으며
" 네가 나를 곳간으로 삼는데 내 아이를 기르지 않는다면 나는 손해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여러 아들에게 <염장>공의 딸을 아내로 맞게하여 그 딸들이 <염장>공의 재산을 나누어 시집오게 하였다.
<보단>은
" <염장>공 형은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니 그 딸을 맞으면 가풍을 상하게 될까염려됩니다."라고 하니
공은
" 색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이지요. 나 또한 그대가 없었다면 곧 염형과 같았을 것입니다.
내가 재물을 탐했다면 곧 집이 부유해져서
그대로 하여금 고생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니 호색탐재 또한 할 만하지 않소"라고 하였다.
<보단>은 막을 수 없었다. 공 또한 심하게 책망하지 않았다.
공의 셋째 아들만이 <염장>공의 딸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들 <영윤令胤>을 낳았으니 그가 곧 <반굴盤屈>공이다.
흠슨(보단) - 반굴(영광) - 영윤
원수
원선(636- )
흠순(이단) - 원훈
부자(父子)가 마침내 전쟁에서 죽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을 것이다.
넷째 아들 <원수元帥> 여섯째 아들 <원선元宣>은 모두 중시(中侍)가 되었는데 <보단>의 소생이다.
아홉째 아들 <원훈元訓> 또한 중시(中侍)였는데 곧 <이단>의 소생이다. 모두 공의 음덕이 이룬 것이다.
공은 여러차례 대전을 거쳤으나 패한 일이 없었고 사졸 사랑하기를 어린아이같이 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삼보(三寶)의 하나로 삼았다.
문무제 20년(680) 2월 <보단>낭주와 함께 천계(天界)로 올라갔다.
나이가 82살이었는데 낭주는 2살이 적었다.
자손이 백을 헤아렸고 조문하는 사람이 만을 헤아렸다. 공경할 만하지 않은가.
찬하여 말한다.
<유신>의 동생이고 <보리>의 사위다.
하늘을 뒤집는 큰 공은 좋은 짝을 얻는 데서 비롯되었다.
오직 공의 덕은 만세에 이르리라.
20. 20세 풍월주(632-634) <예원禮元(608-673)>
<예원禮元>공은 <보리>공의 아들이다.
<흠순>을 따라 화랑이 되었다.
<염장>공이 풍월주가 되자 <흠순>공이 부제가 되어 공을 전방화랑으로 삼았다.
성품이 단아하고 따뜻하고 자상하였다.
이화(숙명) - 보리(만룡) - 예원(608-673)<20세 풍월주(632-634)>
자신을 굽혀 다른 사람보다 낮추었고 도로써 자신을 다스렸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 과연 <이화二花>의 손자입니다." 라고 하였다.
위화(준실) - 이화(숙명) - 보리(만룡) - 예원
<흠순>공을 섬기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제처럼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흠순>공이 풍월주가 되자 부제로서 낭정을 대행하여 폐정을 많이 개혁하였다.
가야파의 옳지 않은 자들이 진골정통을 부흥하는 일이라하여 비방하였다.
공이 스스로 물러나려 하자 <흠순>공이 노하여 그 무리를 내쫒고 말하기를
" 부제는 곧 내 몸이다. 어찌 나와 조그마한 차별이라도 있겠는가.
또한 지금 천하가 한 집이 되었는데 어찌 진골과 가야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진골정통의 옛 낭두들을 대거 진출시켜 등용하였다.
가야파의 낭두들이 <염장>공에게 많이 모여 간절히 구원을 청하였다.
<염장>은 이에 <예원>공을 청하여 술을 내리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 듣건대 네가 나이가 어리나 낭정을 잘 한다고 하니 기쁨을 금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 때 가야파의 많은 낭두들이 당하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염장>공이 그들을 가리키며
" 이 무리들은 모두 내가 거느리는 바이다.
나를 믿고 너에게 불순하니 죄를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한다. 너는 심한 자를 매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 불순하는 자가 없으며 신 또한 처벌할 뜻이 없습니다.
단지 풍월주 형이 노하신 것은 말이 누차 귀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형의 노함이 조금 가라앉으면 곧 신은 마땅히 모두 제자리에 임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염장>공이 웃고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 진실로 나의 좋은 부제이다. 나는 이미 선종(仙宗)이 보통 풍월주들과 같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낭도들은 본래 너의 집안의 무리이니 어찌 파가 있겠느냐.
이 무리들이 모두 너의 종(奴)들이니 또한 걱정스럽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낭두들이 모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죽을 죄를 지었으니 부주(副主)를 위하여목숨을 바차기를 원하였다.
공이 " 너희들은 죄가 없는데 쫒겨났다. 내가 그 억울함을 알았으니 각자 돌아가서 기다려라." 라고 하였다.
낭두들이 기뻐하며 물러났다.
<염장>공 또한 크게 기뻐하며 공에게 술을 억지로 권하며
" 첩으로 삼을만한 어리석은 딸들이 있으니 네가 택해 보아라." 라고 하였다.
곧 서녀(庶女) 세 사람을 나아가 공에게 절하게 하였다.
공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 신의 어머니가 매우 엄하여 감히 스스로 택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염장>공이 칭찬하며 " 이 같은 아들이 있으니 어머니는 걱정할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곧 세 딸에게 명하여 손수 만든 옷을 공에게 바치고 애교를 부리게 하였다.
공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거두어 돌아왔다.
모두가 <염장>공의 첩인 가야파 낭두 딸들의 소생이다.
<염장>공은 17명의 첩이 있었다. 진골정통파가 5명, 대원신통파가 4명, 가야파가 8명이었다.
모두 낭두의 딸이었는데 서로 총애를 다투어 구걸하였다.
<예원>공이 여러 차례 <염장>공의 부름을 받고 당(堂)에서 배알을 하면 <염장>공은 첩을 품고 앉아서
"아무개는 실은 이 첩의 오빠이다. 너는 나를 위하여 그를 보호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장차 첩들 때문에 곤란하여 고생하다가 죽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본래 사사로움이 없는데 첩들이 그냥 두지않으니 어쩌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따뜻한 말로 사정을 아뢰어 올리고 물러났다.
<염장>공은 공이 나가는 것을 보고 그 첩에게 말하기를
" <예원>은 비록 어리나 의리가 있다. 너희들은 나를 강요하여 체면을 잃게 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첩들은 <예원>공이 어머니에게 효성스러운 것을 알고
값비싼 뇌물로 공의 어머니 <만룡>낭주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만룡> 또한 모두 어루만지고 순종케 하는데 마음을 씀이 실로 많았다.
<만룡>은 평소에 <미실>의 딸 <난야蘭若>궁주와 잘 지냈다.
그 딸 <우야雨若>공주는 진평제의 소생인데 <만룡>은 공에게 아내로 맞을 것을 명하였다.
공 또한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서로 화합한 것이 마치 아교나 옻으로 붙여 놓은 것 같아서 첩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염장>공이 그 딸을 첩으로 삼아주기를 너무 절실히 원하였음으로
서로 사이가 나빠질까 염려하여 <만룡>이 취하기를 권하였고 <우야> 또한 권하였다.
공은 부득이 <염장>공의 딸 <찰기察己>를 첩으로 삼았다. 곧 가야낭두 <찰인察忍>의 딸 소생이다.
<만룡>이 그 예의바른 태도를 보고 ....정하였다.
공의 부제 <선품善品>공 또한 <미실>궁주의 딸 <보화寶華>공주의 소생이다.
<보화>는 <난야>와 어머니가 같고 <우야>와는 아버지가 같다.
설원(미실) - 난야(570?- )
백정(미실) - 보화(582?- )
백정(난야) - 우야(608?- )
구륜(보화) - 선품(609-643)
그러므로 제(帝)가 <예원>공을 사랑함이 유달리 심하였다.
공은 선품보다 두 살이 많았다. 뜻과 취향이 서로 맞아 마침내 형제가 되었다.
은혜와 사랑함이 날로 두터워지자 문득 끌어들여 화제(花弟)로 삼고 거취를 같이 하였다.
<선품>은 대원신통파인 까닭에 낭도 중에 간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정색을 하며 거절하였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그 때 가야파인 <진주眞珠>공이 오랫동안 좌방화랑으로 있었으나
풍월주가 되지 못하였는데 어떤 자가 그에게 물려 줄 것을 권하였다.
비보(덕명) - 진주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 <진주>는 나의 형이다. 어찌 형에게 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물러 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진주>는 이에 화랑을 물러나 병부에 들어갔다.
공과 <선품>은 더불어 낭정을 수행하였는데 3파를 균등하게 등용하여 중망을 크게 만족시켰다.
선도는 <보종>을 따르고 무도는 <유신>을 따랐다.
<예원>공은 풍월주에 3년간 있다가 <선품>공에게 물려주고 예부로 들어갔다가 조부로 옮겼다.
선덕대왕이 총애하여 내성사신으로 발탁하였다.
대왕이 죽자 물러나 양진(養眞)을 행하였다.
그 때 <춘추>공이 장차 당나라에 들어가려 할 때 문장 잘 하고 풍채 좋은 사람을 선발하려 하였다.
선화 3인, 승려 3인이 따라가기 때문에 그들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면 마땅한 사람을 선발 할수 없었다.
<흠순>공이 " 우리 <예원>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라고 하니 <춘추>공이 크게 기뻐하며 선발하였다.
공이 한가롭게 있으려 하여 사양하니 <춘추>공이 말하기를
" 이 같은 유사시에 어찌 한가로이살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따랐다.
조정에서는 당나라 사람들이 색을 좋아한다고 하여 유화 3인을 뽑아 꾸며 태우고 거짓으로 종실 여자라고 이르게 하였다.
공이 " 색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도 도가 아닌데 하물며 골품을 속이는가" 라고 하며 따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공이 막으며 " 인명은 지극히 중한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때 <양도良圖> 또한 선화로서 같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다투어 말하기를
" 형은 여자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공(主公)을 중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위험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 위험하면 함께 위험하고 편안하면 함께 편안하여야 한다. 어찌 사람을 죽여 삶을 꾀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바람이 고요하여졌다.
사람들은 해신(海神)이 공의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었다고 생각하였다.
모종(양명) - 양도(610-670?)
당나라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공이 <원광圓光>의 조카로서 문장을 잘 한다고 존중하였다.
<유향柳享>이 신선(神仙)의 도에 대하여 물었다.
공은 <보종>이 그 도를 능히 얻었다고답하였다.
또한 연서(燕書)에 대하여 물었느데 공이 암송하여 주었다.
또 우리나라의 혼인하는 도에 대하여 물으니 공이 신의 뜻에 따른다고 답하였다.
어떠한 신이 시조냐고 묻자
" <일광日光>의 신이다." 라고 하였다.
<유향>이 묻기를
" <일광>과 금천(金天)씨가 같은가?" 라고 하였다.
대개 전에 왔던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금천씨를 조상으로 삼는다고 한 때문일 것이다.
공이 반문하기를
" 금천씨가 어떻게 신이 되겠는가?" 라고 하니 <유향>이 답을 할 수 없었다.
또 당나라 재상이 묻기를
" 너희 나라와 백제는 서로 혼인을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서로 다투는가?"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백제가 고구려에 쫒겨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우리 나라가 군대와 땅을 빌려 주어 보호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에게 신하로서 의지하였는데 점차 안정이 되자 도리어 우리 땅을 침범하였다.
또한 가야는 본래 우리의 부용국이었고 지금은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백제가 그 서쪽 땅을 빼앗고 돌려 주지 않는다.
대개 탐욕스럽고 도가 없다. 그러므로 천병(天兵)을 얻어 토벌코자 한다." 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너의 나라에서 건원칭제(建元稱帝)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멀리 상고(上古)부터였다.
먼저 온 사신이 법흥왕부터 시작 되었다고 대답한 것은 문자사용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가야가 너희 나라를 부용국으로삼았는지, 너희 나라가 가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어느 것이 옳으냐?"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우리 나라는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BC 57)에섰고.
가야는 한(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AD 42)에 섰으니 누가 옳은지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당나라의 재상이 옳다고 하였다.
신라는 삼한을 통일하자 신라건국년도를 1갑자 정도 끌어올렸다.
화랑세기는 삼한통일 후 편찬하였다.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하면서 신라건국년도를 그대로 기록하였다.
돌아올 때 당나라 사람들이 유화가 말이 통하지 않고 풍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우나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유화도 함께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종자(從者)가 그들을 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어찌 버릴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도중에 적병이 있는 곳을 지날 때 <온군해溫君解>로 하여금 <기신紀信>의 계책을 쓰게 하여 벗어났다.
※ 참고<기신紀信>의 계책
<기신紀信>은 한(漢) 고조의 신하인데 고조가 하남성 영양(榮陽)에서 <항우>의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기를 희생하여 그를 구해 낸 사람이다.
고조의 수레에 타고 초군(楚軍)을 속여 마침내 고조를 대신하여 죽었다.
공으로 작(爵)이 오르고 다시 품주가 되었다가 2년 후 예부의 영(令)으로 나갔다.
이어 이부(理府)의 영(令)이 되었다. 여러차례 요직에 있었으며 품이 이찬에 이르렀다.
문무제 13년(673) 집사부의 대등으로 있으며 관아에서 죽었다. 나이가 67살이었다.
제(帝)가 슬퍼하여 상대등의 예로써 장사지내 주었다.
오호! 성인은 진실로 수(壽)를 누리지 못하는구나.
공의 덕으로서도 상수(上壽)를 누리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공은 우리나라의 혼인의 도를 부끄럽게 여겨 신의 뜻에 따른다고 대답하고 돌아와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으나 관습이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웠다. 항상 걱정하였다.
자손들에게 다시는 나쁜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공의 아들 <오기吳起>공이 사촌 누이 <운명雲明>을 아내로 맞이 하였다.
보리(만룡) - 예언(우야) - 오기(633- )(운명) - 대문
보리(만룡) - 보룡(선품)- 운명
공이 노하여 보지 않았다.
<흠순>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선품>의 딸이니 네가 마땅히 자식으로 여겨야 하는데
도리어 노여워하니 무슨 일인가 산 자는 불안하고 죽은 자는 원망할 것이다. 네가 그것을 살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공은 부득이 허락하였다.
<운명>은 곧 <대문大問>의 어머니이다.
<대문>을 낳자 공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 하늘의 뜻이구나. 아니면 <선품>이 이 손자를 점지하려고 너희들을 사랑에 빠지도록 하였느냐."라고 하였다.
마침내 다시는 혼도(婚道)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공의 딸 <온희溫喜>는 <춘장春長>공에게 시집갔고 <성희星喜>는 <원수元帥>공에게 시집갔으며
서녀는 <찰희察喜>, <찰연察燕>, <찰미察美>, <찰해察亥>이다.
서자인 <찰덕察德>, <찰원察元>은 모두 출세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선화(仙花)의 으뜸이요 문장이 뛰어났다.
청빈한 호덕(好德)은 나라를 위하여 다 바쳤네.
신선을 물으려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이며 성현을 물으려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인가.
<世系>
아버지는 <보리> 사문이고 어머니는 <만룡>낭주이다.
<만룡>의 아버지는 <정숙>태자이고 어머니는 <만호>태후이다.
<정숙>의 아버지는 진흥대제이고 어머니는 <숙명>공주이다.
'남당유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랑세기(花郞世紀) 完譯(9) (1) | 2023.12.09 |
---|---|
화랑세기(花郞世紀) 完譯(8) (2) | 2023.12.08 |
화랑세기(花郞世紀) 完譯(6) (2) | 2023.12.06 |
화랑세기(花郞世紀) 完譯(5) (2) | 2023.12.05 |
화랑세기(花朗世紀) 完譯(4) (1) | 2023.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