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4세 풍월주(643-647) <천광天光(616- ?)>
<천광天光>공은 <수품水品>공의 아들이다.
천운(614?- )
수품(천장) - 천광(616- ) <24세 풍월주(643-647)>
천봉(620?- )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태는 마치 부인과 같았다.
말은 친절하고 거동은 단아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협기가 있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으며
자신의 뜻을 과감하게 실행하여 상선(上仙)으로 인하여 동요하지 않았다.
공은 나이 14살에 <흠순>공이 풍월주로 있을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양도>공이 보고 좋아하여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았으며 그 아래에 소속되어 폐신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양도>공이 여러 번 공의 집에 와서 잤다.
공의 어머니 <천장>낭주는 곧 <염장>공의 누이로서 공의 누나 <천운>과 더불어
<양도>공을 맞이하여 밤을 새워 이야기하며 즐겼는데 날이 밝아 오는 것도 알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천운>은 마침내 <양도>공에게 시집을 갔다.
<양도>공은 <천장>의 은혜를 갚고자 <군관>공에게 공을 부제로 삼도록 명하여 공이 부제가 되었다.
<양도>공이 공에게 <춘화春花>의 누이 <윤화尹華>와 결혼하라고 명하여
공은 그녀를 아내로 삼았고 이에 이르러 <윤화尹華>는 화주가 되었다.
처음에 <윤장閏長>의 아우 <하장夏長>이 공과 더불어 부제가 되려고 경쟁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이 때 이르러서야 <양도>공이 공에게 명하여 <하장夏長>의 아우 <춘장春長>을 부제로 삼았다.
<춘장春長>은 곧 <윤화尹華>의 오빠이다.
<윤화>의 어머니 <하희夏姬>는 곧 <하종夏宗>공의 딸이다.
그 어머니 <은륜銀輪>공주는 <사도思道>태후의 딸이어서 많은 사재(私財)가 있었다.
<윤화>가 그것을 얻어 공에게 시집을 갔기에 곤란한 사람을 도우는데 쓰기에 넉넉하였다.
<염장>공 이후 낭정이 가야파에게 많이 돌아갔으므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는 출세하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개탄하여 발탁하여 주었다.
<양도>공과 <군관>공 때에 낭두들은 <염장>공의 마복자들이 많이 등용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공이 그들을 많이 물리치며 말하기를
" 낭두는 낭정에 중요한 자들이다.
어찌 내 옹(翁)만이 홀로 중하고 낭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라고 하였다.
여기서 옹(翁)은 <천광>공의 어머니 <천장>의 오빠 <염장>공을 말한다.
쫓겨난 자들이 모두 <염장>공을 찾아가 공의 허물을 말하니
<염장>공이 웃으며
" 너희들이 새 풍월주를 따르지 않는데 나 또한 어쩌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때 가야파의 우두머리 <찰인察忍>은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아직 대노두로 있었고 처첩과 자녀가 백을 헤아렸으며 출입하고 거동하는 것이 완전히 상선(上仙)과 같았다.
그 아들인 <찰두察斗>와 <찰석察石>이 모두 도두가 되었는데
<찰두察斗>는 계해년(603) 생이고 <찰석察石>은 을축년(605) 생이다. 각기 첩이 수십 인이었다.
낭두들이 그 아들과 사위에서 많이 배출되었고 대도두 <당보唐甫> 또한 <찰인>의 사위였으며
그 막내아들 <찰의察儀>가 <양도>공의 폐아(嬖兒)가 된 것 등, 그 권세를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찰인>의 처 <옥두리玉斗里>는 절색으로 역대의 상선을 섬긴 까닭에 높은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공은 본디 <찰인>을 미워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먼저 <찰인>을 파면시키고
진골정통의 구두(舊頭) <만덕萬德>을 대도두로 삼고 <당보>도 대노두가 되었다.
<당보>는 곧 <당두唐斗>의 아들로 대원신통파였다.
그러므로 가야파가 크게 놀라 다투어 상선에게 가서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은 우뚝 서서 들어 주지 않고 규칙을 새로이 정하였다.
대노두는 60살까지로, 대도두는 55살까지로, 도두는 50살까지로,
대두와 상두는 45살까지로, 낭두와 대낭두는 40살까지로 한정하였다.
별장(別將)은 각기 그 지위에 따르게 하였다.
사람은 3파를 고루 써서 사리사욕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였고
망두(望頭)는 재주와 그릇의 바탕에 의거하고 마복자를 논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신진의 문을 크게 열었다.
이로 인심이 크게 흡족하였다.
그 때 국사(國事)가 점차 어려워졌다.
공과 여러 낭두들이 낭도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하여 병부에 보충하였다.
공이 5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의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모반을 하였다.
<유신>공이 신주(新主){천관공}을 받들어 전쟁을 독려하였다.
그 때 경사(京師)의 군대가 적어 공이 낭도를 모두 동원하여 먼저 그 진으로 돌격하였다.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공은 그 공으로 발탁되어 호성장군이 되었다.
<비담>의 난은 647년 선덕여왕 16년에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난으로
선덕여왕의 진덕여왕 왕위계승을 빌미로 일으킨 난이다.
금륜(미실) - 비담(578?-647)
동륜(만호) - 백정(567-631)(마야) - 천명(583?- )(용수) - 춘추(603-661)
덕만(587?-647) <선덕여왕 재위 632-646>
국반(571- )(월명) - 승만(590?-654) <진덕여왕 재위 647-653>
<승만>은 <덕만>의 사촌 여동생이고 <춘추>는 <덕만>의 조카이다.
이때 비담 70세?, 선덕여왕 덕만 61세?, 진덕여왕 승만 58세?, 김유신 53세, 무열왕 김춘추 45세이다.
곧 풍월주의 지위를 부제인 <춘장>에게 전하여 주고 오로지 왕사(王事)에 힘써
변방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며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중흥 28장수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가히 공경할 만하지 않은가!
공의 성품은 외유내강하고 사리를 분명히 살폈으며 사민(士民)을 사랑하고 구휼하여 옷을 벗어 주기도 하였다.
술은 즐겼으나 많이 마시지 않았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방사(房事)에 어지럽지 않았다.
<윤화>낭주가 자녀 7명을 낳았다. 공은 첩이 5명이었다.
<진수眞凁>는 <진복眞福>공의 누이이다.
<효월孝月>은 <효종孝宗>공의 딸이다.
<경화京華>는 <윤화尹華>의 동생이다.
<찰언察言>은 <찰의察儀>의 누이이다.
<만수萬水>는 <만덕萬德>의 딸이다.
각기 자녀가 있어 일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찰인>은 비록 그 지위를 잃었지만 딸을 공에게 바쳤고 공이 지극히 사심이 없는 것을 알았기에
감히 원망하거나 허물하지 않고 그 자손을 타일러 말하기를
" 신주는 진실로 세상에 드문 영웅이다.
우리들이 어찌 일시의 잃음을 가지고 원망을 마음에 두겠는가.
기쁜 것은 이 훌륭한 선(仙)을 얻었으니 우리 외손을 낳아서 기르면 나의 집안이 또한 번창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3파가 화합하고 좋아하여 서로 혼인하고 모두 공의 덕을 칭송하였으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찬하여 말한다.
대원신통에서 나왔고 가야파에 들어갔다.
세 화랑을 도왔고 국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오직 공의 맑은 덕은 만세에 바야흐로 빛날 것이다.
<世系>
아버지는 <수품水品> 상대등인데 곧 <구륜仇輪>공의 아들이다.
<구륜>공이 <반야>공주를 아내로 맞아 <수품>공을 낳았다.
<반야>의 어머니는 <미실>궁주이고 <구륜>의 어머니는 <사도>태후인데 모두 진흥대제가 아버지다.
<수품>공은 <천주>공의 딸 <천장>낭주를 아내로 맞았으니 곧 <지도>태후의 사생(私生)이다.
<천주>공 또한 진흐애제의 아들이다. 세계는 <염장>공조에 상세하다.
25. 25세 풍월주(647-652) <춘장春長(620?- ?)>
<춘장春長>공은 <염장廉長>공의 셋째 아들이다.
염장(하희) - 춘장(620?- )<25세 풍월주(647-652)>
공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고 덕을 좋아하였으며 윗사람을 받드는데 지성으로 하고 자기의 뜻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천광>공의 누이 <천봉天鳳>낭주를 아내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
낭정은 한결같이 <천광>의 명에 의거하여 행하였고 <천광>공의 명에 의거하여
<찰두察斗>를 대도두, <만덕萬德>을 대노두로 삼았으므로 가야파의 세력이 점차 다시 창성하게 되었다.
부제 <진공眞功>은 <천광>공의 애첩 <진수眞凁>의 아우이다.
사린(호명) - 진수(620?- )
진공(622- )
공은 낭정을 <진공>과 <찰두>에게 맡기고 매일 낭주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낭주가 말하기를
" 내 오빠가 풍월주로 있을 때는 아침부터 밤까지 바빴는데
낭군이 풍월주가 되고는 낮에도 일이 없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 바쁘다면 자체가 바쁜것이고 한가하다면 자체가 한가한 것이지 어찌 추호의 가감이 있겠소"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집에서는 근검으로 자제를 훈계하였다.
늘 낭주와 더불어 낭두의 처와 딸들을 독려하여 정포(征袍)를 만들어 출전한 낭도들에게 보냈다.
몰래 서울과 시골로 다니며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을 구휼하였다. 인망이 크게 돌아왔다.
풍월주로 6년간 있다가 <진공眞功>에게 물려주고 창부(倉部)에 발탁되어 들어갔다.
곧 집사부(執事部)로 옮겼는데 그 일이 맞았으므로 여러 번 하여 중시(中侍)가 되었다.
공은 늘 스스로 겸손히 말하기를
" 나 같은 사람을 가히 일러 행운아라 한다.
한 가지 재능도 없이 부형과 상선들의 음덕에 의지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공적을 스스로 내세운 적이 없었다.
기상이 <천주>공과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천장>이 늘 <천봉>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의 지아비는 아형(阿兄)을 닮지 않고 나와 몹시 닮았다.
너는 너의 아버지를 닮았고 너의 부부는 도리어 나의 부부와 흡사하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이 대개 빈 말이 아니었다.
공은 일찍이 <보종>공의 청결함을 사모하여 덕을 세우는 표준으로 삼고
틈이 생기면 반드시 화주와 같이몸소 그 사당에 나아가 절하며 기도하고 돌아왔다.
<보량>을 섬기기를 어머니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여 청하는 것은 들어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보량>은 이에 그 딸 <양시良時>를 공에게 주어 첩으로 삼았고 다른 잡스런 여자는 없었다.
공의 행실은 선문의 사표(師表)가 될만하다.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찬하여 말한다.
<천주>의 후예로 이 같은 성인이 있다.
마음가짐이 깨끗하고 어질었다.
내조가 짝이 되어 아름답고 복록이 날로 새롭다.
천주(지도) - 염장(하희) - 춘장
하종(은륜) - 하희(586?- )
26. 26세 풍월주(652-656) <진공眞功(622- ?)>
<진공眞功>은 임오년생이고 임자년에 화랑이 되었다.
<진공眞功>은 <사린思隣>공의 아들이다.
처음 <미실>궁주가 진흥대제를 섬겨 <반야般若>공주를 낳았다.
<천관>공은 <반야>공주의 적손이다.
또 <수종壽宗>전군을 낳았는데 후에 <사진思眞>으로 고쳤다. 그 아들이 곧 <사린思隣>이다.
그러므로 <진공>과 <천광>공은 제종 형제가 된다.
삼모진(미실) - 반야(568?- )(구륜) - 수품(천장) - 천광(616- ) <24세 풍월주(643-647)>
삼모진(미실) - 수종(572?- )(호린) - 사린(호명) - 진공(622- ) <26세 풍월주(652-656)>
<반야>가 일찍이 <수종>에게
" 어머니는 자녀가 많은데 같은 아버지의 형제는 오직 너와 나뿐이다." 라고 말하고
대대로 서로 저버리지 않기를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수품>공 또한 <사린> 사랑하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제처럼 하였다.
<사린>의 어머니 <호린好隣>은 곧 <호림虎林>공의 누님이다.
복승(송화) - 호린(576?- )
호림(579- )
<사린>은 처음에 <임종林宗>공의 대사(大舍)가 되었는데
<임종>공의 첩 <호명好明>과 득통하여 딸 <진수眞凁>를 낳았다.
<임종>공이 곧 <호명>을 <사린>의 처로 삼게 하여 <진공>을 낳았다.
<진공>은 문장에 능하였고 풍채가 있었고 기묘한 꾀를 좋아하였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였으며 또한 굳세고 용맹스러워 무리를 다스리기에 족했다.
그러나 색을 좋아하였고 마음이 탐욕스러웠고 사사로운 비밀을 많이 행하여 인망을 얻지는 못했다.
<찰두>와 결탁하여 <찰두>의 딸 셋을 첩으로 삼았다.
또한 <찰두> 아들 <승昇>의 처 <대씨代氏>를 첩으로 삼았다.
찰(察)과 대(代) 양쪽의 처와 딸 중 아름다운 자들은 모두 색공 장부에 올랐다.
이에 앞서 <진공>과 <달복達福>공의 아들 <흠돌欽突>이 사이가 좋았다.
<흠돌>의 누이인 <흠신欽信>이 <보로寶路>전군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는데 아름다웠다.
<진공>과 <흠돌>이 꾀를 써서 <흠신>의 두 딸과 정을 통했으나 <흠신>과 <보로>전군은 알지 못했다.
<흠신>의 어머니 <정희政姬>는 곧 <유신>공의 누이인데
<진공>의 무례함에 노하여 <유신>공에게 고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흠돌>은 크게 두려워하여 곧 <찰의>에게 귀중한 뇌물을 주고 <보량>을 설득하게 하였다.
<보량>은 이에 알아듣고 <정희>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 폭로하면 단지 내 자녀가 상처를 입지만 감추면 곧 물방울처럼 없어질 것입니다.
어찌 생각을 깊이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 <정희>가 곧 멈추었다.
이 때부터 <진공>은 더욱 거리낌이 없어졌다.
양명(호륜) - 호명(사린) - 진공(622- )
양명(보종) - 보량(백정) - 보로(620?- )
서현(만명) - 정희(달복) - 흠돌(627-681)
흠신(630?- )
<찰의>는 <보량>의 폐신이고 <보량>은 <진공>의 고모이다.
<흠신>은 또 <진공>이 출중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하여 <보로>를 버리고 <진공>에게 가려고 하였다.
<진공>은 이에 사람을 시켜 <보로>를 설득하기를
" <흠신>은 병이 있으니 버리고 좋은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다.
<보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유신>의 삼녀 <작광酌光>을 맞이하여 처로 삼았다.
<진공>은 이에 <흠신>을 처로 삼았고 풍월주가 되자 화주로 삼았다.
<흠돌>은 마음이 험악하고 간사한 꾀가 많아 사람들이 모두 꺼렸다.
그 때 가야파가 크게 성하여 찰씨(察氏) 일문에서 낭정을 모두 장악하였다.
<찰의>는 도두별장인데 대도두로 행세하였다.
<흠돌>은 <찰의>와 죽음을 같이할 친구가 될 것을 허락하고 <보량>과 득통을 하고 <진덕>제를 알현하였다.
제(帝)는 그의 작(爵)을 올려주고 총애하였다.
이에 앞서 <흠돌>은 <자의慈儀>의 아름다움을 듣고 <보룡寶龍>이 홀로됐음을 업신여겨
<자의>를 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보룡>이 막았다.
얼마 안 있어 <보룡>이 <당원幢元>전군을 낳았다.
선품(보룡) - 자의(630?- )
순원(633?- )
야명(636?- )
법민(보룡) - 당원(647?- )
<흠돌>은 사람을 시켜 <보룡>의 추함을 떠들게 하여 위협하였다.
대개 <보룡>에게 왕의 총애가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의>가 태자비가 되자 <흠돌>은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의>가 덕이 없다고 험담을 하여 궁지로 몰았다.
그 때 <흠돌>은 <문명>황후의 조카였다. 그러므로 권세가 내외를 압도하였다.
<자의>궁은 마음을 졸이며 조심하였다.
<흠돌>이 문명후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 <자의>가 후일 후(后)가 되어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정통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므로 가야파는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광信光>을 일찍 태자비로 삼아 우리 집안을 편안하게 함만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신광>은 <유신>공의 딸로 태자의 첩이 된 사람이다.
27. 27세 풍월주(656-661) <흠돌欽突(627- ?)>
<흠돌欽突>은 정해년(627) 생이고 병진년(656)에 화랑이 되었다.
달복(정희) - 흠돌(627- )<27세 풍월주(656-661)>
<신광信光>의 언니 <진광晋光>은 곧 <흠돌>의 처였다.
유신(영모) - 진광
신광
그러므로 <유신>공의 공을 핑계대서 말하였으나 마음 속으로는 그 무리를 굳세게 하려 하였다.
<문명>후는 거의 기울었으나 태자가 받아들이지 않아 <흠돌>의 계책은 마침내 깨어졌다.
<진공>은 풍월주의 지위에 5년간 있다가 <흠돌>에게 물려주었다.
그 때 태손 <소명昭明>전군이 이미 태어났고 무열제는 <자의>의 현숙함을 매우 사랑하였다.
법민(자의) - 소명{정명, 신문왕}(645-692)
<흠돌>은 감히 다시는 그 계책을 말하지 못하였다.
이에 <보룡>궁에 정성을 바치고 그 딸을 <순원順元>의 첩으로 들일 것을 청하였다.
<보룡>궁은 속임수를 두려워하여 좋은 말로 거절하였다.
<흠돌>은 다시 사람을 시켜 <야명夜明>궁과 나의 아버지 <오기吳起>공에게
정성을 바치고 전에 저지른 악행을 덮으려 하였다.
그 때에 <야명> 또한 <인명仁明>전군을 낳았는데 준수하고 용봉(龍鳳)의 자태가 있었다.
법민(야명) - 인명
태자가 매우 사랑하니 <흠돌>이 스스로 말하여 <인명>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야명>이 부득이 받아 들였다.
그 때 <순원>공이 <흠돌>에게 속아 비밀히 <흠돌>의 딸과 사통하였다.
그리하여 <흠돌>을 위하여 <야명>을 설득한 것이다.
무열제가 죽고 문무제가 즉위하자 <자의>를 황후로 삼았다.
<흠돌>의 악함을 알았으나 문명태후에게 효도하였으므로 한 마디 말도 발설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흠돌>은 <호원好元>공의 아들 <흥원興元>을 부제로 삼았다.
애초에 <태양太陽>공주가 진평대제를 섬겨 <태원太元>과 <호원好元>을 낳았는데 제(帝)를 닮지 않았다.
공주는 어려서 <금륜>태자를 섬겼는데 사신(私臣)을 좋아하였다.
제(帝)를 섬길 때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양 군(君)은 통(統)을 얻지 못하였다.
<흥원>은 제통(帝統)이 자기에게 있다고 혼자 생각하여 조정을 원망하고 누이를 <흠돌>의 첩으로 삼아 결탁하였다.
<흠돌>은 <야명>궁에 정성을 바치게 되자 선위(仙位)를
나의 아버지 <오기>공에게 전하고자 <흥원>을 계책으로 꾀어 양보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낭정이 무너졌기에 받지 않으려 하였다.
진골정통파의 낭두들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피를 흘리며 따져 말하기를
" 공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신(臣) 등이 장차 자멸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자의>황후 또한 나아갈 것을 권하여 마침내 풍월주의 지위를 받았다.
<흠돌>은 풍월주로 7년간 있었다.
28. 28세 풍월주(662-664) <오기吳起(633- ?)>
<오기吳起>는 계사년(633) 생이고 임술년(662)에 화랑이 되었다.
예원(우야) - 오기(633- )<28세 풍월주(662-664)>
아버지가 비로소 풍월주의 위에 나아갔는데 실제 28세 풍월주다.
이 때 낭정이 이미 어지러워졌기에 급작스럽게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진공>,<흠돌>, <흥원> 등이 모두 낭도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위에서 낭정을 전횡하였다.
아버지는 바로잡을 수 없음을 알고 3년간 재위하고 부제 <원선元宣>공에게 물려주었다.
29. 29세 풍월주(664-667) <원선元宣(636- ?)>
<원선元宣>은 병신년(636) 생이고 갑자년(664)에 화랑이 되었다.
흠선(보단) - 원선(636- )<29세 풍월주(664-667)>
<원선>공 또한 4년간 재위하고 역시 <군관>공의 적자 <천관天官>에게 물려 주었다.
30. 30세 풍월주(667-674) <천관天官(639-?)>
<천관天官>은 기해년(639) 생이고 정묘년(667)에 화랑이 되었다.
군관(천운) - 천관(639- )<30세 풍월주(667-674)>
<천관>의 처는 곧 <흠돌>의 딸이다. 그리하여 낭정이 다시 <흠돌>의 무리들에게 돌아갔다.
<천관>은 8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었다.
31. 31세 풍월주(674-678) <흠언欽言(645- ?)>
<흠언欽言>은 을사년(645) 생이고 갑술년(674)에 화랑이 되었다.
<흠돌>의 아들 <흠언>이 대신하였다.
대개 그 첩 <언원言元>의 소생이기 때문이다.
흠돌(언원) - 흠언(645- )<31세 풍월주(674-678)>
<흠언>은 <흥원>의 조카로 <흥원>의 딸을 화주로 삼았다.
<흠원>은 5년간 풍월주로 있었다.
32. 32세 풍월주(678-681) <신공信功(649-?)>
<신공信功>은 기유년(649) 생이고 무인년(678)에 화랑이 되었다.
진공(흥신) - 신공(649- )<32세 풍월주(678-681)>
<진공>의 아들 <신공>이 대를 이었는데 <신공>은 <흠돌>의 조카로서 또한 <흥원>의 딸을 화주로 삼았다.
수년 내에 낭정은 한결같이 삼간(三奸)의 손으로 들어갔다.
<흠돌>은 아첨으로 문명태후를 섬겼다.
이에 그의 딸이 <유신>공의 외손이므로 태자에게 바쳤다.
태자의 모후(母后){자의}는 <흠돌>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소명昭明>태자는 무열제의 명으로 <흠운欽運>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약속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흠운>의 딸은 스스로 <소명>제주(祭主)가 되기를 원하였으며 <자의>후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것이 <소명昭明>궁이다.
태자와 더불어 모후가 자주 소명궁으로 거동하였다.
태자가 소명궁을 좋아하여 마침내 <이공理恭>전군을 낳았다.
달복(보개) - 흥운(배금) - 신목(정명) - 이공{효소왕}
후(后)가 이에 소명궁에게 명하여 동궁으로 들어가게 하고 선명궁(善明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총애함이 <흠돌>의 딸보다 컸다. <흠돌>의 딸이 투기를 하였다.
<문명>태후가 죽자 <흠돌> 등이 스스로 그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두렵고 불안하였다.
게다가 <흠돌>의 딸이 총애를 잃었다.
<흠돌> 등이 이에 모반을 하였다.
<야명>궁을 핑계로 삼아 <인명仁明>을 옹립하였으나 실제로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것이다.
문무제의 병이 크게 악화되자 나의 아버지 <오기>공이 북원(北原)으로부터 들어와 호성장군이 되었는데
실제로는 <자의>황후의 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때 <진공>이 호성장군으로서 인부(印符)를 내어 주지 않으며 말하기를
" 주상(主上)이 병으로 누웠고 상대등이 문서를 내리지 않는데 어찌 중요한 직을 가벼이 넘겨 주겠는가?"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대개 적들의 모의가 이미 치밀했기 때문이다.
제(帝)가 죽었으나 비밀에 부쳐 발설하지 않고 사람들을 시켜 비밀리에 경외(京外)의 군대를 입성시켜
<흠돌>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야명궁과 <군관>공의 집을 포위하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오기>공의 심복인 낭두가 모의를 공에게 발설하였다. 그 때 시위삼도(侍衛三徒)는 적 편에 많이 서 있었다.
<오기>공이 이에 <순지順知>, <개원愷元>, <당원幢元>, <원수元帥>, <용원龍元>공 등과 더불어
비밀히 사병(私兵)을 불러 들어가 호위하고 삼도의 대감을 모두 파면하여 다스렸다.
서불한(舒弗邯) <진복眞福>공이 수병(手兵)을 이끌고 포위를 깨고 들어와 말하기를
" 경외(京外)의 병력이 크게 이르렀다.
너희들은 적신(賊臣)에게 미혹되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때 <흠돌> 등이 그 무리를 속여 말하기를
" 상대등 <군관>과 각간 <진복>이 제(帝)의 밀조(密詔)를 받아 <인명人明>을 즉위시켰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관>이 움직이지 않았고 <진복>은 포위를 깨뜨렸으므로 무리들이 의심하여 서로 다투었다.
이에 큰 소리로 왕에게 충성할 자는 오른쪽, 적을 따를 자는 왼쪽으로 서라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무리 중에 오른쪽으로 간 자들이 많았다.
<흠돌> 등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포위를 풀고 물러가려 하였다.
<오기>공 등이 병사를 풀어 대파하였다.
경외의 병력이 또 이르렀다. 적은 이에 삼간(三奸)을 사로잡아 바쳤다.
반란이 비로소 평정되었고 삼도 중에는 이로써 죽임을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흠돌>의 난은 681년에 일어났다.
<자의>태후가 화랑을 폐지하라고 <오기>공으로 하여금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속하게 하고 직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의 낭정은 옛날 그대로 스스로 남아 있었다.
실직(悉直)이 가장 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 풍속이 다시 서울에 점점 퍼졌다.
중신들이 모두 오래 된 풍속을 갑자기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태후가 이에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화랑의 풍속은 그리하여 크게 변하였다.
※ 흠돌의 난
1. 흠돌의 난 전모
681년, 신라 문무제 21년,
문무제가 나이 들어 병상에 눕자 <자의>황후는 급히 북원으로 사람을 보내 <오기吳起> 장군을 불렀다.
빨리 서라벌로 들어와 호성장군(護城將軍)의 임무를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호성장군은 ‘서울을 지키는 장군’ 즉 수도방위사령관 정도 되는 직책이다.
<오기> 장군은 <자의>황후 동생인 <운명>부인의 남편이자 외사촌 동생으로, 황후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라벌의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흠돌> 일파가 무슨 행동을 벌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당시의 호성장군이던 <진공>은 <흠돌>과 같은 패였으므로 <오기> 장군에게 인수인계를 하지 않았다.
“주상이 병으로 누웠고, 상대등이 확인한 문서가 없는데 이 중요한 직책을 어찌 말만 듣고 가볍게 넘겨주겠습니까?”
정식 임명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기> 장군도 황후의 지시만 듣고 왔으므로 주춤하였다. 그 사이 문무제가 죽었다
<흠돌> 등은 서라벌 외곽 군대를 불러들여 난을 일으키려 획책하였다.
<흠돌>, <진공>, <흥원> 일파가 모의한 작전은,
“주상께서 돌아가시기 전, <인명> 왕자를 차기 왕으로 지명하셨다!
상대등 <군관>과 각간 <진복>이 문무제의 밀조를 받았다!” 라고 선포하여
민심을 잡은 후, 새로운 왕을 세우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것이었다.
이때 이미 정비인 <자의>황후가 낳은 <정명>태자가 엄연히 있었지만,
<흠돌>은 <야명>궁주가 낳은 <인명> 전군을 옹립하여 이를 번복시키려하였다.
<화랑세기>는 <흠돌> 자신이 왕이 되려고 획책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던 문제가 생겼다. 급박한 순간에 비밀이 새어나간 것이다.
<흠돌> 측에 있던 <오기> 장군의 심복인 낭두가 이 모의를 알아채고 <오기> 장군에게 뛰어와 알렸다.
<오기> 장군은 즉시 <순지>·<개원>·<당원>·<원수>·<용원> 등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급히 자기들의 사병을 거느리고 월궁으로 들어가 시위삼도의 대감(大監:책임자)을 모두 파면하고 궁을 점령해 버렸다.
<오기> 장군이 선수를 친 것이다.
* 순지 : 순원. 자의황후의 동생. 훗날 신라 정계를 휘어잡는다.
* 개원 : 개원 전군. 문명태후의 아들.훗날 효소왕 대상대등 역임
* 당원 : 당원 전군. 보룡궁주의 아들. 훗날 효소왕 대 중시 역임
* 원수 :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 장군의 아들.
이때 <흠돌> 일파는 야명궁과 상대등의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야명궁에 <인명> 왕자가 있었기 때문이고 상대등 <군관>에게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등 <군관>은 이들을 도와주지 않고 미적거렸다.
<오기> 장군이 월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흠돌>은 재빨리 군사를 돌려 월궁을 포위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성 안팎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직 승자가 권력을 잡고 자기 위주로 역사를 쓸 것이다.
이때 <흠돌>이 고대하던 각간 <진복>이 나타났다. <진복>은 <흠돌>의 일당 <진공>의 형이기도 하다.
그런데 <진복>의 행동은 전혀 딴판이었다.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나타나 월성을 에워싼 군사들의 포위를 깨고 궁안으로 들어왔다.
<진복>이 성안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지방의 병력이 크게 일어나 이쪽으로 오고 있다. 너희들은 적들에게 속았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흠돌> 측 군사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흠돌>의 말대로라면 상대등 <군관>과 각간 <진복>이 <인명> 왕자를 모시고
자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상대등 <군관>은 아무런 말도 없이 꿈쩍도 않고,
각간 <진복>은 오히려 자기들을 공격하지 않는가!
<진복>이 또 외쳤다.
“왕을 따를 자는 오른쪽에, 적들을 따를 자는 왼쪽으로 서라!”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병사들이 우루루 오른쪽으로 몰려선 것이었다.
<흠돌> 일파는 일이 틀려진 것을 알고 포위를 풀고 물려가려 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기> 장군이 군사를 몰아쳐 대파하였다.
<흠돌>과 <진공>, <흥원>은 도망쳤는데 오히려 자기편 군사들에게 잡혀 왔다.
세 명의 반란 주모자들은 처형당하였고, 얼마 후 상대등 <군관>도 반란 공모죄로 자살을 명받았다.
화랑 풍월주 출신들이 5명이나 연루되고 수많은 화랑, 낭도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자의>황후는 화랑도의 폐지를 명하였다.
그후 오래된 풍속을 없앨 순 없다는 주위의 여론에 따라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만 허락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정명태자가 즉위하였다.(신문왕).
2. 흠돌의 난 실패 결정적 이유
‘흠돌의 난’의 클라이막스는 단연 마지막 장면이다.
<흠돌>을 따랐던 군사들이 <진복>의 한마디에 등을 돌리고
급기야 도망치는 <흠돌> 등을 잡아, <오기> 장군 측에 바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일으키는 반란이면 끝까지 자기의 주군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게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인데, 결국 <흠돌>이 속임수로 군사들을 이끌었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
그리고 반란 주모자들이 얼마나 엉성하게 모의를 획책했는지도 곳곳에 보인다.
아마 각간 <진복>과 상대등 <군관>에게는 평소에 잘 예우하며 충성을 다하였는 것 같다.
또 ‘<정명> 태자보단 <인명> 왕자가 훨씬 인망이 좋지 않습니까?’ 등으로 묵시적 동의만 얻은 걸 가지고 마치 거사를 하면
자신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줄 것으로 착각하였지 않나 싶다.
반란이란 것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야 하는 건지 이들은 몰랐던 것 같다.
3. 흠돌과 자의황후의 악연
<화랑세기>에 의하면, <흠돌>이 난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으로 <자의>황후와의 관계를 꼽는다.
<흠돌>과 <자의>황후는 어떤 사이였을까?
<자의>는 21세 풍월주였던 <선품>공의 부인이었던 <보룡>궁주의 딸이다. 매우 아름답고 정숙하였다.
<흠돌>이 <자의>를 첩으로 삼으려 했으나 <보룡>이 거절했다. <흠돌>은 앙심을 품었다.
<자의>의 어머니 <보룡>은 남편 <선품>공이 일찍 죽자 과부가 되었는데 미모가 여전히 절색이었다.
문무제가 태자가 되기 전(법민 왕자 시절) <보룡>을 좋아하자,
<보룡>은 장녀인 <자의>를 <법민> 왕자에게 바치고 자신은 여승이 되었다. <법민> 왕자가 매우 애석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법민> 왕자는 곧 <자의>의 아름다움에 빠져 사랑하였으며 태자가 되자 바로 태자비로 삼아 궁을 짓고(자의궁)
<보룡>을 입궁시켜 감(監)의 일을 맡겼다(보룡궁).
<보룡>에게는 <자의>, <운명>, <야명> 딸 셋과 <순원>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둘째 <운명>은 <오기>공에게 시집보내고 셋째 <야명>은 <법민> 태자의 후비로 들였다.
(외아들 <순원>은 나중 신라를 휘어잡는 정치 9단으로 자란다)
<흠돌>은 <자의>와 그 어머니 <보룡>을 미워하였다.
<자의>가 태자비가 되자 온갖 험담을 하고 다녔으며
<보룡>이 그 와중에 아이를 낳자(당원 전군) 더러운 여자라고 떠들었다.
<당원>은 훗날 효소왕 때 중시(中侍)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흠돌>이 감히 태자비와 선왕의 총애를 입은 궁주를 험담하고 다닐 수 있었던 건
그가 <김유신> 장군의 사위로써 <문명>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하무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점점 <자의>황후에 대한 문무제의 사랑이 깊어가자, <흠돌>은 어리석은 계책을 쓰기 시작했다.
문무제의 어머니인 문명태후(태종무열왕비)를 찾아가 태자비를 폐하고
김유신의 3녀인 <신광>을 태자비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가 문무제가 반대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보룡궁을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고
자기 딸을 <보룡>의 아들인 <순원>에게 첩으로 들이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하였다.
<보룡> 가족들에게 잘 보이려 <자의>의 제부인 <오기>공에게 풍월주 자리를 물려주었다.
<오기>공은 풍월주가 되었다가 자기는 허수아비이고 모든 낭정을 <흠돌> 일파가 좌지우지하는 걸 알고 사임하였다.
마지막으로 <흠돌>은 <자의>의 여동생인 <야명>에게 접근하여
그녀가 낳은 <인명> 전군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여 <야명>이 부득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흠돌>의 행태에 대해 <자의>황후는 속만 앓고 있었다.
그가 차지한 서라벌에서의 위세가 너무 커 감히 손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태후가 죽고 문무제가 죽었을 때
그녀가 취한 행동을 보면 얼마나 <흠돌>에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는가 알 수 있다.
<흠돌>은 자신이 충분히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쓸데없이 ‘황후’를 미워하고 해코지를 하려고 하였다. 어리석은 자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4. 소명궁과 흠돌의 딸
<흠돌>과 <자의>황후의 악연 중 또 하나는 <자의>황후의 아들인 <정명>태자(훗날의 신문왕)의 비에 대한 문제였다.
내외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흠돌>은 자신의 딸을 <정명>태자의 비로 들여앉히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정명>태자에겐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흠운>이란 장군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흠돌>의 형이다.
<흠운>은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는데 둘째 딸이 <자의>왕후의 첫째 아들인 <소명> 왕자의 아내가 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명> 왕자가 일찍 죽어버렸다. <흠운>의 딸은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고
<소명> 왕자를 위해 제주(祭主)가 되기를 원했다. 청상과부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의>황후는 이 여인에게 소명궁을 지어주고 와서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둘째 왕자인 <정명> 왕자와 자주 소명궁을 찾아와 위로하며 놀았다.
그 사이 <정명> 왕자와 소명궁이 정이 들고, <이공>전군까지 낳았다.
왕이나 왕자가 정비가 아닌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전군(殿君)이라고 한다.
만약 왕비가 낳았는데 왕자가 아닌 전군이라고 칭하면 왕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아니란 뜻이다.
그후에 원수와 다름없는 <흠돌>의 딸이 비로 들어왔으니 <흠돌>의 딸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흠돌>의 딸은 정비였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이 역시 <흠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자의>황후가 있는 한 <흠돌>의 후손 중에서 왕통을 보긴 어림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흠돌>은 마음을 너그럽게 쓴 적이 없고 항상 욕심을 부렸으며, 더 많이 갖기 위해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을 줄 알았더라면 분명 자제를 하였을 것이다.
(흠돌의 난 이후 흠돌의 딸은 폐비가 되고 소명궁은 정식 왕비가 된다. 곧 신목황후이다.
<이공> 전군은 <이공> 태자가 되고 왕위에 오른다.[효소왕]
발문(跋文)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찍이 향음(鄕音)으로 화랑 세보(世譜)를 저술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불초 자식이 공무의 여가에 낭정의 큰 일과 파맥의 정사(正邪)를 모아 아버지의 계고(稽古)의 뜻을 이었다.
혹 선사(仙史)에 하나라도 보탬이 있을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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