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

화랑세기(花郞世紀) 完譯(8)

지보고 2023. 12. 8. 10:05

 

21, 21세 풍월주(634-637) <선품善品(609-643)>

 

<선품善品>공은 <구륜仇輪>공의 아들이다.

<예원>공을 따라 화랑도에 들어갔다.

용모가 절묘하고 언행이 매우 아름다웠다.

문장을 좋아하고 선불(仙佛)을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높은 골품의 인물이다.

<예원>공이 누이 <보룡寶龍>을 처로 삼게 하여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 주었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며 한결같이 <예원>공의 제도를 따랐다.

부제인 <양도良圖>공에게 풍월주를 전하여 주고 <예원>공을 따라 내성(內省)에 들어갔다가 얼마 후 예부에 올랐다.

인평(仁平) 10년(643)에 왕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병을 얻고 돌아와서 곧 죽었다.

나이가 35살이었다. 왕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작을 아찬(阿湌)으로 올렸다.

 

삼모진(사도) - 구륜(보화) - 선품(609-643)<21세 풍월주(634-637)>

백정(미실) - 보화

 

후에 공의 딸 <자의慈義>가 문무제의 후(后)가 되자 파진찬으로 추증하였다.

 

선품(보룡) - 자의(630?- )

                    운명(634?- )

                    야명(636?- )

                    순원(640?- )

 

공의 차녀 <운명雲明>은 <예원>공의 아들 <오기吳起>에게 시집갔다.

 

예원(우야) - 오기(633- )

 

3녀 <야명夜明> 또한 문무제를 섬겨 궁주가 되었다.

 

외아들인 <순원順元>은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처음 공이 죽고 <보룡>이 혼자 살았다.

그 때 <문명>태후가 <선원仙元>전군을 낳고 <보룡>에게 젖을 먹여 줄 것을 청하였다.

 

춘추(문희) - 선원(644?- )

 

문무제가 이로써 <보룡>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하였다.

 

644년경 법민 19세, 보룡 43세?이다.

 

<보룡>이 제(帝)에게 장녀를 허락하고 스스로 여승이 되었다.

 

장녀 <자의> 15세?이다.

 

제(帝)가 애석하게 여겼다.

문무가 태자가 되자 <보룡>의 딸 <자눌慈訥>을 비(妃)로 삼아

궁을 세워 자의(慈義)라 하고 <보룡>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감(監)이 되도록 하였다.

<순원>은 이로써 궁중에서 자랐으며 <선원仙元>과 <당원幢元> 전군과 더불어

같은 예로 작이 올라가니 영화와 행운이 지극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일러 공의 음덕을 누린 것이라 하였다.

 

법민(보룡) - 당원(645?- )

 

찬하여 말한다.

<보화>의 아들이고 진흥대왕의 손자이다.

녹이 있으나 받지 않아 복이 자손에 미쳤다.

 

 

 

22. 22세 풍월주(637-640) <양도良圖(610 - ?)>

 

<양도良圖>공은 <모종毛宗>공의 아들이다. <선품>공보다 한살이 적었다.

 

모종(양명) - 양도(610 - )<22세 풍월주(637-640)>

 

처음 <염장>공을 따라 화랑이 되었다. 나이 겨우 12살에 상하의 예를 알았다.

<흠순>공 때에 이르러 <예원>공에게 속하도록 명하였다.

<선품>공이 풍월주가 되자 <예원>공의 명으로 부제가 되어 <선품>공을 섬겼는데 힘을 다하여 받들고 순종하였다.

풍월주가 되자 전횡이 많아 당시 사람 중에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공의 성품은 사람 섬기기를 잘 하고 일의 추이에 밝았다.

부처를 숭상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공명을 중히 여겼다. 문장을 잘 하였고 격검에 능하였다.

늘 강개하여 천하를 말하니 마치 한 세대의 영웅과 같았다.

상선들에게 몸을 굽혀 존경을 표할 때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재롱을 떠는 것 같아서 윗사람들의 기분을다 맞추었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어머니 <양명良明>공주는 진평대제의 딸이다.

 

백정(보명) - 양명(579?- )

 

제(帝)는 공의 총명함을 사랑하여 늘 궁중에 불러들이고 내사(內賜)를 많이 하였다.

공은 스스로 가지지 않고 번번이 공주에게 바쳐 동기들과 고르게 나누었다.

<양명>공주는 처음에 <미실>궁주를 위하여 그의 아들 <보종>공에게 시집가서 딸 <보라宝羅>와 <보량宝良>을 낳았다.

 

보종(양명) - 보라(602?- )

                    보량(604?- )

염장(양명) - 장명(608?- )

모종(양명) - 양도(610 - )

 

<보종>공이 내사(內事)를 좋아하지 않아 부제인 <염장>공과 사통하여 아들 <장명長明>을 낳았다.

그 때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하종夏宗>공의 아들이었는데

빼어난 용모에다 재주가 있어 <보종>공이 자기처럼 사랑하였다.

 

세종(미실) - 하종(564- )(미모) - 모종(584?- )

설원(미실) - 보종(580- )

 

문장과 화법(畵法)을 가르쳤는데 공주 또한 더불어 같이 배웠다.

하루는 공주가 꿈에 난새의 상스러움을 얻고 길조라 여겨 <보종>공에게 말하고 <보종>공을 끌어당겼다.

<보종>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길조가 어찌 홀로 나에게만 있느냐" 하고는 반듯이 누워 자 버렸다.

그 때 <모종>공이 옆에서 묵화를 그리다가 갑자기 옷이 더럽혀졌다. 공주가 이에 이끌어 그 옷을 빨아 주었다.

마침내 더불어 사랑하여 공을 낳았다.

대개 <보종>공이 공주의 마음이 <모종>공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벼루를 발로 차서 사랑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모종>공은 공주보다 5살이 적었다.

공주는 지극히 사랑하여 제공(弟公)이라고 불렀다.

공이 태어나자 <보종>공은 <양도良圖>라 이름지으며 말하기를

" 그림은 제공(弟公)의 아들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주가 기뻐하며 그 이름을 허락하였다.

 

공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7살에 이름을 지은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대답할 것이 없어 숨겨서 말하기를

" 네가 그림을 잘 그리기를 바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분발하여 힘써 그림을 그렸다. 진도(陳圖)를 잘 그렸는데 병장기가 매우 정밀하였다.

따라서 일을 하는 것도 몹시 치밀하였다. 마침내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

 

공주는 <보종>공을 지아비로 하고, <염장>공과 <모종>공을 사신(私臣)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늘 <모종>공을 숙공(叔公)이라고 불렀다.

커서는 곧 친아버지인 것을 알고 더욱 존경하고 효를 다하였으며 일찍 알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효도하였다.

<모종>공이 말하기를

" 너는 실제로 나의 아들이지만 적(籍)은 선부(仙父)를 이었으니 사랑을 나누지 않는 것이 옳다." 라고 하였다.

대개 <보종>공이 공을 사자(嗣子)로 삼은 까닭이다.

 

공은 그러므로 형 <장명長明>을 뛰어넘어 먼저 낭계(郞階)에 발탁되었다.

공이 그 형을 걱정하여 양보하려고 하자 <염장>공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 집과 나라에는 모두 사자(嗣子)가 있으니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비록 형에게 우애롭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죄를 얻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명>에게 형으로 처신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장명>은 이에 몸을 굽혀 공을 섬겼다.

공은 한층 더 효도를 하고 우애를 다하였다. <염장>공 섬기기를 또한 아버지에 대한 도리로 하였다.

 

처음에 <장명>의 손위 누이 <보량>이 진평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아 전군인 <보로寶路>를 낳았다.

 

백정(보량) - 보로(620?- )

 

<승만僧滿>后가 질투를 하여 물러나 살 것을 명하고 장차 종신(宗臣)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보량>은 평소에 공을 사랑하여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원치 않았다.

공주가 이에 제(帝)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 만약 <보량>으로 하여금 <양도>를 배필로 맞게하면 곧 <보종>의 혈통을 이은 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帝)가 허락하였다.

<보종>공 또한 원하였다.

공은 본디 동기간에 서로 결합하는 풍습을 싫어하여 따르지 않았다. <보량>이 그 때문에 병이 생겼다.

공주가 성을내어 책망을 하니

"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이족(夷族)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기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주는 이에 공을 감싸안으며 말하기를

" 참으로 내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이에 <보량>을 처로 삼아 아들 <양효良孝>를 낳았다.

 

양도(보량) - 양효(630?- )

 

공은 <보량>을 처로 대우한 적이 없고 섬기기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보량>이 노하여 말하기를

" 너는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랑하지 않느냐?

너와 내가 같이 산 지 3년이며 이같이 아름답고 예쁜 아들을 낳아 부모가 매우 기뻐하고

내가 너를 잠시라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너는 한결같이 나를 누나로 섬기고 존경한다.

내가 불상도 신상도 아닌데 공경은 무엇때문에 하느냐?

너는 듣지 못했느냐, 백말의 공경은 한 되의 사랑만 못하다는 것을

부부 사이에 공경은 해서 무엇 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공이 웃고 <보량>을 감싸안으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 같은 굴에서 생사를 하는데 어찌 사랑을 하지 않을 까닭이 있습니까.

제가 듣기를 큰 사랑은 공경하기를 신과 같이 하고 작은 사랑은 희롱하기를 옥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큰 사랑으로 그대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그대를 큰 누나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보량>은 이에 스스로 부끄러워 사과하고 공을 섬기기를 임금과 같이 하며

감히 외설스런 일로 공 앞에서 희롱하지 않고 말하기를

" 나의 지아비는 천하에 훌륭한 사람이다.

여자가 되어 이러한 사람을 섬기다 죽으면 더 큰 영광이 없다." 라고 하였다.

비록 한겨울이나 한더위에도 반드시 몸소 음식을 조리하여 공의 입맛에 맞추었으며

조그만 아픔과 작은 병도 걱정하며 정성을 다했다.

늘 보도(寶刀)를 지니고 다니며 따라서 죽을 뜻을 품고 있었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스스로 아름다움이 쇠하였다고 생각하여 <능보能寶>를 뽑아 화주(花主)로 삼으려 하였다.

<능보>는 본디 <보량>의 침비였는데 승진하여 난방(暖房)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 나는 선부(仙父)의 사자(嗣子)로 혈통을 얻었는데 진골정통은 그대에게 있다.

그대가 화주가 아니면 내가 어찌 풍월주가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보량>은 이에 기쁘게 화주의 지위에 올라 공과 더불어 축하를 받았다.

그 때 공의 나이는 28살이었고 <보량>의 나이는 34살이었다.

공은 낭정을 <보량>에게 많이 맡겼으나 큰 일은 스스로 맡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화주가 집정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공이 실제로 큰 낭정을 결정하였다.

 

풍월주가 된 후 처음에 낭두 7급을 9급으로 하였다.

국초에 서민(庶民)의 아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

13,4살에 동도(童徒)가 되었고 18,9살에 평도(平徒)가 되었으며

23,4살에 대도(大徒)가 되었는데 대도 중 입망자(入望者)는 망두(望頭)라고 하였다.

공과 재주있는 자를 천거하여 신두(臣頭)로 삼았다.

신두는 낭두가 될 수 없었고 오직 망두만이 낭두가 되었다.

대두가 30살이 되면 곧 병부에 속하거나 또 농공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長)이 되었다.

 

입망의 법에는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가 아니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낭두의 처들은 임신하면 곧 산 꿩을 예물로 하여 선문(仙門)에 들어가

탕비(湯婢)가 되었는데 몇 날 또는 몇 달 만에 잠자리 시중을 들게되면 물러났다.

물러날 때 그 남편은 재물을 들여 예를 갖추고 맞이하였다. 이름하여 사함(謝函)이다.

아들을 낳아 석 달이 되면 다시 돌아가는데 양과 돼지를 예물로 하였으며 세함(洗函)이라 하였고

몇 날이나 몇 달만에 잠자리 시중을 들게되면 물러났다. 그 남편은 또 사함을 하여 맞았다.

이로써 낭두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곧 그 재산이 기울게 되었다.

경박한 여자는 선문에서 놀고자 임신하였다고 거짓으로 칭하고 들어가 탕비가되었는데

임신이 안 될까 염려하여 선문의 예졸(隸卒)들과 사통하거나

혹은 선종(仙種){화랑의 아이를 갖는 것}을 얻어 돌아가니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공이 비로소 입망의 법을 개혁해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하였다. 낭도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낭두에 낭두(郞頭), 대낭두(大郞頭), 낭두별장(郞頭別將), 상두(上頭), 대두(大頭), 도두(都頭)의 등급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공이 그 위에 대도두(大都頭), 대노두(大老頭)를 더하였다.

도두 이하는 각기 별장을 두어 그 벼슬길을 넓혔고 지위를 높였다.

 

낭두의 딸은 모두 선문에 들어갔는데 이름하여 봉화(奉花)라 하였다.

위로부터 잠자리 시중을 받지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투어 청례(靑禮)를 하기 위하여 아양을 떨었다.

잠자리 시중을 받은 자는 봉로화(奉露花)라 하였고 아들을 낳은 자는 봉옥화(奉玉花)라 하였다.

옥로(玉露)가 아니면 낭두에 새로 오른 자들이 처로 삼지 않았다.

대개 처로 인하여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봉화는 청례를 하지 못하면 선문에서 늙어 예졸들에게 떨어졌다. 공은 이에 청례와 옥로의 폐단을 금하였다.

서민의 딸들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속하여 유화(遊花)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공이 또한 그 폐단을 바로 잡으니 향리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선문의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운 자들 중에는 전횡한다고 생각하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염장>공이 이를 걱정하여 공에게 지나치게 빨리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공이 직간하여

" <미생>공은 마복자가 수 십인이었는데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부주(父主)께서는 마복자가 백 인이니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염장>공이 웃으며

" 저들이 좋아 요구하였으니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물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 순리대로 하면 되고 서두르면 물이 샌다." 라고 하였다.

 

그 때 도두 <세기世己>의 처 <도리道里>는 어려서부터 아리땁다는 명성이 있었다.

<염장>공의 두 아들을 낳고서 <세기>의 처가 되었다. <세기>보다 12살이 많았다.

<세기>를 노복과 같이 보아서 그 뜻에 맞지 않으면 <세기>를 매질하였는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세기>에게는 첩이 셋 있었는데 첩이 아들을 낳으면 <도리>가 질투를 하고

철기(鐵器)로 <세기>를 난타하여 <세기>는 일어나서 낭무(郞務)를 볼 수 없었다.

공이 노하여 <도리>를 잡아다 막 볼기를 치려 하는데 <도리>가 말하기를

" 첩의 죄가 비록 중하나 <효장曉長>과 <유장劉長>의 어미입니다.

국법에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 법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노하여

" 너의 죄는 곤장 3대에 해당하나 너의 말 때문에 곤장 3대를 더한다."라고 하고 그 치마를 내리고 묶었다.

<보량>이 간하여 말하기를

" 염부(廉父)가 알면 마음이 상할까 염려됩니다.

우리들이 어찌 지위로써 사람을 다스리고 도리어 불효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이 사람을 다스리지 않으면 많은 사람을 징계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이에 <세기>를 불러 꾸짖기를

" 사람의 지아비가 되어 처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너의 죄는 파면해야 마땅하다.

너의 처를 곤장치려 하였는데 화주(花主)가 중지시켰으니

마땅히 너를 파면함으로써 너의 처를 징계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도리>는 <세기>가 파면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 첩이 볼기를 맞을 것이니 지아비를 파면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부부의 의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만약 네가 <세기>를 나와 같이 섬기고 방자한 행동을 않는다면

당연히 볼기맞는 것을 면하고 너의 지아비를 보호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도리>가 이로써 그 지아비에게 굴복하여 방자함이 변하여 순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첩들에게 강새암을 하지 않았다.

그 밖에 다른 낭두의 처들도 모두 선(仙)을 믿고 지아비에게 방자할 수 없게 되었다.

낭두들이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 신주(新主)의 덕화가 안방까지 깊이 미쳤다." 라고 하고 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공은 실제로는 색을 좋아하여 낭두의 처들이 공의 아들을 많이 낳았으며

폐신 <찰의察儀>가 위로 <보량>을 범하는데도 금하지 않았다.

낭두들이 사사로운 정으로 많이 일어나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낭정(郞政)의 일이 전횡에서 많이 나왔다.

상선(上仙)들이 운상(雲上)에서 의논을 하고 3파가 막하(幕下)에서 다투었다.

공은 이에 <보량>에게

" 무리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파리를 쫓고 풀을 뽑는 것과 같다.

오래지 않아 통제함이 없어 질 것인데 어찌 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에 <보량>이 웃으며

" 낭군은 무리를 다스리는 데는 능하나 스스로는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공 또한 웃으며

" 누가 나의 처를 강새암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나는 낭정에서 물러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부제인 <군관軍官>에게 물려주며 말하기를

" 너는 능히 정중하여 자제력이 나보다 뛰어나다." 라고 하였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면서 오래 된 폐단을 개혁한 것이 많으니 어찌 공이 없다 하겠는가.

공의 사랑하고 미워함은 심히 치우쳐 마음 속에 성이 나면 종신토록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아랫 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공이 풍월주에 오를 때 <문충文忠>과 <선제善祭>등이 모두 부제의 지위를 다투었는데

공이 홀로 <염장>공의 아들 <윤장閏長>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윤장>의 누이 <춘화春花>가 공의 애첩이었으므로 <윤장>은 나이가 어리고

경박하여 총애를 믿고 법을 어기기를 여러 번 하였다. <염장>공이 명하여 부제를 그만두게 하였다.

<문충文忠>, <선제善祭>, <천진天眞>, <하장夏長> 등이 다시 부제 자리를 다투었다.

공이 홀로 <군관>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여러 상선(上仙)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명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 <보현>궁의 사손(嗣孫)이 부제가 되지 못한다면 곧 누가 될 수 있습니까?" 라고 하고

곧 그 첩인 <천운天雲>을 <군관>의 처로 삼아서 뜻을 공고히 하였다.

처음에 공과 더불어 <군관>의 누이 <명란明蘭>이 사통하였는데

공이 이미 <보량>을 아내로 맞이하였기에 <명란>이 <장명長明>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장명長明>이 공만 못하여 그 어머니 <석명昔明>을 원망하였다.

<석명昔明>은 곧 <양명良明>의 이부형(異父兄)이었다.

<군관>은 이에 <장명>을 설득하고 <명란>을 공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공은 이에 <군관>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겨 발탁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여 말하기를

" 남의 부인을 첩으로 삼고 중매한 자를 발탁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군관>이 침착하고 중후하고 커다란 지략을 가지고 있어

위아래를 다스릴 수 있었으니 공의 현명함이 어찌 <명란>에게 구애를 받았겠는가.

이로써 <군관>은 공을 받들기를 하늘과 같이 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서로 도왔다.

<군관>은 용기가 있어 전쟁을 잘 하였기에 공의 훈업 또한 <군관>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일찍이 당나라에 사신을 가다가 도중에 점쟁이를 만나 점을 친즉 말하기를

" 두 공은 모두 장상(將相)의 운을 가졌습니다. 단 비명에 죽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웃으며

" 대장부가 말가죽으로 송장을 싸야지 아녀자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당연하다." 라고 하였다.

공은 과연 당나라의 옥에서 죽었다.

<군관>은 점이 신통하게 맞는 것을 보고 소심해져서 조심하다가

마침내 <흠돌欽突>의 난에 연루되어 명을 받고 자살하였다.

아! 성하고 쇠하고 막히고 통달하고가 문득 또한 운명이구나!

 

공은 일곱 명의 아들과 ....명의 딸이 있었으며 서자녀는 각기 10여 명이 있었다.

<군관> 또한 공의 누이  2인을 아내로 맞아 아들 18인을 두었는데 <흠돌>의 옥사에 많이 연루되었다.

공의 처 <보량>은 공이 전사한 것으로 잘못 듣고 칼로써 자결하였다.

공의 세 아들과 두 딸은 절의 노비가 되었다. 대개 공의 가풍을 알 수 있다.

 

찬하여 말한다.

미실의 후예이고 진평의 손자이다.

나라를 위한 간성(干城)이 되어 공은 하늘과 땅을 덮었다.

어려움에 임하여 몸을 던졌고 만리에서 혼을 불러 장사지냈다.

대인은 기림이 없으니 천지와 더불어 남으리로다.

 

<世系>

<양도>의 아버지 <모종>의 아버지는 <하종>이고 어머니는 <미모美毛>,  양부(養父) <보종>의 아버지는 <설원>이다.

<양도>의 어머니 <양명>의 어머니는 <보명>인데 <지소>태후와 침신 <구진仇珍> 사이에서 태어났다.

<보명>은 아름답고 부드러워 향기가 있었다. 세 명의 帝를 섬겼으나 총애가 쇠하지 않았다.

진평제가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가 <보명>과 <미실>에게 명하여 帝를 도(導)하도록 하였다.

<미실>은 위가 낮고 골이 천하여 <보명>에게 상도(上導)를 양보하였다.

<보명>은 그때 <석명>을 가진 지 3개월이었기에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미실>이 먼저 잠자리 시중을 들었다.

帝는 양기(陽氣)가 통하게 되자 스스로 보명궁에 이르러 도(導)할 것을 구하였다.

<보명>이 감히 어길 수 없어 잠자리 시중을 들었다. 이 해 9월 帝는 <보명>과 <미실>을 좌.우후로 삼았다.

<보명.은 <석명>을 낳고 나서 3년간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양명>을 낳았다.

<양명>은 <보명>을 많이 닮았다. 그러므로 帝가 매우 사랑하여 늘 帝의 곁에 있었다. 

나이 20살이 넘어 <보종>공에게 시집을 가서 <보량>을 낳았다. 

28살에 <모종>공과 통하여 공을 낳았는데 보배로운 난새로 생각하여 어머니의 사랑이 더욱 깊었다.

공 또한 지극한 효성으로 종신토록 명을 어긴 바 없다.

 

 

 

 

23. 23세 풍월주(640-643) <군관軍官(613- ? )>

 

<군관軍官>공은 <동란冬蘭>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석명昔明>공주이니 진지제의 딸이다. <양도>공보다 세살이 적었다.

 

금륜(보명) - 석명(576?- )(동란) - 군관(613- )<23세 풍월주(640-643)>

백정(보명) - 양명(579?- )(모종) - 양도(610- )<22세 풍월주(637-640)>

 

인품이 넉넉하고 후덕한 것이 <지소>태후의 전형(典型)이 있었다.

15살에 활을 잘 쏘았고 힘이 세서 당할 자가 없었다.

병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릇이 크다고 하였다.

<석명>이 말하기를

" 내가 해마(海馬)의 꿈을 꾸고 이 아이를 낳았다. 반드시 우리 집의 천리구(千里駒)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양도>공을 따라 노는 것을 좋아하였다.

<석명>이 일찍이 진평의 후궁으로 있을 때 <양명>과 더불어 함께 살며

삼생의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아들을 낳으면 함께 아들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석명>이 <양명>에게

" 우리 자매의 마음을 이 아들이 꿰뚫었다."라고 하고는

공에게 명하여 <양도>공과 더불어 삼생 형제가 될 것을 약속하게 하였다.

<양도>공이 지위가 오르면 반드시 공을 자기가 있던 자리에 이끌어 앉혔다.

그 때 <윤장閏長> 또한 <양도>공의 사랑하는 아우로서 공과 나란히 경쟁하였는데

공은 스스로 그 세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일마다 <윤장>에게 양보하였다.

<윤장>은 공과 같은 나이인데 한 달이빨랐으므로 공은 형으로 섬겼다.

 

염장(하희) - 윤장(613- )

 

<윤장>은 색을 좋아하였고재물을 탐하였으며 종녀(宗女)나 유화와 간음을 많이 하였는데

여자의 사사로운 말을 듣고 죄없는 사람에게 허물을 씌웠다. 소문이 궁중에 퍼졌다.

<염장>공이 그것 때문에 대죄(待罪)하였다.

<양도>공이 이에 공을 이끌어 부제로 삼고 <보량>과 더불어 앙정을 함께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공은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고 한결같이 <양도>공의 마음 쓰는 법을 따랐다.

 

<보량>은 <양도>의 누나이다.

 

그 때 <양도>공의 폐신<찰의察儀>가 미모로 아양을 잘 떨어 <보량>과 내통하고 전횡을 많이 하였다.

공이 검을 뽑아 참하려 하자<찰의>가 낭하로 달려 들어가 나오지 못하였다.

<보량>이 말하기를

" 이 피라미를 죽이면 누(累)가 우리 부부에게 미칠까 걱정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찰의>는 감히 다시 낭정에 대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공의 성품은 주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사생활을 엿볼 수 없었다.

<보량>이 늘 " <군관>은 진정으로 우리 부부의 신하다." 라고 하였다.

선덕제가 일찍이 궁정의 연회에서 조용히 <보량>에게 일러 말하기를

" 듣건대 너의 폐아(嬖兒)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 아름다움이 과연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보량>이 대답하여

" 신이 듣건대 천자는 신하의 내사(內事)를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폐하가 굳이 물으신다면 신첩에게 한 명의 사신이 있으니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른 날 <군관>을 데리고 뵈었다.

대개 제(帝)의 뜻이 <찰의>에게 있었는데 <군관>을 뵈게 한 것이다.

제(帝)가 <군관>에게

"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무슨 재주가 있는냐?" 하고 물으니

<군관>이 답하기를

" 신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단지 마음 속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帝)가 " 네 마음 속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는가?" 라고 하자

<군관>이 말하기를

" 신은 <보량> 부처를 위하여 죽기를원하고

<보량> 부처는 폐하를 위하여 죽기를 원합니다.

소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帝)가 그 착함을 칭찬하며 음식을 내리고 <보량>을 보며 말하기를

" 네가 데리고 있는 한 아이가 나의 열 아이보다 낫다. 잘 기르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처음에 <염장>공의 누이 <천장天長>낭주는 <수품水品>공에게 시집가서

<천운天雲>을 낳았는데 <천운>은 경국지색이 있었다.

 

수품(천장) - 천운(614?- )

                    천광(616?- )

 

<천운>의 동생 <천광天光> 또한 얼굴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양도>공의 폐신이 되었다.

<양도>공이 마음으로 <천운>을 좋아하여 <천장>낭주에게 몸소 청하여 첩으로 삼고 사랑하여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보량>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공이 이에 처첩의 도로써 간하니 <양도>공은 <천운>을 공의 처로 삼도록 하였다.

공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천광> 또한 공에게 소속되었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양도>공이 <천광>을 부제로 삼으라고 명했다.

이에 공이 " 처의 동생을 이끌어 주었다는 여론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라고 하니

<양도>공이 말하기를

" 네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명령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부득이 <천광>을 부제로 삼고는 <천운>에게 말하기를

" 너는 화주가 되었고 너의 동생은 부제가 되었으니

낭도들이 반드시 내가 사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천운>이 웃으며

" 낭군 또한 주군의 첩의 동생이 아닙니까?

우리의 살갗 한 점, 머리털 한 오라기도 주군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찌 감히 주군의 명을 어길 수 있습니까? 낭군은 단지 조심하여 명을 받들면 됩니다.

그리고 <천광>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면 옳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 그대의 말이 옳다." 라고 하였다.

 

공은 풍월주로 4년간 재위하며 오로지 명 받드는 것을 주로 하여 한결같이 <양도>공의 구정(舊政)을 따랐으며

낭두를 쫓아내고 승진시킬 때 조그만 변화도 없이 부드럽게 지나갔다.

그런데 <양도>공의 낭정은 모두 <보량>에게서 나왔다.

<천운>이 비록 화주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빈 그릇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불평하는 낭도들이 노래를 지어 비방하기를

'<보량>의 문 안에는 사람이 구름같고 <천운>의 집 위에는 흰 구름이 지나간다.'라고 하였다.

<천광>이 매번 <보량>이 사사로움을 행하고 낭두들이 불평하는 실상을 말하면 곧 <천운>이 꾸짖어

" 네가 감히 은혜로운 주군의 흠을 말하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천광>은

" 그 은혜를 갚고자 하기 때문에 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군관>공이 천천히 위로하여 말하기를

" 네 누나의 견해와 나의 견해가 같다.

머지않아 네가 풍월주가 되면 네 마음대로 하겠지만

지금은 우리 부부의 흠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천광>은 감히 한 가지 일도 말하지 않았다.

공은 장엄하고 정중하며 큰 뜻이 있어 조그만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진노하면 천둥 번개가 이는 것 같았으나 마음은 실로 부드럽고 온후하여 부인을 감읍하게 할 수 있었다.

부부가 대단히 화목하여 역대의 풍월주들이 모두 낭두의 처와 딸들을 거느렸으나

공은 홀로 한 번도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이 노래하여 이르기를

'천운은 높고 높아 인간의 비가 되기 어렵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공과 양공(良公)이 모두 선덕제를 입시(入侍)하여

작위를 뛰어넘어 받았기 때문에 식자들이 그것을 잘못으로 여겼다.

 

찬하여 말한다.

<보현>공주의 후손이고 금륜왕의 손자이다.

<양도>공에게 한결같이 의지하였고 생사도 같은 근본이다.

빛나는 공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원통함을 머금었다.

오호! 푸른 하늘이여, 이 무슨 업의 뿌리인가.

 

보현(482- )(모진) - 사실(입종) - 오종(비란) - 오란(동종) - 동란(석명) - 군관

                                                                       금륜(보명) - 석명(동란) - 군관

 

<世系>

아버지는 <동란冬蘭>이고 할아버지는 <동종冬宗>이다. 증조는 <오종五宗>이다.

<오종>공은 <사실梭失>공주의 아들이다. <보현>공주가 어렸을 때 법흥대제와 사랑하여 <사실>공주를 낳았다.

법흥대제가 <사실>을 <입종>공에게 시집 보내어 <오종>공을 낳았다. <오종>공은 곧 진흥대제의 배다른 형이다.

<오종>이 <비차부>의 딸 <비란比蘭>을 아내로 맞아  딸 <오란五蘭>을 낳고

<황종荒宗>공의 아들 <동종>을 데려다 아들로 삼아 <오란>을 배필로 삼게하여 <동란>을 낳았으니

공은 실로 <보현>과 <사실>의 적사(嫡嗣)이다.

<석명>공주가 처음에 진평제를 섬겨 두 딸을 낳고 출궁하였다.

<동란>공은 그 때 음성서(音聲署)의 장(長)으로 향가를 잘 하였다.

<석명>이 <동란>공에게 가무를 배웠다. 마침내 서로 사랑하여 딸 <석란>을 낳았다.

帝가 허락하여 혼인을 하였으나 <동란>공은 감히 처로 대하지 못하고 군(君)으로 섬기며 자녀를 계속 낳았다.

공은 그 네번째이다. <석명>의 어머니는 <보명>인데 금륜제를 섬겨 현조(玄鳥)에 대한 꿈을 꾸고 <석명>을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황종>의 증손이고 <구진仇珍>의 외예(外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