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

화랑세기(花郞世紀) 完譯(6)

지보고 2023. 12. 6. 10:49

 

 

13. 13세 풍월주(596-603) <용춘龍春(578-647)>

 

풍월주 <용춘龍春>공은 무술년(578)생이고 병진년(596)에 낭주가 되었다.

<용춘>공은 <금륜>왕{진지대제}의 아들이다.

 

금륜(지도) - 용수(573?- )

                    용춘(578-647) <13세 풍월주 (596-603)>

 

어머니는 <지도智道>태후인데 곧 <기오起烏>공의 딸이다.

<기오>공은 <선혜>황후의 사자(私子)로  <사도>태후의 포매 <흥도(興道> 낭주를 아내로 맞아 <지도>를 낳았다.

 

영실(옥진) - 사도(534- )

입종(옥진) - 흥도(537- )(기오) - 지도(555?- )(금륜) - 용춘(578-647)

선혜(홍기) - 기오(499- )

 

<지도>가 처음 <동륜>태자궁에 들어 갔을 때 태자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금륜>태자와 더불어 사통하였다.

<동륜>태자가 죽자 총애가 더욱 도타워졌다.

<금륜>태자가 즉위하자 황후가 되어 공을 낳았다.

 

공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였으며 ....를 좋아하였고 탐욕스럽고 방탕한 놀이에는 끼이지 않았다.

잔평대왕이 그 ....를 기특하게 여겨 ....공을 지도하게 하였다.

<이화>와 <문노>의 학(學)을 얻어 ....의 도(道)를 잘 하였다.

공의 손위 누이인 <용명龍明>공주는 곧 진흥의 딸이다.

 

삼모진(지도) - 용명(571?- )

 

진평을 섬겨 총애가 있었다.

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공의 형 <용수龍樹>전군은 혹은 <동륜>태자의 아들이라 하고

혹은 <금륜>태자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 진실은 알 수 없다.

전군열기(殿君列記)에 이르기를 공은 곧 <용수> 갈문왕의 동생이다.

금륜왕이 음란함에 빠졌기 때문에 폐위되어 유궁에 3년간 살다가 죽었다.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금륜(552-582)

 

공은 아직 어려 그 얼굴을 몰랐다.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사도}의 명으로 다시 신왕{진평대제}을 섬기자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엾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

자라자 곧 슬퍼하며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庶弟) <비형鼻荊>랑과 함께 낭도를 모았다.

그렇게 하자 대중이 따랐고 3파가 모두 추대하고자 하였으므로 <서현>랑이 지위를 물려 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3세 풍월주가 되고 <호림虎林>공을 부제로 삼았다.

공은 곧 낭도의 구습(舊習)을 고쳤다.

한결같이 인재를 뽑는데 골품에 구애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 골품이란 것은 왕위와 신위를 구별하는 것이다. 낭도에 골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의 원칙이다. 어찌 피로써 다스리겠는가?" 라고 하였다.

무리들이 크게 화합하여 말하기를

" <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졌다." 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미생>공은 많은 폐첩(嬖妾)이 있었다.

9부 낭두들이 모두 첩을 통하여 청탁을 하였다.

그러므로 다투어 그 딸을 바치고 청탁을 하여 화랑과 맺어진 낭도들을 이름하여 신선골(新仙骨)이라 하였다.

<보리>공이 염려하여 3파를 섞어 등용하고 그 세력을 고르게 하였는데 이름하여 균등(均登)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공이 있는 자라도 만약 균등에 걸리면 진급을 시키지 않았다.

 

그 때 <대남보大男甫>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용감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급인지풍(急人之風)이 있어 무리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그런데 선골(仙骨)의 품이 없고 또한 균등의 힘이 없었다.

어떤 이가 <대남보>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 그대의 딸이 아름다운데 어찌 신주(新主)에게 바치고 골품을 얻지 않는가?" 라고 하니

<대남보>가 말하기를

" 우리 무리는 천인인데 어찌 감히 여색으로 풍월주를미혹할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공이 듣고 그 말을 기특하게 여겨 낭두별장을 불러 묻기를

" 대남보의 재능이 낭두가 될 만 한가?" 라고 하니

답하기를

" 될 만 합니다. 그러나 골품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묻기를

" <대남보>의 공은 어떠한가?" 라고 하니

답하기를

" 풍월주를 모신 같은 낭도로서 출정한 바 있는데

대상(對上)이 아직도 승진하지 못했습니다.따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대상이 누구인가?" 하고 묻자

답하기를

" <조심보曺心甫>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또 묻기를

" <조심보>가 <대남보>보다 공이 큰가?" 라고 하니

답하기를

" <조심보>는 비록 공이 없으나 <대남보>의 대상입니다.

만약 <대남보>를 승진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조심보>를 승진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3파 균등의 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재능이 없는 자를 재능이 있는 자의 대상으로 삼아 재능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지 않는 것은 재능을 장차 썩이는 것이다.

골(骨)과 파(派)가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하고는 <대남보>를 세 번 승진시켜 낭두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불평하는 자들이 상선(上仙)을 찾아가 바로 잡으려하였다.

<문노>공이 말하기를

" 법이 점점 더 날로 새로워지고 우리들은 모두 늙었는데 어찌 신주(新主)를 괴롭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생>공 또한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습이 고쳐졌다.

 

<대남보>의 딸은 공을 위하여 스스로 정절을 지키고 유화(遊花)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공이 딱하게 여겨 여러 차례 말하였으나 안 되었다.

<대남보>가 말하기를

" 한 명의 여자로 인하여 어찌 공께서 걱정하실 수 있습니까?"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내가 너를 사사롭게 대한다고 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딸이듣고 슬퍼하여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낭두 등이 이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공에게 절하고 말하기를

" 이같이 이르도록 만든 것은 신들의 잘못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마지 못하여 거두었다.

그 날로 <남보>를 해직하고 말하기를

" 부녀가 한 사람을 섬길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남보>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 나를 알아 주면 충분합니다. 어찌 모름지기 지위를 논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가 이를 듣고 곧 <남보>를 등용하여 공의 궁사지(宮舍知)로 임명하여 재용(財用)을 관장하게 하였다.

<남보>는 원래 부유하였는데 그 재물을 모두 기울여 공이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결사대 백 명을 모아서 공을 호위하였으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공이 하루는 종자들과 더불어 미복으로 거리를 지나는데 어린아이들이 노래하여 부르기를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이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치고 가난해져

세 아들이 모두 베옷을 입었다네

 

라고 하였다. 공이 물었으나 종자들이 말하지 않았다.

 

<남보>의 집에 이르자 그 처와 세 아들이 삼을 쌓아 놓고 손으로 껍질을 벗기고 있다가 공을 보자 그것을 숨겼다.

공은 이에 종자들이 바른대로 말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다.

종자들이 복종하여 말하기를

" 당두의 일곱 아들은 모두 영달하였는데 남보의 세 아들은 모두 천한 까닭에 거리에 이 노래가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오래동안 슬퍼하다가 말하기를

" 나의 잘못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그 장자 <학열郝熱>을 승부(乘府)에 천거하여 오지(烏知)를 주었고

다시 그 두 동생을 <호림>공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 <남보>는 나를 위하다가 가난해졌다.

나는 장차 지위를 물려줄 것이다. 그대는 그들을 낭두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자 모두 등용하여 낭두로 삼았다.

<남보>는 그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다.

세 아들은 모두 충절을 숭상하였다.

건복 20년(603) 공과 <비보>랑이 제를 좇아 한수(漢水)의 전쟁에 나갔다.

<남보>에게 공으로 대나마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 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공의 형 <용수龍樹>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 주려 하였다.

이에 전군이 공에게 의견을 물으니 공이 답하기를

" 대왕의 춘추가 한창 강성할 때인데 혹시 왕위를 이으면 불행할까 염려됩니다." 라고 하였다.

전군은 이에 사양하였으나 <마야摩耶>황후가 들어 주지 않고

마침내 전군을 사위로 삼았으니 곧 <천명天明>공주의 남편이다.

 

지소(515- )(영실) - 황화(541?- )(복승)- 마야(567?- )(백정) - 천명(583?- )

 

이보다 앞서 공주는 마음 속으로 공을 사모하여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 남자는 용숙(龍叔)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동륜(만호) - 백정(마야) - 천화(581?- )

                                        천명(583?- )

                                        호명(585?- )

                                        덕만(587?- )

금륜(지도) - 용수(573?- )

                    용춘(578-647)

 

용수와 용춘은 천명과 덕만의 작은 집 삼촌이다.

 

황후가 <용수>로 생각하여 시집을 잘못 보냈던 것이다.

공주는 이에 공에게 말하기를

" 첩이 본래 그리워한 사람은 곧 그대입니다." 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 가정의 법도는 장자가 귀한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형과 같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주는 공을 더욱 사랑하여 제에게 공의 처지를 떠받쳐 주게 하였고

여러 차례 공의 관계(官階)를 승진시켜 지위가 <용수>공과 같게 하였다.

<용수>공이 공주의 뜻을 알고 공주를 공에게 양보하려 하였으나 공이 힘써 사양하였다.

<마야>황후가 밤에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을 불러 공주와 함께 묵도록 하였다.

<용수>공 또한 늘 병을 칭하고 공에게 공주를 모시고 공주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스스로 게으르거나 방자한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대궐에서 더욱 신임을 받았다.

 

<호림>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자 조정에 들어 가 요직에 있었는데

대사(大舍)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들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로써 낭도로 등용돤 자들이 또한 공을 심히 존중하여 모두 목숨 바치기를 원하였다.

 

선덕(善德)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은 왕위를 이을 만 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마야> 황후가 죽은 해는 600년 경이다.

 

그러므로 대왕은 공을 마음에 두고 공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성으로 순종하였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을 하였다.

<선덕>은 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私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공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되었는데 과연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그 때 <승만僧滿>황후가 ..... 아들을 낳자,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하였는데 그 아들이 일찍 죽었다.

<승만>은 공의 형제를 미워하였다. 공은 이에 지방으로 나갔다.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승진하여 각간에 봉해졌다.

<용수>전군이 죽기 전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맡겼다.

그 아들은 곧 우리 태종황제이고 부인은 곧 <천명天明>공주이다.

 

용수(천명) - 춘추(603-661. 29대 태종 무열왕 재위 654-660)

 

처음에 <용수>공은 <천화天花>공주를 아내로 맞았는데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게되자 <천화>공주를 공에게 주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선덕>공주를 모시게 되자 제가 <천화>공주를 <백룡白龍>공에게 내려 주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하자 공을 지아비로 삼았는데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 날 것을 청하였다.

 

선덕공주가 즉위한 해는 632년이다.

 

군신들이 이에 삼서(三婿)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欽飯>공과 <을제乙祭>공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공은 본디 <금륜>이 색에 빠져 폐위 된 것을 슬퍼하였고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政事)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기를 허락하였다.

공은 <천명>공주를 처로 삼고 태종{춘추}을 아들로 삼았다.

 

이에 앞서 왕명으로 <호명昊明>궁에 살며 딸 다섯을 낳았고 달리 적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태종을 아들로 삼은 것이다.

서자는 다섯인데 <용산龍山>과 <용석龍石>은 <대씨大氏>가 낳았다.

<용귀龍貴>는 <미생>공의 딸 <매생梅生>이 낳았다.

<용주龍珠>와 <용릉龍凌>은 비보랑공의 딸 <홍주紅珠>가 낳았다.

 

용춘(대철) - 용산

                    용석

                    용태(춘추) - 인태

용춘(매생) - 용귀

용춘(홍주) - 용주

                    용릉

                    용보(춘추) - 거득

                                        마득

 

서녀는 18명이었다.

<용산>의 누이 <용태龍泰>는 태종을 섬겨 <인태仁泰> 각간을 낳았다.

<용주>의 누이 <용보龍寶>는 태종을 섬겨 <거득車得>과 <마득馬得> 양 공을 낳았다.

공은 청렴하고 담백하여 색을 멀리 하였는데 자손이 저절로 창성하였다.

사람들이 덕이 있는 사람은 창성한다고 말하였다.

나머지 자손을 다 기록하지 않지만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다.

 

공은 만년에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

<천명>, <호명> 양 궁과 더불어 산궁(山宮)에 술상을 차려놓고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탔다.

시첩 다섯이 온화한 모습으로 받들어 섬겼다.

태종은 효성을 극진히 하여 안락하게 모셨다.

태화 원년(647) 8월 세상을 떠나니 나이 70이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갈문왕으로 추존하였다.

아, 성대하다!

공의 성스러운 덕은 하늘과 같고 땅과 같아 영원히 다하지 않을 것이다.

 

賛曰葛文之徳日月并明三韓之業願以大成

찬하여 말한다.

갈문왕의 덕 일월과 아울러 밝고 삼한의 업이 힘입어 크게 이루어지도다.

 

<世系>

아버지는 <금륜>대왕이고 어머니는 <지도>황후이다.

<금륜>의 아버지는 진흥대제이고 어머니는 <사도>태후이다.

<지도知道>의 아버지는 <기오起烏(499- ? )>각간이고 어머니는 <흥도興道(537- ?)>인데,

<흥도>는 <영실>공의 딸이며 곧 <사도>태후의 포매이다.

<기오>는 아버지 <홍기洪起(461- ? )>가 신궁봉사가 되어 신궁황신<선혜善兮(459-518)>황후와 사통하여 낳았다.

<홍기>의 아버지는 <보기寶器(443-511)>이고 어머니는 <수리首理>이다.

<보기>의 아버지는 <보신寶信(421-485)>이고 어머니는 <황아皇我(418-483)>이다.

<보신>의 아버지는 <미해美海(393-433)>이고 어머니는 <보미寶美(404-485)>이다.

 

<大元神統>

<보미>는 대원신통의 대원(大元)이다.

<황아>는 눌지왕의 딸이고 그 어머니는 <치술>공주인데 실성왕의 딸이다.

<제상>공에게 시집을 가서 삼아(三我)를 낳았으나 <제상>공이 장차 멀리 떠나려 하자

장사(長沙)에 드러누워 오랫동안 크게 울며 일어나지 않았다.

왕이 불러 궁중으로 들여 색도(色道)로써 위로하니 마침내 <황아>를 낳았다.

그러므로 <미해>공이 눌지왕에게 청하여 <보신寶信>공의 배필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보미>가 <미해>공의 말을 따를 것을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그런데 <보신>이 어린 까닭에 <황아>는 왕의 총신과 더불어 음란하여 <벌지伐知>와 <덕지德知> 양 공을 낳았다.

그러므로 <보기>공은 실제는 양 공의 동복아우이다.

<황아>는 <치술>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양 공에게는 무에 힘쓰도록 명령하고

<보기>공에게는 의(醫)에 힘쓰도록 명하였다.

<선혜>후의 천주사가 발생하자 <보기>공은 태의로서 후를 보호하여 욕을 당한 일이 없이 재난이 그쳤다.

그 까닭에 후가 <홍기>를 봉사(奉事)로 삼아 <기오>공을 낳았다.

아마 <홍기>의 노력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14. 14세 풍월주(603-612) <호림虎林(579- ?)>

 

虎林者福勝公子也 母曰松花公主只召太后女也 或曰公乃公主私子故未詳 其父或曰秘宝郎子也

<호림虎林>은 기해년(579)생이고 계해년(603)에 풍월주가 되었다.

<호림>공은 <복승福勝>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화松花>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혹 말하기를 "공주의 사자(私子)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잘 알 수 없다" 하고 혹은 <비보>랑의 아들이라고 한다.

 

복승(송화) - 호림(579- ) <14세 풍월주(603-612)>

 

公多勇力好撃劍 早入文弩之門 率倹自居不以骨品自高

공은 용력이 많고 격검을 좋아하여 일찍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다.

검소하게 지냈으며 골품으로 뽐내지 않았다.

 

公之嫡兄摩耶夫人 時以皇后有寵 竜春公乃擢為副弟 至是為十四世乃真骨統也

공의 누나 <마야>부인은 그 때 황후로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이 부제로 발탁하였다.

이에 이르러 공은 14세 풍월주가 되었으니 곧 진골정통이다.

 

복승(황화) - 마야(567?-600?)

 

公熱心清直散財施衆 時人称以脱衣地蔵

공은 마음가짐이 청렴하고 곧았으며 재물을 풀어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탈의지장(脫衣地藏)이라고 불렀다.

 

公謂郎徒曰 仙仏一道也 花郎亦不可不知仏也. 如我弥勒仙花菩利沙門皆吾師也.

공은 낭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 선불(仙佛)은 하나의 도(道)다. 화랑 또한 불(佛)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미륵 선화(仙花)와  <보리> 사문 같은 분은 모두 우리들의 스승이다." 라고 하였다.

 

公乃就菩利公受戒 以此仙仏漸相融和.

공은 곧 <보리>공에게 나아가 계를 받았다. 이로써 선불(仙佛)이 점차 서로 융화하였다.

 

公初娶文弩公女早卒 再娶夏宗公女柔毛娘主. 時美室宮主春秋已高極愛娘主願見貴子.

공은 처음 <문노>공의 딸 <현강玄剛>낭주를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었다.

 

문노(윤궁) - 현강(586?-605?)

 

<하종>공의 딸 <유모柔毛>낭주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다.

 

하종(미모) - 유모(584?- )

 

그 때 <미실>궁주의 나이가 많았는데 낭주를 매우 사랑하여 귀한 아들을 보기를 원하였다.

 

605년경 미실의 나이는 59세이다.

 

命公造千部観音 而祷子乃生善宗郎 長為律家大聖人.

공에게 명하여 천부관음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게 하였다.

이에 <선종善宗>랑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律家)의 대성인이 되었다.

 

호림(유모) - 선종(605?- )

 

公崇仏益重 乃譲位于庾信公自号茂林居士.

공은 부처를 숭상함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유신>공에게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茂林)거사라 불렀다.

 

不干朝廷然国有大事必奉之 而問与.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어 물었다.

 

閼川公等作七星友.

<알천閼川>공, <임종林宗>공, <술종術宗>공, <염장廉長>공, <유신庾信>공, <보종寶宗>공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에서 만나 놀았다.

 

숙흘종(보리) - 알천(580?- )

복승(황화) - 임종(570?- )

천주(지도) - 염장(586-648)

서현(만명) - 유신(595-673)

설원(미실) - 보종(580- )

복승(송화) - 호림(579- )

 

統一之業多従公等始焉. 盛矣至矣.

통일의 기초가 공 등으부터 비롯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賛曰 太后之孫 真骨之流 福入仏仙共垂千秋

찬하여 말한다.

태후의 손이고 진골 정통의 무리이다.

복되게 불선에 들어갔으니 공이 천추에 드리웠다.

 

<世系>

아버지는 <복승>인데 <산종山宗>공의 아들이다.

<산종>공이 법흥의 딸 <사도미沙道美>를 아내로 맞아 낳았다.

<산종>공은 곧 법흥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이다.

<산종>의 아버지는 <비처>대왕이다. 그러므로 공은 비처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이고, 그 아버지는 <영실>각간으로 <지소>태후의 계부가 되어 낳았다.

따라서 공은 <지소>태후의 외손이 된다.

<사도미.의 어머니 <사룡沙龍>은 <사량沙梁>궁주의 손(孫)이다.

 

 

 

 

15. 15세 풍월주(612-616) <유신庾信(595-673)>

 

庾信公者舒玄角干之子也. 母曰万明夫人即万呼太后私女也. 父曰粛訖宗亦立宗葛文王之子也.

<유신庾信>공은 <서현舒玄>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萬明>부인인데 곧 <만호萬呼>태후의 사녀(私女)이다.

아버지는 숙흘종인데 또한 입종 갈문왕의 아들이다.

 

서현(만명) - 유신(595-673)<15세 풍월주(612-616)>

입종(금진) - 숙흘종(536?- )

숙흘종(만호) - 만명(573?- )

 

初万明与舒玄野合而有娠. 太后以舒玄大元流欲不許.

처음 <만명>과 <서현>이 야합하여 임신하였는데 태후는 <서현>이 대원신통이기 때문에허락하지 않았다.

 

乃逃万弩凡二十月而生多有夢祥

이에 만노(萬弩)로 도망하여 무릇 스무 달 만에 낳았는데 꿈의 상서로움이 많았다.

 

真平大王以私妹受苦封舒玄公于万弩

진평대왕은 사매(私妹)가 괴로움을 받자 서현공을 만노(萬弩)에 봉하였다.

 

동륜(만호) - 백정{진평대왕}(567-631)

 

公 既長有天日之表. 太后欲見之許帰 而見之喜曰 是真吾孫也. 以是加耶派遂奉之.

공은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

태후가 보고 싶어하여 돌아 올 것을 허락하여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 참으로 나의 손자다." 라고 하였다. 이로서 가야파가 마침내 받들었다.

 

虎林公副弟 宝宗公者 美室宮主末子也. 父曰薛原. 以公有衆望譲其位

<호림>공의 부제 <보종>공은 <미실>궁주의 막내 아들인데 아버지는 <설원>이었다.

공이 중망(衆望)이 있다고 하여 그 지위를 양보하였다.

 

설원(미실) - 보종(580- )

 

그 때 공의 나이가 15살 이었는데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

가야파의 낭도로서 승진하기를 탐하는 자가 말하기를

" 어른께서는 가야 정통으로 어찌 저를 사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 나는 곧 태후의 손자인데 네가 무슨 말을 하는가. 또한 대인은 사애(私愛)를 하지 않는다.

공이 있으면 비록 미천하여도 승진을 할 것이다. 어찌 공을 세우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낭도는 크게 부끄럽게 여기며 물러났다.

어떤 이가 고하기를 그 낭도가 장차 배반할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 옳지 않으면서 붙는 것은 배반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지만 그 낭도가 승진을 탐하는 기색으로 보아 반드시 공을 세울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후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이로써 능히 각 도(徒)를 화합하였다.

공은 늘 낭도에게 이르기를

" 우리나라는 동해에 치우쳐 있어 삼한을 통일할 수 없다. 이것이 부끄럽다.

어찌 구차하게 골품과 낭도의 소속을 다투겠는가?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면 곧 나라에 외우(外憂)가 없을 것이니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잊으면안 된다." 라고 하였다.

무리가 공에게 몸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공은 이에 지혜와 용기가 있는 낭도를 뽑아서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고

고사(高士)들과 힘써 결속을 맺었으며 중악(中岳)에 들어가 노인에게 비결을 받았다.

신변에는 늘 신병(神兵)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 주겠다고 청하였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다.

 

이때 <유신> 18세이다.

 

태후가 하종공의 딸 <영모令毛>를 아내를 맞도록 명하여 <미실>궁주를 위로하려고 하였다.

 

이때 태후 <만호> 57세이고 미실궁주 66세이다.

 

<영모>는 <유모柔毛>의 동생이었다.

 

하종(미모) - 유모(584?- )

                    영모(590?- )

 

형제가 모두 선화(仙花)의 아내가 되었다.

 

<유모>는 <호림>의 아내, <영모>는 <유신>의 아내이다.

 

그 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곧 건복(建福) 29년(612) 임신년이었다.

 

공이 풍월주의 위에 오르는 날 낭도들과 더불어 병장기를 만들고 궁마를 단련하였다.

 

<용춘>공이 이에 사신(私臣)으로 발탁하였다.

공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기로 맹세를 하고 따랐다.

<용수>공 또한 그 아들을 맡기니 공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 우리 <용수>공의 아들은 삼한의 주인이다." 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공주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용춘>공은 왕의 남편이 되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한 해는 632년이다.

이때 유신 38세, 춘추 30세, 선덕여왕 덕만 50세, 용춘 55세이다.

 

공이 <춘추>공에게 말하기를

" 바야흐로 지금은 비록왕자나 전군(殿君)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춘추>공은이에 공의 누이 <문희文姬>를 아내로 맞았고 공의 부제가 되었다.

 

서현(만명) - 유신(595-673)

                    흠순(599-680)

                    보희(601?- )

                    문희(603?- )

                    정희(605?- )

 

<춘추>가 <문희>를 아내로 맞이한 해는 625년경이다.

 

이보다 앞서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기 전에 공에게 양보를 하였다.

따라서 대원파가 불평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은 이에 풍월주의 위를 보종공에게 물려 주었다.

열국을 순행하여 뜻과 기개가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삼한을 통합하였다.

공의 사업과 공덕은 모두 사책(史冊)에 있으므로 생략한다.

 

찬하여 말한다.

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의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하여 우리 동방의 질서를 바로잡아 통치하니 혁혁한 공명은 해와 달과 아울러 함께 할 것이다.

 

<世系>

아버지는 <서현>각간이고 할아버지는 <무력武力>각간이며 증조는 <구충仇衝>대왕이고 고조는 <겸지鉗知>대왕이다.

<겸지>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나라의 골품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우리나라 조정에 복종하여 따랐다.

<겸지>왕 원년(492) 왕의 조카 <납수納水>공이 우리 <덕지德知>공의 딸 <계황桂皇>을 아내로 맞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왕 또한 우리나라 여자를 원하였는데 왕의 어머니 <방원邦媛>이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왕의 아버지 <질지銍知>대왕이 영명하여 선정을 베풂으로써 금관이 잘 다스려졌다.

<질지>는 <백흔>공의 손아래 누이<통리通里>를 왕후로 삼았다. 곧 <미해>공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제상>공의 장녀 <청아>이다.

서로 매우 사랑하였는데 일찍이 아들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통리>는 이에 <백흔>공의 딸 <하희河喜>를 데려다가 첩으로 삼았는데 또한 딸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얼마 안 있어 <통리>가 아들 <선통善通>을 낳으니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선통>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는데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비를 만나 사간 <김상金相>의 집에 들어갔다.

<김상>은 <좌지>왕의 외손이었다. <김상>의 딸 <방원>은 교태에 능하고 아름다웠는데 <선통>을 유혹하여 사통하였다.

1년 남짓하여 딸을 낳으니 <통리>가 듣고 거두어 태자비로 삼았다.

얼마 안 있어 <통리>와 <선통>이 모두 죽었다. <질지>가 이에 <방원>을 왕후로 삼았다.

이에 앞서 <방원>은 <질지>와 밀통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아들 <겸지>를 낳았다.

그러므로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왕후로 삼은 것이다. <방원>은 ....를 좋아하였다.

<질지>는 늙어 정치를 다스리지 않았다. (신라)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이 때문에 <방원>은 우리나라를 원망하여 <겸지>가 우리나라에서 아내를 맞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겸지> 10년에 <방원>이 죽었다.  <겸지>왕은 이에 <납수>공을 보내어 청혼하였다.

조정에서는 <출충出忠>각간의 딸 <숙씨淑氏>를 허락하여 보냈다.

<겸지>는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왕후로 삼고 <구충>을 낳았다.

<구충>은 <계봉>의 딸 <계화桂花>를 아내로 맞아 <무력>과 <무득>을 낳았다.

모두 우리나라에 왔는데 조정에서 예로써 대접하였다.

<무력>은 진흥제의 딸 <아양阿陽>을 아내로 맞아 <서현>을 낳았다.

<서현>은 <만호>태후의 딸 <만명>을 아내로 맞아 (유신)공을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진골, 대원, 가야 3파의 자손이다.

금관가야는 수로 청예왕에서 비롯하였는데 황룡국의 여자 <황옥>을 아내로 맞아 <거등居登>을 낳았다.

<거등>은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을 아내로 맞아 <마품馬品>을 낳았다.

<마품>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를 아내로 맞아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는 아궁(阿躬) 아간의 손녀 <아지阿志>를 아내로 맞아 <이품伊品>을 낳았다.

<이품>은 사농경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을 아내로 맞아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는 색을 좋아하여 각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도령(道寧) 아찬의 딸 <복수福壽>를 보내어 아들 <취희吹希>를 낳자

<좌지>가 크게 기뻐하여 정후(正后)로 삼았다.

금관에서 우리나라 여자를 왕후로 삼는 것이 이로써 비롯하였다.

<취희>가 왕위에 오르자 <복수>는 태후로서 집정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다,

금관이 또한 우리나라에 많이 왔으며 사이좋게 친한 관계가 점점 깊어졌다.

<취희>는 우리나라 <진사進思> 각간의 딸 <인덕仁德>을 아내로 맞아 <질지>를 낳았는데 곧 공의 5세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