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麗濟전쟁(고국원제 vs 근초고대왕)

지보고 2023. 11. 3. 09:51

 

318년 일본 열도(列島)의 야마토에 정착한 숭신왕(의라)을 몰아내고,  야마토는 <계契(295?-358)>에게 맡긴 후

333년 열도(列島)의 동정(東征)을 마지막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야마토 타케루(倭建命, 日本武尊)란 이름을 남기고

대륙으로 건너 온 백제 비류(比流)왕의 아들 <여구餘句(295-375)>는 대륙의 한성(漢城, 위례성)에서

前燕의 <모용황(297-348)>과 고구려의 고국원제 <사유斯由,釗(311-371)>와 더불어 하북의 패권을 다투게 된다.

 

342년 高燕전쟁을 승리로 이끈 <모용황>은 344년에 우문 선비를 멸하여 병합하고,

345년에는 고구려의 남소를 함락시켰으며,

346년 무렵에는 서부여를 침공하여 부여의 호족들을 낙랑과 대방지역으로 이주케 한다.

모용황의 서부여 침공을 막지 못한 계왕은 왕위에서 물러나고 <여구餘句>가 제위에 오른다. 

 

고구려와 우문국의 정벌을 마친 <모용황>은 중원으로의 남하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황>은 348년 52세의 나이에 수렵 도중 낙마하여 사망한다.

 

모용황의 사후 <모용준>은 354년에 계성(薊城, 今 보정시 당현)으로 천도하고

357년애는 중원을 도모하려 한단(邯郸)의 업성(鄴城)으로 다시 천도한다.

 

고구려 고국원제와 백제 근초고대왕의 려제(麗濟)전쟁을 통설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한다.

 

이 당시 하북의 정세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그림 1. 371년 麗濟전쟁시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의 한성(위례성)

 

 

고국원제 4년{AD334}갑오,

추8월에 평양성을 늘려짓고, 환도에 새 궁전을 지었다.

이 해 10월, 후조의 <석호>가 <석홍>을 죽이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석륵>의 피붙이를 모조리 척살하였다.

<모용황>이 이복형인 <모용한慕容翰>의 처를 빼앗자, <모용한>은 <단>씨에게로 도망하였고,

<모용인>은 <모용황>의 죄를 들먹이며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어 청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황>은 대노하여 11월에 자신이 나서서 양평(襄平)을 쳐서 차지하였고,

요동의 큰 성씨 집안들을 극성(棘城)으로 옮겼고, <두군杜羣>을 요동의 상(相)으로 삼았다.

이에 <모용인>은 신창(新昌)을 습격하여 <왕우王寓>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334년 <모용황>이 요동성을 차지한다.

 

고국원제 5년{AD335}을미,

이 해 9월에 <석호>가 업(鄴)에 도읍하였다.

 

335년 後趙의 <석호>가 한단의 업성(鄴城)을 수도로 삼는다.

 

고국원제 6년{AD336}병신,

춘정월, <모용황>이 려(黎)에서 동쪽으로 얼음이 언 물을 건너서 행군하여

동생인 <모용인>을 습격하여 평곽(平郭)에서 잡아 죽였더니,

<동수佟壽>・<곽충郭充> 등이 <뉴벽紐碧>{평곽태수}에게로 도망하여 왔다.

왕은 <모용황>이 쳐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상도尙道>를 동진(東晉)에 보내서

<모용황>이 동생을 죽이고 형수와 놀아난 죄를 송사하였으나,

진(晉) 사람은 <모용황>을 두려워하여 감히 죄를 논하지 않았다.

 

이 때 도망 온 <동수佟壽(289-357)>의 이름이  황해도 안악 3호분에 묵서명으로 남아있다.

 

고국원제 8년{AD338}무술,

 

조연(趙燕)전쟁이 일어 나 <모용황>이 범성(凡城. 今 보정시 순평현)까지 진출 함.

 

고국원제 9년{AD339}기해,

정월, <모용황>이 대거 쳐들어오자, 신성(新城) 성주 왕자 <인仁>이 성을 버리고 물러났다.

<고희高喜>에게 서부의 병력을 끌고 가서 구하라 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5월, 왕의 동생 <민玟>을 신성으로 보내 <모용황>과 화친을 약속하고

평곽 태수 <오충烏忠> 등을 인질로 하게 하였다.

<모용황>이 <봉추封抽>와 <송황宋晃>을 내놓으라고 심히 급하게 굴어서, 이들을 도피하게 하였다.

가을 9월, <고수高穗>를 <모용황>에게 보내서 표피와 황금을 뇌물로 주고 <민玟>을 돌려달라고 청하였다.

겨울 10월, <방상方象>이 남소(南蘇)를 지켜냈고, <우성牛成>이 신성(新城)을 지켜냈다.

11월,< 민玟>이 <모용황>의 홀로된 여동생과 혼인하여 돌아왔는데, <모용황>에게 왕녀 3인을 보내주길 청하였다.

<담기談奇>에게 명하여 왕의 딸 <두豆>씨와 <삭朔>씨 및 왕의 여동생 <절折>씨를 <모용황>에게 데려다 주게 하였다.

<송황宋晃> 등을 무이속국(撫夷屬國)의 직을 주어 낙랑대방 땅으로 보냈다.

 

신성(新城)은 옛 개마국의 하양성이 물가에 있어 지키기 어려워 새로 쌓은 성으로 남소의 서남쪽, 안평의 북쪽에 있었다.

목저성, 남소성, 신성은 고구려의 환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고국원제 10년{AD340}경자,

2월, 왕의 동생 <민玟>과 세자 <성珹>을 <모용황>에게 보내서 백양 3천두를 뇌물로 주었더니,

<모용황>이 <오충烏忠>과 <조문祖文>을 돌려보내주었다.

가을 7월, 환도의 장안궁(長安宮)이 완성되어, <주周>태후의 행궁으로 삼았다.

<모용황>은 흑룡과 백룡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부비며 사귀다가 용산(龍山)에 뿔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새로이 지은 궁의 이름을 화룡(和龍)이라 하였으며, 그 산 위에다가는 용삭불사(龍朔佛寺)를 세워서

공경들의 자제를 가르치는 관학(官學)으로 삼았다.

<석호>의 사신이 해(海)를 건너서 도착하였기에

환도의 새로 지은 궁전으로 맞아들여 함께 <모용황>을 토벌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9월, 사천원(蛇川原)에서 사냥하였다.

 

고국원제 11년{AD341}신축,

정월, <해발觧發>을 태후궁의 위두로 삼고 수졸(手卒) 300인을 내려주었다.

<모용황>은, 용(龍)을 본 이후에,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용산(龍山)의 남쪽에 성을 쌓고는 용성(龍城)이라 하였다.

10월, <모용황>이 자기 아들 <모용각>을 시켜 우리의 평곽(平郭)을 빼앗았다.

아군은 성을 내어주기 싫어 호상 간에 교전하였으나 극복하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모용각>은 옛 관리들을 위무하여 오래도록 눌러 살게 하였다.

우리의 계책에 대비하게 한 것이었다.

 

341년 평곽을 <모용황>에게 빼앗김

 

고국원제 12년{AD342}임인,

 

고연(高燕)전쟁이 일어 나 고구려가 대패하고 태후와 왕후 및 고구려인 5만 명이 전연으로 끌려 감.

 

고국원제 13년{AD343}계묘,

봄 2월, 왕의 동생 <민玟>을 <모용황>에게 보내서 진이한 물건 천여 개를 주었더니,

<모용황>은 크게 기뻐하며 재궁{제왕의 시신}과 왕후들은 돌려보내고 <주>태후만은 인질로 잡았다.

상이 태후에게 효성스러웠음을 알았음이다.

가을 7월,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상불尙弗>을 동진(東晉)으로 보내 <모용황>의 무도함을 하소연하였다.

 

고국원제 14년{AD344}갑진,

봄 2월, 남소 태수 <조문祖文>이 죽어, <고희高喜>가 대신하였다.

<모용황>이 손수 우문국(宇文國)을 정벌하여 남라성(南羅城)主 <섭야간涉夜干>을 죽이고

승승 진격하여 그 도성인 자몽천을 빼앗았다.

<우문>의 주인 <일두귀逸頭皈>는 막북으로 죽기로 도망쳤으며,

<모용황>은 그곳의 가축과 산물 및 자화(資貨)를 거두었고,

그 부의 무리 5천여 락을 창려(昌黎)의 벽지 천 리로 옮겨놓았으며, 남라성(南羅城)을 위덕성(威德城)이라 하였다.

10월엔 백제의 <비류>가 재위 41년 만에 죽고, <분서>왕의 장자 <계契>가 섰는데,

드높은 기품에 강직하며 용감하였고 기사에도 뛰어났었다.

 

344년 <모용황>이 우문선비를 멸하여 병합함

 

고국원제 15년{AD345}을사,

봄 정월, 왕이 용강(龍江)에 거둥하여 용주희(龍珠戱)를 하여 평양의 부로들 71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4월, 백제의 <계契>가 시조 동명 묘를 찾아뵈었다.

10월엔 <모용각>이 쳐들어오자, 남소(南蘇)의 소수(小守) <승융勝戎>이 연(燕)에 투항하고 나서

<모용각>과 함께 남소(南蘇)를 협공하여 빼앗았다.

이에 패자(沛者) <빈조賓兆>와 사마(司馬) <우매牛買>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345년 <모용황>이 남소성을 빼앗음

 

고국원제 16년{AD346}병오,

 

서부여가 멸망하고 근초고대왕이 즉위 함

 

고국원제 19년{AD349}을유,

9월, 낙랑왕 <고희高喜>가 <유색구劉索句>와 <뉴작紐作> 등을 이끌고

<부헌芙軒>과 함께 대방을 쳐서 다섯 성을 빼앗았다.

<유색구劉索句>를 신지(新地)태수로, <휴절休折>을 점선(占蝉)태수로, <감柑>을 채공사(採供使)로 삼았으며,

<남楠>은 후위장군(後衛将軍)으로 삼아 대방(帶方)을 지키게 하였다.

 

349년 고구려가 대방의 다섯 성을 빼앗음

 

고국원제 20{AD350}경술,

10, 신지(新地)평나(平那)로 이름을 바꿨다.

 

350년 대방의 신지(新地)를 평나(平那)로 이름을 바꿈

 

고국원제 22년{AD352}임자,

2월, <해발觧發>이 정남대장군이 되어 <방식方式>․<우신于莘>․<동리佟利> 등을 이끌고 나가서 대방을 정벌하고

그 왕 <장보張保>를 사로잡았으며, <근초고>와 관미령(関彌岺)에서 싸워 대파하고 세 개의 성을 쌓았으며,

두 나라의 남녀 1만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7월, <해발觧發>을 진남대장군으로 <우신于莘>을 진서대장군으로 삼아 각기 8만군을 거느리게 하였고,

<용백龍白>을 진북대장군으로 삼아 3만군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서로들 간에 호응하도록 하였다.

<창번倉樊>을 좌보로, <부헌芙軒>을 우보로, <장보張保>를 대방 태수로 삼았다.

 

352년 고구려의 대방 정벌과 관미령 전투

 

고국원제 23년{AD353}계축,

정월, <청발靑發>을 연(燕)에 보내서 <모용준>의 등위를 축하하고 토산물을 바치고 대방 태수 일을 설명하였다.

<모용준>은 지난 해 11월 이래로 칭제를 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 대례를 치르고 곧 중원으로 들어갈 것이어,

우리와는 일을 두고 다투기를 피하고자 내내 너그럽고 후하게 대하면서 말하길

“동방의 일은 그대에게 맡기니 잘 처리하시오. 짐은 장차 그대를 나의 아들같이 여길 것이오.”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인 13살 먹은 <호인好仁>공주를 상의 처로 주었고, 상을 부마도위 현도군왕으로 봉하였다.

상은 서하(西河)로 나가서 공주를 맞이하여 온탕으로 들어갔으며,

공주에게 딸려 온 신하들에게는 용산 행궁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황상의 동생 <림琳>을 천원공(天原公)으로 삼았다.

9월, <해>후와 함께 사천(蛇川)에서 사슴제를 지냈다.

 

353년 대방의 일을 전연에 보고하고 고국원제가 전연의 부마가 됨

 

고국원제 24년{AD354}갑인,

 

<모용준>이 계로 천도함

 

고국원제 25년{AD355}을묘,

9월, <민玟>을 연(燕)에 보내 태후를 돌려보내 달라 하였더니 <모용준>이 승낙하였다.

태후와 <민玟>은 연(燕)의 명산과 대원(大院)을 두루 돌아보고 12월에서야 돌아왔다.

<모용준>은 전중장군(殿中将軍) <도감刀龕>을 시켜 호송케 하였다.

상을 정동대장군․영주자사․낙랑군공으로 봉하고 현도대왕은 지난날과 같게 하였으며,

영화(永和)라는 연호를 쓰지 말 것이며 사사로이 왕을 봉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우리나라 역시 연호가 있는데, 어찌 영화(永和)를 쓰겠는가.

종척을 봉왕하는 것은 시조 때부터 해오던 것이어 하루아침에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응당 그 큰 뜻은 천천히 따를 것이다.”라 하였다.

 

355년 <모용준>은 태후를 돌려보내고 고국원제를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군공 현도대왕으로 명함

 

 

고국원제 27년{AD357}정사,

10월, <해발觧發>이 <근초고>를 쳐서 성 두 개를 취하였으며, 포로 200인을 바쳐왔다.

12월, 연(燕)의 <모용준>은 업궁(鄴宮)으로 들어가더니만 다시금 동작대(銅雀臺)를 만들었다.

 

<모용준>이 업으로 천도함

 

고국원제 28년{AD358}무오,

정월, <해발觧發>이 들어와서 남쪽을 정벌할 방략을 상주하며,

한산(漢山)평나(平那)에 곧바로 닿는 길목인 수곡(水谷)을 취하자고 청하였다.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려 설명해보이니 아주 명쾌한지라,

상은 크게 기뻐하며 <해발觧發>에게 준마와 보도를 내려주었다.

<양주陽疇> 등 축설군(蹴雪軍) 300인이 큰 고개를 넘어서 장새진(獐塞鎮)을 함락하였다.

2월, 대평왕(大平王)이 아들 <소이素已>를 보내 입조하였다.

<대평大平>최체(最彘) 동남에 있는 번갈(藩鞨)인데, 북갈(北鞨)과 싸워서 북쪽의 땅을 모조리 차지하고,

스스로 태평국(太平國)이라 칭하였으며, 계림{신라}> 및 백제와 통교하였다.

계림(鷄林)은 딸을 주어 처로 삼게 하였다.

상이 이를 토벌하고자, <방식方式>에게는 2천기를 이끌고 최체(最彘)에서 출진하게 하고,

<람국藍國>에게는 3천기를 이끌고 황남(洸南)으로 출진하게 하였더니,

<대평大平>이 두려워하며 <소이素已>를 보내 입공한 것이었다.

<봉화烽火>를 처로 삼아주었다.

6월, <해극觧克>이 수곡성(水谷城)을 쳐서 빼앗고 남녀 200인을 잡아서 돌아왔다.

 

358년 고구려가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음

 

고국원제 29년{AD359}황양(黃羊)(己未),

10월, 백제가 미녀 5인 및 백마 한 쌍과 맑은 구슬 10과 및 대방에서 도망나온 이들을 바치며, 화친을 청하였다.

 

고국원제 34년{AD364}靑鼠(甲子),

정월, 경도에 돌림병이 크게 돌아서, 상이 태자와 후비들을 데리고 용산으로 들어갔다.

5월, <양주陽疇>가 (那)와 파(巴)에 있는 두 갈족을 토벌하여 그 성을 빼앗고, 백제 인 남녀 100인을 잡아다 바쳤다.

그 두 갈족은 백제의 북쪽 변경에 살며 배반하고 뒤집기에 무상하여 토벌하여 없앤 것이었다.

 

고국원제 35년{AD365}靑牛(乙丑),

정월, <선극仙克>이 백제의 이진성(伊珍城)을 정벌하여 빼앗았다.

 

고국원제 36년{AD366}火虎(丙寅),

8월, <선극仙克>이 백제군을 복수(福水) 달령(達岺)에서 추격하고 있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는데, 당산(棠山) 대왕이 길을 막아 나섰다가,

<선극仙克>이 “필시 복병이 있을 것이오.”라 하니 물러났다.

적들이 과연 고개를 넘어오는지라, 복수천(福水川)에서 맞싸워 크게 이겼다.

2천명을 포로로 잡고, 적의 장수 <진벽真璧>과 <사리沙利>를 사로잡았으며,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 또한 많았다.

 

고국원제 39년{AD369}土蛇(己巳),

정월, 백제가 이진성(伊珍城)을 되빼앗아 갔고, 우리의 군사들도 많이 상하였다.

최체(最彘) 태수 <우눌于訥>이 상장으로서 <선극仙克>보다 못하여 실기하여 패하였다.

이에 상이 노하여 <우눌于訥>을 불러들이고 <람풍藍豊>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백제는 승승하면서, 고개에서 군사를 수를 늘려서, 곧 수곡성(水谷城)을 탈취할 참이었다.

백제의 장수 <막고해莫古觧>는 용병을 잘하고 사졸들의 마음도 얻고 있었는데,

아군은 힘씀에 틈이있고 싸울 뜻도 없었었다.

5월, 백제가 진격하여 수곡성을 깨뜨렸다.

당시 백제군은 분기탱천하였었다.

자신들의 태자 <대구수大仇首>가 선봉이 되어 진영을 이끌었으니, 사졸들 모두는 죽기로 싸우길 원하면서, 말하길

“태자께서 상시 이러하시거늘 우리들은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들 하였었다.

상이 이 소문을 듣고는 친히 싸움에 나서기로 결심하고는, 태보 <우신于莘>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사위군(四衛軍) 2만을 추가로 발동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대암산(大岩山)을 거점으로 삼고,

치양(雉壤)으로 나아가서 진영을 차리고,

북한산(北漢山)을 포위하였더니, 적들은 대적하지 못하고는 성을 비우고 물러갔다.

이에 아군은 승승하여 멀리 있는 이진천(伊珍川)에 이르렀다.

여름이어서 날씨는 무덥고 산 속엔 등에․뱀․호랑이․범 들이 많았으며, 양군 모두에 돌림병이 돌았기에,

할 수 없이 산 밑에 진을 치고는 초략하며 대치하고 가을이 되길 기다렸다.

8월, <해>후가 동궁을 데리고 졸본으로 가서 <서구胥狗>의 복을 빌었다. <천강天罡> 역시 그들을 따랐었다.

9월, 적들이 해로로 군사를 보충하고는 치양(雉壤)을 습격하였다.

이때 아군은 크게 피로하여 죽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데다가 호랑이 피해도 많았다.

이에 상은 날래고 건장한 이들을 가려 뽑아서 호랑이를 산으로 쫒아냈다.

적군은 아군이 지친 것을 알아차리고는 새로 온 정예군으로 갑자기 쳐서나오니,    우리 군은 크게 무너졌다.

상은 단기로 무산(撫山)으로 피해 들어갔다.

날씨까지 비가 그치지 않으니 갑자기 겨울같이 추워졌고 많은 사졸들이 상하였다.

이에 상은 좌우를 돌아보며

“짐이 태보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렇게 패하게 되었소.”라 이르고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돌리라 명하였다.

10월, 낙랑공 <주영周榮>이 치양(雉壤)에서 종군하였다가 병이 들어 죽으니,

상은 그의 충성에 감사하며 후하게 묻어주었다.

그의 처 <현능玄能>은 아직 젊어서 점선(秥蝉)태수에게 개가하도록 하였다.

<강오충杠烏忠>을 태보로, <우신于莘>을 대방공으로 삼았다.

 

고국원제 41년{AD371}신미,

정월, <우신于莘>을 정서장군으로 삼고 10만군을 이끌게 하여 연(燕)을 치는 계책으로 삼았다.

<송松>을 대방공으로, <인仁>을 태보로,< 감柑>을 좌보로, <민 玟>을 우보로,

<무武>를 묘왕(廟王)으로, <용백龍白>을 남소 태수로, <람국藍國>을 신성 태수로,

<중실효仲室孝>를 평곽 태수로,< 고장창高長創>을 안평 태수로,

<주일周日>을 현도 태수로, <우격牛鬲>을 빈강(濱江)태수로,

<재봉再逢>을 대부경(大府卿)으로, <담활談活>을 북부 대사자로 삼았다.

 

10월, 백제가 우리가 군대를 움직여서 서쪽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허를 노려 공격해왔다.

이때, 상은 연(燕)을 쳐서 지난날을 설욕하고자 한 것이었다.

낙랑 또한 대거 쳐들어와서, <양주 陽疇>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대구수大仇首>가 <북한성北漢城>을 공격해 오자,

우리군대가 한수(漢水)에 복병을 깔았다가 이를 크게 깰 무렵에,

<대초고大肖古> 또한 손수 3만 정병을 끌고 와서 아들을 도우니,

<대구수大仇首> 군사들은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우리의 군대는 서쪽을 정벌할 생각으로 요동에 집결되어 있었고,

<낙랑>과 <초고> 및 <구수>를 나머지의 군대로 나누어 막아야 했기에 우리의 병력의 수가 딸렸다.

이에 상이 친히 4위의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진전에 서서 장수 병사들을 독려하였더니 상하가 잘 따랐다.

이리되어 한성(漢城)의 서산(西山)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상이 흐르는 화살 두 대를 맞았다.

하나는 어깨에 다른 하나는 가슴에 맞았다.

힘껏 화살을 뽑아내고 다시금 출진하려 하였더니, 좌우들이 죽기로 말렸다.

<해명觧明>은, 상의 상처가 심함을 알았으나 이를 숨기고는, 군사를 불러들여서 진지를 굳게 지키게 하였으며,

<선극仙克>과 <람풍藍豊>을 시켜서 힘껏 싸우게 하였다.

<해명觧明>은 응당 성상을 철저히 옹호하여 고상령(高相岺)으로 물러났으나, 극심한 고통 끝에 죽었다.

죽음을 앞두고는 <해>후와 <천강>을 부르심이 입에서 끊이질 않았었다.

좌우가 모두 눈물 흘리며 아랫사람들에겐 비밀로 하여 발상하지 않고,

말을 몰아 왕천(王川)으로 가서 급히 국부인 <해현觧玄>에게 알렸다.

이에 <해현>과 <해>후가 달려 나와서 상을 도성으로 모시고 들어가 발상하였다.

 

동궁 <구부丘夫>가 천룡궁(天龍宮)에서 즉위하였다.

<해>후를 태후로, 국부{해현}를 조왕(祖王)으로, <이련伊連>을 태제(太弟)로 하였다.

새로이 선 황상이 원수를 갚고자 친히 정벌하려 하였더니,

조왕(祖王)과 태후가 서쪽의 일이 중요함을 들어 힘껏 말렸다.

 

372년 동진(東晉)이 근초고대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로 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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