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공 신도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유신庾信(513~581)>이 지은 것으로
북주(北周) 천화(天和) 원년(566)에 각자(刻字)되었다.
이 비문은 현재 <유신>의 문집에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비석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두로(506~563)>공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주에서 농우총관부 장사(隴右總管府長史)를 역임하고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증직된 <두로영은豆盧永恩>公을 말한다. 여기서 <두로>는 성, <영은>은 이름을 가리킨다.
두로씨는 원래 모용선비족 인데 후연(後燕)의 <모용장慕容萇>이 탁발선비 정권인 북위(北魏)에 항복하자
두로라고 성을 하사했다. 두로는 선비족의 언어로서 귀순이란 뜻이다.
따라서 <모용장>이 두로씨의 시조가 되는 셈인데 이들은 뒤에 다시 노씨(盧氏)로 바뀌었다.
성씨심원(姓氏尋源)에 따르면 북위 효문제 <탁발굉拓跋宏>이 태화(太和)(477~499) 초기에
조서를 내려서 두 씨를 노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노씨에서 <노태우>와 <노무현> 대통령이 두 분이나 나왔는데
이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용선비족 두로씨에 가서 닿게 된다고 본다.
두로공 신도비문에 의해서 모용선비족 두로씨는 한국인과 혈통이 같은 고조선의 후예란 사실이 밝혀졌다.
<두로영은> 즉 <노영은>에 관한 행적은
주서(周書) 및 북사(北史)의 두로녕전(豆盧寧傳) 말미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비문 내용과 참조하면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신도비문의 주인공 <두로영은>은 <두로은豆盧恩>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두로은비라 하기도 하고 또 그가 모용선비족이므로 모용은비(慕容恩碑)라 불려지기도 한다․
비문의 첫 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君諱永恩 字某 昌黎徒河人 本姓慕容 燕文明帝皝之後也. 朝鮮箕子之封 孤竹 伯夷之國 漢有四城
秦爲一候. 其先 保姓受氏 初存柳城之功 開國承家 始靜遼陽之亂.
군의 휘는 <영은>이고 자는 모某이며 창려(昌黎) 도하(徒河) 사람이다. 본래 성은 모용(慕容)이다
(5호16국시대) 전연(前燕)을 건국한 문명제(文明帝) <모용황慕容皝>의 후손이다.
(모용황이 활동한 지역은) 기자조선(朝鮮箕子)이 봉해진 땅이고, 백이의 고죽국이 있던 땅이고,
그곳에 한나라 때는 사성(四城)이 있었고 진(秦)나라 때는 일후(一候)가 있었다.
그 선조가 성을 보존하고 씨를 받았으니 처음 유성(柳城)을 보존한 공로이고
나라를 열고 가업을 계승하였으니 비로소 요양(遼陽)의 난을 조용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기록은 <두로영은(506-563)>은 본래 모용선비로서 전연(前燕)을 건국한 <모용황(297~348)>의 후손이고
그가 태어난 고향은 중국 하북성 창려군이고 <모용황>의 전연(前燕)은 기자조선이 봉해진 땅이고
이곳에 백이 숙제의 고죽국이 있었으며 秦나라 때에 요동군이고 漢나라 때에 漢4郡을 설치한 곳임을 말해준다.
또한 선비산에 있던 <모용황>의 고조부 <막호발>이 부족을 이끌고 요서에 들어와 살다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솔의왕에 임명되어 극성(棘城)에서 개국을 하였고,
또 <모용황>의 조부 <모용섭귀>는 유성(柳城)을 온전히 보존한 공로로 선우에 봉해지고 요동으로 고을을 옮겼으며
모용으로 성(姓)을 정하였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다음은 이 비문의 뒤에 붙은 명문에 대해 알아보자. 명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 乃爲銘曰 朝鮮建國 孤竹爲君 地稱高柳 山名密雲 遼陽趙裂 武遂秦分
이에 명(銘)을 붙인다. 조선이 건국을 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
땅은 고류(高柳)라 호칭하고 산은 밀운(密雲)이라 이름하였다.
요양(遼陽)은 조(趙)나라가 분열했고 무수(武遂)는 진(秦)나라가 분할했다.
명문에서는 서두의 내용을 재인용하면서
‘朝鮮箕子之封 ~ 始靜遼陽之亂’ 부분을 ‘朝鮮建國 孤竹爲君’ 8글자로 요약하여 기술하고 있다.
조선과 고죽은 <모용연慕容燕>의 건국과 통치의 뿌리가 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조선건국 고죽위군’ 으로 요약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열거된 조선(朝鮮), 고죽(孤竹) , 고류(高柳) , 밀운(密雲) , 요양(遼陽) , 무수(武遂)는
모두 산서성과 하북성에 있던 지명들이다.
조선(朝鮮)은 그 도성이 지금의 보정시 정흥현 고성진(固城鎭)이고
고죽(孤竹)은 노룡(盧龍)에 있었는데 유성(柳城)의 서북에 있는 창려(昌黎)인근에 있었고
고류(高柳)는 옛 현의 명칭으로 지금의 산서서 대동시 양고현(陽高縣)으로 선비족 <단석괴(136-181>과 활동한 곳이고,
밀운(密雲)은 산이름으로 지금 보정시 래원현 백석산(白石山)인근에 백단과 밀운이 있었다.
요양(遼陽)은 보정시 정흥현 상락부촌(常樂富村)이고 무수(武遂)는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이다.
그러면 이 사료는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해서 어떤 가치를 갖는가?
이 자료는 5호16국시기 요서 유성에서 전연을 건국한 <모용황>의 행적을 설명하면서
‘조선이 일찍이 그곳에서 건국했다(朝鮮建國)’ 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용황>이 건국했던 유성이 본래 기자조선의 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이 한사군이기도 하였다(漢有四城 )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후한서>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箕子去之朝鮮)” 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기자조선 이전에 이미 고조선이 실재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준다.
<산해경>의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다. 발해의 북쪽이고 갈석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는 기록도 고조선이 하북에 있었다는 심증을 갖게 하지만
‘하북에 고조선이 있었다’ 라고 직접적으로 실증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식민사학에 오염된 국내 강단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을 내세우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이런 사료를 무시하고 평가절하 하는데 급급하였다.
그러나 두로공 신도비문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유성에 도읍을 정하고 하북에서 건국한 전연을 설명하면서 ‘조선이 그 지역에서 건국했었다’ 라고 잘라 말했다.
이것은 고조선이 하북에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이 아닌 직접적인 방식으로 언급한 것으로,
고조선이 하북에 있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해준 것이다.
이제 이 사료에 의거하여 고조선이 하북에 있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두로영은>의 비문에서 왜 우리 한민족의 고대 국가 조선이란 나라 이름이 맨 앞에 등장하는가?
이는 선비족이 우리 한민족과 피를 나눈 동족이자 전연국(前燕國)이 건국했던 발해유역에서
일찍이 조선국이 거기서 최초로 건국되었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하겠다.
이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