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사이에 논쟁 중인 한일 관련 고대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 하나가 칠지도(七支刀)이다.
원래는 나라현(奈良縣) 텐리시(天理市) 이소카미 신궁의 신고(神庫)에 녹이 슨 채로 보관되었는데,
이소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임명된 국학자 스가 마사토모(菅政友 1824-1897)가
1874년 신고(神庫)를 조사하며 칠지도의 녹을 떼보았다가 명문을 찾아내었다.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모습읗 드러낸 것이다.
길이74.9센티메터이며 일곱 개의 가지가 있고 양면에 62자의 한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다.
글자 일부가 훼손되어 추측해서 해독해야 되는 탓도 있지만 기록된 내용을 둘러싸고 한일 학자간에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앞면〉 泰△四年 △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그러면 칠지도는 언제 누가 누구에게 왜 준 것일까?
① 근초고왕이 손자인 토무루왕(침류왕)에게 369년에 제작하여 372년에 주었다는 설(통설)
앞면의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를 泰和四年 五月十六日 丙午로 보아 東晉의 연호이며
일본서기의 신공 52년조가 그 근거를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진구우(神功) 52년(서기372)
가을9월 쿠테이(久低)들이 찌쿠마노 나가히코(千熊長彦)와 함께 왔다.
그리고 칠지도(七枝刀),칠자경(七子鏡)등 여러가지 보물을 헌상하고
“우리나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일 주일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수원이 나옵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수원이 있는 코쿠나(谷那)의 철산(鉄山)의 철을 채굴하여 영원히 헌상할 것입니다.”
라는 왕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또 왕은 손자인 토무루왕(枕流王)에게
“내가 교류를 계속해 온 동방의 야마토(日本國)는 우리나라의 세력확대에 협력하였고
그에 의거하여 지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너도 우호를 중시하고 공물이 끊기지 않도록 하면 내가 죽은 뒤에도 나라는 평안하리라.”라 하였다 한다.
그 뒤로 매년 조공이 이어졌다.
② 전지왕 4년에 인덕천왕의 딸 <팔수八須>가 낳은 <구이신久爾辛(408-470?)재위420-422>의 탄생을 축하하며
인덕천황(전지왕의 장인이며 큰할아버지이지만 후왕이다)에게 하사하였다는 설 <건국대 홍성화 교수>
근구수(320?-394) - 인덕(337-427)
침류(350- ?) - 아신(372-424) - 전지(391-432) - 구이신(408-470?)
진사(352-395)
앞면의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를 泰△ 四年 十一月十六日 丙午로 보아 泰△는 백제 전지왕의 연호이며
408년 음력 11월 16일이 병오일이며 뒷면의 기생성음(奇生聖音)은 부처님의 가호로 진기하게 태어난
<구이신>의 탄생을 계기로 후왕(侯王), 즉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칠지도(七支刀)는 전지대왕이 408년에 제작하여 409년에 큰 할버지이며 장인인 인덕(仁德)왕에게 전한 것이며,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1874년 나라현 텐리시(天理市) 이소카미(石上)神宮 창고에서
간 마사모토(菅政友)가 발견하여, 칼로 긁어 8자를 지워 임나일본부설을 뒷바침하기 위하여 조작하였다.
1872년 폭풍우로 인하여 인덕천황릉이 일부 무너졌을 때 쏟아져 나온 부장품 중
칠지도는 이소카미 신궁의 신고로 옮겨지고 칠자경(七子鏡)은 미국 보스톤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미일수호통상조약 후 미국의 함대는 오사카항에 정박하여 있었을 것이다.
칠지도와 칠자경은 인덕천왕릉에서 나온 것이다.
칠지도는 전체길이 3尺, 손잡이 4寸, 칼 몸길이 2尺 6寸으로 백제시절 1尺이 25cm인 것을 알 수 있다.
東晉의 연호는 太和이지 泰和가 아니며 369년 음력 5월 16일은 乙未일이며 신공52년의 기사는 가공하여 기록한 것이다.
필자는 <홍성화>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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