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유물

칠지도(七支刀)

지보고 2023. 10. 26. 08:32

 

한국과 일본 사이에 논쟁 중인 한일 관련 고대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 하나가 칠지도(七支刀)이다.

원래는 나라현(奈良縣) 텐리시(天理市) 이소카미 신궁의 신고(神庫)에 녹이 슨 채로 보관되었는데, 

이소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임명된 국학자 스가 마사토모(菅政友 1824-1897)가

1874년 신고(神庫)를 조사하며 칠지도의 녹을 떼보았다가 명문을 찾아내었다.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모습읗 드러낸 것이다.

길이74.9센티메터이며 일곱 개의 가지가 있고 양면에 62자의 한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다.

글자 일부가 훼손되어 추측해서 해독해야 되는 탓도 있지만 기록된 내용을 둘러싸고 한일 학자간에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앞면四年 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侯王△△△△()

뒷면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그러면 칠지도는 언제 누가 누구에게 왜 준 것일까?

 

① 근초고왕이 손자인 토무루왕(침류왕)에게 369년에 제작하여 372년에 주었다는 설(통설)

 

앞면의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를 泰和四年 五月十六日 丙午로 보아 東晉의 연호이며

일본서기의 신공 52년조가 그 근거를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진구우(神功) 52(서기372)

가을9월 쿠테이(久低)들이 찌쿠마노 나가히코(千熊長彦)와 함께 왔다.

그리고 칠지도(七枝刀),칠자경(七子鏡)등 여러가지 보물을 헌상하고

우리나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일 주일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수원이 나옵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수원이 있는 코쿠나(谷那)의 철산()의 철을 채굴하여 영원히 헌상할 것입니다.”

라는 왕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또 왕은 손자인 토무루왕(枕流王)에게

내가 교류를 계속해 온 동방의 야마토(日本國)는 우리나라의 세력확대에 협력하였고

그에 의거하여 지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너도 우호를 중시하고 공물이 끊기지 않도록 하면 내가 죽은 뒤에도 나라는 평안하리라.”라 하였다 한다.

그 뒤로 매년 조공이 이어졌다.

 

 

② 전지왕 4년에 인덕천왕의 딸 <팔수八須>가 낳은 <구이신久爾辛(408-470?)재위420-422>의 탄생을 축하하며

인덕천황(전지왕의 장인이며 큰할아버지이지만 후왕이다)에게 하사하였다는 설 <건국대 홍성화 교수> 

 

근구수(320?-394) - 인덕(337-427)

                                침류(350- ?) - 아신(372-424) - 전지(391-432) - 구이신(408-470?)

                                진사(352-395)  

 

앞면의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를 泰△ 四年 十一月十六日 丙午로 보아  泰△는 백제 전지왕의 연호이며

408년 음력 11월 16일이 병오일이며 뒷면의 기생성음(奇生聖音)은 부처님의 가호로 진기하게 태어난

<구이신>의 탄생을 계기로 후왕(侯王), 즉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림 1. 음력 408년 11.16일 병오

 

칠지도(七支刀)는 전지대왕이 408년에 제작하여 409년에 큰 할버지이며 장인인 인덕(仁德)왕에게 전한 것이며,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1874년 나라현 텐리시(天理市) 이소카미(石上)神宮 창고에서

간 마사모토(菅政友)가 발견하여, 칼로 긁어 8자를 지워 임나일본부설을 뒷바침하기 위하여 조작하였다.

 

1872년 폭풍우로 인하여 인덕천황릉이 일부 무너졌을 때 쏟아져 나온 부장품 중

칠지도는 이소카미 신궁의 신고로 옮겨지고 칠자경(七子鏡)은 미국 보스톤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미일수호통상조약 후 미국의 함대는 오사카항에 정박하여 있었을 것이다.

 

칠지도와 칠자경은 인덕천왕릉에서 나온 것이다.

 

칠지도는 전체길이 3, 손잡이 4, 칼 몸길이 26으로 백제시절 125cm인 것을 알 수 있다.

 

東晉의 연호는 太和이지 泰和가 아니며 369년 음력 5월 16일은 乙未일이며 신공52년의 기사는 가공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림 1 적외선 사진으로 나타난 글자

 

필자는 <홍성화>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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