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백제왕가의 절대좌표 <사마斯摩(461-523)>
(1) 무령왕 가계도
문주왕(文周王)[혹은 문주(汶州)라고도 한다.]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삼근왕(三斤王)[혹은 임걸(壬乞)이라고도 한다.]은 문주왕(文周王)의 맏아들이다. 왕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13세여서 병사 임무와 정치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동성왕(東城王)의 이름은 모대(牟大)[혹은 마모(摩牟)라고도 한다.]이니, 문주왕(文周王)의 동생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담력이 뛰어났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三斤王)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23년 (서기 501년) 11월, 임금이 웅천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처음에 임금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임금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가>는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임금을 칼로 찔렀고, 12월에 이르러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남제 건원(建元) 2년(서기 480), 백제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하늘의 명령을 새로 받드니 혜택이 먼 곳까지 미치고 있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의 번신으로 있으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기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므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을 제수한다.’라고 하였다.
또 영명(永明) 8년(서기 490) 백제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렸다.
이에 알자복야(謁者僕射) <손부孫副>를 보내 <모대>에게 그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관작을 계승케 하고
백제왕으로 삼는 책명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이어 받았으니 그 정성이 멀리까지 드러나 보였다.
바닷길은 고요하고 조공이 변함없기를 바라며, 법전에 따라 책명을 잇게 하니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을 일이다.
아름다운 국가의 위업을 잇는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牟都>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고,
또 <모대牟大 >는 개로왕의 손자요,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의 아들로서,
그의 할아버지가 <모도>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기록되어 있는 바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는 개로왕의 아들이 곤지이고 곤지의 아들이 동성왕이라고 한다.
무령왕(武寧王)의 이름은 사마(斯摩)[융(隆)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왕(牟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키가 8척이고 눈썹과 눈이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관대하여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돌아가시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개로왕과 문주왕과 곤지는 형제이며 무령왕은 개로왕 또는 곤지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무령왕의 릉은 서기1971년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 고분을 발굴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도굴꾼들의 피해를 입지않고 완벽한 모습을 드러냈다.
무덤속에서 지석이 함께 나왔는데 이름, 출생 사망연대등이 기록되어있어 신분이 파악되었다.
이리하여 백제 무령왕은 생몰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백제의 왕으로 백제왕가의 절대좌표가 되었다.
그는 백제 21대 개로왕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개로왕의 서자(庶子)이며
삼촌인 좌현왕 <여곤餘昆>에게 입적되어 <여곤>을 아버지라 부르며 오사카 카와치성에서 자랐으며
41세에 백제의 왕으로 즉위 하기 전의 기록은 478년에 송의 .순제에게 올린 표문만 송서에 남아 있을 뿐
일본서기는 일체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여정을 추정하여 따라가 보자.
(2) 이히토요(飯豊)皇女(440-483)
일본서기 세이네이(淸寧)천황 3년 (서기 482년) 가을 7월조에 밑도끝도 없이 29자의 짧은 기사가 나온다.
“飯豊皇女、於角刺宮、与夫初交、謂人曰、一知女道、又安可異、終不願交於男”
“이히토요 황녀가 쯔노사시궁(角刺宮)에서 남편과 첫날 밤을 지내고 나서,
여자의 길을 한번 알았으니 더 알아 무얼 하랴.
더 이상 남정네와 볼 일 없네 라 하며 평생 남정네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淸寧천황기에 나온 이 기사는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후세에 남기고 싶어서 역사의 행간에 끼어 넣은 에피소드라고 본다.
후세에 남겨두고 싶은 인간세의 아픈 이야기,
이것은 여인의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사실은 淸寧천황 <곤지>의 순결한 사랑을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 아닐까.
필자는 일본서기의 기년은 맞지 않으니 이 가사를 469년의 기사로 본다.
<곤지>의 아들로는 <진선眞鮮>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모대(466-501)>와
<이히토요(飯豊皇女)> 사이에서 태어난 <오호도(男大述)(470-534)>가 있었다.
일본서기는 淸寧천황의 황후를 기록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던 중 淸寧2년 11월 하리마(播磨)국에 숨어 살고 있던 億計와 弘計 황자를 발견하여
카즈라기(葛城)의 오시누미(忍海)에 있는 타카키 쯔노사시궁(高城 角刺宮)에서
그들의 누나 이히토요飯豊 황녀(皇女)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히토요飯豊 황녀는 이치노헤 오시하(市邊押磐 414 – 456) 황자의 딸로 應神천황의 4대손이다.
應神천황 시절 일시 백제가 장악하였던 일본열도는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의 영향 아래 놓이고
광개토태왕의 왕자 高珍이 19대 允恭천황이 되었다.
應神의 아들로 야마토의 천황이었던 닌토쿠(仁德)는 419년에 전사하였고
닌토쿠의 아들 리츄(履中)천황 ( ? – 432)도 전지왕과 함께 432년에 전사하였다.
일본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고 고구려의 왕자 <고진>은 야마토의 19대 允恭천황으로 기록된다.
이때 履中천황의 아들, <이치노헤 오시하(市邊押磐)>황자가 시가(滋賀)현으로 도망가 모습을 감추고 숨어 살았다.
<이히토요飯豊>황녀는 이 사람의 딸이다.
서기 432년 일본을 장악한 윤공천황은 453년 자기 아들에 의해 독살된다.
그 후 安康천황을 거쳐 456년 安康 사후 允恭천황의 아들 雄略이 정권을 장악하고
시가현에 숨어 살던 <이치노헤 오시하>황자를 색출하여 처단한다.
서기 458년 雄略은 다시 백제의 개로왕과 昆支王에게 패배하여 연금되고 일본은 백제의 관리로 돌아간다.
458년 飯豊皇女는 8촌 오빠인 개로왕에게 발견되어 백제로 따라간다.
이 때까지 飯豊皇女의 두 남 동생 億計와 弘計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서기 461년 백제의 개로왕은 동생인 코니키시(軍君)에게 “ 너는 일본에 들어가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 하였다.
행정로장군 좌현왕 餘昆 (= 昆支) 코니키시는
“ 국왕의 명령을 따르겠읍니다. 다만 국왕의 부인 한 사람을 저와 동행시켜 주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코니키시에게 맡기며
“ 이 부인은 이미 출산이 가깝다. 혹시 가는 도중 출산하면 어디서든 배에 태워 보내라”
이 부인이 바로 이히토요(飯豊)황녀였다.
행방불명된 두 명의 남동생 億計와 弘計를 찾으려는 일념에서 사실은 飯豊皇女가 먼저 야마토에 가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6월 부인은 쯔쿠지(筑紫)의 카카라시마(各羅島, 현 加唐島)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세마키미(嶋君)라 지었다. 코니키시는 모자를 귀국시켰다
(기록은 이러하나 정황상 귀국시키지 않고 오사카에 입성다고 본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훗날의 백제무령왕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 (현대어의 임금 섬) 라 부른다.
가을 7월 코니키시(軍君)는 도성에 도착하였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한다.
이로부터 아마 2년후 億計와 弘計를 찾았고 이들 형제는 누이와 함께 쯔노사시궁에서 살게 되었다.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는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삽입한 기사이다.
왜냐하면 이때 곤지는 20세 전후로 아들을 다섯 씩이나 둘 나이는 아니다.
이 때는 475년 한성백제 멸망시 왕과 왕자들이 모두 희생 당하여 왕실의 인재 풀이 거의 바닥 난 시점이었다.
461년 코니키시가 일본에 올 때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는
475년 이후에 등극한 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왕실의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5명의 아들을 거론하였다고 본다.
(3) <모대牟大(466-501)>
장수47년{AD479}을미,
9월, <삼근三斤>은 대두산성(大豆山城)을 버리고 두곡(斗谷)으로 도망갔다.
조정이 <연신燕信>을 시켜 <해구解仇>의 남은 무리들을 모아 <삼근三斤>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삼근三斤>은 열다섯으로 어린 나이로 <해구>의 처 <진>씨와 그 딸을 처로 삼고,
또 <곤지>의 처 <진선真鲜>을 첩으로 삼고 음란을 일상사로 하였다.
<곤지>의 아들 <모대>{동성왕}를 아들로 삼았는데 한 살이 적었다.
그러나 <모대>는 <삼근>을 아비로 잘 섬겼으며 또 담력이 있고 활을 잘 쏘았으며 태도가 매우 아름다웠다.
<삼근>이 그를 곁에 두고 정사를 맡기니, <모대>의 어미 <진선真鲜>에 대한 총애가 최고였다.
<삼근>이 점점 일어나지 못하더니 병이 커져 죽었다.
혹 <진선真鲜>이 <모대>를 위하여 그를 독살하였다고도 하는데, 이는 <해구>의 처가 퍼뜨린 것이다.
11월, <모대>가 즉위하여 <삼근>이 죽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해구>의 처와 딸 모두는 <삼근>이 언제 무슨 까닭으로 죽었는지를 몰랐다.
<모대>는 <해구> 처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삼근>을 섬겼던 <해구>의 딸을 처로 삼고,
자신의 외삼촌 <진로眞老>를 위사좌평으로 삼았다.
.......
<장수대제기>
<곤지>의 아들 동성왕 <모대>는 14살에 왕위에 올랐다.
四月 .............
加耶賛明 金官治水 扶余牟大 來會
<소지명왕기>
(479년) 4월, .............
가야의 <찬명賛明>, 금관의 <치수治水>, 부여의 <모대牟大>가 와서 만났다.
十一月 壬乞以疾卒
王遣阿飡阿珍宗 冊牟大爲扶余君
牟大者 文洲弟昆支子也
有膽力善射 與文洲妻宝留相通 媚事我國
至是 得立 仍賜首器爲妻
<소지명왕기>
11월, 임걸{삼근왕}이 병으로 죽었다.
왕이 아찬 <아진종阿珍宗>을 보내 <모대牟大>를 부여의 임금으로 책봉하였다.
<모대>는 <문주>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다.
담력이 있고 활을 잘 쏘았으며, <문주>의 처 <보류宝留>와 상통하고 우리나라를 순종하며 섬겼다.
이제 임금의 자리를 손에 넣으니 <수기首器>를 처로 하사하였다.
<보류宝留>는 신라왕자 <보해寶海(390-441)>의 딸이다.
雄略天皇二三年(己未四七九)
廿三年夏四月 百濟文斤王薨
天皇 以昆攴王五子中 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仍賜兵器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일본서기>
웅략천황 23년 (기미 479)
23년 하 4월, 백제 문근왕{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이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 <말다>왕이 나이가 어려도 총명하기에,
조서로 궁전으로 불러 머리와 얼굴을 친히 쓰다듬으며 은밀히 천자의 명을 고하여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이에 병기를 주고 축자국 군사 5백 명을 같이 보내 그 나라로 호위하여 보내주었다.
이 사람이 동성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근왕은 재위 3년째인 서기 479년 11월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어, 그가 11월이 아니라 4월에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79년 11월에는 <삼근>의 발상, 즉 죽음을 공표한 것이지, 11월에 죽었다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시해당하고 정정이 불안할 때는 그 발상을 늦추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구려 측의 기록은 그 죽음을 아무도 몰랐다고 기록하였으니, 삼근이 11월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서기 475년 신라는 웅진을 백제에게 할애하여 백제의 부흥을 돕고, 친 신라계 <문주>를 통해 백제를 속국화 시켰다.
하지만 <문주>가 <해구>에게 제거된 후 신라의 영향력이 감쇠하자
신라가 다시 친 신라계 <모대>를 지원하여 왕으로 봉하게 된다.
<모대>는 잠시 신라에 볼모로 살면서 자비왕의 딸 <준삭>과 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역사에서는 <삼근>이 서기 479년 9월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이 사건을 <모대>의 어미 <진선>의 독살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대두산성을 버리고 두곡으로 피신하였을 때,
이를 기회로 삼아 <모대>의 무리들이 <삼근>왕을 시해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와 금관, 백제가 신라로 들어와 모종의 모임을 가졌다는 것은
신라가 이때 <모대>를 지원하기로 약속하며 가야와 금관으로 하여금
<모대>를 도우라고 지시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당시 웅진을 백제에 할애하고 <모대>를 백제왕으로 지원한 것은 신라이다.
신라사에서도 고구려사와 마찬가지로 삼근이 9월까지 생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0월을 건너뛰고 11월에 그의 사망소식을 기록하고 있으니,
고구려사와 견주어 볼 때 삼근이 9월에 사망하고 11월에 발상한 것으로 판단된다.
<모대>는 <보류宝留>와 친하게 지내며 신라에 그 우의를 확인시켜준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신라사의 역사를 그들 나름대로 가공하여 기록한 것이다.
<모대>의 무리들이 4월부터 <삼근>을 제거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며,
9월에 두곡으로 피신한 <삼근>이 독살당하고, 11월에 <삼근>의 발상을 하며 <모대>가 즉위한 것이다.
이 무렵 백제의 왕자라고는 <모대>와 일본에 있는 <사마>와 <오호도南大述>뿐이었다.
왕이 어리고 왕의 인척이 없으니 자연히 외척들이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백제 왕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곤지>는 개로왕과 문주왕의 아우로서 개로왕 7년(461년)에 왜에 건너갔고
그 후 백제로 돌아와 465년에 <진선>과 혼인하여 466년에 <모대>가 태어난다.
그리고는 다시 왜에 들어 가 왜 흥왕으로 오사카 지역을 다스렸으며
470년에는 <이히토요>가 <곤지>의 아들 <오호도>를 낳았다.
<곤지>는 문주왕 2년(476년)에 형 왕 문주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내신좌평에 임명되었다.
내신좌평에 오른 그는 왕권과 조정을 지키기 위해 <해구> 세력과 대치하다가
<해구>에게 <문주>와 함께 477년에 살해되었다.
살아 있을 당시 곤지는 진씨 세력과는 꽤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해구>를 핵심으로 하는 해씨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력한 외척인 진씨 일가와의 결탁은 필연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변에 성공한 진씨 세력이 곤지의 아들을 택해 왕으로 삼고자 한 것은 그와 같은 배경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리하여 14세의 <모대>가 즉위하니 동성왕이다.
『삼국사기』는 즉위 당시 동성왕에 대해서 평하길
‘담력이 대단히 컸으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 이었다’고 쓰고 있다.
동성왕 초기에는 진씨 세력에 의해 조정이 움직였는데,
<해구>에 대항하여 반군을 일으킨 <진남>이 병권을 쥐고 병관좌평에 올라 있었고,
<해구>의 목을 친 <진로>가 덕솔로서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재위 4년(482년)에는 <진로>가 병관좌평에 올랐는데, 기록에 나오지는 않지만 <진남>은 상좌평으로 승격된 듯하다.
<진로>는 그로부터 동성왕 재위 19년까지 약 15년 동안 병관좌평에 머무르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때까지는 진씨 정권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진씨 이외에도 조정의 중추 세력으로 등장한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沙)씨, 백(苩)씨, 연(燕)씨 등이다.
이는 동성왕 6년에 내법좌평 <사약사>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했고, 8년에 <백가>를 위사좌평에 임명했으며,
19년에는 달솔로 있던 <연돌>을 병관좌평에 입명한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성왕은 외척인 진씨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이들을 발탁하였을 것이다.
동성왕은 즉위 이후 줄곧 백제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때문에 여러 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첫 전쟁은 일방적으로 당한 싸움이었다.
재위 4년 9월에 말갈이 한산성(남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당시 백제는 정치와 군사가 모두 불안한 상태였기에 말갈을 공격할 힘도 없던 때였다.
때문에 동성왕은 이듬해 봄에 직접 한산성으로 가서 열흘 동안 머무르며
군사와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동성왕은 궁실을 중수하고 성곽을 보수함으로써 외침에 대비하였는데,
그 무렵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선비의 탁발 씨가 세운 북위와 마찰을 일으켜, 전쟁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이 전쟁은 484년, 488년, 490년에 세번의 전쟁이 있었다.
1차로 벌어진 484년에는 백제가 패한 것으로 기록을 전한다.
그러나 488년과 490년에는 백제가 대승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이 건무 2년(495년)에 올린 표문이다.
신은 예로부터 책봉을 받고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으며, 분에 넘치게도 하사하신 부절과 도끼를 받아들고
여러 제후들을 극복하여 물리쳤습니다.
지난번 <저근> 등이 나란히 관작을 제수 받는 은총을 입은 것으로 신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490년)에 험윤이 회개하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깊숙이 핍박하여 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맞아 토벌하매, 밤중에 불시에 공격하여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노의 선우가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적이 패주하는 기회를 타고 추격하여 머리를 베니 들녘은 엎어진 주검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지금 나라가 고요하고 평온한 것은 <사법명> 등의 책략이 결실을 맺은 것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기리고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임시하고,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으며, <목간나>는 앞서 군공이 있는 데다 또한 누선을 쳐 빼앗았으니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천자의 은혜로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고 청을 들어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 태수 겸 장사 신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 태수겸 사마 신 <왕무> 및
겸참군행진 무장군 조선 태수 신 <장색>, 그리고 행양무장군 <진명> 등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오로지 임무를 공변되게 하며,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이행함에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임명함에 거듭되는 험난을 무릅쓰고 다니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관작을 올려줘야 함에 각기 행(行)으로 임명하여 임시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조정에서 특별히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남제의 황제는 ’조서로써 허락하고 나란히 군호를 하사하였다‘고 『남제서』는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위의 동성왕이 올렸다는 표문은 왜 무왕 <사마>가 올린 것으로 본다.
왜 무왕 <사마>는 477년 <문주>왕과 <곤지>가 <해구>에게 살해되고 <삼근>왕이 즉위하자
477년에 스스로 왜 무왕에 올라 478년에 송(宋) 순제에게 표문을 올리고
야마토는 어머니 이히토요(飯豊)와 <오호도>에게 맡기고 왜의 장병들과 함께 대륙의 거발성을 향해 출항한다.
이 거발성(居拔城)은 근초고왕 때 백제가 세운 도성(都城)으로
유성(柳城)(今 보정시 서수구 동부산향)과 북평(北平)(今 보정시 순평현)사이의 진평(晉平)에 있었다.
중원의 남조도 479년에 <소도성>이 송(宋)을 멸하고 제(齊)를 세우게 된다.
왜 무왕 <사마>는 제(齊) 무제(武帝)에게 왜, 백제, 남제가 연합하여 북위에 대항할 것을 제안한다.
왜, 백제, 남조의 제(齊) 연합군과 북위와의 전쟁에서 연합군은 대승을 거두게 되고
<사마>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에게 합당한 관직을 내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모대>는 중원에 진출할 만한 군대도 없었을 뿐 아니라 외척의 세력을 견제하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모대>의 사후 시호가 동성왕(東城王)인 것을 보면 중원 진출을 포기하고
동성(東城) 즉 웅진성을 지킨 왕이라는 의미에서 동성왕(東城王)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한편 백제에는 499년 여름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일어나고,
백성 2천 명이 고구려로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하지만 동성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궐 동쪽에 8미터 높이의 임류각을 세우고,
그 주변에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들을 기르는 등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가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지만, 동성왕은 듣지 않고 대궐 문을 닫아버렸다.
또 우두성으로 사냥을 다니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측근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연회를 열며 밤새도록 실컷 즐기기도 했다.
동성왕은 신라에 대해서도 거만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신라와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신라에서는 백제 정벌론이 대두되었고, 그 때문에 동성왕은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을 대비하고,
가림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토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동성왕의 사치스런 행각은 그치지 않았다.
정사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501년 겨울에는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 머물러야 했다.
이 때 <백가>라는 인물이 칼로 찔러 죽임으로써, 동성왕은 36세의 나이로 비명에 생을 마감했다.
<백가>는 동성왕 8년에 위사좌평에 임명되었고, 23년 8월에 가림성 성주로 임명되어 그 곳으로 떠나야 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 <백가>가 가림성으로 가기 싫어 병을 핑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지만,
동성왕은 억지로 그를 가림성으로 보냈고, 이 때문에 <백가>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사냥을 하다가 길이 막혀 마포촌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림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성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일본서기』는
동성왕이 ‘포학무도하여 국인(國人)이 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성왕의 시해에 무령왕의 암묵이 있었을까?
동성왕이 시해되자 이제 남은 왕손은 <사마>와 <오호도南大述>뿐이다.
(4) <오호도南大迹> 게이타이(繼體)천황(470-534)과 <다시라카手白香>황후
무령대왕 3년 계미(503년)
8월 10일 <사마斯摩(462-523)>는 우전팔번경(隅田八幡鏡)을 만들어
동생 <오호도男大迹(470-534)>가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 <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는데,
최고급 구리쇠 200간으로 이 구리거울을 만들었다.
이 거울에는 48자의 글과 9명의 인물상이 양주(陽鑄)되어 있는데,
남5년 전 요도카와 강에서 선상결의(船上結義)를 다졌던 세 사람과
사마대왕 즉위에 공이 많은 신하 6명을 그려 넣은 것이다.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역시 말을 타고 있는 대왕의 모습이다.
투박하거나 조잡하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로운 생각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청동거울에는
‘계미년 8월, 사마대왕 치세에 오시사카 궁에 있는 남제왕의 장수를 기원하며,
하내의 수령으로 있는 예족 <금주리> 등 2인을 보내 양질의 백동 2백 덩어리로 이 동경을 만든다.’라고 쓰여 있다.
이 청동거울은 <오호도>가 계체천왕으로 즉위하는 509년에 오사카의 오시사카궁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사마>의 심정을 잘 나타낸 두 편의 시를 소개한다.
우전팔번경(隅田八幡鏡) - 淸浪 장팔현
검은 바닷물
징검다리 각라도에서 태어난 왕자
왜국 내 분국(分國)에서
작은 왕 노릇하고 있을 때
사촌동생 말다왕(末多王)
초심 완전히 잃고 천방지축
웅진성 임류각 옆에
큰 연못 파고 세월아 네월아
진귀한 새 끌어 모아
주지육림 음탕한 사랑놀음에
굶주린 백성들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구동성 난리로다
왜왕무(倭王武)
본국 사직 걱정에
힘센 귀족 백가(苩加)와 손 잡네
혈연보다 역사깊은 백제사직 구하고자
눈물 머금은 반정으로 대왕자리 오르네
팔척거구 잘 생긴 백제왕
강 위에서 맺은 선상결의(船上結義)따라
도움 준 왜국의 의형제 한없이 고마워
사마대왕
계미년 양질의 백동(白銅) 이백 덩어리 녹여
청동거울 신임장으로 남제왕(男弟王)에게 하사하며
폭군 몰아내고 왜대왕으로 등극하라 격려하네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 김후란
바다는 너무 멀었다.
밤낮으로 출렁이는 동해바다 저 너머에
오호도 왕자 내 아우여
잘 있는가 아우여 백제의 넋을 끌고
우리 눈물로 헤어져
일본 땅 오시사카궁에 서 있는 그대
그리워라 머나먼 그대에게 이 청동거울을 보내노라
아우의 장수 기리며 구리쇠 200한으로
그 무게보다 더 무거운 내 깊은 사랑 증표로 보내노니
밤이면 그쪽 향해 누운 나를 보라
내 마음 그 거울에 달이되어 떠오르리라 아우여!
- 다시라카(手白香) 황후
무령대왕 치세에 일어난 일들 중에 많은 부분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왜의 제26대 왕인 계체천황 대에 집중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무령대왕은 계체천황의 즉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계체천황과 무령왕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당시 백제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안일 수밖에 없다.
무령대왕 즉위 당시인 501년에
왜는 499년에 즉위한 제25대 부레츠(武烈)천황이 학정을 일삼고 있었다.
그는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라 그 태를 보고,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서 산마를 캐게 하였으며,
머리털을 뽑고 그 사람을 나무 위에 올라가게 한 뒤에
나무 밑둥치를 베어 나무 위의 사람이 떨어져 죽도록 하기도 했다.
수문에 사람을 집어넣고 수문을 열어 물살에 흘러나오는 사람을 삼지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고,
나무 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활을 쏘아죽이고, 여자를 발가벗겨 판자 위에 앉히고, 말을 끌고 앞으로 가서 교접을 시키고,
여자의 음부를 보고 정액을 흘린 자는 죽이고, 흘리지 않는 자는 관노로 삼는 등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매일같이 창기들을 불러놓고 음란한 짓거리를 하거나
나체 춤을 추게 하는 등 변태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주색에 빠져 지내기까지 했다.
501년 11월에는 백제 출신 왕족 <의다>랑이 죽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학정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무령대왕은 <의다>랑이 죽은 뒤에 한동안 왜와 통교를 끊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는 <의다>랑의 죽음이 부레츠(武烈)천황에 의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무령왕이 다시 사신을 보낸 것은 504년 10월이었다.
이 때 사신으로 간 사람은 <마나麻那>인데,
그를 군(君)이라고 칭한 것으로 봐서 부여씨 성을 쓰는 왕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마나麻那>는 백제 국왕의 골족이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즉, <마나麻那>는 왕족이긴 하나 무령왕의 직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무령왕과 계체천황의 관계는 <마나>를 파견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계체천황은 생시에 <오호도男大迹(470-531)>천황으로 불리었는데, <오호도男大迹>은 계체천황의 속명이었다.
무열천황의 극악한 행위가 지속되고 있을 때,
왜국 내부에서는 반정의 움직임이 있었고, <오호도男大迹>가 바로 그 핵심 인물이었다.
504년 10월에 무령대왕이 <마나>군을 사신으로 왜에 보낸 것은
<오호도男大迹>와 연계하여 무열천황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503년 <오호도>에게 보낼 청동거울에는 <오호도>를 남제왕(男弟王)이라고 칭하였다.
503년은 무령대왕이 왜에 <마나>군을 보내기 전이었고, <오호도>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무령대왕은 이미 <오호도>를 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무령대왕이 <남대적>을 왕이라고 호칭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이미 <오호도>를 왜의 왕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고,
둘째는 비록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오호도> 자신이 왕을 칭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호도>는 응신천황의 5세손인 언주인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오호도>는 <사마>의 동복(同腹)동생이라고 본다.
<사마>가 <곤지>에게 입적하였으니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경(銅鏡)의 대왕년(大王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본 측 학자들은 이 대왕은 무열천황을 지칭한다고 보고,
한국 측 학자들은 당연히 무령대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무령대왕은 왜 <오호도>에게 동경을 보냈을까?
동경은 예로부터 천황의 상징이요, 신물이었다.
때문에 무령대왕이 <오호도>에게 왕의 상징인 동경을 만들어 보냈다는 것은
학정을 일삼는 무열천황을 제거하고 천황의 자리에 오르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504년에 <마나>를 왜에 보낸 것은 무령대왕이 무열천황을 제거하고
<오호도>를 천황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의중을 행동으로 옮긴 조치였다.
<마나>가 왜에 사신으로 갔을 때,
무열천황은 백제가 몇 년 동안 통교를 끊은 일을 놓고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령대왕은 505년 4월에 자신의 아들 <사아斯我>를 다시 왜에 파견했다.
무령대왕은 아들을 파견할 정도로 왜의 정치적 상황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왜의 정국은 한치 앞을 대다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런 상황이었는데도,
무령대왕이 아들을 파견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안전 장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 때는 <오호도>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조정을 거의 장악한 상태였기에
무열천황도 감히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오호도>의 세력 확대엔 왜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제 도래인들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무령대왕이 <마나>를 파견하여 <오호도>를 지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백제 출신 신하들은 <오호도>를 지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무령대왕의 아들 <사아>군까지 가세하자, <오호도>의 힘은 한층 더 강해졌을 것이다.
무열천황은 이듬해 12월에 죽는데, 아마도 <오호도>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사아>군의 가세가 <오호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말하자면 <오호도>는 백제 세력을 기반으로 고구려계의 무열천황을 제거했던 것이다.
무열천황이 죽자, 왜 조정의 장관 격인 대반대련 <금촌>은 조정 중신들과 의논하여
중애천황의 후손 왜언왕(倭彦王)을 천황에 앉히려 했지만, 왜언왕은 살해될까 염려스러워 은신해버렸다.
아마도 <오호도>를 의식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일본서기는 무령대왕의 아들 <사아>군은 왜로 건너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법사>군이고 이가 곧 왜군(倭君)의 시조라고 했으며,
응신천황 대에 17현을 이끌고 건너간 <아지阿知>는 왜한직(倭漢直)의 선조라고 쓰고 있다.
이들의 작호에 근거해볼 때 작호에 왜(倭)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사람들은 백제에서 도래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금촌>과 대신들이 천황에 앉히려 한 왜언왕은 백제 계통의 인물일 것이다.
왜언왕이 숨어버리자, <금촌> 등은 결국 <오호도>를 천황으로 받들어 앉히게 된다.
천황에 오른 <오호도>는 <수백향手白香> 황녀를 황후로 삼는데, 이는 정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수백향>이 황후가 되기 전에 이미 <오호도>에겐 몇 명의 아들이 있었다.
즉, 본부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인을 황후로 책봉하지 못하고 <수백향>을 맞아들여 황후로 삼고,
오히려 원래의 부인과 후실들을 후궁으로 삼아 <수백향>의 명령을 받도록 했다.
이는 <수백향>이 <오호도>를 천황에 앉히는 데 큰 역할을 한 세력 출신임을 의미한다.
<수백향>은 황후에 책봉되기 진에 황녀의 신분이었다.
당시 백제인 중에 황녀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무령대왕의 딸뿐이다.
일본서기는 중요한 황후들에 대해서,
특히 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천황의 황후나 천황의 모후에 대해서는 그 혈통을 대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수백향>의 혈통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더구나 <수백향>은 제29대 흠명(欽明)천황의 모후다.
따라서 <수백향>의 혈통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 편자들이 고의로 누락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왜 일본서기 편자들은 <수백향>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도 수록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바로 <수백향>이 무령대왕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이 <오호도>가 507년에 천황으로 즉위하니 그가 계체천황이다.
이제 열도에 백제의 세력을 능가할 만한 세력은 아무도 없다.
'강역고 > 백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도(列島)의 쿠다라(百濟)를 찾아서(5) (1) | 2023.10.25 |
---|---|
열도(列島)의 쿠다라(百濟)를 찾아서(4) (1) | 2023.10.24 |
열도(列島)의 쿠다라(百濟)를 찾아서(3) (1) | 2023.10.24 |
열도(列島)의 쿠다라(百濟)를 찾아서(2) (1) | 2023.10.23 |
열도(列島)의 쿠다라(百濟)를 찾아서(1) (0) | 2023.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