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응신(應神)천황과 신공(神功)황후
미추왕 13년(AD.337) 주조(朱鳥=丁酉)
정월, <백발白發>을 이벌찬으로 <해강亥康>을 품주로 삼았다.
<양부良夫>를 <백발白發>과 함께 부여(夫余)로 보냈다.
9월 부여(夫余)의 <열복悅福>등이 와서 항복하였다.
처음에 <비류比流>의 어머니 <여음餘音>이 <소내素嬭>에게 쫓겨나 평촌(平村)에 숨어 살았다.
그곳의 촌주(村主)와 사통하여 아들 <우복優福>을 낳았다.
<비류>가 왕이 되자 <우복優福>이 <여음餘音>에게 의지하여 지위가 내신좌평에 나아갔다.
자못 제멋대로 하는 바가 있었다.
이때 <청계靑稽>의 처 <사계沙鷄>가 <비류>의 작은 처가 되었는데,
<우복優福>이 그 색(色)을 흠모하여 처로 삼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이에 급하게 다른 뜻을 품었다.
또 <비류>의 여러 아들과 불화하여, 북한산(北漢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비류>가 토벌하였으나, 여러 해를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우복優福>이 죽자,
그의 아들 <열복悅福> 등이 그 무리를 이끌고 우리에게 귀순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이것으로 다시 화친에 흠결이 생겼다.
<남당유고>
<백발白發>은 신라의 이벌찬이지만 그 가계(家系)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349년에 그의 딸 <아이阿尒(336-390)>가 <근구수(320-394)>와 혼인하여 <근구수>의 장인이 되는데
필자는 이 <백발白發>의 딸 <아이阿尒(336-390)>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神功)황후로 본다.
<신라>는 <백발>에게 신라의 최고관등을 내리고 그의 딸 <아이>를 <구수>에게 시집보내 백제와 화친하려고 하였으나
백제의 <열복>이 신라로 귀순하여 화친에 흠결이 생겼다는 것이다.
고사기는 경행(景行)천황이 기록에 남은 아들만 해도 21명, 기록되지 않은 아들이 59명 도합 80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했다.
숭신천황에게 빼앗긴 열도를 탈환하기 위하여 백제에서 파견된 왕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의 말년 일본열도에 그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분할하여 후세들에게 나누어 통치하도록 한 것 같다. 소위 분봉정책이다.
그 자신의 후계자인 성무(成務)는 근강국(近江國) 즉 현 시가현 (滋賀縣)을 맡고
야마토 타케루{근초고왕}의 아들 중애(仲哀)는 야마토를 분봉받았다.
그런데 야마토 타케루가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경행(景行) 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당시 백제 비류왕의 아들이다.
경행(景行) 말년 중애(仲哀)가 야마토를 맡았다는 것은
야마토 타케루의 영향력이 경행천황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서기 344년 백제의 비류왕이 죽자 경행(景行)천황 <계契>는 아들 성무(成武)천황에게 선위하고 백제로 돌아가 즉위한다.
<성무成務 (327-355)>와 <중애仲哀(327-362)>는
피 한방을 섞이지 않은 비슷한 연배의 백제 왕자로 경쟁관계이다.
<성무成武>는 <계契>의 아들로 근강국(近江國)의 왕, <중애仲哀>는 <근초고왕>의 아들로 야마토의 왕이다.
산성(山城)이라는 땅은 이 두 사람의 사이에 낀 땅이다.
<기장족희氣長足姬(336-390)>의 조상들의 근거지가 이 지방이며
근강(近江)의 고혈수궁 (高穴穗宮)에서 멀지 않는 곳이다.
일본서기는 그녀를 <중애仲哀>의 황후라고 기록했으나 우리는 그녀가 <성무成務>의 아내였다고 믿는다.
역사를 기록할 때 진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성무>와 <중애>를 바꿔 기록했다고 본다.
가장 강력한 근거가 이들의 무덤의 위치이다. 신공황후와 성무는 지하에 나란히 누워 있다.
여러 번 결혼한 여인이 죽으면 첫 남자의 무덤 옆에 묻는 것이 옛날의 법도이다.
그러면 은폐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란 무었이었을까?
그만큼 은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의 신공(神功), 응신(應神) 시대에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왕래는 눈 부신 데가 있다.
우리는 그 눈 부신 교류의 기록을 일관된 권력의지의 산물로 이해한다.
권력의지의 주체는 백제의 귀수왕자와 열도의 신공(神功)황후이다.
귀수왕자의 또 다른 얼굴이 응신(應神)이며 그는 <중애仲哀>의 형이다.
일본서기가 그토록 감추고자 한 것이 그의 진면목인 것이다.
열도의 야마토 타케루는 서기 34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되었고 귀수왕자는 바로 그의 아들 근구수왕이다.
경쟁관계인 <성무>와 <중애>간의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이 일본서기 <중애>조에 적혀있다.
월국(越國, 현 후쿠이현)에서 <중애>에게 헌상하는 백조(白鳥)가
산성(山城) 우지강(菟道河)에 왔을 때 훼방꾼이 나타나 헌상품인 백조를 훼손한다.
<중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중애>는 군사를 보내 범인을 찾아 처형한다.
자기의 영토에서 벌어진 <중애>의 군사행동에 대해서 <성무>가 항의한다.
이렇게 시작되어 서기 344년경 전면전으로 발전한다.
이 전쟁을 지휘했던 장군이 다름아닌 환이신(丸邇臣)의 조(祖)
<건진웅建振熊>이며 그가 신공황후의 부친이다.
신무(神武)에서 원정(元正)천황까지 일본천황의 한풍시호는
일본서기가 완성된 이후에 <염해삼선淡海三船(722 – 785)>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슬픈 이름을 받은 중애(仲哀)란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일까?
대부분의 천황에게 60여년의 넉넉한 재위기간을 할해한 일본서기가 그에게 부여한 재위기간은 겨우 9년이다.
또 모든 천황들의 궁이 야마토나 하내(河內)에 있었는데
<중애>는 재위 9년 가운데 6년을 일본 혼슈 최서단의 야마구치현(山口縣) 혈문(穴門)의 풍포(豊浦)궁에서 보냈다.
일본서기는 왜 그가 서울을 떠나 궁벽한 한촌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중애>의 주력부대를 산성(山城)에서 궤멸시킨 뒤 <성무>의 군대는 야마토를 접수한다.
서기 344년 <중애>는 오오사카를 버리고 산성(山城)의 풍포진(豊浦津)으로 도망간다.
거기서 그는 혈문풍포궁 (穴門豊浦宮)을 짓고 6년을 보낸다.
이것이 중애천황이 혈문(穴門, 현 시모노세키 근방)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낸 이유이다.
<중애>가 시모노세키를 피난처로 선택한 것은 백제의 도움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 백제로 탈출하기 쉽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제왕이 누구인가? 346년에 즉위한 바로 <중애>의 아버지 근초고왕이 아닌가?
<중애>는 혈문의 피난처에서 <성무>에게 저항하였으므로
<성무>는 그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움직인 것이 서기 349년경이다.
서기 349년은 귀수 왕자 30세, 성무 23세, 중애 23세, 신공황후 14세 때이다.
이 전쟁에 <성무>와 동행한 것이 그의 비(妃) 기장족희(氣長足姬)였다.
그녀는 당시의 전쟁영웅 건진웅(建振熊)의 딸이다.
<중애>가 6년간 기거하던 혈문풍포궁(穴門豊浦宮)를 버리고 축자(筑紫)의 난현(儺県, 博多湾岸)으로 도망가서
강일궁(橿日宮, 福岡市香椎)에 머물렀다.
<성무>의 추격이 계속되고 큐우슈우 전체가 내란에 휩싸이게 된다.
왜냐하면 큐우슈우의 각 나라들도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중애 8년 9월
천황은 카시이궁에서 신하들과 웅습(熊襲) 토벌에 관해 협의 한다.
그 때 황후가 귀신에 씌어
“쿠마소(熊襲)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그보다 신라(新羅)라는 보물로 가득 찬 땅이 있지 않느냐?
그 곳을 쳐라. 그러면 쿠마소는 저절로 복종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쿠마소 정벌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5일 천황은 신의 저주로 급사했다.
위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중애>의 기사로 취급되고 있지만 <성무>에 관한 기사로 읽어야 된다.
이 무렵의 역사기록에 신(神)과 신탁(神託)의 출현이 빈번해 진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대의 주인공들의 시호에 신(神)이라는 글자가 붙여진다.
응신(應神)과 신공(神功)이 그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문자 그대로 귀신을 의미할까?
아니면 지금 일본열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가진 인간 누군가를 의미할까?
쿠마소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는 신탁은
백제의 귀수왕자가 <성무>에게 보내는 경고이다.
열도에서 집안 사람들 끼리 싸울 힘이 있거든 그 힘을 차라리 신라를 치는데 써라.
그러나 <성무>는 귀수왕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귀수왕자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귀수는 백제의 군대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열도내의 국조(國造)들을 동원하여 <성무>를 제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귀수왕자는 일거에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야마토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성무>는 서기 349년 항복하였고 귀수왕자는 <성무>를 비롯한
<기장족희氣長足姬>, <무내숙녜 武内宿禰>등의 거취를 결정하였다.
이 때 귀수왕자는 소문으로만 듣던 <기장족희氣長足姬>를 처음 면담하였다.
고사기는 응신(應神)천황이 <기장족희氣長足姬>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아래와 같이 상세히 묘사하였다.
어느 때 천황이 근염해국(近淡海國)에 넘어 가려고 우지노(宇遅野) 주변에 서서 카즈노(葛野)를 바라보며
“카즈노를 바라보니 넉넉하게 사는 민가의 정원이 보이네.
풍요로운 나라의 모습이 보이네.”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목번촌(木幡村)에 왔을 때 십자로에서 빼어난 미모의 처자와 마주쳤다.
천황이 처자에게 누구의 딸이냐고 물으니
“와니(丸邇)의 <히후레노 오호미 (比布礼能意富美)>의 딸로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하에 히메 (宮主矢河枝比売)>라 하나이다.” 라 하였다.
천황이 “내일 돌아 오는 길에 너의 집에 들리겠다.”하고 길을 떠났다.
<야카하에 히메>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전하자
“천황에 틀림없다. 받들어 모셔야 한다.”하며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고 기다리니 이튿 날 천황이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큰 잔치가 벌어지고 <야카하에 히메>의 큰 술잔을 받은 천황이 흥에 겨워 노래하였다.
“이 이쁜 게(蟹)야! 어디서 온 게(蟹)냐?
머나 먼 쯔누가(角鹿)에서 온게(蟹)다. 옆으로 기어서 어디로 가느냐?
이찌지시마 (伊知遅島)나 미시마(美島)에 닿는다.
거기 사는 물새가 잠수하거나 밖에 나와 숨을 쉬듯
기복이 있는 사사나미(佐佐那美) 의 길을 가다 목번(木幡)의 길에서 마주친 처자여.
뒷 모습은 방패와 같이 날렵하고 치열은 잣나무 씨알처럼 고르고 희구나.
이찌히이(櫟井)의 와니사(丸邇坂)의 흙을,
표면의 흙은 너무 연하고 깊은 곳의 흙은 너무 진하여 가운데 흙을 골라
불에 직접 닿지않게 만든 물감으로 이마를 그리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비너스같은 여인이여!
이렇게 하고 싶다 또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여인을 마주하고 있다. 가까이 하고 있다.”
응신(應神)천황이 소년처럼 즐겨워 하던 때는 서기 349년 경이며 응신(應神)이 30세, 야카하에 히메 14세 정도였다고 본다.
이렇게 혼인하여 생긴 황자(御子) 우지와키 이라쯔코(宇遅能和紀郎子)가
서기 350년 12월 쯔쿠지(筑紫)의 우미신궁 (宇美 神宮)에서 태어났다.
박창화 필사본 신라사초에서는 <건진웅建振熊>이 家系가 불명한 이벌찬<백발白發>로
신공황후가 <백발>의 딸 <아이阿尒(336~390)>로 349년 <구수>왕자와 신라의 포사에서 혼인하여
350년에 침류왕을 낳은 것으로 되어있다.
<무내숙녜 武内宿禰>는 <성무>가 가장 총애하던 신하였으므로 새로운 정권에서 등용하기 거북한 사람이었다.
4세기의 백제는 비류왕 (서기304 – 344 재위), 계왕 (344 – 346), 근초고왕 (346 – 375), 근구수왕(375 – 384),
침류왕(384 – 385), 진사왕(385 – 392), 아신왕(392 – 405), 전지왕(405 – 420)의 순서로 왕위를 잇는다.
이 기간 일본열도는 숭신(崇神) – 경행(景行) – 성무(成務) – 중애(仲哀) – 신공(神功) – 응신(應神) – 인덕(仁德)의 순이다.
일본서기는 수인(垂仁)을 숭신(崇神) 다음 세대로 배치하였으나 수인(垂仁)은 숭신(崇神)보다 앞 선 세대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기년(紀年)의 개념이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서
주변국과의 외교기사를 보고 단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밖에 없다.
이 무렵 경행(景行) – 성무(成務) – 중애(仲哀) – 신공(神功) – 응신(應神) – 인덕(仁德)의 6대의 천황을 모신 것으로 기록된 무내숙녜(武内宿禰)라는 인물이 있다.
일본서기 경행(景行) 3년조에 그의 탄생과 관련된 기사가 나오고 마지막 기사가 인덕(仁德) 50년에 나온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경행(景行) 3년과 인덕(仁德) 50년이
서력으로 몇년에 해당하는지 보증할 권위를 갖는자료가 부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정사(正史)라고 믿고 있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현 주소이다.
일본서기는 각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에 의거하여 무내(武内)의 수명을 계산하면 287년이 된다.
인덕(仁德) 50년의 기사는
“야마토에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는데 집안에서 가장 연장자인 그대 생각은 어떤가?”
하고 천황이 묻는 내용이므로 <무내숙녜 武内宿禰>는 그 보다 더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무내숙녜 武内宿禰>는 287년 이상 살았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므로 <무내숙녜 武内宿禰>는 가공된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간을 재는 기년(紀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무내숙녜 武内宿禰>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무렵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합산하면 숭신(崇神) 68년, 경행(景行) 60년, 성무(成務) 60년, 중애(仲哀) 9년,
신공(神功) 69년, 응신(應神) 41년, 인덕(仁德) 87년 등으로 총394년이 된다.
1 세기 정도의 시간이 4 배로 부풀려 있다는 뜻이다.
부여의 의라왕(依羅王)이 일본열도을 장악하고 숭신(崇神) 천황으로 기록된 것을 서기 300년,
그가 다시 경행(景行)에게 패하여 사망한 것을 서기 318년(무인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필자는 경행(景行) 원년을 서기 319년으로 본다.
일본서기는 <무내숙녜 武内宿禰>를 효원(孝元)천황의 증손으로 고사기는 손자로 기술하여 1 세대의 편차를 보인다.
<무내숙녜 武内宿禰>는 성무(成務)와 같은 날 태어나서
<성무>와 특별한 관계였다 하니 <성무>와 동갑내기라고 볼 수 있다.
<무내숙녜 武内宿禰>의 4명의 아들들은 서기 392년 야마토의 장군의 반열에 올라
백제의 <아신>왕을 즉위시키고 <진사>왕을 야마토로 압송하였다.
4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을 이 때 45세 정도로 보면 서기 347년 경 출생한 셈이 된다.
<무내숙녜 武内宿禰>가 장남을 20세에 보았다면 <무내숙녜 武内宿禰>의 출생은 서기 327년 경이다.
성무(成務)천황 또한 이 무렵 태어났을 것이다.
<무내숙녜 武内宿禰>가 새로운 정권에 충성할 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서기 응신(應神) 9년의 <무내숙녜 武内宿禰>의 위기라는 기사는
<무내숙녜 武内宿禰>가 새로운 정부의 검증을 무사히 통과하여였다는 내용이다.
서기 349년 <성무>를 퇴위시키고 일본열도는 귀수왕자의 통치 아래 들어가며
이 때부터 그는 응신(應神)천황으로 기록된다.
이 무렵 전쟁 포로로 잡혀있던 <기장족희氣長足姬>를 방면하여 자기의 비(妃)로 만들고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히메>로 바꾸었다.
신공황후 (神功皇后)와 무내숙녜 (武内宿禰)는 화폐에 새겨질 정도로
지금도 일본에서는 위대한 인물로 취급되고 있다.
"신공황후는 일본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신비의 인물이며, 수수께끼의 인물이며, 환상의 여인이다.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에 관한 전설적 무용담은
일제시대 식민지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귀가 닳도록 들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그녀가 유명한 것은 신라를 쳐서 속국을 삼았다는 그 전설적인 무용담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 제1권 「비밀의 문(門)에서 발췌>
'야마토 조정이 일본을 통일하는데에 천황을 섬겨 커다란 업적을 올린 인물'이라고 일본인들은 지폐를 설명하고 있다.
신공황후 (神功皇后)가 응신(應神)의 어머니라는 것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집자들의 최대의 승부수였다.
이것을 뒤 집을 역사적 자료가 혹시 응신(應神)이나 신공황후 (神功皇后)의 무덤 속에서 나올 가능성이 있을까?
황실은 영혼의 평안을 헤치면 안 된다면서 일본은 결사적으로 천황들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진실은 두려운 것이다.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다음 해 12월 백제에서 돌아오던 길에
축자(筑紫)의 우미(宇美) 신궁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 아들이 <우지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 350 – 422)> 백제의 침류왕이다.
일본서기는 이 아들이 응신(應神)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감추고 혈통을 바꾸며 소설을 쓰면서 감추고자 하였던 귀신은
바로 귀수(貴須)였고 응신(應神)이었으며, 그의 妃가 신공(神功)이었다.
8. 왕자의 난
소수림제14년{AD384}갑신,
4월, <근구수近仇首>가 죽자, 그의 아들 <침류枕流>가 섰다.
그의 어미 <아이阿爾>가 북쪽의 승려를 맞이하였다.
진{東晋}>에 있던 <마라난타滅難陀>가 9월에 {<백제>로} 와서 불법을 불러들였다.
<소수림대제기>
근구수10년(384년)
봄 2월,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대궐 뜰에 있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 왕이 사망하였다.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가을 7월, 晉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晉 나라에서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하였다.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내물왕 8년[갑신384]
부여의 <근수謹須>가 죽고 <침류枕流>가 섰다.
그 어머니 <아이阿尒>가 집정(執政)했다.
<천세千世>를 보내서 그를 조문하였다.
<내물대성신제기>
神功64년 백제 귀수왕(貴須王)이 죽었다.
왕자였던 토무루왕(枕流王)이 즉위하였다.
<일본서기>
고국양대제2년{AD385}을유,
이해 2월에 <침류枕流>가 漢山에 절 짓기를 시작하여 10월에 완성하고, 열 사람을 중이 될 수 있게 허락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아우 <진사辰斯>가 뒤를 이었는데, 강하고 용감하였으며 총기 있고 지혜로웠으며 지략이 있었다.
<침류枕流>의 처는 <진사辰斯>를 매우 좋아하여 새 남편으로 삼고는 정사를 독차지하고,
자신의 아들 <신莘>을 후사로 정하였다.
<고국양대제기>
내물왕 9년 목계(木鷄:을유385)
2월, 부여(扶余)가 한산(漢山)에 불사(佛寺)를 창건했다.
10월, <침류枕流>가 졸(卒)하고 아우 <진사辰斯>가 섰다.
<내물대성신제기>
진사왕 원년 (서기 385)
진사왕(辰斯王)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神功 65년 백제의 토무루왕이 죽었다.
왕자인 <아화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인 <진사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
<일본서기>
역사는 영속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백제의 역사 또는 야마토의 역사가 따로 따로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보는 식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독립된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된 실체란 다만 우리의 사유 속에 만 존재할 뿐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역사란 눈 위에 남겨진 발자국 같은 것이다.
피차 왕래가 많았다면 섞일 수밖에 없다.
지배계층의 왕래가 많았다면 한 쪽만의 역사는 반쪽의 역사에 불과하다.
민족(Nation)이나 국가(State)라는 말은 19세기부터 쓰기 시작한 최근의 용어이며
고대 역사에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거론하고 있는 이 시대에 야마토와 백제가 요즘 용어로
민족이나 국가로 얽힌 관계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오고 갈 수 있는 땅이었다.
그 시대 토지는 어느 곳이고 지천으로 있었고 부족한 것은 인력이었다.
외부에서 이주 해 오는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환영을 받았다.
부국강병의 알파와 오메가는 인구의 증가였다.
자연출산보다 인위적인 인구증가가 최상의 방법이었다.
전쟁을 통하여 적국의 백성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기사도 비일비재하다.
근초고왕과 應神천황 父子는 대대적으로 백제인을 야마토로 이주시켰다.
그 후 광개토대왕의 남진으로 한반도의 피난민이 전란을 피하여 대규모로 일본으로 이주 하였다.
(권선철씨의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서 인용하였음)
應神천황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오호사자키大鷦鷯(337-419), 우지와키菟道稚郞子(350-422), 오호야마 大山守命(352-395)이다.
384년 應神천황 근구수는 백제를 침류왕 우지와키菟道稚郞子에게 맡기고 야마토로 들어간다.
385년 백제의 침류왕 우지와키兎道稚郞子는 14살된 아들 와카누케 稚野毛二派(372-424)에게
백제를 맡기고 중원으로 들어간다.
前秦황제 <부견>이 383년 11월 비수대전에서 패하여 대륙의 화북전역이 다시 권력의 재편성 단계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385년 10월, 34세의 오호야마 大山守命(352-395)>이 쿠테타를 일으켜
14살의 조카 와카누케稚野毛二派를 몰아내고 백제왕이 되니 그가 제 16대 진사왕이다.
이것이 오호야마 大山守命의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남당유고와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일본서기는 왕자인 <아화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인 <진사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백제 관련기사가 삼국사기보다 더 믿음이 가는 대목이다.
서기 392년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책임을 물어
應神은 휘하의 장수 4명(모두 武內宿禰의 아들)을 백제에 보내
진사왕 오호야마 大山守命을 야마토로 압송하고 실각되었던 와카누케稚野毛二派를 복위시킨다.
그가 아신왕이다. 아신왕도 이제 나이 21살이 되었다.
서기 394년 應神천황이 사망하였다.
태자 우지와키兎道稚郞子는 황위를 형님인 오호사자키大鷦鷯에게 양보하고 즉위하려고 하지 않았다.
“ 아버지가 어린 저를 태자로 정한 것은 자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다만 어린 자식이 귀엽기 때문이었읍니다.
형님은 외모로 보나 자질로 보나 대왕에 걸 맞는 분입니다. 국가나 집안을 이끌어 가기에 저는 적합하지 않읍니다.”
오호사자키大鷦鷯도 지지 않았다.
“아버님은 하루라도 황위를 비워두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너를 태자로 정하여 미리 국민에게 알린 것이다. 아버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두사람은 서로 사양하면서 황위에 오르지 않았다.
오호야마 大山守命은 아버지 應神천황이 자기를 후계자로 하지 않은 데 불만을 품고 있었고,
또 오호사자키 大鷦鷯가 국정을 대행하고 있는 것도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둘이서 서로 양보하며 아무도 황위에 오르지 않겠다면,
태자를 죽여버리고 내가 즉위하겠다고 마음을 정 하였다.
오호사자키 大鷦鷯는 이러한 움직임을 탐지하고 태자에게 군사를 대비시키도록 당부하였다.
오호야마 大山守命은 상대가 경계하고 있는 줄 모르고 수백인의 군사를 인솔하고 밤중에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녘 우지(菟道, 京都府宇治市)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우지강 건너 우지(菟道)마을에 우지와키 菟道稚郞子가 살고 있었다.
이 때 태자는 남루한 의복차림으로 노를 잡고 뱃사공들과 섞여 오호야마 大山守命을 배에 태웠다.
그리고 배가 강의 가운데 쯤 왔을 때 배를 흔들어 전복시킨다.
오호야마 大山守命과 태자는 강물에 빠져 떠 내려간다.
오호야마 大山守命은 전투복 차림의 중무장, 태자는 간단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오호야마 大山守命은 매복한 군사들이 강가로 나오는 것을 막았으므로 강에서 익사했다.
태자의 이 때의 심경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솜씨 좋은 名人이여, 우지 나루에 서 있는 가래나무(梓)여, 박달나무(檀)여,
그것을 베어 활을 만들까 했는데, 그것을 취하여 활을 만들까 했는데,
뿌리를 보면 兄을 생각하고, 가지(枝)를 보면 누이가 생각나네,
가슴이 매이고 슬픔이 솟구치네, 베지 말고 돌아서자, 가래나무여, 박달나무여.”
서기 394년 오진應神천황이 사망하여
중국에서 전전하고 있던 우지와키菟道稚郞子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하여 돌아 왔을 때
부친이 정 한 태자가 뒤를 이어야 된다고 오호사자키大鷦鷯가 주장한다.
우지와키 菟道稚郞子는 이를 거부하고 오호사자키大鷦鷯를 민다.
백제 진사왕으로 부왕의 허락없이 즉위했다가 일본으로 압송된 바 있던 오호야마 大山守命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서기 395년 다시 황위를 노리고 태자 우지와키 菟道稚郞子를 살해하려고
군사행동에 나섰으나 사전에 대비한 太子에 의하여 우지강(宇治川)에서 익사한다.
우지강은 수량이 많고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강이다.
이것이 오호야마 大山守命의 제2차 왕자의 난이다.
황위를 사양하고 태자는 우지(菟道)의 집에 틀어 박혔다.
그러나 오호사자키大鷦鷯도 버티기를 3년, 역사는 이 때를 공위(空位)의 3년이라고 기록했다.
서기 394년에서 397년까지이다.
태자는
“형님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살이있는 것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결과가 된다.” 고 생각하여 自害를 시도하였다.
태자가 빈사의 중증이라고 들은 오호사자키 大鷦鷯는 난파(難波)에서 우지(菟道)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태자가 의식을 잃은지 3일이 지났다.
오호사자키 大鷦鷯가 울면서 “나의 동생 태자여!” 하고 세번 부르자 태자가 눈을 떴다.
“너무나 슬픈 일이 벌어졌다…. 왜 자해를 해!…. 돌아가신 아버님께 뭐라고 하겠느냐?” 하였다.
태자는 “저희들 두 사람 너무 심했다고 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는 형님이 몇번이고 사양했다고 말 하겠읍니다.” 라고 대답하며
“제 누이 팔전(八田)황녀가 걱정됩니다. 형님이 후비로 거두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하고 당부하며 숨이 멎었다.
오호사자키 大鷦鷯는 소복으로 갈아 입고 한동안 오열을 멈추지 못 하였다.
그리하여 태자를 우지산에 매장했다.
그런 다음 오호사자키 大鷦鷯가 천황으로 즉위하니 그가 61세의 仁德천황이다.
일본서기는 그럴듯하게 소설을 쓰고 있으나
우지와키 菟道稚郞子는 중국대륙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그는 야마토라는 작은 나라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3년상이 지나면 중국에 돌아 가 그 곳에서 그의 꿈을 실현하고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지와키 菟道稚郞子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때 일본을 떠난 뒤 다시 일본에 돌아 온 역사기록은 없다는 선언이다.
그는 이때 일본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부친의 3년상을 끝내고 서기 397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東晉의 정치상황은 내일의 일을 알 수 없는 혼란된 상황으로 빠져 들고 있었고
광개토대왕의 말 발굽은 만주벌판을 종횡무진으로 주름잡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호태왕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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