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도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 등장한 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 클럽인 '붉은악마응원단'은
전쟁의 神으로 여기고 있는 치우천왕의 모습을 심볼로 하였다.
황선홍 선수가 머리에 흐르는 피를 붕대로 감고 투혼을 불사르는 모습에
외국 선수들은 마치 붉은 악마의 환상을 보는 듯 하였으리라.
우리에게 붉은 악마로 상징된 치우는 실존인물인가? 신화인가?
탁록은 어디인가?
전쟁은 언제, 왜 일어났는가?
이제 그 의문을 하나씩 풀어 보자
1. 상반된 기록을 전하는 치우(蚩尤)
대황에 계곤산이 있는데 그곳에 황제여발(黃帝女魃)이라는 자가 있었다.
치우가 갖가지 병기로 황제여발(黃帝女魃)을 공격하니 황제는 응룡(鷹龍:날개 달린 용)을 보내
기주(冀州)의 들에서 치우를 막게 하였다.
치우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에게 청해서 폭풍우를 일으키게 하니 황제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황제가 발(魃:가물귀신)을 보내 폭풍우를 잠재우고 치우를 죽였다.
그러나 발(魃) 또한 신력을 다함으로 승천하지 못하고 발이 머무는 곳에는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가뭄이 들었다
<산해경 대황북경>
치우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황제는 목축을 기반으로 민족이고 치우는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으로 묘사되어 있다.
산해경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과의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유목민족인 황제가 농경민족인 치우를 죽이고
황제족(화하족華夏族)이 농경민족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치우는 신농의 후예로 황제헌원과 탁록지전 등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다.
신농의 치세 말기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세상을 안정시켰는데,
이때 치우가 가장 포악하여 염제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제후들을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였을 때
치우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헌원은 군대를 일으켜 치우를 탁록(涿鹿)에서 잡아 죽였다고 한다.
<사마천 《사기史記》 권1 황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황제여발이 황제헌원으로 바뀌고 기주(冀州)의 들이 탁록으로 바뀐다.
그리고 치우는 염제신농의 후손인데 치우가 난을 일으키자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한다.
관자(管子)는 ‘치우가 노산(盧山)에서 금을 얻어 5가지 병기(兵器)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 사마천의 《사기史記》
구려(九黎)국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九黎之君號曰蚩尤 - 《書經》
치우는 고대의 천자이다. 蚩尤古天子 - 《書經》
孔子三朝記曰蚩尤庶人之貧者 諸候相侵伐 蚩尤最爲暴則蚩尤非爲天子也 -『書傳』
공자는 삼조기(三朝記)에 가로되 치우는 서인(庶人)이며 빈곤하였는지라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침벌함에 치우가 가장 사나웠으니 천자(天子)가 아니다.
제나라 관자 가로되
치우는 廬山의 金이라 (위대하다는 뜻) 五兵을 일으켰으니 분명 庶人은 아니다.
치우가 죽은 후 천하가 다시 소란해지고 황제는 드디어 치우의 형상을 만들어 통치에 앞세우니
천하가 두려워하고 치우가 죽지 않았다 하여 팔방 만방이 복종하였다.
공안국이 가로되 九黎 즉 천하가 인군이라 하였다.
『三朝記大載記』
또 몇 세를 지나 자오지(慈烏支) 환웅에 이르렀다.
이 분은 신령한 용맹이 더없이 뛰어나시고, 머리와 이마를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보호 하셨다.
능히 짇은 안개를 일으키고, 구치(九治){채광 기계}를 만들어 채광하시고
철을 녹여 무기를 만드시고 또 비석박격기를 만드셨다.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이분을 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蚩尤)라 하였다.
대저 치우라는 말은 속언으로 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말이다.
치우천황께서 신농(神農)의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시고 드디어 웅도를 품고
서방에서 자주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수(淮水)와 태산(太山)사이를 점령하셨다.
헌원이 등극하자 곧바로 탁록의 광야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후에 오(吳)장군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 땅을 쳐서 전공을 세우게 하셨다.
<태백일사 神市本紀>
치우천황께서 서쪽으로 탁예(涿芮){산서성의 탁록(涿鹿)과 예성(芮城)}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垈){회수(淮水)와 태산(太山)를 평정하여 산을 헤치고 길을 내시니 그 영토가 만리였다.
<태백일사 三韓管境本紀>
그리고 『주서(周書)』, 『열자(列子)』, 『시자(尸子)』, 『신서(新書)』,
『태일산어람(太一産御覽)』,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귀장(歸藏)』,
『제왕세기(帝王世紀)』, 『춘추석례(春秋釋例)』, 『고금주(古今注)』 등에 나타난 선진시대(先秦時代)의 기록들도 모두
“황제(黃帝), 염제(炎帝), 치우(蚩尤)가 탁록(涿鹿)에서 서로 전쟁을 한 후 이곳에서 동맹(同盟)을 맺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왕퇴에서 발굴된 기록에는 '황제가 치우를 피해 산속에서 3년을 지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치우천황이 중화족을 대표한 헌원의 항복을 받고 그에게 배달한국의 황제(黃帝) 벼슬을 내려주어 회유한 것을
중국측에서는 동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이 기록들이 아마도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홀로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위에 열거한 모든 책들과는 확연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2. 밝혀지는 탁록전쟁의 진실
1899년에 이르러 무려 3500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던 갑골문이 발견되었고
또 1천여자의 난해한 금문이 해독됨으로써 비로소 베일 속에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은(殷)나라의 실존 모습이 드러났다.
갑골문의 발견과 금문의 해독으로 지금까지 신화로 여겼던 치우와 헌원, 신농이 동 시대의 인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치우는 BC 2707년에 즉위한 배달국 <자오지> 환웅으로 BC 2690년경 탁록에서
황제헌원 간에 무려 10여년간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치우는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유목민족인 황제헌원이 농경민족인 염제신농을 공격하자 치우천왕과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집트를 통일한 <메네스>왕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우게 되는 것도 이 무렵이다.
공자는 치우에서 하은(夏殷)으로 이어지는 치적도 사기에서 끊어 버리고
요전(堯傳)을 시작으로 요순 우탕 문무 주공에 이르는 중국의 정통사를 기록하니 태고사를 알 수 없다.
공자가 요전(堯傳) 이상의 역사를 끊는 것에 대하여 당시 사가들의 비난이 있어
상고 기록이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끊어 버린 것은 부당하다는 항의에 대하여
공자는 ‘역사를 뺀 것은 그 기록을 잃어버린 것이다’ 라고 간단히 회피하였다.
그리하여 치우에 관한 기록은 이러한 단편적 기록뿐 지나의 사서에서는 더 이상 찾을 길이 없다.
3. 軍神으로 모셔진 치우(蚩尤)
진(秦)나라 때 동방 8신께 제사를 지냈는데 그중 ‘병(兵)’의 신(神)은 치우였다.
『사기』의 「봉선서(封禪書)」
패정(沛庭)의 관아에서 치우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후
산 제물을 희생시키고 그 제물을 잡아 피를 북(鼓)과 군기(軍旗)에 바른 후 전군이 붉은 기를 들고 출전하였다.
「고조본기(高祖本紀)」
치우가 죽은 후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졌다.
이에 황제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보내어 천하의 위엄을 떨치니 팔방만방이 모두 복종하였다.
『용어하도(龍魚河圖)』
동방의 군신(軍神)·전신(戰神)·병신(兵神)·무신(武神)이라 불리는 치우천왕은
9개 대장간(九冶)을 만들어 캐낸 철광석을 주조해 인류 최초로 칼·창·활·갑옷 등 철제무기와 투석기도 만들었으며
군대를 조직하고 진법과 전술을 개발하여 구사하니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치우에게는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모습에 사람의 말을 하며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도극·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우천왕은 마지막 탁록 전투에서 황제 헌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그를 신하로 삼았다.
또한 유망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 정벌했다.
집안에서 인재 81명을 골라 각종 부대의 장으로 임명해 마치 질풍노도와도 같이 연전연승하니
적들이 겁에 질려 굴복하여 그 위세를 천하에 떨치었다.
치우천왕이 12명의 제후를 공격해 죽어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니,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치우천왕이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고 일거에 이를 멸망시키니,
'관자'에서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라는 문구가 이를 두고 말함이다.
치우천왕이 전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는
자신은 보·기병 3000명을 이끌고 사방에서 적을 참살하니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 못하게 하니 적군은 마침내 두려움에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 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치후 사후 동이족은 물론 화하족도 치우를 군신(軍神)으로 모셨다.
4. 탁록과 치우성은 산서성 해주에 있다
치우가 황제 헌원(軒轅)과 전투를 한 곳은 현 하북성 북부의 탁록(涿鹿)이라고 우리는 알고있다.
현재지명을 고대의 그것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이지만,
하북성이 아니라 산서성 운성현(運城縣) 해진(解鎭)이라는 주장이 있다.
산서성 남단인 해주(解州)의 염지(鹽池)를 중심으로 한 일대가
치우와 헌원이 전투를 벌린 지역임을 주장하는 아래의 근거 자료는 지나 웹에서 발췌한 것이다.
해진(解鎭)은 고대에 해량(解梁)이라고 불리웠었는데 해현지(解縣:解州誌)에는
"原解梁亦稱涿鹿" 이라는 기록이 있고,
안읍현지(安邑縣誌)에는 "他是安邑"蚩尤村"(今改爲從善村)人" 이라는 기록이 있다.
안읍(安邑)에 치우촌이 있었는데 개명된 이름은 종선촌(從善村)이라 한다.
당나라 시인 왕한(王翰)이 지은 解州<鹽池曉望>의 시(詩) 중에는
"涿鹿城頭分曙色,素池如練迥無塵"
이라는 귀절이 있어 탁록(涿鹿)이 해주에 있고 탁록성도 있음을 말한다.
<河東鹽法備覽、鹽池門勝跡>이라는 소금과 염지관련 고서에는
"軒轅氏誅蚩尤于涿鹿之野,血入池化鹵,今池南有蚩尤城,相傳是其喪處"
라는 기록이 있어 해주,안읍 지역에 위치한 염지가 전투지이고 염지의 남쪽에 치우성(蚩尤城)이 있음도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 羅必이 지은 <路史>에는
"黃帝與蚩尤轉戰到中冀,才活捉了蚩尤,並立即就地處死,故殺蚩尤處稱做"解"
라 기술하고 있다.
산서성 남부는 고대의 기주(冀州)지역인데 기주의 중심인 "解" 즉, 해주(解州)에서 치우가 죽었음을 뜻한다.
<路史>에는 일설, 헌원의 성(姓)이 "公孫"이라는 기록도 있다.
송나라 문인 宋沈括의 <夢溪筆談>에는 "解州鹽池的滷水呈紅色,俗話稱謂"蚩尤血" 라 하여
해주의 염지는 붉어서 간수가 들어간 듯 한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치우의 피"라 한다고 적고 있다.
<孔子三朝記>에는
"黃帝殺之(蚩尤)于中冀,蚩尤股體身首異處,而其血化爲鹵,則解之鹽池也"
라 하여 절단되어 죽은 치우의 피가 간수처럼 변하여 해주의 염지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雲笈七簽、軒轅本紀>의
"黃帝殺蚩尤于"黎山之丘",其實"黎山"正是中條山的別名,距解鎭十五里,它是黃帝殺蚩尤于"解"的又一證據"
라는 기록은, 치우가 죽은 곳을 "여산(黎山)언덕"이라 하는데 여산은 중조산(中條山)의 다른 이름으로
해진(解鎭)에서 십오리에 있어, 치우가 해주에서 죽은 하나의 증거가 된다.
중조산은 백이숙제의 묘(墓)가 있는 수양산(首陽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그 고봉은 "탕산(湯山)"이다.
이상 대략으로 산서성 해주(解州:今運城縣) 일대를 치우가 헌원과 전투를 벌리다
죽음을 당한 지역임을 주장하는 근거 자료를 살펴보았다.
탁록전투가 하북성 북부에서 일어 난 것과 산서성 남단에서 일어 난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하북성 북부에서의 사건이라면 현재의 북경을 중심으로한 하북성 북부일대, 홍산지역 까지
모두 헌원의 강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산서성 남단에서의 사건이라면
태행산맥 이동지역은 모두 치우의 강역이었다는 재야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역판도는 치우 이전이나 이후시대의 우리역사를 풀어 가는데도 수월한 길잡이가 될 수가 있다.
현재 우리 사학의 입장에서 치우시대를 논하고 연구 한다는 것이 힘겨운 일이긴 하지만,
"동이족수령" 이라고 치우를 말하면서도 헌원과 함께 중화민족의 위대한 선조로 만들어 가고 있는
저들의 행태를 봐야 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아래 이미지는 대명일통지(1461)의 산서성 평양부(平陽府) 편과 산서통지(1682) 해주(解州) 안읍현(安邑縣)의 고적편,
산서시집요의 안읍현편에서 발견한 치우성(蚩尤城) 기록들로 위에 소개한 근거들과 상통한다.
5.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일반적으로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의 삼황과
소호(少昊)·전욱(顗頊)·제곡(帝嚳)·요(堯)·순(舜)을 오제라고 한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한국의 학계에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를 모두 전설시대의 이야기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이유로는 중국의 정사(正史)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삼황시대를 전설시대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3년, 호남성 마왕퇴(馬王堆)의 제3호분에서 『황제사경』이 출토되면서 그동안의 황제 기록이
전설이 아닌 엄연한 역사 시대의 기록임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이다.
만약 황제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면 황제가 싸웠던 우리의 치우천황 역시 사실이 아닐 수 없고
동시대에 같은 역학관계에 있던 염제 신농 역시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정확히 기술해놓았던 우리의 『한단고기』 등의 기록 역시
당연히 진실임이 입증된 것이며 한민족사 발전에 장애가 되어 왔던
『한단고기』의 위서(僞書) 시비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황제사경』을 검토했던 중국학자들은 무려 7000~8000년 전의 인류 문명수준에 비교하여
겨우 5000년 전의 사건들을 전설로 취급해왔던 그동안의 학술적인 연구태도를 스스로 반성하고
『국어』, 『좌전』의 기록들이 틀렸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마왕퇴의 1호묘에서 출토된 ‘T’자형 백화도는 3장의 견직물을 합쳐서 만들었는데
가운데 몸통 부분은 이음새 없이 짜여 있다.
옷의 상단 부분은 천상의 풍경으로 해(日)와 달(月), 촉용(燭龍) 그리고 천상의 문신(門神)이다.
하단 부분은 제후(諸侯)의 도장(印)인 교룡(交龍)과 제사(祭祀)를 모시는 문양이 있다.
이 옷의 제작년도가 이미 2500년을 넘었고, 또 실크의 제작기술이 무려 5000년 전으로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치우천황의 시대를 원시시대로만 보려는 시각은 바뀌어야 한다.
사마천은 상고금문과 갑골문을 해독할 수 없었으니 삼황오제시대를 전설의 시대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치우와 황제헌원, 염제 신농은 동 시대의 인물이며
전설이 아닌 BC 2600년대에 실존한 엄연한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6. 중국의 묘족은 치우의 후손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는 “삼위산은 삼묘족(三苗族)의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회남자(淮南子)』에는 “묘족은 머리채를 삼끈으로 묶는 상투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에서 상투를 트는 민족은 우리와 삼묘족 뿐이므로
삼묘족의 터전은 치우천황 당시 우리 한민족의 영역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는 묘족 인구는 약 600만 명으로 그중 약 500만이 중국 내에 살고 있다.
중국 사천민족출판사의 『묘족사(苗族史)』에 “묘족의 원조(遠祖)는 치우”라고 하면서
선조의 노래 ‘상보상랑가(相菩相娘歌)’의 내용을 전설, 풍속, 관습 등으로 나누어 연구한 결과
이들의 선조가 치우 가우리[蚩尤九黎]족이 틀림없다고 썼다.
묘족(苗族)의 묘(苗)는 우리말의 ‘움’으로, 곧 ‘움족’이 된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치우천황을 그들의 원시조로 모시고 있다.
『산해경』 「대황북경(山海經大荒北經)」에 “흑수(흑룡강)의 북쪽에 묘민족이 있다(黑水之北有人苗民也)……
초기 묘민들의 지역은 겨울이 혹독하게 추워서 반지하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라고 기록하여
읽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 이유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묘민(苗民)들이 주로 살고 있는 지역은 모두 중국 양자강의 상하지역인데,
이곳의 날씨는 결코 ‘겨울이 혹독하게 추운’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묘민들은 흑수변(黑水邊)에 살다가 치우천황의 소개작전(疏開作戰)에 의하여 남쪽으로 내려 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묘족간사(苗族簡史)』에는
“약 5000년 전 장강(長江) 중하류와 황하(黃河) 하류에 묘족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묘족은 치우의 후손이다.
이들은 삼묘(三苗)족의 일부로서 후일 요(堯), 순(舜), 우(禹)를 거치면서
거듭 침략을 당하고 그중 일부는 형만(荊蠻)으로 발전하여 초(楚)나라를 세웠으며
나머지는 산간으로 들어가 묘족(苗族), 요족(猺族), 여족(黎族)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북쪽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모두 훈족, 몽골족, 선비족으로 융화되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7. 치우(蚩尤) 현도(玄道)씨
<심백강> 선생은 죽서기년과 일주서를 통해 치우천황의 씨족명이 현도씨라고 밝히고 있다.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황제헌원씨, 전욱고양씨, 제곡고신씨, 제요도당씨, 제순유우씨처럼,
우리에게 붉은 악마로 잘 알려진 치우천황께서도 씨족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도씨라는 것.
왜 씨족명을 현도라고 했을까?
<심백강> 선생은 현묘지도(玄妙之道)의 현(玄)은 한민족의 핵심사상 선(仙)의 요체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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