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

삼국사기 초기 기년 조정(3)

지보고 2023. 10. 17. 18:22

2. 고구려 신명선제는 누구인가?

 

삼국사기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고구려 황제가 있다.

5대 모본제의 뒤를 이은 6대 신명선제(48-121 재위 73-111)이다.

아버지는 대무신제 <무휼無恤(4~64)>이며 어머니는 갈사태후(曷思太后 20-96)이다.

갈사태후는 동부여 <해소解素(BC43~47)>의 손녀이다.

 

신명선제의 휘()는 재사(再思) 또는 녹신(鹿臣)이었고

AD48년에 태어나 121년에 죽었으며 재위에는 73년부터 111년까지 있었다.

 

그는 그의 동복형 <호동好童 (33-60)>태자가 정쟁에 휩싸여 자결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정치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모본왕이 시해되자 갈사후에 의하여 신명선제로 즉위하게 되는 것이다.

 

신명선제는 어머니 갈사후에게 정치를 맡기고 갈사후의 뒤를 이어 

동부여 출신 황후인 여걸 <호화芦花(49~132)>가 정치 전면에 나서 고구려의 여인천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신명선제의 妃인 <호화芦花(49~132)>황후는 185cm의 키에 체중이 90kg 인 여걸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초기 기년은 온조 집권 9년과 동부여 출신 갈사후가 집권한

신명선제 39년을 감추기 위하여 태조가 93년간 집권한 것으로 하다 보니 고구려 초기기년이 뒤틀리게 된것이다.

 

 

(1) 광명대제 사망년도의 미스테리

 

삼국사기는 광명대제 <유리>가 죽은 해를 AD 18년이라 하고 남당유고 고구려 사초는 AD 28년이라 한다.

어느 것이 맞는 역사적 진실일까?

필자는 삼국사기의 기록인 AD 18년에 <온조>의 반정으로 <유리>왕이 피살되고

온조가 9년간 고구려를 통치한 것으로 본다.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삼국사기는 광명대제 피살 후 바로 대무신제가 즉위하였다고 하고

고구려사초는 광명대제가 AD 28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면 남당유고 광명대제 18년부터 27년까지의 기사를 살펴보자

 

三十七年戊寅, 四月,<解術>溺死<礪津>,祭須尋其尸,葬于<王骨岺(八虎畔向陽山)>.

七月,<烏伊>,< ><>,<>之參也.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37년(AD18)무인,

4월, <해술(BC10-18)>이 려진(礪津)에서 익사하여

(수신에게) 제사하고 깊은 곳에서 그 시신을 찾아 왕골령(王骨岺)에 장사했다.

7월,<오이烏伊(BC64-18)>가 죽어, <보득>의 아들 <모린>이 섰는데, <오이>의 사위이다.

 

三十七年戊寅 四月 解術溺死礪津不得其尸

沸流人祭須得之葬于王骨岺(八虎力下畔向陽山),

賜須金十斤田十頃, 解術禾氏出也性如婦女, 慕解明及珍公主而死.

七月黃龍王烏伊薨, 宝得子毛獜代之 烏伊之女婿也. 烏伊柵城褥薩烏文之子也.

慷慨有大志事東明爲元勳,

以解明事傷心至是又見解術事得疾, 累夢解明羊吉而驚劇而終年八十三.

<고구려사략 유류기>

 

유류왕 37년(AD.18)무인년

4월 <해술>이 려진에서 익사하여 그 시체를 찾지 못했다.

비류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아서 왕골령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는 금 열 근과 밭 십 경을 주었다.

<해술>은 <화禾>씨의 아들로 성품이 부녀자 같았으며, <해명>을 사모했던 <진珍>공주(해명의 처)도 따라 죽었다.

7월 황룡왕 <오이>가 죽어, <보득>의 아들 <모린>이 섰는데, 오이의 딸의 남편이다.

<오이>는 책성욕살(태수) <오문烏文>의 아들이다.

동명의 으뜸 공신으로 큰 뜻이 있어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슬퍼하고 한탄하였는데,

<해명>의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이에 또 <해술>의 일을 보고 병을 얻었다.

<해명>과 <양길>의 꿈이 누적되어 심하게 놀라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리왕 37년(18년)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애통해 하여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 (祭須)가 찾아서 알리니, 마침내 예(禮)로서 왕골령 (王骨嶺)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頃)을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에 두곡(豆谷)의 이궁에서 죽으니, 두곡의 동쪽 들판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유리명왕 (瑠璃明王)이라 하였다.

대무신왕 (大武神王)이 즉위하였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무휼 (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성장하여서는 영웅호걸로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에 태자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어머니는 송(松)씨로서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解術太子(해술태자)는 禾太后(화태후)의 소생이다.

성격은 온화하고 인자하고 지극히 효성스러우니 마치 婦女(부녀)와 같았다.

解明(해명)이 죽자, 明王(명왕, 유리왕) 역시 解術(해술)을 太子(태자)로 삼아서, 禾太后(화태후)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군신들은 그가 人君(인군)의 모습이 없다며, 이를 그만두라 간하니, 禾氏(화씨)의 무리들은 不快(불쾌)하여,

解術(해술)에게 사졸들을 길러서 병권을 장악하라고 설득하였다.

解術(해술)이 말하길,

"비록 解明(해명)의 용감함과 都切(도절)의 인자함으로도 父王(부왕)에게 수용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저희 어머님은 미천하여 핍박을 당할테니, 어찌 감히 太子(태자)를 바라겠소이까?" 라고 하며, 결국 듣지 않았다.

곧 無恤(무휼)이 太子(태자)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니, 手下(수하)의 사람들이 나날이 無恤(무휼)에게 돌아갔다.

解術(해술)은 처음에 解明(해명)과 서로 좋아하여, 夫婦(부부)와 같아서, 그들이 男女(남녀)가 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

이때 이르러 無恤(무휼)은 解術(해술)을 尊大(존대)하였으나, 나이가 많아서 그의 밑에 들어가기를 수치스러워하였다.

그리하여 礪津(려진)에 가서, 解明(해명)에게 제사지내고, 물에 뛰어들어 죽으니

그 노래가

"解明(해명)아! 解明(해명)아! 어디로 갔느냐?

解術(해술)이 解術(해술)이 여기에 왔다!

나도 너를 따라 물속으로 가련다.

天上(천상)에서 만나거든, 夫婦(부부)가 되자꾸나." 라고 하였다.

明王(명왕)이 이를 듣고 애통해 하며 말하길

"짐이 자애롭지 못해 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어찌 사람들을 볼 수 있을꼬" 라고 하였다.

곧 그 시체를 찾았으나, 7일동안 찾지 못하다가,

沸流人(비류인) 祭須(제수)가 물의 성질을 알 수 있어서, 下流(하류)에서 찾으니,

이를 듣고, 왕은 곧 太子(태자)의 禮(례)로서 解明(해명)의 곁에 장사지냈다.

祭須(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하사하였다.

<본기신편열전>

 

유리왕은 고구려사초(략)에서는 28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해술과 오이와 함께 18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14년 송태후의 비류세력에 의하여 무휼태자가 정윤이 되자 해술태자는 자살하여 그의 형 해명태자의 뒤를 따른다.

화태후계와 <오이>는 정변을 꾀하게 되고 정변이 실패하자 한산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온조가 정변을 일으켜

유리왕을 두곡의 행궁에서 제거하고 마침내 도성(北都)을 점령하게 되고

이후 온조가 죽을때(28년)까지 고구려를 통치하게 된다.

 

고구려사초(략)의 이후 10년간의 유리왕 기록은 온조의 치세 기록이다.

 

고구려사략 유류기는 소서노와 유리의 딸인 <珍>공주(해명의처 BC18년생)가 <해술>을 따라 죽었다고 하였으나

온조의 同腹異父 동생인 <珍>공주는 살아남아 훗날 <무휼>이 즉위하자 황후로 책봉된다.

고구려사초(략)은 유리왕이 죽은 해를 유리왕의 母 <예>씨가 죽은 해인 28년에

<소서노>와 함께 슬그머니 집어넣어 온조의 정변을 은폐하려 한 것이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유리왕이 죽은 후 <무휼>이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다보니

고구려 초기 기년이 뒤틀리게 된다.

 

三十八年乙卯, 正月, 北都大震,移于東都. <默居>太輔.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38년 을묘(19년) 정월 북도에 큰 지진이 있어 東都로 옮겼다.

묵거를 태보로 삼았다.

 

AD 19년에 북도에 큰 지진이 있었다는 것은 정변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二年己巳, 正月,.... <汗南>旱蝗,民飢來投者千餘戶,賑恤而置之<西河>.

十二月,大鍊兵馬于<>. <烏婁>右輔主兵, <松屋勾><沸流>沛者主刑,

<溫祚>改國號曰<伯濟>. <解婁>爲太輔, <解素>之次子也.

<고구려사초 대무신제기>

 

대무신제 2(AD29)기사, 정월, (중략)

한남이 가물고 메뚜기 피해로 인하여 백성들이 굶게 되어 찾아와 의지하려는 이들이 천여호가 되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서하(西河)에서 살도록 하였다.

12, <>수 가에서 병마 훈련을 크게 하였다.

<오루>를 우보로 삼아 군사를 주관케 하고, <송옥구><비류>패자를 삼아 형벌을 주관케 하였다.

<온조>가 나라이름을 백제(伯濟)로 바꾸었다.

<해루>를 태보로 삼았는데, <해소>次子일 것이다.

 

대무신왕 2년(19) 봄 정월에 서울에 벼락이 쳐서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투항해 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사초와 삼국사 고구려본기의 19년 기사는 온조의 정변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 해에 온조계의 1천여 호가 東都로 옮겨 왔으며,

온조가 東都의 朝陽殿에서 즉위하여 졸본세력인 <해루>를 태보로, <오루>를 우보로,

<송옥구>를 비류패자로 임명하고 나라이름을 백제(伯濟)라 하였다.

 

三十九年庚辰, 三月, <東明>神廟于<龍山岺(勃利廟岺)>. <再思>公主與<多婁>來朝,

<><>兩公主妻<多婁>, 而賜'正胤冠刃', 以爲<汗南>'傳國之璽'.

九月,田于<骨句川()>,東宮得神馬狀如<巨婁>.

上曰:"<東明>復興之兆. 十月,<扶余>獻赤烏一頭二神.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 39년 경진(AD20)

3월 용산령(龍山岺)에 동명신묘(東明神廟)를 세웠다.

재사(再思)공주와 다루(多婁)가 문안 와서, <선蘚>공주와 <백苩>공주 둘을 <다루>에게 시집보내고

<다루>에게 정윤관인(正胤冠刃){왕위계승자임을 표시하는 관모와 보검}을 내려,

한남(汗南)국 전국옥새(傳國玉璽)로 삼게 했다.

9월, 골구천에서 사냥했는데, 동궁이 거루를 닮은 신마를 얻으니, 상이 "동명(東明)이 다시 일어날 징조로다."라 하였다.

10월, 부여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가마귀를 보내왔다.

 

대무신왕 3년(20)

봄 3월에 동명왕 (東明王)사당을 세웠다.

가을 9월에 왕이 골구천 (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 이름을 거루(駏䮫)라 하였다.

겨울 10월에 부여 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파견하여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까마귀는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하여 붉은 색이 되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합칠 것입니다.” 하였다.

<대소>가 기뻐서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답하기를

“검은 것은 북방의 색입니다.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왕이 얻어서는 갖지 아니하고 나에게 보내었으니

두 나라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대소>가 그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광명대제39년 기사와 대무신왕 3년의 기사는

온조가 고구려왕위에 오른 후 2년째 되는 해 AD20년의 기사이다.

용산에 동명신묘를 세운 것은 온조가 금와왕과 우태, 소서노를 모시는 사당을 세운 것을 말한다.

까마귀는 본래 검은 색의 새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이 새는 흔히 흉조를 알리는 새로 여겨졌다.

그러나 ‘붉은 까마귀’는 이와는 반대로 상서를 나타내는 새로 여겨졌다.

이 설의 연원은 중국 주 武王이 은의 <紂>임금을 칠 때 붉은 까마귀가 나타났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일두이신(一頭二身)의 기사는 백제본기에도 등장한다.

고구려본기에는 두개의 나라가 고구려와 동부여라고 하였으나, 백제와 고구려를 말한다.

머리가 붙은 쌍둥이의 까마귀가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살아남기도 매우 어려우며,

더더구나 붉은 빛을 띤 까마귀가 나타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머리가 하나에 몸통이 두개인 짐승이 나타나면 그러한 동물을 획득한 나라에서는

주변의 국가를 병합할 징조라 생각하여 상서롭다하였다.

동부여가 그러한 동물 혹은 상징물을 제작하여 고구려에 주었다면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하나가 되었음을 축하하는 선물이었을 것이다.

즉, 고구려에 온조가 즉위하였음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또 이해에 갈사태후(20-96)(국조왕 태조의 할머니)가 태어났으며.

백제의 우보 <해루>의 오누이인 갈사태후(BC16-36)를 동부여에서 보내와 백제와 동부여의 우호를 다졌다.

 

四十七年戊子,八月, 太后崩,春秋八十五,葬於<豆谷>東原. 十月,上與皇后崩,于豆谷離宮.

上春秋六十八,皇后八十三. 皆葬于太后陵內. 東宮卽位於<豆谷>離宮.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47년(AD28)무자,

8월, 태후(예태후)>가 죽었다. 춘추 85세였고 두곡(豆谷) 동원(東原)에 장사했다.

10월, 상과 황후(소서노)가 두곡(豆谷) 이궁(離宮)에서 죽었다.

상은 춘추 68세였고, 황후는 춘추 83세였다.

둘 다 태후릉 경내에 장사했다. 동궁이 <두곡>의 이궁에서 즉위하였다.

 

 

元年戊子, 十一月, 改元<大武>. <多勿候><松義>為太輔主民,

以母<>后為太后, 以妃<>公主為皇后. <龍山>, 告卽位. , 年二十五.

<고구려사초 대무신제기>

원년{AD28}무자,

11월, 연호를 대무(大武)로 고쳤다.

다물후(多勿候)인 <송의松義>를 태보 겸 주민대가로 삼고,

모친인 <송松>후를 태후로 올렸으며, 비(妃)였던 <진珍>공주를 황후로 올렸다.

<용산{동명릉}>에 가서 즉위하였음을 고하였다. 이해에 나이 25세였다.

 

47년(A.D28)무자년

8월 (예)태후가 춘추 85세로 죽었다, 두곡 동원(동쪽 평원)에 장사를 지냈다.

10월 황후와 왕이 태후릉을 찾아뵙고 두곡이궁으로 돌아왔다.

왕이 먼저 죽고 황후가 따라 죽었는데 예태후릉 경내에 장사를 지냈다.

왕의 춘추 68세였고, 황후는 춘추 83세였다. 동궁이 보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

<고구려사략 유류기>

 

온조46년(28년) 봄 2월에 왕이 돌아갔다.

원년 다루왕 (多婁王)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도량이 넓고 명망이 높았다.

온조왕 재위 28년에 태자가 되었고, 46년에 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유리>는 AD18년에 죽었고, <소서노>는 BC6년에 죽은 것을

태후 <호예>가 죽은 해에 두 사람의 죽음을 끼워 넣어 <온조>의 반정을 은폐하였다.

<소서노>가 <유리>의 황후로 <유리>와 같이 죽었다는 것은

상식적인 생각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 해 <온조>가 죽고 고구려는 태자 <무휼>이 즉위하니 25세였고

백제는 <다루>가 한남왕으로 즉위하니 27세였다.

고구려사초는 <해명>이 AD 8년에 여진 동원에서 자결하였고

<해술>은 AD 18년에 여진에서 익사하였다고 하나

18년 온조반정 때 <유리>와 <오이>. <해명>과 <해술>이 함께 죽은 것으로 보인다.

 

 

(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년 조정

 

묘호
(생몰년도)
             父               母 삼국사기 재위기
(재위년수)
조정 재위기
(재위년수)
1. 동명성왕
(BC58-BC19)
고두막(모수제)
(BC118-BC59)
옥유화
(BC74-BC24)
BC37-BC20
(18년)
BC37-BC20
(18년)
2. 광명대제
(BC40-18)
추모(동명성왕) 호예好禮(BC57-28) BC19-18
(37년)
BC19-18
(37년)
    온조
(BC44-28)
優台(BC67-BC41) 소서노(BC66-BC6)   19-27
(9년)
3. 대무신제
(4-64)
유리(광명대제) 松后(BC32-34) 19-43
(25년)
28-63
(36년)
4. 민중제
(7-68)
유리(광명대제) 松后(BC32-34) 44-47
(4년)
64-67
(4년)
5. 모본제
(40-73)
무휼(대무신제) 烏氏(15-94) 48-52
(5년)
68-72
(5년)
6. 신명선제
(48-121)
무휼(대무신제) 曷思后(20-96)   73-111
(39년)
7. 태조황제
(68-165)
재사(신명선제) 호화芦花(49-132) 53-145
(93년)
112-145
(34년)
8. 차대제
(71-165)
재사(신명선제) 호화芦花(49-132) 146-164
(19년)
146-164
(19년)

차대제 이후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고구려사초의 기년이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