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진경(魏花眞經) 完譯(1)
위화진경은 남당 <박창화>씨가 일본 왕실도서관에 촉탁으로 근무할 때 필사한
신라 최초의 화랑이며 1대 풍월주인 <위화魏花(487- )>에 대한 이야기이다.
풍월도를 서두로 <김유신>의 아버지인 <소연逍衍>장군의 이야기로 끝맺고 있다.
주역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여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였으니 한문에 해박한 이의 지도와 편달을 바라는 바이다.
1. 풍월도(風月道)
金華䙴子 朴達玉耶 淨修開祀
금화(金華)선인(仙人) <박달朴達>옥야(玉耶)는 몸을 깨끗히하여 가다듬고 사당 문을 연다.
높은 산에 오를 선(䙴)은 선(仙)의 古字인 사람이 산 위에 있는 선(屳)과 같이 사용한 글자이다.
선자(䙴子)는 선인(仙人)을 말한다.
옥야(玉耶)는 불교의 옥야경(玉耶經)에 나오는 아름다운 부인의 이름이다.
옥야(玉耶)는 美人의 불교식 용어이다.
뒤에 <위화魏華> 옥야 이야기가 나온다.
風雲九天飛車 日月萬古長燈 與人之道呼吸 風月馳聘雲日
바람과 구름은 구천(九天)을 나는 수레요 해와 달은 만고(萬古)의 긴 등불이라.
사람과 더불어 함께 호흡하는 도(道)이니 바람과 달은 구름과 해를 뒤쫓아 마중하노라
풍운구천비거(風雲九天飛車) 일월만고장등(日月萬古長燈)
여인지도호흡(與人之道呼吸) 풍월치빙운일(風月馳聘雲日)
위화진경의 서두(書頭) 위 두 구절은 화랑도의 전신(前身)인
풍월도(風月道)를 수레와 등불에 비유하여 가장 잘 나타낸 글이다.
구천을 나는 수레는 공간의 개념이고 만고의 긴 등불은 시간의 개념이다.
풍월도는 天地人 三才와 神仙사상을 담고 있다.
바람과 구름을 타고 천공(天空)중에서 해와 달을 마중나가는 신선의 모습...
사당 안에는 이러한 신선도가 그려져 있지 않았을까?
주역(周易)에서 바람과 구름은 하늘(해)과 땅(달)의 은택이다.
구름은 땅의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 생명수를 내려 주고,
바람은 하늘의 기운이 땅으로 내려와 만물을 생장수장(生長收藏)한다.
在昔熙昊之世 白馬天降 聖人造那
옛날 밝고 광대하던 시절에 백마(白馬)가 하늘에서 내려오니 성인(聖人)께서 나라를 세우셨도다.
파소=선도성모(혁서거=천신) - 혁거세=일광(BC5?-66?)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하면서 신라를 수위(首位)에 올리기 위하여
기년을 1갑자 정도 끌어 올려 18대 실성왕 이전의 삼국사기 기년은 맞지 않는 것이다.
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해는 BC57년이 아닌 AD 8년이다.
天神地仙相繼 而起德洽于上 樂腴於下
천신(天神)과 지선(地仙)이 잇달아 일어나 위로는 덕(德)이 흡족하고 아래로는 즐거움이 풍성하였다.
歲和年豊國泰民安 舞袖遍山頌歌連天
시절은 화목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여,
춤추는 옷소매가 산에 가득하고, 기리는 노래 소리가 하늘에 잇닿았다.
傳維朴昔金一體之心 風是康燕魏三代之目
다만 박(朴), 석(昔), 김(金)이 한 몸이 되어 마음을 전하니
풍월도(風月道)는 강(康), 연(燕), 위(魏) 삼대(三代)의 요목(目)이라.
신라는 神國의 나라이고 二聖의 나라로 모계를 중심으로 골품을 중히 여긴 나라이다.
혁명을 통하여 朴, 昔, 金이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二聖 중 여왕이 남왕 보다 권력이 높아 여왕의 副君이 되어 왕위를 계승하거나
여왕의 사위나 아들인 朴, 昔, 金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朴, 惜, 金이라는 姓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후
<혁거세>의 후손을 朴씨로 <탈해>의 후손을 昔씨로 <알지=세한>의 후손을 金씨로 姓을 삼은 것이며
백성은 姓이 없었으며 공경대부들 중 나라에 큰 공을 세우면 帝가 특별히 姓을 하사하였으며
일반 백성은 고려 중엽 이후가 되어서야 족보를 만들어 姓을 사용하였다.
康, 燕, 魏 삼대(三代)는 <탈해>의 아들인 <강조康造>, <포공>의 아들인 <연공燕公>,
<염신>의 아들인 <위화魏花> 삼대(三代)를 말하는 것인가?
解脫上化之妙 遁甲開山之奧 盡在于此 天秘地(藏)可以忍之實
해탈하여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신묘함과 둔갑하여 선을 개창하는 오묘함이
여기에 빠짐없이 담겨있어 하늘이 숨기고 땅이 감추니 가히 인내의 결실이라.
興緣之寶大覺之珍 凡我郞徒潛心玩哉
큰 인연의 보배요 큰 깨달음의 보물이니 무릇 우리 낭도(郎徒)들은 마음속에 채워 담아 갖고 놀 것이로다.
2. 고삼도(古三徒)와 후삼도(後三徒)
傳曰達門大母生許婁曷文之子許乙是爲乙公
전(傳)에 말한다. <달문達門>대모(大母)가 <허루許婁> 갈문왕의 아들 <허을許乙>을 낳으니 이가 을공(乙公)이다.
대노(구을) - 허루許婁 (80-155)
탈해(장씨) - 달문達門 (97-171)
허루(달문) - 허을許乙 (131-176)
<허루>는 <탈해(51-130) 4대왕 재위 107-125>의 사위이고 허을(을공)은 <탈해>의 외손자이다.
好神仙得道與屈公吉公齊名當世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득도하고 <굴공屈公>, <길공吉公>과 더불어 당세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심공(구을) - 굴공屈公 (66-141)
윤공(흘고) - 길공吉公 (113 - 170?)
<길공吉公>은 파사왕 32년(157년)에 골문 각간이 되었다.
<흘고>대모기를 보면 <길공>은 113년생이다.
<굴공>은 66년 丙寅년생으로 호랑이 띠이고, <길공>은 113년 癸丑년생으로 소 띠이다.
파사왕 16년(141) 3월
仙老屈公薨 以角干禮葬之 屈公者心公之子也 性淸閑 好神仙
壽至七十六 及其仙化 身體如玉 人多奇之
선노(仙老) <굴공屈公>이 죽어 각간례로 장사를 지냈다.
<굴공>은 <심공心公>의 아들인데, 성품이 청명하고 여유로우며 신선을 좋아하였다.
수명이 76세에 이르러 선화(仙化 : 신선의 죽음)하니 신체가 마치 옥(玉)과 같아서 많은 사람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屈公騎虎故其徒稱虎徒奉鳳凰大母
<굴공屈公>은 호랑이를 타고 다닌 까닭에 그 낭도(徒)를 칭하여 호도(虎徒)라 했으며 <봉황鳳凰> 대모를 받들었다.
吉公騎牛故其徒稱牛徒奉紇古大母
<길공吉公>은 소를 타고 다닌 까닭에 그 낭도(徒)를 칭하여 우도(牛徒)라 했으며 <흘고紇古> 대모를 받들었다.
탈해(금당) - 흘고紇古(89- ?)
<흘고>는 탈해의 딸이며 89년 기축년 생으로 소띠이다.
<흘고>는 14살(102년)에 유리왕(51-107, 3대왕 재위 84-106>의 후궁이 되었다.
乙公騎白羊故徒爲羊徒奉金剛大母 是爲古三徒
을공(乙公)은 백양을 타고 다닌 까닭에 그 낭도(徒)를 칭하여 양도(羊徒)라 했으며 <금강金剛> 대모를 받들었다.
이를 고삼도(古三徒)라 한다.
을공(乙公)은 131년 辛未년생으로 양띠이다.
신라의 풍월도는 고삼도(古三徒)인 <굴공>, <길공>, <을공>으로부터 시작되어
<위화>가 화랑인 된 후 지방 호족에 분산된 모든 낭도를 통합하여
법흥왕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것이 삼국통일의 기반이 된 것이다.
黑齒之徒奉道生大母爲鷄徒
<흑치黑齒>의 낭도(徒)는 <도생道生> 대모를 받들어 계도(鷄徒)가 되고,
유리(아리) - 파사婆娑(90-158, 5대왕 재위 126-158)
허루(?) - 사성史省(100?-173)
파사(사성) - 도생道生 (121-174)
?(조호) - 흑치黑齒 (133-186)
<도생>은 121년 辛酉년생으로 닭띠이고 <흑치>는 133년 癸酉년생으로 닭띠이다.
<도생>은 <지마(131-191)>의 누나로 백계성모로 불리었으며 <도생>의 딸 <복생(155- ?)>은 적계성모로 불리었고
<도생>은 <파사>, <허루>, <마제>를 섬기다 159년 <마제>가 죽자 <흑치>의 처가 되어 세 상둥이를 낳다 1
74년에 54세의 나이에 죽었다.
木我之徒奉阿世大母爲狗徒
<목아木我>의 낭도(徒)는 <아세阿世> 대모를 받들어 구도(狗徒)가 되고,
일광(알영) - 차웅 남해왕(28?-84, 2대왕 재위 66-83)
천신(월지) - 운제(26?-108)
차웅(운제) - 아세(74- )
<아세>는 남해왕 <차웅>의 딸이며 74년 甲戌년생으로 개띠이다.
<목아>는 <아세>의 私臣이다.
지마왕 23년(181) 4월
初阿世大母有私臣木我者 不知何許人也
其根肥大 沈沈有味 阿世藏于密室 而好之
日知大王聞而惡之 遂焚于川上 自後有大蚊生于川
上多害人 命卜之 則木我之化也
乃配阿世 而作祠 而祭之 蚊自不見 而雨調 年豊
처음에 <아세阿世>대모(大母)에게 <목아木我>라는 사신(私臣)이 있었는데 어찌 받아 들인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목아>의 성기가 크고 왕성하여 맛이 있어 <아세>가 밀실에 감추어 두고 좋아하였다.
<일지日知(85?-129)>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더럽다하여 문천 위에서 태워 죽이기에 이르렀다.
<목아>를 죽인 후로부터 하천에 왕모기가 생겼다.
왕이 사람에게 해로움이 많으므로 점을 치도록 명한 즉 <목아>가 화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아세>와 짝 지워 사당을 짓게 하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 때부터 모기가 보이지 않고, 비가 고르게 와서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突山之徒奉玉帽聖母爲馬徒 是爲後三徒
<돌산突山>의 낭도(徒)는 <옥모玉帽> 성모를 받들어 마도(馬徒)가 되니 이를 후삼도(後三徒)라 한다.
소벌(형산) - 돌산
욱보(호례) - 구도(218-301)
묘덕(초운) - 운모(208?- )
구도(운모) - 옥모(238-311)
<옥모>는 238년 戊午년생으로 말띠이다.
조분왕 7년(298)
五月 西巡撫恤 玉帽太后率馬徒 行突山大祭
5월 서쪽을 돌아다니며, 어루만지고 구휼하였다.
<옥모玉帽>태후가 마도(馬徒)를 거느리고 돌산대제(突山大祭)를 행하였다.
3. 소문국(召文國)의 양도(羊徒)
羊徒有奉阿惠聖母者與後三徒爲四友
양도(羊徒)는 <아혜阿惠> 성모를 받든 적이 있어서 후삼도와 더불어 네벗이 되었다.
탈해(운제) - 아혜(83-136)
<아혜>는 83년 癸未년생으로 양띠이다.
<탈해>의 많은 자녀들 중에서 <아혜>만이 그 어머니가 성골이므로 유일한 성골이다.
고삼도(古三徒) 중에서 호도(虎徒)와 우도(牛徒)를 제외한 양도(羊徒)만이
후삼도(後三徒)인 계도(鷄徒), 구도(狗徒), 마도(馬徒)와 더불어 벗이 되었다.
金剛之徒 多不振 唯有城東及召文
<금강金剛>의 낭도는 다소 부진하여 오직 성동(城東)과 소문(召文)만을 차지했다.
양도(羊徒)는 주로 소문국(今 의성지역)에서 활약하였다.
乙公子 山乙是爲山公
을공(乙公)의 아들을 <산을山乙>이라하니 이가 산공(山公)이다.
허을(반화) - 산을山乙 (170-245)
<반화盤花(157-248)>는 <반산盤山>의 딸이다.
<반산盤山>은 <길공吉公(113-170?)>, <족공足公(120?-180>, <을공乙公(131-176)>, <흑치黑齒(133-186)>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긴 성인(聖人)이다.
아달라왕 16년(AD.228)
正月 召文妙德王殂
紅鳳碧海黃雲暖玉宝雲牧丹妙雲好蛙 八世主爭立 國中大亂
女主楚雲請救 乃命山乙率仙徒二千人 與盤述入召文
靖其亂立 楚雲子妙楚爲王 以山乙爲召文監國
山乙善占風雲 知人邪正 皓鬚過膝 召文人奉之 爲廟王 世稱乙公者是也
정월 소문(召文) <묘덕妙德>왕이 죽었다.
<홍봉紅鳳>, <벽해碧海>, <황운黃雲>, <난옥暖玉>, <보운宝雲>, <목단牧丹>, <묘운妙雲>, <호와好蛙> 8세주(世主)가
왕위를 다투었다.
나라 안에 대란이 있어났다. 여주(女主) <초운楚雲>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산을山乙>에게 명하여 선도(仙徒) 2000명을 이끌도록 하여 <반술盤述>과 함께 소문으로 들어갔다.
그 난리를 평정하고, <초운妙雲>의 아들 <묘초妙楚>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산을>을 소문 감국(監國)으로 하였다.
<산을>은 바람과 구름의 점을 잘 쳤고 사람들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았으며, 흰 수염이 무릎을 넘었다.
소문 사람들이 받들어 묘왕(廟王)으로 삼았다.
세칭(世稱) 을공(乙公)이라는 사람이다.
을공(乙公)은 <허을許乙>이고 <산을山乙>은 산공(山公)이라고 불렀다.
出守召文 世娶牧丹女 生子傳于
소문(召文)에 나가 지키며 대대로 <목단牧丹>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칸(干)을 전했다.
<목단>은 아달라16년(228)에 소문왕 <묘덕>이 죽자 소문 8世主 중 1명이 되었다.
山之子曰牛乙 牛之子曰燕乙 燕之子曰久乙 久之子曰水乙 水之子曰用乙 皆有祖風能傳舊道
<산을山乙>의 아들은 <우을牛乙>이고, <우을牛乙>의 아들은 <연을燕乙>고,
<연을燕乙>의 아들은 <구을久乙>이고, <구을久乙>의 아들은 <수을水乙>이고,
<수을水乙>의 아들은 <용을用乙>이라하니 모두 조상의 풍모를 가져서 능히 옛 도(道)를 전하였다.
산을(족화) - 우을(묘연) - 연을(?) - 구을(수단) - 수을(용단) - 용을(310? - )
4. <용을用乙 >과 <분아 粉兒 >의 만남
時阿凰大母 尊奉乙公
때에 <아황阿凰> 대모(大母)가 을공(乙公)을 받들어 모셨다.
아황(311? - )은 13대 미추왕(292-362 재위 325-349)의 후궁이다.
用乙每入朝必拜阿凰設場于宅賓禮甚崇
<용을用乙>이 매번 입조할 때마다 <아황阿凰>을 배알하니
<아황阿凰>은 자택에 자리를 베풀어 대접하는 예(禮)가 매우 융숭했다.
宅婢粉兒 夢見白馬 侍用公生子 長大魁傑 阿凰名之曰 長大郞
택비(宅婢) <분아粉兒>가 꿈에 백마(白馬)를 보고는
용공(用公)을 모셔서 아들을 낳았는데 몸집이 크고 재주가 뛰어났으므로
<아황阿凰>이 그를 <장대長大>랑이라 이름하였다.
용을(분아) - 장대長大(330?-405)
5. <장대長大>랑과 <접황蝶凰>의 만남
長屬衙門 骨微不展 自投羊徒 爲衆所推 善弓馬有膽力
장성해서는 위문(衛門)에 소속하였다.
골품이 미천하여 떨치지 못하자 스스로 양도(羊徒)에 투신하였는데
궁마(弓馬)를 잘하고 담력이 있어 무리들에게 추대된바 되었다.
時朝廷憂西北 欲以將才代用公
때에 조정은 서북면을 근심하여 용공(用公)으로써 장재(將材)를 대신하려 했다.
公憂之 乃謁阿凰而歎曰 世祿絶於臣
용공(用公)이 이를 근심하여 마침내 <아황阿凰>을 알현하고 탄식하여 말했다.
“세록(世祿)이 신(臣)에서 끊어집니다.”
阿凰憐之 乃召其女蝶凰計之
<아황阿凰>이 그를 딱하게 여기고 이에 그 딸 <접황蝶凰>을 불러서 그를 위해 계책을 내게 했다.
蝶凰有寵于帝得 專房事 乃以枕席之間告于帝曰
用乙世襲之臣 不可以汰 其子長大郞有將才 可以代之 帝許之
<접황蝶凰>은 제(帝)에게 총애가 있어 방사(房事)를 오로지 하였으므로
마침내 침석(寢席)하는 기회에 제(帝)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용을用乙>은 세습의 신하이니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아들 <장대長大>랑은 장수의 재주를 갖고 있으니 그를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제(帝)는 이를 허락하였다.
미추(아황) - 접황蝶凰 (332?-399)
<접황>은 <미추>와 <아황>의 딸로서 <기림>왕 4년(367년)에 품주에 올랐다.
羊徒乃盛飾以西召門 骨老以郎骨微 不肯配世主
이에 양도(羊徒)가 소문(召文)으로서 서쪽을 성대히 장식하려하자
소문(召文)의 골노(骨老)들은 <장대長大>랑의 골품이 미천함으로 해서 <접황蝶凰>의 배필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主曰 當此危急之時 賢人最貴 安問骨品 前干之子 天帝之詔 敢不奉乎
<접황蝶凰>이 말했다.
“마땅히 이 위급한 시기에는 현인(賢人)이 가장 존귀하니 어찌 골품을 묻겠는가?
전(前) 칸(干)의 아들이요 천제(天帝)의 조칙인데 감히 받들지 않을 것인가?”
上老曰 臣等老且死矣 惟願報主 主若好新 敢有異辭
상로(上老)등이 말하기를
“신(臣)등은 늙었으니 또한 죽어야 합니다.
다만 세주께 보답하기를 원할 따름이오니 만약 세주께서 새 사람이 좋으시다면 감히 딴 말이 있겠습니까?”
乃以十燭 迎于逢山 婚於樹王
이에 10촉(燭)을 밝혀 봉산(逢山)에서 맞이하고 수왕(樹王) 아래서 혼인(婚)하였다.
是夜 瑞光繞床 天樂下空
이 밤에 상서로운 빛이 침상(床)을 감돌았으며 하늘의 음악이 허공을 타고 내려왔다.
昏臣奏曰 必生貴子
혼신(昏臣)이 아뢰기를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을 것입니다.”하였다.
世主果夢 靑牛口摘樹王之碩果 以授之口受 而呑之 異香滿腹
세주(世主)가 과연 꿈을 꾸었는데
푸른소(靑牛)가 수왕(樹王)의 큰 열매를 입으로 따서 주므로 입으로 받아 삼켰더니
기이한 향내가 뱃속에 가득 차는 것이었다.
覺之見歡 而生子 名曰裵實郞
깨어나서 합환을 치르고 아들을 낳게 되자 <배실裵實>랑이라 이름하였다.
장대(접황) - 배실(347?- )
6. <배실裵實>랑과 백양선자의 만남
性豪宕 好施人 能屈己而下士
<배실裵實>랑은 성품이 호탕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능히 자신을 굽혀서 아랫사람(下士)을 대할 수 있었다.
欲遊京華 而交英雄 時羊徒以猪君爲頭
번화한 경도(京都)에 노닐면서 영웅(英雄)과 교제코자 했는데 당시 양도(羊徒)는 <저군猪君>을 우두머리로 삼고 있었다.
猪君 粉兒後夫之生也
<저군猪君>은 <분아粉兒>의 후남편의 소생이다.
長公在京時生三女 長曰羊兒爲猪君妻 次曰翟兒侍世己公 季曰亥兒侍忽明公
<장대長大>공이 서울에 있었을 때 딸 셋을 낳았는데
장녀는 <양아羊兒>라 하며 <저군猪君>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적아翟兒>라 하며 <세기世己(335-391)>공을 모셨고,
막내는 <해아亥兒>라 하며 <홀명忽明(341-412)>공을 모셨다.
조분(아소례) - 유례(306-367) 14대왕
미추(선례) - 선추(317-408)
서해(양기) - 양부(294-356)
우로(달례) - 줄례(321-387)
? (분아) - 저군(335?- )
유례(선추) - 세기(335-391)
양부(줄례) - 홀명(341-412)
장대(접황) - 양아(359?- )
적아(361?- )
해아(363?- )
粉兒尙無恙
<분아粉兒>는 오히려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
長公乃授弓馬 以送之 邸于猪君
<장대長大>공이 이에 활과 말을 주어서 <배실裵實>랑을 보내어 <저군猪君>의 집에 묵게 했다.
猪君好俠義 善御衆 羊兒亦能與徒甘苦 且有達行 徒稱姐娘
<저군猪君>은 의협심이 있고 무리들을 잘 이끌었는데
<양아羊兒> 역시 능히 낭도(徒)들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며 또한 행실이 통달하여 낭도들이 저낭(姐娘)이라 칭했다.
城東無品女皆從之 獨一奾子不從 自稱白羊神 呼羊兒以黃羊奾
성동(城東)의 골품이 없는 여자들이 모두 그녀를 따랐으나
홀로 한 선자(奾子)만이 따르지 않고 스스로 백양신(白羊神)이라 칭하며 <양아羊兒>를 황양선(黃羊奾)이라 불렀다.
猪君怒將辱之羊兒曰 吾聞聖人之生 必有祥德 白羊之年 明活山神池復湧 是彼有其祥也
<저군猪君>이 노하여 욕보이려하자 <양아羊兒>가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성인(聖人)의 태어남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덕을 갖는다고 합니다.
백양(白羊)의 해에 명활산(明活山)의 신지(神池)가 다시 솟아올랐는데 저 이가 바로 그 상서로움을 가졌습니다."
雖窮不鳩財於衆曰 不忍割貧 而自榮者 仁也
비록 궁핍하나 무리에게 재물을 모으지 않으며 말하기를
“ 참을 수 없이 가난해도 스스로 영화롭게 여기는 자는 어질(仁)다”
人勸之嫁曰 以君之美侍 于高門 則富貴立至
사람들이 그녀에게 시집가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아름다움으로 높은 가문에서 섬기면 부귀가 선 채로 오리라.”하니
奾子曰 道惟所居富貴 不可淫者智也 不以老少美醜揀之 許其悅之者勇也
仁智且勇彼有其德也 我無有矣 君爲吾夫不能敎我 以道反辱聖人不亦恥乎
선자가 말하기를
“도는 오직 부귀하게 살 수 있으나 음란할 수 없는 것이 지(智)요,
늙은이나 젊은이나 아름답거나 추한 것으로 택하지 않고 그를 즐겁게 허용하는 것이 용(勇)이다라고 하며
인자함과 지혜와 또한 용기와 덕을 너는 가지고 있으나 나는 못 가졌노라!
그대는 내 남편이 되어서 도(道)로써 나를 가르치지 못하고 도리어 성인(聖人)을 욕하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猪君乃謝 使裵實郞往見之
<저군猪君>이 이에 사과하고 <배실裵實>랑으로 하여금 가서 그를 만나게 하였다.
至其門 亂麥成堆 入其堂 破瓢雜錯 奾子 腰着短裙偃 臥不起
그 집 문전에 이르자 보리가 어지럽게 쌓여있고
당(堂)에 들어서자 깨진 박(瓢)이 나뒹굴어 난잡하였는데
선자(奾子)는 허리에 짧은 치마를 걸치고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郎拜曰 聞奾高風 而來 願惠德音
<배실>랑이 절하며 말했다.
“선자(奾子)의 높은 풍월도(風月道)를 듣고서 왔으니 바라건대 덕음(德音)을 베푸소서.”
奾子微笑擧足以加肩曰 我有月事 郎可換?
선자는 미소를 짓고 다리를 들어 랑의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내가 월사(月事)가 있으니 랑(郞)은 기저귀를 갈아야 할 것이다.”
郎不厭其腥汚 而換之
<배실>랑은 그 비린내와 더러움을 꺼려하지 않고 그것을 갈아주었다.
奾子曰 郎君遠來愛我無可以飯 且可與我舂麥乎
선자가 말했다.
“낭군(郞君)이 멀리서 와서 나를 아끼는데 밥이 없을 수 없으니 또한 나와 더불어 보리를 찧겠는가?”
郎諾之下庭對舂手脫而麥不脫奾子頽臥藁上曰
我無好夫常飢不堪舂誰能惠我一斤肉乎
<배실>랑이 응낙하고 뜰로 내려가서 절구에 넣고 껍질을 벗기려 하였으나
보리가 채 벗겨지지 않았는데 선자가 짚단 위에 쓰러져 누우며 말했다.
“나는 좋은 남편이 없어서 늘 굶주려 절구질을 감당할 수 없으니 누가 능히 나에게 한 근의 고기를 베풀겠는가?”
郎出門見肉舖 問價皆値百金 乃解所佩宝刀以換之
<배실>랑이 문을 나와서 푸줏간(肉舖)을 발견하고는 고기 값을 묻자 모두가 백금(百金) 가격이었으므로
이에 차고 있던 보도(寶刀)를 풀어서 고기와 바꾸었다.
歸見 奾子與醜丈 天歡于藁上 不忍見 而尋常 入厨烹 而進之
돌아와 보니 선자가 추하게 생긴 장부(丈夫)와 더불어 짚단 위에서 합환하는데
차마 못 볼 광경이었으나 <배실>랑은 예사롭게 생각하고 부엌에 들어가 고기를 삶아서 내어갔다.
奾子與醜盡食之腹脹 而瀉矢水濺衣臭氣難聞 而郎晏然扶護奾子
선자가 추장부와 더불어 고기를 남김없이 먹고는 배가 부르자
똥물을 싸서 옷에 뿌리니 냄새도 맡기 어려웠으나 <배실>랑은 태연히 선자를 부축하며 간호했다.
乃吐其食唾泥胆水完如膿汁
마침내 그 먹은 것을 토하니 토해낸 물이 완연히 고름즙과도 같았다.
命郎食之郎少無難色而食之
<배실>랑에게 그것을 먹도록 명하자 <배실>랑은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이 그것을 핥아먹었다.
醜怒謂郎曰 汝必通吾婦甘其吐也
추장부가 노하여 <배실>랑에게 말하기를
“네가 필시 내 아내와 통정했기에 그 토한 것을 달게 먹는 것이다."
欲倒懸以詰之郎正色曰 君子惟以道交 豈爲色乎
그를 거꾸로 매달고 힐문하려하자 <배실>랑이 정색하며 말했다.
“군자는 오직 도(道)로써 사귈 뿐이니 어찌 색(色)을 하리오?”
醜以爲僞 而將以脯之 霜刃過腹 而不動
추장부가 거짓이라 하며 장차 그의 포(脯)를 뜨려고 시퍼런 칼날이 배를 지나갔으나
<배실>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奾子仰天大笑 醜丈夫隨風 而倒 乃一蜀秦稈也
선자(奾子)가 앙천대소하고 추장부는 바람을 따라 쓰러지는데 보니 그것은 곧 한줄기의 수수깡이었다.
郎方知其神 而請爲弟子奾子曰
神仙之道惟在乎養眞 今看郎君眞氣已成非妾所可及也
妾與郎君有夫婦之緣今夕當之
<배실>랑이 바야흐로 그 신통함을 알고 제자가 될 것을 청하자 선자가 말하였다.
“신선(神仙)의 도는 오직 진(眞)을 기르는데 있을 뿐입니다.
지금 낭군을 보니 이미 진기(眞氣)가 이루어져 첩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첩이 낭군과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이 밤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였다.
乃出其珍味待之人間所無也
마침내 그 진미(珍味)를 차려내어 대접하니 이는 인간 세상에 없는 것이었다.
徹夜膠漆到曉而醒 奾子已無去處 只一空枕而已
밤을 새워 두터운 정을 나누고 새벽에 이르러서 깨어보니
선자는 이미 간데없고 다만 빈 베개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을 따름이었다.
郎怳惚自失 息見壁上題詩曰
<배실>랑이 황홀하여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문득 벽을 보니 시(詩) 한 수가 있어 가로되
風吹天上雨 更作人間雲
散合本無常 何時再見君
바람 불어 하늘 위의 비를 뿌리니 다시 인간세상에 구름이 일어나네
모이고 흩어짐이 본래 무상하거니 어느 때나 그대를 다시 보려나.
郎愴然而歸過 昨日之肉舖 乃一瓜架也
<배실>랑이 몹씨 슬픈 마음으로 돌아가며 어제의 푸줏간을 보니 곧 하나의 오이 시렁이었다.
宝刀尙在架上 所濺矢水皆成紫金花紋也
보도(寶刀)는 오히려 시렁위에 있었고,
똥물을 흩뿌렸던 곳은 모두 자금화(紫金花)의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7. 배실랑, 유례왕의 아들 <세기世己>에게서 수업하다
羊兒謂郎曰 奾子婚汝而別者勉汝學也 京中多上仙 汝可就學而待也
<양아羊兒>가 <배실>랑에게 일러 말했다.
“선자가 오라비와 얼우고 떠난 것은 오라비가 학문에 힘쓰도록 함입니다.
경도 안에 상선(上仙)들이 많으니 오라비는 가히 취학(就學)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乃詣世己公受業
이에 <세기世己(335-391)>공에게 나아가 수업(受業)하였다.
公理方以郎爲舍知 有善政超授大舍 務省形政
<세기世己>공은 이방(理方)으로써 <배실>랑을 사지(舍知)로 삼았는데
잘 다스리자 차례를 뛰어넘어 대사(大舍)를 제수하고 힘써 형정(刑政)을 보살피게 하였다.
사지(舍知)는 13등급, 대사(大舍)는 12등급으로 황색 공복을 입었다.
흘해 2년(371) 6월,
<현운玄雲>에게 명하여 명활산(明活山)에서 백양제(白羊祭)를 행하도록 하였다.
때에 성동(城東)의 세민(細民:비천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허다히 백양신(白羊神)을 받들었는데
의(義)를 숭상하여 무리(徒)를 지으매 그 수가 심히 많았다.
저군(猪君)을 우두머리로 삼아 성대하게 말(盛言)하기를 “백양신이 강림하여 나라를 지킨다.”하고
다시 “제(帝)는 소이고 후(后)는 양이다(帝牛而后羊?)”하며
집집마다 <광명(323-392)>후(后)의 상(象)을 받들어 조석으로 그를 경배하였다.
후(后)가 (소문을) 듣고 그를 기이하게 여겨 <세기世己>에게 말하였다.
“성동(城東)의 양도(羊徒)는 대다수가 곧 빈민(細民)들인데 의(義)로써 서로 격려하여 각기 그 업(業)에 안주하며
짐의 몸(朕躬)에 충성하여 조석으로 상(象)에 절을 하니 비록 여느 선문(仙門)이라 해도 이 무리(輩)에는 미치지 못한다.
너 또한 양도(羊徒)인데 어찌 이 무리(衆)를 돌보아 돕지 않는가?”
<세기世己>가 말했다.
“신(臣) 또한 그 (소문)을 듣고 그 우두머리 저군(猪君)이란 자를 불러 의의(義)를 물었는데 자못 선도(仙道)를 알았습니다.
그 어미 <분아粉兒>란 자는 <마선馬先>의 서자 <마아馬兒>의 딸입니다.
그 골품이 비록 미미하나 이처럼 되어 오게한 사람이니 포상이 없을 수 없으나
신(臣)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까닭에 감히 아직 (못하였습니다.)”
후(后)가 말했다.
“이 무리(徒)는 가히 병관(兵官)에 속하게 함으로써 군려(軍旅)에 기용함이 가하리라.”
<세기世己>가 말하기를
“신(臣)의 뜻은 저군(猪君)을 신하로 삼아 관리(官吏)에 소속시키고
이방(理方)에 들이어 먼저 민속(民俗)을 바로잡도록 하고자 합니다.”하니
후(后)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저군(猪君)을 이방(理方) 사지(舍知)로 삼고 그대로 대제(大祭)를 행하였다.
<광명>여왕은 323년(계미년)생으로 양띠이고 <흘해>왕은 329년(기축년)생으로 소띠이다.
371년(신미년)은 백양(白羊)의 해이다.
신라는 신국(神國)의 나라이고 여왕의 나라이다.
<광명光明(323-392)>은 <조분>과 <아이혜>의 딸로서 미추왕(292-362)의 후가 되어
유례, 기림, 흘해,내물왕을 세우고 다섯 왕으로 부터 21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녀의 딸 <보반(360-428)>은 실성(359-417)의 후가 된다.
삼국사기는 402년에 실성왕이 283년에 죽은 미추왕의 딸을 후로 하였다고 한다.
<미추>는 <구도>와 <술례> 사이에서 292년에 태어나 362년에 죽었다.
<보반>은 360년에 <미추>와 <광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360년에 태어난 <보반>을 삼국사기는 283년생으로 만들어
44세의 실성왕이 120세의 <보반>을 후로 삼은 것으로 하였으니
삼국사기 이 자체의 모순을 아직도 믿고 있는 우리의 사학자들이 한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