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전서

사고전서로 보는 낙랑

지보고 2023. 11. 22.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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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낙랑군

 

 

 

是歲冬殷人伐夏 其主桀請援 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以助戰事 湯遣使謝罪 乃命引還 桀違之遣兵遮路欲敗禁盟遂與殷人伐桀 密遣臣智于亮率畎軍合與樂浪進據 關中邠岐之地 而居之設官制

흘달 16년 갑오(BC1767) .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 단제께서 읍차(邑借)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邠)․기(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제(官制)를 설치하였다.

<단군세기>

 

낙랑이라는 지명이 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BC 1767년 하(夏) 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을 정벌할 때이다.

 

甲申元年 命皇叔固弗加治樂浪忽 遣熊乫孫與藍國君 觀南征之兵置 六邑於殷地 殷人相爭不決乃進兵攻破之

秋七月誅申督還都命釋囚浮

아흘 갑신원년(BC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령하여 낙랑홀(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熊乫孫>을 보내 남국(藍國)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申督>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단군세기>

 

BC 1200년경에 <고불가>가 다스리는 고조선의 제후국인 낙랑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해모수 단군 45년 병오년(B.C. 195)

겨울 낙랑 왕 최숭이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해를 건너 마한의 도읍인 왕검성에 이르렀다

 

고해사 단군 원년 임신년(B.C. 169)

정월 낙랑 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海城)에 바쳤다

<북부여기>

 

<최숭>이 다스리는 북부여의 제후국인 낙랑국이 해모수 말년인 BC 195년에 위만이 북부여로 망명을 오자

북한의 평양으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계유 13년(BC 108) 

한나라 <유철>이 평나(平那)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지역에 4군을 설치하였다.

4군 병사들의 침략행위는 더욱 더 심해졌다. 이에 <고두막高豆幕>한(汗)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들을 연파하였다.

유민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도왔다. 고두막한의 군대는 크게 적을 무찔러 유민의 호응에 보답하였다. 

<태백일사 북부여기>

 

BC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의 왕검성에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한 무제는 BC 300년경 燕나라의 장수 <진개>가 동호를 물리치고 설치한 요동군 험독현에 낙랑군 조선현을 설치하였다.

 

그러면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은 어디인가?

 

한사군의 낙랑은 한국사의 척추이다.

 

낙랑이 바로서면 한국사가 바로 서고 낙랑이 뒤틀리면 한국사 전체가 뒤틀린다.

 

그래서 중국의 중화중심주의자들은  조선의 낙랑은 중원의 낙랑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한국사의 대륙사와의 단절을 낙랑을 통해 시도했고

일제의 식민사학자들 또한 위조 가능설이 높은 낙랑유물을 내세워

대동강 낙랑설을 제기하며 이를 한국사 왜곡의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청나라 건륭(1736-1795) 연간에 학자 360여명을 동원해 10년에 걸쳐

청나라 이전 중국의 사료를 집대성한 사고전서를 통하여 낙랑의 실체를 알아보자.

    

 

1. 갈석 낙랑(碣石 樂浪)

 

....孝武皇帝 元狩六年 太倉之粟 紅腐而不可食 都內之錢 貫朽而不可校

迺探平城之事 錄冒頓以來 數爲邊害 籍兵厲馬 因富民以攘服之 西連諸國

至于安息 東過碣石以玄兎樂浪爲郡 北郤匈奴萬里更起營塞 制南海 以爲八郡

則天下斷獄萬數 民賦數百 造鹽鐵酒榷之利 以佐用度 猶不能足....

<前漢書 64下 賈捐之傳>

.....孝武皇帝{漢 武帝} 元狩六年 (BC117)에 이르러  太倉의 곡식은 붉게 썩어서 먹을 수가 없었고

都內의 돈은 꾸러미를 꿴 끈이 노후하여 숫자를 계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평성(平城)의 일을 탐색하고 <모돈冒頓>이래로 자주 변방에 피해를 입힌 일을 기록한 다음

병사를 징집하고 무기를 손질하여 부민(富民)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저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서쪽으로는 여러나라와 연대하여 안식(安息)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갈석(碣石)을 지나 현토(玄兎), 낙랑(樂浪)으로서 군(郡)을 삼았습니다.

북쪽으로는 흉노를 만리를 퇴각시켜 다시 營塞를 일으켰고, 남쪽 바다에 있는 섬들은 제압하여 8郡으로 만들었으니

천하의 죄수는 수만명에 달했고 백성의 부세(賦稅)는 수백이 되었습니다.

염(鹽), 철(鐵), 주각(酒榷)의 이로움을 만들어서 용도(用度)를 보탰지만 오히려 부족했습니다....

   

 

 

2. 고죽국 낙랑 (孤竹國 樂浪)

  

弔夷齊賦                                     - 王世貞

盧龍 故孤竹也 城西 有伯夷叔齊祀 吳人王世貞 

奉使過此 酌水酹焉 而爲辭

曰余奉輶以東逝兮 束馬放乎令支 山瓚岏而嵬礨兮

衆草贙雚而條緯 兪兒道余於卑耳兮 武夫磷其參差.....

溟波委輪於樂浪兮 箕蒙難而宗靈 庶偕以翺游兮 語侏離而不可通....

<畿輔通志 券115>

伯夷 叔齊의 魂靈을 위로하는 글     -  王世貞

노룡(盧龍)은 옛 고죽국 땅이다.

성 서쪽에 백이. 숙제의 사당이 있다.

吳人 왕세정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나가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물 한사발 떠놓고 제사를 올리며 이 글을 지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동쪽에 사신으로 떠나게 되어 행장을 꾸려서 영지(令支)에 이르렀도다.

산들은 뾰족뾰족 높낮이가 고르지 않고, 갖가지 풀들은 여기저기 옹기종기 나 있도다.

유아(兪兒)는 비이(卑耳)에서 나를 인도하고, 무사는 울긋불긋 그 색갈이 다르도다.....

북방의 물줄기가 낙랑(樂浪)으로 모여드니,  <기자箕子>가 난을 당하여 여기서 종묘사직을 연장시켰도다.  

함께 노닐며 즐길 수도 있었건만 주리(侏離)의 언어라서 말이 통하지 않았도다.

 

 참고

 兪兒 : 북방 의 이름이다

 卑耳 : 고죽국 인근의 지명

 侏離 : 蠻夷의 말소리. 여기서는 伯夷東夷계통의 고죽국 사람으로 중원과 달라서

           중원에서 온 箕子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畿輔通志淸代에 북경, 하북 및 천진 일대의 역사연혁과 사화 상황을 종합 기재한 官撰의 지방지이다.

동북방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몇 안되는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요 문인이었던 <왕세정>은 동쪽으로 사신을 떠났다가

옛 고죽국 땅인 오늘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고성진에 이르러  백이. 숙제의 사당에 간소한 제사를 올린 다음

그의 혼령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弔夷齊賦를 지었다.

고죽국은 오늘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을 중심으로 상당히 광대한 지역에 걸쳐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왕세정은 이 글에서 令支, 卑耳, 樂浪 등의 지명을 거론하면서 고죽국에서 벌어졌던 옛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후한말 공손도의 거점인 평주(平州)를 조조가 차지하여 노룡군을 설치하였다

그후 북위때 북평군이 되고 수.당때에는 다시 평주로 개명하여 송. 명까지 이어오다가

청나라때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 지명이 이동되었다

 

기주冀州() - 영주營州() - 고죽국() - 유주幽州() - 산융.비자(춘추시대)

- 요서, 우북평(, 이 일시 차지) - 낙랑군, 현토군(이 일시 차지) - 고구려 

- 평주(발기의 난으로 공손도 차지) - 노룡군(조위) - 평주군, 낙랑군(북연)

- 고구려(광개토대왕 요동 요서 회복) - 북평군, 요서군(북위) - 북평군 노룡현()

- 평주 노룡현, 평주 석성현() - 평주()

   

 

3. 영평부 낙랑 (永平府 樂浪)

 

영평부 

동쪽으로 산해관까지 180리이고 서쪽으로 順天府 豊潤縣 경계까지 120리이며

남쪽으로 해안까지 160리이고 북쪽으로 桃林口까지 60리이다.

府의 치소로부터 京師{북경}까지는 550리이고 남경까지는 3,995리이다.

糧은 45,000이다.

설치연혁 

「禹貢」의 冀州 지역이고 천문은 尾分野이다.

처음에 虞舜이 冀州의 동북을 분할하여 營州로 만들었으니 이곳이 바로 그 지역이다.

商나라 때는 고죽국이 되었고 周나라 때는 幽州에 속했고

춘추시대에는 山戎. 肥子 두 나라의 땅이 되었고 秦나라 때는 요서. 우북평 2郡의 땅이 되었다.

漢末에는 <공손도>의 차지한 바가 되었고 魏나라때 노룡군으로 개정되었으며

北燕 때 平州 및 낙랑군을 설치했고 後魏 때 낙랑을 고쳐서 북평군으로 삼았으며

隋나라 때 다시 平州로 고쳤고 天寶(당 현종 연호, 742-756)초기에 북평군으로 고쳤으며

乾元(당 숙종 연호, 758-760)초기에 다시 平州로 만들었다.

五代唐시대에 遼興軍이라 하였고, 金나라 때 승격시켜 南京삼았으며

天會(금 태종 연호, 1123-1135)초기에 다시 平州로 삼고 興平軍으로 승격시켰다.

元나라 때 興平府로 개정했고 中統(원 세조 연호, 1260-1263)초기에 平樂路로 승격시켰으며

大德(원 성종 연호, 1297-1307)중에 永平路로 개정했다.

本朝 洪武2년(1369)에 永平府로 개정하여 北平布政司에 소속되었다.

永樂( 명 성조 연호, 1403-1424) 중에 京師의 직할이 되었고 관하에 1개의 州와 5개의 縣을 관할했다. 

<明一統志 券5>

  

참고

順天府 : , 때 오늘날의 북경시 지역을 순천부라고 하였다

桃林口 : 진황도시 서북쪽에 있다.

北平布政司 : 명나라 초기에 京師(南京)를 제외하고 전국을 절강, 강서, 복건, 북평,

광서, 사천, 산동, 광동, 하남, 섬서, 호광, 산서 12개 구역으로 나누어 12布政使司

설치했고 洪武 15(1382)에 운남포정사사를 증설하여 13포정사사가 되었다.

永樂 원년(1403)明 成祖가 북평포정사사를 北京으로 바꾸었다.

  

明一統志의 원래 명칭은 大明一統志이다. 明 英宗 5(1461)에 완성된 官撰 地理總志이다.

全國總圖各布政使司分圖는 그림으로 그려서 실었다.

명나라 때 영평부는 관하에 노룡현, 천안현, 무령현, 창려현 등과 란주를 관할했고

순천부. 보정부. 하간부 등과 함께 북경 직할로 되어 있다.

이 지역이 오늘날은 북경시와 별도로 하북성에 포함되어 있지만  나라 때는 수도 북경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虞舜시대 12의 하나였던 營州바로 이 북평부 지역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나라 때 설치되었던 요서군, 우북평군이 바로 이 명나라 때의 영평부 지역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나라 때의 요동, 요서는 오늘날의 요하를 기준으로 설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北燕시대에 나라 때의 영평부 지역에 平州 및 낙랑이 설치되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낙랑군이 처음 설치된 것은 한무제시기이다.

이 때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의 낙랑군과 무관한 것일 수가 없다.

나라 때 요서. 우북평이 설치 되었던 이 부근에 의 낙랑군이 있었고

북연이 한의 낙랑군 지역에 다시 옛 이름을 복원 설치했다고 본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무제가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16국 시대에 북연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영평부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漢末<공손도>가 차지했던 곳이 바로 이 명나라 때의 영평부 일대였다는 사실도 전해주고 있다.

<공손도>가 차지했던 요동은 오늘날의 요동이 아니라 북경시 남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4. 노룡 낙랑 (盧龍 樂浪)

 

朝鮮

箕子 後封遙之樂浪 今平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德

以遙爲箕州 八年 而高麗 亦其地

<路史 券27 朝鮮>

조선

箕子를 뒤에 遼의 낙랑에 봉하였다.

지금 平州의 노룡에 조선성이 있다.

그러므로 武德연간(당 고조의 연호, 618-626)에 遼州로써 箕州로 삼았으며

武德 8년임.

고구려도 역시 그 지역이다.

 

路史는 남송의 학자 <라필>이 효종 乾道 연간(1165-1173)에 편찬하였다.

상고시대부터 兩漢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어

동북아의 상고사를 연구하는데 크게 참고할 가치가 있다.

다른 자료에서는 일반적으로 箕子"朝鮮에 봉하였다"라고 말한 데 비해

이 자료는 "樂浪에 봉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상에서 한반도의 대동강이 遙水遼河로 지칭된 일은 없다.

또 여기에 일찍이 遙西. 遙東郡이나 遙州가 설치된 적도 없다.

그러면 저자가 여기서 말하는 樂浪은 어디를 두고 말한 것일까?

路史의 저자 <라필羅泌>南宋 孝宗시대 사람이다.

그 당시에 하북성 노룡현이 平州에 소속되어 있었고,

나라 때 <락사樂史>가 쓴 太平寰宇記에 따르면

"노룡현에 箕子가 봉함을 받은 朝鮮城이 있다"라고 하였다.

平州의 노룡은 백이. 숙제의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다.

백이. 숙제는 나라 제후국의 왕자로서 周武王나라 정벌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인물이고

箕子나라 왕족으로서 나라가 쇠망하자  나라의 신하노릇하기가 싫어서 떠나간 인물이다.

당시 고죽국은 山戎족으로서 중원지역이 아닌 東北方 지금의 만리장성 부근에 있었다.

그리고 고죽국과 같은 동족인 조선이 거기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지금은 하북성 노룡현이 다 중국 땅이 되어 있지만

箕子 당시에는 오늘의 하북성 남부, 북부와 동부가 다 東夷들이 사는 지역이었고

거기에는 孤竹, 令支, 朝鮮 東夷 국가들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하여 玄兎, 樂浪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다.

다시말해 요동에서 일어나 요동에서 멸망한 나라이다.

玄兎, 樂浪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가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이 옳겠지만,

그렇지 않고 易水, 漕河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 또한 그 지역에 있었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너무나도 명백한 역사사실을 거짓이라 생각하고

조작된 역사를 사실이라 믿는 우를 범해 왔다.

이제는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5. 요수 낙랑 (遙水 樂浪)

遙水

在漢樂浪玄兎之地 東西四百八十里 水經云 遙水源出靺鞨國西南山 南流會白滄水

至安市城 今號東京 小遙水 源出小遙山 西南流 與天梁水會 在國西也

<武經總要>

요수(遙水)

漢나라시대의 낙랑. 현토 땅에 있다. 동서로 480리이다.

水經에 말하기를 "遼水는 말갈국의 서남쪽 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白滄水와 만나서 안시성에 도달한다" 라고 하였다.

지금은 東京이라고 호칭한다.

小遼水는 小遼山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天梁水와 만난다.

나라의 서쪽에 있다.

  

무경총요는 요수와 소요수를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요수는 당연히 대요수를 지칭하는 것이다.

수경에서 "대요수는 새외의 衛白平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새로 진입하고 요동 襄平縣 서쪽을 경과한다" 라고 하였다.

요동 양평현은 오늘날의 보정시 서수구의 수성진 인근이다.

오늘날의 남역수가 大遙水이며 小遼水는 남역수의 지류이다.

대요수가 한나라때 요수(요하)이고 수.당때는 조하漕河가 요수(요하)이다.

   

 

6. 평주 낙랑 (平州 樂浪)

遼東

「地理志」에 "燕나라 땅은 동쪽에 遼東이 있다"라고 하였다.

「흉노전」에는 "燕나라가 요동군을 설치하여 胡를 방어했다"라고 하였다.

「通典」에는 "舜이 설치한 營州는 遙水의 동쪽이 이곳이다.

燕나라 때는 요동군이라 하였고 秦漢시대에도 그대로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낙랑과 통하였다.

晉나라 때 平州를 설치했고 後魏시대에 고구려국이 그 땅에 도읍했으며

唐나라 때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通鑑地理通譯 券10 遙東>

 

通鑑地理通譯은 남송 말년의 <王應麟(1223-1296)>通鑑의 지리에 관한 내용을  간추려 주석을 낸 책으로 총 14권이다.

인용한 자료의 폭이 넓고 고증이 대체로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後魏 北魏시대에 고구려가 요동에 도읍을 했다고 한다.

북위시대에 고구려가 도읍을 정했다는 이 기록은 그간 우리의 고구려사에 대한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충격적인 내용아 아닐 수 없다.

고구려가 북위시대 즉 장수대제 14(427)에 천도한 곳이

오늘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진이었고 여수전쟁과 여당전쟁이 일어난 곳이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설치한 안동도호부는 직접 통치기구가 아닌 기미(羈糜)정책의 한 수단에 불과했고

그것마저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숙종(756-758)이후로는 폐지되었던 것이다.

 

甲午 晉 世祖 武皇帝 泰始 10년(274년)

吳歸命侯 鳳凰 3년(274년) 봄 정월 乙未에 일식이 있었다.

「通鑑」을 기준으로 하여 정리함

윤월 丁亥에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으로부터는 첩잉(妾媵)으로써 正嫡을 삼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本紀」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함

幽州를 분할하여 平州를 설치하였다.

「本紀」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함

解題 

幽州는 7개의 郡과 國을 관할했다.

范陽郡 지금의 涿州, 雄州, 易州, 覇州 4州의 땅이다.

燕國 지금의 涿州, 薊州 2州의 땅이다

北平郡 지금의 經州, 薊州, 檀州, 營州 4州의 땅이다. 

上谷郡 지금의 媯州의 땅이다.

廣寧郡 지금의 媯州의 땅이다.

代郡  지금의 雲中路의 奉聖州, 蔚州, 儒州 3州의 땅이다.

遙西郡 지금의 平州, 景州 2州의 땅이다.

平州는 5개의 郡과 國을 관할했다.

遼東國. 昌黎郡. 樂浪郡. 玄兎郡. 帶方郡이다.

宋나라 때는 營州에 소속되었는데 安東都護府의 땅이다.

<大事記續編 券24>

  

大事記續編元末 明初의 학자 <왕위王褘(1322-1373)>가 편찬했으며 총 77권이다.

漢武帝 征和 4(BC89)으로부터 시작해서

宋 德祐 2(1276)까지 1,365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解題를 통해 역사 사실에 대한 異同을 고증하여 자못 학술적 가치가 높은 저서이다.

幽州를 분할하여 설치한 平州遼東國. 昌黎郡. 樂浪郡. 玄兎郡. 帶方郡

나라 때의 營州 安東都護府에 소속한 땅이라고 밝히고 있다.

274년은 고국천제 18(196)에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가 요동을 상실하여

산상대제 13(209)에 환도성으로 천도하고 

동천대제 20(246)에 관구검의 난으로 환도성이이 함락되니

동천대제가 이듬 해에에 평양(今 遙陽)으로 천도 한 뒤

중천대제를 이어 즉위한 서천대제 5년이다.

 

서천대제5{AD274}갑오, 8,

<유화>성모의 신묘에 제사하였다

<{}><유주>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로 삼았다.

일설엔 <범양><상곡><북평><요서>을 말하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요동><대방><낙랑><현도>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의 땅이 아니었었다.

교위태수참군을 허설(虗設)한 것이었으니, 또한 웃을 일 아니겠는가?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魏 明帝 曺叡13(238) 사마의가 요동의 공손연을 정벌한 후

265 司馬炎()진을 낙양에서 건국하여 274년 평주를 설치할 때까지

고구려가 발기의 난으로 공손도에게 내어준 요동과 요서지역은 부여왕 의려가 다스리고 있었다.

 武帝 司馬炎泰始 10(274)에 유주를 분할하여 평주를 설치하였으나

이 지역은 부여왕 의려가 다스리고 있어 수조권과 군권이 없는 실권없는 허명일 뿐이었다

 286년 선비족 모용외가 의려를 내쫒고 이 지역을 차지한다.

  

나라 때의 안동도호부는 어디 인가?

 

송나라 때 <락사樂史>가 지은 태평환우기에

영주(營州){보정시 서북}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營州나라 때 고죽국이었고, 나라 때는 요서. 우북평군 지역이었으며

. 시대는 요서군 지역이었고, 16국시대는 선비 모용황의 도읍지였으며,

.시대에는 營州에서 柳城郡으로 다시 柳城郡에서 營州로 변천되었다."

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태평환우기에서  영주와 이웃한 檀州를  지금 북경시 密雲縣 일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영주는 바로 옛 고죽국 지역인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북쪽 일대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대가 ..시대에는 營州, .시대에는 요서군으로 시대에는 고죽국으로 불렸던 것이다.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고종 때 평양에 처음 설치되었고

나중에 요동군 故城, 新城, 平州 등지로 옮겨 다녔으며  최후에 요서 고군성(故郡城)으로 옮겨 폐지되었다.

 

요서 故郡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요서군은 본래는 幽州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北魏 시기에 幽州를 분할하여 만든 平州 지역에 요서군을 새로 설치하므로써

幽州에 있던 요서군의 이 요서 故郡城이 된 것이다

 

그러면 당시 平州는 어디인가?

 

태평환우기에 의하면 이 지역은

"춘추시대에 山戎의 고죽국, 白狄肥子國 2의 땅이었고 .시대엔 우북평 및 요서 2의 땅이었으며

나라 때는 북평군으로 고쳤다가 다시 平州로 되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7. 극성 낙랑 (棘城 樂浪)

 

鞠殷

鞠殷 樂浪太守 彭之子也 彭初守樂浪 趙石虎來伐 境內多叛應之

彭選壯士數百 固守棘城 城得不沒 趙兵旣退 大加賞賜 殷仕儁 爲尙書左丞

太原王恪 克廣固 遷殷爲東來太守 彭時爲大長秋 以書戒殷曰

王彌曺疑 必有子孫 汝善招撫 勿尋舊怨 以長亂源

殷推求彌從子立 疑孫嚴於中山 請與相見 深結意分

彭復遺使 遺以車馬衣服 君民大安

<十六國春秋 券30 鞠殷>

 鞠殷

 <국은鞠殷>은 낙랑태수 <국팽鞠彭>의 아들이다.

 <국팽鞠彭>이 처음에 낙랑태수가 되었을 때  趙 <석호石虎>{後趙 재위 335-348}가 와서 공격하니

경내의 많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 趙 <석호石虎>에게 호응하였다.

 <국팽鞠彭>이 장사 수백 명을 선발하여 극성(棘城)을 굳게 지키니 성이 함락되지 않게 되었다.

 趙兵이 퇴각한 뒤에 포상이 내려졌다.

 <국은鞠殷>이 <모용준>{前燕 재위 348-360)에게 벼슬하여 상서좌승이 되었는데

태원왕 <각恪>이 廣固城을 이기자 <국은>을 동래태수로 옮겼다.

 <국팽>이 이때 大長秋로 있었는데 편지로써 <국은>을 경계하기를

 "<왕미王彌> <조의曺疑>가 반드시 자손이 있을 것이니

너는 그들을 잘 불러서 무마하고 옛 원한을 찾아서 혼란의 근원을 키우지 말라" 라고 하였다.

 <국은>이 수소문한 끝에 <왕미>의 조카 <왕립王立>과  <조의>의 손자 <조엄曺嚴>을 中山에서 찾아내어

그들과 서로 만나기를 요청하고 깊은 정분을 맺었다.

 <국팽>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車馬와 의복으로써 전해주니 東來군민이 크게 안정되었다.

 

後趙<석호>가 극성을 공격한 것은 348년의 일이다.

前燕<모용황>이 죽고 <모용준>이 즉위하자 <석호>가 극성을 공격한 것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18(345)에 평양에서 환도성으로 천도한 지 3년이 지난 해이다.

백제는 근초고왕이 346년에 즉위하여  371년에 고구려 평양을 공격하고 고국원왕이 이 전쟁에서 전사한다

   

十六國春秋北魏의 저명한 사학자 <최홍崔鴻(478-525>東晉 16국시대(304-439)의 역사를 기록한 紀傳體 史書이다.

史記. 漢書.後漢書.三國志주로 漢族 본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과 달리

본서는 북방과 서북방 민족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극성은 창려 바로 이웃하여 있었으며 낙랑군과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 상곡군 낙랑 (上谷郡 樂浪)

 

上谷郡

開皇 元年(581년)에 易州를 설치했다.

관하에 6개 縣을 관할했다.

가구수는 38,700가구이다.

易縣

開皇 초기에 黎郡을 설치했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開皇 16년(596년)에 縣을 설치하였고

大業(수 양제 연호, 605-616) 초기에 上谷郡을 설치하였다.

옛날에는 故安縣이 있었는데 後齊시기에 폐지하였다.

박우산(駮牛山). 오회령(五廽嶺)이 있고 易水. 除水가 있다.

래수현(淶水縣)

옛날에는 주현(逎縣)이라고 하였는데 後周시기에 폐지하였다.

開皇 원년에 范陽으로써 주현(逎縣)을 삼고 다시 이곳에다 范陽을 설치하였다.

6년에 固安이라고 고쳤다가 8년에 폐기하였다.

10년에 또 永陽을 설치하고 18년에 래수(淶水)로 개정했다.

주현(逎縣)

옛날에는 范陽이 이곳에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小范陽이라 불렀다.

開皇 초기에 주현(逎縣)으로 고쳤다.

遂城縣

옛날에는 武遂라고 하였다.

後魏 시기에 南營州. 淮營州를 설치하고 5郡 10都를 설치하여 建德郡에 소속시켰다.

襄平. 新昌을 요동군에 소속시키고, 永樂은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富平. 帶方. 永安은 營口郡에 소속시켰다.

後齊 시기에는 오직 黎 1郡만 남겨 永樂. 新昌 2縣을 거느리도록 하고

나머지는 감소시켰다.

開皇 원년에 州가 옮겨오고 3년에 郡을 폐지하였다.

18년에 遂城으로 고쳤다.

龍山이 있다.

 永樂縣

옛날에는 北平이라 하였는데 後周시기에 이름을 고쳤다.

浪山이 있다.

 飛狐縣

後周시기에 縣을 설치하여 廣昌이라고 하였는데

仁壽(수 문제 楊堅의 연호, 601-604)초기에 고쳤다.

栗山이 있고 巨馬河가 있다.

<隋書 券30 地理中>

 

나라 때의 상곡군 수성현은 나라 시기의 낙랑군 수성현이다

북위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가 북방을 통일하던 과정

(439년 북위의 북방통일)에서 연화(延和) 원년(432), 장수대제 19년에 

조선의 백성들을 비여(肥如)로 옮겨 살게 하고 그곳에 조선현을 설치했다.

이후 한나라 시기의 낙랑군 수성현(보정시 인근} 자리에 나라 때 상곡군 수성현을 설치하게 된다.

   

 

9. 요서 낙랑 (遙西 樂浪)

 

조선은 周나라가 箕子를 봉한 나라이다.

옛적에 武王이 箕子를 석방하니 箕子가 차마 周나라의 곡식을 먹지 못하고 달아나 조선으로 갔다.

武王이 그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써 봉하였다.

太傅 箕子가 예의와 田蠶으로써 가르치고 8조의 가르침을 베푸니

門戶를 걸어 잠그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대를 지나 전국시기에 이르러 조선후도 또한 참람되게 王이라 칭하였다.

燕나라의 전성가로부터 시작해서 燕에 소속되었으며 관리를 배치하기 위하여 鄣塞를 쌓았다.

그 뒤에 燕王 盧綰이 반기를 들고 흉노로 들어가니

燕人 衛滿이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蠻夷服을 입고

동쪽으로 도망쳐 長城을 나가 貝水를 건너 조선왕 準을 공격하고 秦의 옛 空地 上.下障에 거주하였다.

점차 眞番 朝鮮 諸夷 및 옛 燕과 齊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었으며

王儉 (注, 지명이다. 貝水의 동쪽에 있었다.)에 도읍하였다.

그때가 마침 孝惠 高后시기로서 천하가 안정된 터라

요동태수가 위만에게 外臣이 되어 塞外의 蠻夷들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위만이 협력으로써 그 부근의 小邑들을 침략할 수 있었고

진번과 임둔이 다 와서 복속되어 지방이 수천리나 되었다.

아들에게 전하였고 손자 右渠에 이르러 漢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을 유입시킨 것이 꽤나 많았다.

武帝 元封 2년에 樓船 장군 楊僕을 보내 齊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향해 가도록 했는데 병력은 5만 명 이었다.

좌장군 <순체荀彘>는 요동으로 출동하였다.

얼마 후에 조선인이 우거를 살해하고 와서 항복하니 드디어 그 땅을 평정하여

眞番. 臨屯. 樂浪. 玄兎 4郡을 설치했는데 지금은 모두 東夷의 땅이 되었다.

昭帝 시기에 임둔. 진번을 파하여 樂浪. 玄兎에 병합시키니 이로서 內屬되었다. 

<太平寰宇記 券172 下 朝鮮>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나라 때 <樂史(930-1007)>가 편찬한 지리총서로서 200권이다.

송 태종 태평흥국 연간(976-983)에 편찬된 본서는

현존하는 지리총서 가운데 비교적 시기가 빠르고 완전한 책으로 평가된다.

 五代 十國史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樂史>가 태평환우기를 편찬할 때 한사군 지역이 "지금은 모두 東夷의 땅이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한사군 땅을 차지한 東夷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 당시에 거란족이 세운 나라가 내몽고 남쪽 오늘의 적봉시 寧城에 수도를 두고

북경시를 위시한 하북성 중북부 일대, 산서성 일부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사군 지역이 지금은 모두 東夷의 땅으로 되었다는 것은

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남방으로 밀려나 정부를 수립하고

동북지역은 모두 에게 빼앗겨 東夷 정권이 들어선 사실을 가라킨 것이다.

 

이 기록은 한사군의 낙랑이 대동강 일대에 설치되지 않고 요서에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10. 요동 낙랑 (遙東 樂浪)

 

初樂浪人王調 據郡不服 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遣前將軍李通 率二將軍 與公孫述將 戰於西城破之

西城縣 屬漢中 今金州縣也

<後漢書 光武帝紀 第1 >

 ...처음에 낙랑사람 <왕조王調>가 군에 의거하여 복종하지 않았다.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가을에 낙랑태수 <왕준王遵>을 파견하여 공격하니 군의 아전이 <왕조王調>를 죽이고 항복했다.

 전장군 <이통李通>을 파견하여 두 장군을 인솔하고  <공손술公孫述>의 장수와 서성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서성현은 한중에 속한다. 지금의 금주현이다.)

 

後漢書劉宋 시기의 역사가 <范曄(398-445)>이  東漢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 역사서로 24사의 하나이다.

光武帝 <劉秀(BC6-57)>가 재위하던 기간은  漢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이 그대로 존속한 시기이다.

그런데 이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요동에 있다."라고 후한서의 주석은 설명하고 있다.

 더구나 이 때의 요동은 지금의 漕河 以東을 말한다.

 

  ....及憲爲車騎將軍 辟駰爲椽 憲府貴重 椽屬三十人 皆故刺史二千石

唯駰以處士年少 擢在其間 憲擅權驕恣 駰數諫之 及出擊匈奴 道路愈多不法

駰爲主簿 前後秦記數十 指切長短 憲不能容 梢疏之 因察駰高第 出爲長岑長

長岑縣屬樂浪郡 其地在遼東 駰自以 逺去不得意 遂不之官而歸 永元四年 卒於家

<後漢書 券82 崔駰列傳>

 <두헌竇憲(?-92)>이 거기장군이 됨에 이르러서 <최인崔駰>을 불러 연()으로 삼았다.

 <두헌>官府가 귀중하여 椽屬 30인이다.

 옛 자사 2천석이었다.

 오직 <최인>이 나이 젊은 처사로써 발탁되어 그 중간에 끼여 있었다.

 <두헌>이 권력을 남용하고 교만 방자하니 <최인>이 자꾸 간언을 올렸다.

 흉노를 출격함에 이르러 도로에서 더욱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아지자

<최인>主簿가 되어 전후에 걸쳐 사건을 기록해 上奏하기를 수십 차례하여 장단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두헌>이 용납하지 못하고 조금 소원하게 대했다.

이윽고 <최인>이 높은 등급으로 급제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장잠(長岑)縣令으로 내보냈다.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하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최인>이 스스로 멀리 떠나가 뜻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해서 드디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돌아갔다.

 永元 4(92)에 집에서 서거했다.

   

 

 

11. 청주 낙랑 (靑州 樂浪)

  

古靑州

 「禹貢」에 말하기를 "발해와 태산 사이가 靑州이다."

 <孔安國(BC156-BC74)>은 말하기를

 "동북쪽으로 바다를 의거하고 서남쪽으로는 태산에 이른다.

이것은 靑州의 경계가 동쪽으로 바다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 경계는 대체적으로 태산으로부터 동쪽으로 密州를 지나고

동북쪽으로 海曲. 萊州를 경유하여 바다를 뛰어넘어

요동. 낙랑. 三韓의 땅을 분할하고 서쪽으로는 요수에 이른다.

 嵎夷 지역의 물길이 잘 다스려진 이후에

유수(濰水)와 치수(淄水)의 물길도 잘 소통되었다.

 嵎夷는 지명이니 곧 역곡(晹谷)이 있는 곳이다.

 略은 공력을 들임이 적은 것을 말한 것이다.

 濰와 淄는 두 물의 명칭이니 다 옛 물길을 회복한 것이다.

 유수(濰水)는 지금의 高密群 거현(莒縣) 유산(濰山)에서 발원한다.

 치수(淄水)는 지금의 치천현(淄川縣)이다.

 그곳의 토지는 백색의 沃土이고 해변의 광활한 지역은 모두가 염지이다(海瀕廣瀉)

 빈(瀕)은 물가이다.

 사(瀉)는 치함(齒醎)의 땅이다.

 瀕의 음은 頻이고 또 다른 음은 賓이다. 瀉의 음은 昔이다.

  "萊夷는 放牧을 한다"라고 하였다.

 萊山의 夷는 땅이 畜牧에 적합하다.

 지금의 東萊郡이다.

 舜이 靑州를 분할하여 營州를 만들고 다 牧을 배치하였다.

  <鄭玄>은 말하기를

"舜이 靑州로써 바다를 뛰어넘어 營州를 분할 배치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요동의 땅, 安東府는 마땅히 「禹貢」靑州의 지역이다.

 周나라에서는 徐州로써 靑州에 합쳐서 그 땅이 더욱 커졌다.

 周나라의 靑主는 서주(徐州). 연주(兖州) 2주의 분야를 겸하여 소유했다.

 『周禮』「職方氏」에는 말하기를, "正東을 靑州"라 한다.

  그곳의 鎭山은 기산(沂山)이고 大澤은 孟猪이며

沂山은 지금의 琅瑘郡 沂水縣에 있다. 바로 沂水의 발원지이다.

 孟猪는 澤의 명칭이다.지금 수양군(睢陽郡) 宋城縣에 있는 바로 孟猪이다.

 「禹貢」에서는 荊山과 황하의 사이에 있는 豫州에 속한다.

 「職方」과 山. 澤이 동일하지 않다.

 河流는 淮水. 泗水이고 관개할 수 있는 냇물은 기수(沂水).술수(沭水)이다.

 술수(沭水)는 東海郡 술양현(沭陽縣)에서 발원한다. 沭의 음은 述이다.

 그곳의 특산물은 蒲柳와 海魚이고 백성들의 남여 비율은 二男二女이다.

 그곳의 가축은 닭과 개가 적합하고 곡식은 벼와 보리가 적합하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지역이 少陽에 위치하여 그 색이 靑色이다.

 그러므로 靑州라고 하였다.

 天象에 있어서는 虛星과 危星은 곧 齊의 分野이다.

 漢의 淄州. 東萊. 瑯瑘. 高密. 膠東. 齊南이 다 그 분야이다.

 秦이 천하를 평정한 다음 郡을 설치 했는데 이곳은 齊郡,

 지금의 北海. 齊南. 淄川. 東萊. 東牟 등 郡의 지역이 이곳이다.

 瑯瑘의 동쪽지역, 지금의 高密郡 땅이다. 

 秦나라가 혼란에 처하자 <項羽>가 천하를 분할하여 그 땅으로써 나라를 삼으니

膠東 <田市>로써 왕을 삼고 卽墨을 치소로 하였다.지금의 東萊 郡縣이다.

齊 <田都>로써 왕을 삼고 臨淄를 치소로 하였다. 지금 北海 郡縣이다.齊北이다.

 <田安>으로써 왕을 삼고 博陽을 치소로 하였다. 이를 일러 三齊라고 하였다.

 漢武帝가 13州를 설치하니 이곳은 역시 靑州가 되었다.

군과 국 6개를 거느렸다.

後漢시대에는 그대로 따랐고

군과 국 5개를 거느리고 임치를 치소로 하니 지금의 북해 군현이 이곳이다.

魏晉시대에도 역시 그대로 따랐다.

군과 국 6개를 거느렸다.

晉나라에서는 또 平州를 설치했다.

군과 국 5개를 거느렸고 창려를 치소로 하였으니 지금의 안동부이다.

晉 懷帝 말년에는 <石勒>에게 함락되었다.

 <모용황>과 <모용각>이 <염민冉閔(?-352)>을 멸망시키고 청주를 차지했다.

符氏에 이르러 前燕을 평정시키고 다시 그 땅을 소유하였다가

符氏가 패망한 후엔 刺史 <符郞>이 州로써 晉에 항복하였다.

晉은 靑州로써 幽州를 삼았다.

<피려혼辟閭渾>으로써 刺使를 삼고 廣固를 鎭으로 하였다.

晉 安帝시기에 平州는 또 <모용수>에게 함락되었고

靑州는 또 <모용덕>의 차지한 바 되어 다시 靑州로 고쳤다.

<모용초>는 靑州를 東萊로 옮겼다.

뒤에 <劉裕>에게 빼았겼고 다시 靑州를 설치했다.

당시에 <羊穆之>로써 刺史를 삼았고 廣固를 진으로 하였다.

 平州는 <모용수> 이후로부터 또 <풍발>에게 함락되었다가

곧 바로 後魏의 소유가 되었고

靑州는 宋나라에서 분할하여 靑州. 冀州 2州로 삼았다가

靑州는 郡을 아홉 개를 거느리고 臨淄를 치소로 하였고

冀州는 郡을 아홉개를 거느리고 歷城을 치소로 하였다. 지금의 齊南 郡縣이다.

뒤에는 後魏에 편입되었다.

그 이후에 분할된 것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大唐에서는 15부를 설치하였는데 이 지역은 河南道 北海.齊南. 淄川. 東萊. 高密과

河北道 지금의 安東府가 되었다.

<通典 券180 州郡 古靑州>

   

通典나라 때 <杜佑(735-812)>가 편찬한 책으로 典章制度를 전문으로 다룬 중국 최초의 史籍이다.

 通典에서는 靑州 안에 遼東. 樂浪. 三韓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서쪽 경계를 遼水라고 말하였다.

이는 遼東. 樂浪. 三韓이 모두 발해 유역에 존재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고대의 遼水

오늘의 요령성 요하가 아니라 하북성 동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말해 오늘날의 산동성 북쪽에 遙東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通典의 요동과 의 창려, 의 안동도호부를 동일지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安東府

동쪽으로 越喜部落까지 2,500리이고 남쪽으로 柳城郡 경계까지 90리이고

서쪽으로 거란 경계까지 80리이고 북쪽으로 발해까지 1,950리이고

동남쪽으로...까지...리이고 서남쪽으로 ...까지...리이고

서북쪽으로 거란 衙帳까지 1,000리이고 동북쪽으로 거란 경계까지 80리이고

西京까지는 5,320리이고 東京까지는 4,440리이다.

 戶는....이고 인구는....이다.

安東大都護府는 舜이 靑州를 분할하여 營州를 만들었고 牧을 배치하였으니 마땅히 遼水의 동쪽이 이곳이다.

序篇에서 이미 상세히 주석을 달았다.

춘추시대 및 전국시대에는 아울러 燕에 소속되었고 秦나라와 前漢. 後漢시대에는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는 낙랑과 통하였다.

낙랑은 본래 조선국인데 한무제 원봉 3년에 조선인이 그 왕의 목을 베어 항복하였다.

그 땅으로써 낙랑. 현토 등 군을 삼았다. 뒤에 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요수의 동쪽에 있었다.

晉나라시기에는 그대로 따랐으며 겸하여 平州를 설치하였다.

郡과 國 5개를 거느렸고 여기에 치소를 두었다.

후한말로부터 <공손도>가 평주목이라 자칭했으며

그의 아들 康, 康의 아들 文懿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요동을 제멋대로 점거하였다.

東夷九種이 다 이들에게 복종하여 섬겼다.

魏나라시대에는 동이교위를 배치하여 양평에 거주시켰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을 분할하여 平州로 삼았다.

뒤에 다시 幽州에 병합하였다.

文懿가 멸망한 뒤에는 護東夷校尉를 두어 양평에 거주하게 했다.

晉나라 咸寧(晉 武帝의 연호) 2년(276년)에는 창려. 요동. 현토. 대방. 낙랑. 등

郡 .國 5개로 분할하여 平州를 설치하였고 <모용외>로써 刺史를 삼았다.

마침 水嘉之亂이 일어나자 백성들에 의해 추대한 바가 되었다.

그 손자 <모용준>에 이르러 도읍을 薊로 옮겼고

그 뒤에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가 다시 和龍으로 천도하였다.

後魏시대에 고구려가 그 지역에 도읍하였다.

大唐 總章(당 고종 연호) 원년(688년)에 <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176개 성을 얻어 그 지역을 都督府 9. 州 42. 縣 100개로 분할하였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하고 그 지역의 지도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았다.

上元 2년(676년)에 遙東故城으로 옮겼고 儀鳳 2년(677년)에 또 新城으로 옮겼으며

聖歷(武后 연호)원년(698년)에 안동도호부로 이름을 고쳤고

神龍(무측천과 당 중종 연호) 원년(705년)에 平州로 옮겼고

天寶 2년(742년)에 또 遼西故郡城으로 옮겼다가 至德(756-758) 이후에 페지되었다.

屬縻州 14개를 거느렸다.

<通典 券180 州郡 古靑州>

   

.시대의 요동군, 니리 시기의 平州, 後魏 시기의 고구려 평양성,

나라 때 설치한 안동도호부는 동일한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다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그 명칭 상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도호부와 낙랑. 대방등 遼水의 동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남쪽으로 유성군 경계까지가 90리이고 서쪽으로 거란 경계까지가 80리이다"

라는 기록은 요수가 하북성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12. 단궁 낙랑 (檀弓 樂浪)

 

기자조선 사람들은 성격이 신중하고 기욕(嗜慾)이 적으며 염치가 있다.

남녀는 옷은 다 곡령(曲領){목부위가 둥근 옷}을 착용하고 남자는 銀花를 매다는데

넓이가 몇 치쯤 되며 이것으로 장식을 삼는다.

풍속이 산천(山川)을 중요시 한다. 산천은 각각 부분이 있어 서로 간섭할 수가 없다.

同姓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

忌謂하는 것들이 많고 질병이 나거나 사망하게 되면 곧바로 예전에 살던 집을 버린다.

삼을 심고 누에를 키우며 금포(錦布)를 만들 줄 안다.

또 자못 기후와 星宿에 대한 이해가 있어 그 해의 풍년 들고 흉년들것을 안다.

珠玉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또 호랑이를 제사 지내 神으로 모신다.

그 읍락에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서로 처벌하여 소나 말 같은 짐승을 가지고

배상하도록 하는데 이를 責禍라고 한다. 그래서 도둑이 적다.

모(矛)의 길이가 3丈이나 되어 혹은 몇 사람이 함께 그것을 들기도 한다.

步戰에 능하고 樂浪檀弓이 그 지역에서 나온다.

또 문표(文豹)가 많고 과하마(果下馬)가 있는데 높이가 3尺쯤 된다.

그 바다에서는 반어피(班魚皮)가 나온다.

한나라 때는 두려워서 그것을 바쳤다.

<太平寰宇記 券172 下 朝鮮 >

  

이 자료는 기자조선 사람들의 성격에 대해

"신중하고 욕심이 적으며 염치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민족성은 어느 민족보다 위대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재물보다는 도덕과 진리를 귀하게 여겼고

그러한 정신이 주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 민족의 성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호랑이를 제사지내 신으로 모셨다."는 것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신앙했던 濊國의 민족임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의 단궁은 낙랑지역에서만 생산되었다.

낙랑은 단궁의 생산지이기 때문에 낙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활을 만들었던 역사와 전통이 그 지역에 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동강 유역에서 박달나무가 활을 만들 만큼 많이 자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없고

또 대동강 유역에서 단궁이 만들어졌다는 역사 기록을 본 일도 없다.

낙랑단궁에 관한 기록은 낙랑에 관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國祖 檀君太白山 檀木 아래에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어 檀弓檀木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明一通志에는 "白檀縣의 폐현이 密雲縣에 있는데 남쪽에는 白檀山이 있다."

(白檀廢縣 在密雲 南有白檀山)라는 기록이 나온다.

白檀縣의 남쪽 지금의 북경시 密雲縣 남쪽에 백단산이 있다.

여기 보이는 白檀山白檀은 우리말 '밝달'의 한자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白檀山은 산의 남쪽에 온통 박달나무로 가득하다.

날씨가 맑아 햇볕이 좋은 날은 온 산의 밝달나무들이 햇볕을 받아 광채를 발산하여 독특한 경관을 형성한다.

이 풍경이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白檀晴光"密雲八景  즉 밀운현의 여덟 곳 풍경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밀운현에는 백두산 천지와 같은 천지가 있고,

또 이 지역은 바로 옛 朝鮮河로 알려진 현재의 潮河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이 하북성 白檀山이 바로 밝달나무로 만든 활이 생산되던 樂浪檀弓의 산지가 아닐까?

청나라 사람 <납란성덕纳蘭性德>詩訶全集에는 白檀山을 두고 지은 칠언절구가 실려 있다.

白檀山下水聲秋  地踞潮河最上流

日暮行人尋堠館  凉砧一片古檀州

이 시에는 白檀山潮河의 상류에 위치하고 또 이 지역은 옛적에는 檀州로 불리던 지역이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朝鮮河의 상류 옛 檀州에 위치한 白檀山 즉 우리말 밝달산은 단군조선,

그리고 그 조선의 명궁인 樂浪檀弓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