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高唐전쟁(645년)(1)

지보고 2023. 11. 14. 08:22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은 645년에 발생하여 고구려가 멸망할때까지 승패를 거듭하며 20년 이상을 지속한 전쟁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지금의 요녕성 요동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평양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고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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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645년 高唐전쟁(중국인과 강단사학자 주장)

 

 

1. 연개소문의 쿠데타 (642년)

 

貞觀 十六年 十一月 丁巳

营州都督张俭奏高丽东部大人泉盖苏文弑其王武

정관 16년(642년) 11월 정사일(5일)에 영주(營州)도독 <장검張儉>이

고구려 동부대인 <천개소문>이 그의 왕인 <고무高武>를 시해하였다고 아뢰었다.

 

연자유(용암) - 연태조(연씨) - 연개소문(603-657)

영류대제 <고건무高建武(575?-642)>

보장대제 <고장高藏(597?-682)>

 

盖苏文凶暴多不法其王及大臣议诛之

<천개소문>은 흉포하고 대부분 법을 지키지 아니하여  그 왕과 대신들이 그를 죽이려고 논의 하였었다.

 

盖苏文密知之悉集部兵若校阅者并盛陈酒馔于城南

召诸大臣共临视勒兵尽杀之死者百馀人

<천개소문>은 비밀리에 이를 알고 부(部)의 군사를 다 모아 놓고 사열하는 것처럼 하고

아울러 성의 남쪽에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려놓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가서 보다가

군사를 챙겨서 그들을 모두 죽였는데 죽은 사람이 1백여 명이었다.

 

因驰入宫手弑其王断为数段弃沟中立王弟子藏为王

自为莫离支其官如中国吏部兼兵部尚书也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말을 달려 궁궐로 들어가서 손수 그 왕을 시해하고

잘라서 몇 동강을 내어 시궁창에 버리고서 왕의 조카인 <고장高藏>을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

스스로 막리지가 되니, 그 관직은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에서의 이부상서가 병부상서를 겸직한 것과 같았다.

 

于是号令远近专制国事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 호령하고 국가의 일을 오로지 처리하였다.

 

盖苏文状貌雄伟意气豪逸身佩五刀左右莫敢仰视

<천개소문>은 생긴 모습이 크고 위엄이 있으며 의기는 호방하며

몸에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니었으며 좌우에 있는 사람이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每上下马常令贵人武将伏地而履之

매번 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면  항상 귀한 사람이거나 무장으로 하여금 땅에 엎드리게 하고 그를 디뎠다.

 

出行必整队伍前导者长呼

则人皆奔迸不避坑谷路绝行者国人甚苦之 

나갈 때는 반드시 대오를 가지런히 하였고,

앞에서 이끄는 사람은 길게 소리치게 하니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는데

웅덩이나 골짜기를 피하지 아니하니 길에는 다니는 사람이 끊기어서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심히 고통스럽게 여겼다.

 

우리의 사서인 태백일사의 <연개소문>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자

 

朝代記 曰 淵蓋蘇文 一云蓋金 姓淵氏 其先鳳城人也 父曰 太祚 祖曰 子遊 曾祖曰 廣

竝爲莫離支 弘武十四年五月十日生 九歲選爲皁衣仙人

<조대기>에 말하기를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다. 성은 연씨고, 그 조상은 봉성(鳳城)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광廣>이다.

대대로 막리지 직을 맡았다.

홍무 14년(603년) 5월 10일에 출생하여 9세에 조의선인에 선발되었다.

 

儀表雄偉 意氣豪逸 每與軍伍 列薪而臥 手瓠而飮 群焉而盡己 混焉而辨微 賞賜必 分給 誠信周護 有推心置 腹之雅量 至有緯地經天之才 人皆感服 無一人 異懷者也 然 用法嚴明 貴賤一律 若有犯者 一無假借 雖當大難 少不驚心 與唐使酬言 亦不屈志 常以自族陰害爲小人 能敵唐人爲英雄 喜焉 而 下賤可近 怒焉而 權貴俱震 眞一世之快傑也

(그는) 용모(儀表)가 사내다웠으며, 의기(意氣)가 호탕하고 근면하였다.

늘 자신이 이끄는 낭도(軍伍)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베고 잠을 잤으며,

표주박으로 물을 마셨다. 무리와 함께 있을 때에는 솔선수범하였고,  혼란할 때에는 세세한 것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불만을 내뱉고 싶어도 참는 아량이 있어, 그 위용이 땅과 하늘에 닿았으니,

모든 사람들은 감복하여 어느 누구도 딴 마음을 품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然) 법 적용은 엄격하고 분명하여, 귀하고 천함이 없이 일률적으로 적용하였다.

행여(若)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비록(雖) (감당하기 힘든) 큰 일에 처해도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당나라 사신을 만나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자신의 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항상 그는 말 버릇처럼 자신의 민족을 음해하는 자는 소인배라 하였고,

능히 당나라 사람을 적대시 하는 자는 영웅이라 하였다.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낮고 천함의 구별이 없이 허심탄회하게 대했으나

노(怒)하면 권세있는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모두 벌벌 떨었다. 정말로 일세의 쾌걸이었다.

 

自言生於水中 能潛泳竟日 尤健不疲 衆咸驚伏地 羅拜 曰 滄海龍神 復爲化身矣 蘇文 旣放高成帝 與衆共迎 高臧 是爲 寶臧帝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수중(물가, 발해)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는 하루 종일 잠영(물 속 헤엄)을 해도 피로할 줄 모르고 더욱 힘이 솟는 듯 하였다.

무리들은 탄복하여 모두 땅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창해(발해)의 용신이 사람으로 변하여 다시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영류왕)를 몰아내고, 무리와 더불어 고장(高臧)을 맞아들였다.

이 사람이 바로 보장제이다.

 

蘇文 旣得志 行萬法 瑋公之道 成己自由 開物平等 三忽爲佺 皁衣有律 主力國防 備唐甚盛

<소문>은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였다.

고구려가 나아갈 길로 성기자유(成己自由, 자기성찰로 자유를 얻음)와

개물평등(開物平等, 사물의 이치를 밝혀 평등사회 건설)의 국정지표를 세우고,

삼홀위전(환인, 환웅, 단군의 가르침으로 교화)하고,

조의의 규율을 세워 국방에 주력하여 당나라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先 與百濟上佐平 俱存立義 又請 新羅使 金春秋 館於私邸 曰 唐人 多悖逆 近於禽獸 請吾子 須忘私仇 自今三國 敍族合力

直屠長安 唐醜 其可擒也 戰勝之後 仍舊地而聯政 仁義共治 而約相勿侵爲 永久遵守之計何如 勸再三 春秋 終不聽惜哉

이에 앞서 백제의 상좌평(성충, ?~656)과 의(義)를 지킬 것을 서로 약속하고,

또 신라에서 온 사신 김춘추(604∼661)를 자기 집에 머물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밥먹듯이 하니, 그 무리들은 짐승과 같습니다.

청하건대, 그 동안의 사사로운 감정은 이제 다 잊고,  지금부터는 삼국은 같은 서족(敍族 : 뿌리가 같은 민족)이니,

서로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의 괴수(醜)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옛 땅에 따라서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仁義)로써 함께 다스리며,

서로 침범하지 않을 약속을 하고,  영구히 준수할 계획을 수립함이 어떠하겠소?" 라고 여러 번 김춘추에게 권하였으나

끝까지 듣지 않아 애석하기 짝이 없었다.

 

 

2. 당의 사신 <상리현장>이 평양에서 <연개소문>을 만나다 (644년)

 

相里玄奖至平壤莫离支已将兵击新罗破其两城

高丽王使召之乃还

644년 정월 <상리현장相里玄奖>이 평양에 이르렀는데,

막리지는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그 두 개의 성을 깨뜨리고  고구려왕의 사자가 그를 불러서 마침내 돌아왔다.

 

玄奖谕使勿攻新罗莫离支曰

昔隋人入寇新罗乘衅侵我地五百里

自非归我侵地恐兵未能已

<상리현장>이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타이르니 막리지가 말하였다.

“ 옛날에 수나라 사람들이 쳐들어오자  신라 사람들이 틈을 타고서 우리의 땅 500 리를 침략하였는데

스스로 우리에게 침략했던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아마도 그칠 수는 없을 것이오.”

 

이때 신라는 진흥대제의 북벌로 길림까지 진출해 있었다.

  

玄奖曰

既往之事焉可追论至于辽东诸城本皆中国郡县

中国尚且不言高丽岂得必求故地莫离支竟不从   

 <상리현장>이 말하였다.

“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찌하여 추후에 논란을 한단 말이오!

 요동지역에 있는 여러 성의 경우에 본래 모두 중원지역에 있는 군현들이지만

중원에 있는 나라도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데, 고구려가 어찌하여 반드시 옛날 땅을 요구한다는 말이요.“

 막리지는 끝내 좇지 않았다.

 

二月乙巳朔玄奖还且言其状

2월 을사일(1일)에 <상리현장>이 돌아와서 그 상황을 모두 말하였다.

 

上曰

盖苏文弑其君贼其大臣残虐其民

今又违我诏命侵暴邻国不可以不讨

황상이 말하였다.

“ <개소문>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그 대신들에게 해를 끼치고 그 백성들을 학대하였으며,

지금 또한 나의 조명(诏命)을 어기면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폭행을 하고 있으니 토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谏议大夫褚遂良曰

陛下指麾则中原清晏顾眄则四夷詟服威望大矣

今乃渡海远征小夷若指期克捷犹可也

万一蹉跌伤威损望更兴忿兵则安危难测矣

간의대부인 <저수량褚遂良>이 말하였다.

“ 폐하께서 깃발을 휘둘러서 가리키자 중원지역이 깨끗하고 편안해졌으며,

돌아보니 사방에 있는 이적들이 두려워서 복종하며 위엄과 바라는 것이 큽니다.

지금 마침내 바다를 건너서 멀리 가서 작은 오랑캐를 정벌하니  만약에 기한을 정해 놓고 이긴다면 오히려 좋겠습니다.

만일에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위엄과 소망에 손상이 됩니다.

또한 분에 차있는 군사를 일으키면 안위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李世勣曰

间者薛延陀入寇陛下欲发兵穷讨魏征谏而止使至今为患

向用陛下之策北鄙安矣

<이세적>이 말하였다

“ 전에 <설연타薛延陀>가 들어와 노략질 할 때에 폐하께서 군사를 일으켜서 끝가지 토벌하고자 하였는데

<위징>이 간언을 하여 중지하였다가 오늘에 이르러서 걱정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전에 폐하의 계책을 사용했다면 북쪽 시골은 편안해 졌을 것입니다.

 

 上曰

此诚征之失朕寻悔之而不欲言恐塞良谋故也

 황상이 말하였다.

“ 그렇소. 이것은 진실로 <위징>의 실수요.

짐은 곧 그것을 후회 하였으나 말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은 훌륭한 모의를 막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오.“

 

上欲自征高丽褚遂良上疏以为

天下譬犹一身两京心腹也州县四支也四夷身外之物也

高丽罪大诚当致讨

但命二三猛将将四五万众仗陛下威灵取之如反掌耳

今太子新立年尚幼稚自馀籓屏

陛下所知一旦弃金汤之全逾辽海之险

以天下之君轻行远举皆愚臣之所甚忧也

上不听

황상이 스스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저수량>이 상소문을 올렸다.

“ 천하를 비유하여 한 몸과 같다고 하면  두 개의 서울은 마음과 배이고 주와 현은 사지입니다.

사이(四夷)란 몸 밖에 있는 물건입니다. 고구려가 지은 죄는 커서 당연히 토벌해야합니다.

다만 두세 명의 장수에게 명령하여 4-5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폐하의 위엄과 신령함에 의지하여 그것을 빼앗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지금 태자를 새로 세우시었는데 연세가 아직 어리고,  나머지 번병(籓屏)들은 폐하께서 아시는 바,

하루아침에 금성탕지(金城湯池)를 버리시고 요해(遼海)의 험난한 곳을 넘는 것은

천하의 군주로서는 가벼이 멀리까지 가시는 것이니  모두 어리석은 신하인 저로서 아주 우려합니다.”

 황상은 듣지 않았다.

 

时群臣多谏征高丽者上曰

八尧九舜不能冬种野夫童子春种而生得时故也

夫天有其时人有其功

盖苏文陵上虐下民延颈待救此正高丽可亡之时也

议者纷纭但不见此耳

이 때에 여러 신하들은 대부분이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을 간언하니 황상이 말하였다.

“ 여덟 명의 요 임금과 아홉 명의 순 임금이 있어도 겨울에는 파종을 할 수 없고,

들에 있는 지아비와 어린 아이도 봄만 되면 파종을 하여 자라게 하는 것은 적절한 시기를 만난 연고이다. 

무릇 하늘은 그 적절한 때를 갖고 있고 사람은 그 공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개소문>이 윗사람을 능욕하고 아랫사람을 학대하니  백성들이 목을 늘여가지고 구해 주기를 기다린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가 망할 수 있는 시기인데 의논하는 것이 분분하지만 다만 이것을 보지 않았다.“

 

 

3. 당 태종의 전쟁준비(644년)

 

上将征高丽七月辛卯

敕将作大监阎立德等诣洪江三州造船四百艘以载军粮

황상이 장차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하여 가을 7월 신묘일(20일)에

장작대감인 <염입덕閻立德>등에게 칙령을 내려서 홍주(洪州), 요주(饒州), 강주(江州) 세 주에 가서

배 4백 척을 만들어서 군량을 실어 놓게 하였다.

  

644년 7월 강소성에서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한다.

홍주(洪州), 요주(饒州), 강주(江州)는 강소성에 있는 주이다.

  

甲午下诏遣营州都督张俭等帅幽

营二都督兵及契丹靺鞨先击辽东以观其势

갑오일(23일)에 조서를 내려서 영주(營州) 도독인 <장검張儉> 등을 파견하여

유주(幽州)영주(營州) 두 도독의 군사와 거란 그리고 말갈 족속을 인솔하고

요동을 공격하여 그 형세를 관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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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영주와 유주 및 요동

 

 644년 7월 23일 <장검>이 요동으로 진격한다.

  

以太常卿韦挺为馈运使以民部侍郎崔仁师副之

自河北诸州皆受挺节度听以便宜从事

태상경(太常卿)인 <위정韋挺>을 궤운사(馈运使)로 삼고  민부시랑인 <최인사崔仁师>를 그에게 부사로 삼았으며,

하북 지역의 여러 주에서부터 모두 <위정>의 통제를 받아서  편리한 방법으로 일을 좇도록 허락하였다.

 

又命太仆卿萧锐运河南诸州粮入海瑀之子也

또 태복경인 <소예蕭銳>에게 명령하여  하남 지역의 모든 주의 양식을 운반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 

 <소예蕭銳>는 <소우蕭瑀>의 아들이었다. 

 

乙未鸿胪奏高丽莫离支贡白金

을미일(25일)에 홍려시(鸿臚寺)에서 상주문을 올렸다.

“ 고구려의 막리지가 백금(白金)을 공물로 보내 왔습니다.”

 

 褚遂良曰

莫离支弑其君九夷所不容今将讨之而纳其金此郜鼎之类也

臣谓不可受上从之

<저수량>이 말하였다.

“ 막리지는 그 임금을 시해하고 구이(九夷)도 용납하지 않는 바이고

지금 장차 그를 토벌하려고 하는데,  그들의 금을 받는다면 이는 고정(郜鼎, 뇌물)과 같은 것입니다.

신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상이 이를 좇았다.

 

上谓高丽使者曰

汝曹皆事高武有官爵

莫离支弑逆汝曹不能复仇今更为之游说以欺大国罪孰大焉

悉以属大理

 

황상이 고구려의 사신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고무高武>를 섬기었고 관작(官爵)을 갖고 있다.

막리지가 시역(弑逆)을 하였는데, 너희들은 복수를 할 수 없었고

지금에는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하여 큰 나라를 속이려하니 죄는 어느 것이 큰가?”

모두 대리시(大理寺)에 위탁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644년 9월 고구려에서 당에 사신을 보낸다. 

  

前宜州刺史郑元璹已致仕

上以其尝从隋炀帝伐高丽召诣行在

问之对曰辽东道远粮运艰阻东夷善守城攻之不可猝下

전에 의주(宜州) 자사였던 <정원숙郑元璹>은 이미 치사(致仕)하였는데,

황상은 그가 일찍이 수 양제를 좇아서 고구려를 정벌했었기 때문에

불러서 행재소로 오게 하여 그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 요동까지의 길은 멀고 양식의 운반도 어렵고 막힙니다.

동이족들은 성을 잘 지켜서 이를 공격하여도 급히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上曰今日非隋之比公但听之

황상이 말하였다.

“ 오늘날은 수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니, 공은 다만 이를 듣기만 하시오.”    

  

张俭等值辽水涨久不得济上以为畏懦召俭诣洛阳

<장검> 등이 요수의 물이 불어서 오래 건너질 못하자

황상은 두려워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하고 <장검>을 불러서 낙양으로 오게 하였다.

 

644년 11월 당 태종은 <장검>을 낙양으로 불러 들인다.

   

具陈山川险易水草美恶上悦  

도착하여 산천의 험한 곳과 손쉬운 곳과 물이나 풀이 좋고 나쁜 것을 갖추어 진술하니 황상이 기뻐하였다.

 

上闻洺州刺史程名振善用兵召问方略嘉其才敏劳勉之

卿有将相之器朕方将任使

황상은 명주(洺州) 자사인 <정명진程名振>이 용병을 잘하여 불러서 방략을 묻고

그의 재주가 민첩한 것을 칭찬하고 그에게 위로하고 격려하며 말하였다.

경은 장상(将相)의 그릇을 갖고 있으니 짐이 바야흐로 장차 사명을 맡기겠소.”

 

명주(洺州)는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 영년현 동남쪽이다.

  

名振失不拜谢上试责怒以观其所为

山东鄙夫得一刺史以为富贵极邪

敢于天子之侧言语粗疏又复不拜

<정명진>은 실수하여 절하고 감사하지 않았는데,

황상이 시험적으로 나무라며 화를 내며 그가 하는 것을 보려고 말하였다.

 “ 산동 지역의 시골 녀석이 한 개의 자사 직책을 갖게 되니 부귀함이 극에 달하였다고 생각하는가!

감히 천자의 옆에서 말하는 것이 거칠고 또한 다시 절도 하지 않다니!“

 

名振谢曰疏野之臣未尝亲奉圣问适方心思所对故忘拜耳

<정명진>이 사죄하며 말하였다.

“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신은 아직 일찍이 친히 성스러운 질문을 받던 적이 없었고,

마음속으로 대응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절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举止自若应对愈明辩

행동거지가 태연하고 응대하는 것은 더욱 분명하였다.

 

上乃叹曰房玄龄处朕左右二十馀年每见朕谴责馀人颜色无主

名振平生未尝见朕朕一旦责之曾无震慑辞理不失真奇士也

황상이 감탄하며 말하였다.

“ <방현령房玄龄>이 짐의 좌우에 20여 년 동안 있었는데

매번 짐을 볼 때마다 나머지 사람을 견책하면 안색이 제 모습을 갖지 못하였다.

<정명진>은 평생 동안 짐을 일찍이 보지도 못하였는데,

짐이 하루아침에 그를 책망하였지만 일찍이 두렵고 떨리는 기색이 없었고

말의 조리도 잃지 않으니 정말로 기이한 인사로다!”

 

即日拜右骁卫将军   

그날로 우효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甲午以刑部尚书张亮为平壤道行军大总管帅江

硖兵四万长安洛阳募士三千战舰五百艘自莱州泛海趋平壤

갑오일(24일)에 형부상서인 <장량张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강주(江州), 회주(淮州), 영주(嶺州), 협주(峽州)의 군사 4만 명을 인솔하고,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병사 3천 명과 전함 5백 척을 인솔하고  래주(莱州)에서 배를 띄워 평양(平壤)으로 향하게 하였다.

 

又以太子詹事左卫率李世勣为辽东道行军大总管

帅步骑六万及兰河二州降胡趣辽东两军合势并进

또한 태자첨사이며 좌위솔인 <이세적李世勣(594-669)>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와 하주(河州) 두 주에 있는 항복한 호족들을 인솔하고 요동으로 나아가게 하였는데,

양군이 세력을 합쳐서 같이 나아가게 하였다.

 

644년 11월 24일 <장량>이 전함 5백 척을 인솔하여 4만여명의 수군이 래주에서 평양으로 출정하고

<이세적>이 보병과 기병 6만 명을 인솔하여 요동으로 출정한다.

평양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이다. 전함 1척의 탑승인원은 86명이다.

 

庚子诸军大集于幽州遣行军总管姜行本

少府少监丘行淹先督众工造梯冲于安萝山

경자일(30일)에 여러 군대가 유주(幽州)에서 크게 모여서

행군총관인 <강행본姜行本>과 소부소감인 <구행엄丘行淹>을 파견하여

먼저 많은 공인(工人)들을 감독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운제와 충차를 만들게 하였다.

 

 644년 11월 30일 유주(幽州 치소는 보정시 唐縣이다)에서 운제와 충차를 만든다.

 

 时远近勇士应募及献攻城器械者不可胜数上皆亲加损益取其便易

이때에 멀고 가까이에 있는 용사들 가운데 모집에 호응한 사람과

성곽을 공격하는 기계를 바친 사람은 헤아릴 수가 없이 많았는데,

황상이 모두 친히 덜어내거나 덧붙이며 그 가운데 편리한 것을 선택하였다.

 

 

4. 당 태종의 참전 유시  

 

又手诏谕天下高丽盖苏文弑主虐民情何可忍

今欲巡幸幽问罪辽所过营顿无为劳费

또한 손수 조서를 내려서 천하 사람들에게 유시(諭示)하였다.

“ 고구려의 <개소문>은 주군을 시해하고 백성들에게 학대하였으니 마음으로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유주(幽州)계주(蓟州)를 순행하며 요동갈석산에서 죄를 묻는데,

지나가는 곳에서 군영을 세우고 주둔하려고 하는 것인데  수고롭게 비용을 들지 않게 할 것이다.“

 

요동은 지금의 조하(漕河) 동쪽을 말하고 갈석산은 보정시 래원현의 낭아산을 말한다.

 

且言昔隋炀帝残暴其下高丽王仁爱其民

以思乱之军击安和之众故不能成功

今略言必胜之道有五

一曰以大击小二曰以顺讨逆三曰以治乘乱四曰以逸敌劳

五曰以悦当怨何忧不克布告元元勿为疑惧

 또 말하였다.

“ 옛날에 수나라의 양제는 그 아랫사람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고,

고구려의 왕은 그 백성들에게 어질고 아껴서 어지러움을 생각하는 군사를 가지고

편안하고 화합된 무리들을 공격하였고 그러므로 성공할 수 없었다.

지금 대략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길에는 다섯 가지가 있음을 말하겠다.

첫째로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는 군대로 거역하는 것을 토벌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잘 다스려진 것으로 혼란한 틈을 타는 것이며

네 번째로 편안한 자세로 수고로운 것을 맞는 것이며

다섯째로 기쁜 마음을 가진 것으로 원망하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니 어찌 이기지 못할까를 걱정하겠는가?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노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于是凡顿舍供费之县减者太半   

이에 무릇 주둔하고 머무는데 드는 비용을 갖추는데 줄어든 것이 태반이었다.

 

十二月辛丑武阳懿公李大亮卒于长安遗表请罢高丽之师

12월 신축일(1일)에 무양의공(武阳懿公) <이대량李大亮>이 장안에서 죽었는데,

표문을 남겨서 고구려 원정군을 철회하라고 청하였다.

 

家馀米五斛布三十匹

집안에는 쌀 5곡과 포 30필만을 남겼다.

 

亲戚早孤为大亮所养丧之如父者十有五人

친척들 가운데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가 <이대량>이 길러준 사람들이

그를 아버지처럼 상례를 치렀는데 모두 15명이었다.  

   

甲寅诏诸军及新罗百济契丹分道击高丽   

갑인일(14)에 여러 군대와 신라, 백제 그리고 해()와 거란에 조서를 내려서 길을 나누어서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644년 12월 14일, 당 태종은 신라, 백제, 해(奚), 거란에게 출병을 요청한다.

  

上遣突厥俟利苾可汗北渡河

薛延陀眞珠可汗恐其部落翻动意甚恶之豫蓄轻骑于漠北欲击之

애초에 황상은 돌궐의 <사리필俟利苾> 가한을 파견하여 황하를 건너게 하니,

설연타의 <진주眞珠> 가한이 그 부락들이 뒤집혀 움직일까 두려워하여  속으로 이를 아주 싫어하면서,

막북지역에 기병을 미리 예비하여 두었다가 이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上遣使戒敕无得相攻

황상은 사자를 파견하여 경계하는 칙령을 내리고 서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真珠可汗对曰

至尊有命安敢不从

然突厥翻覆难期当其未破之时岁犯中国杀人以千万计

臣以为至尊克之当剪为奴婢以赐中国之人

乃反养之如子其恩德至矣而结社率竟反

此属兽心安可以人理待也臣荷恩深厚请为至尊诛之

自是数相攻   

<진주> 가한이 대답하였다.

“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명령을 내리시니 어찌 감히 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돌궐은 번복하여 뒤집어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아직 격파되지 않았을 때에  매년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를 침범하여 사람을 죽인 것은 천만 명으로 계상됩니다.

신이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이를 이기셨으니 마땅히 잘라서 노비를 삼아

중원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사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마침내 도리어 그들을 길러서 아들처럼 하시니 그 은덕이 지극한데 <아사나결사솔>이 끝내 배반하였습니다.

이 족속들의 짐승 같은 마음은 어찌 사람의 이치로 대우하겠습니까?

신은 은혜를 입은 것이 깊고 두터우니  청컨대 지극히 높으신 분을 위하여 이들을 죽이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로부터 자주 서로 공격하였다.

 

俟利苾之北渡也有众十万胜兵四万人

俟利苾不能抚御众不惬服

<아사나사리필> 가한을 파견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건널 때에

무리가 10만 명이었고 정예의 군사는 4만 명이었으므로 <아사나사리필>이 어루만지며 억제할 수가 없어서

무리들이 즐겨서 복종하지 않았다.

 

戊午悉弃俟利苾南渡河请处于胜夏之间上许之

무오일(18)에 모두가 <아사나사리필>을 버리고 남쪽으로 와서

황하를 건너서 승주(勝州)와 하주(夏州) 사이에서 살게 해 달라고 청하였고 황상은 이를 허락하였다.

 

승주(勝州)는 내몽고 탁극탁현이고 하주(夏州)는 섬서성 백성자이다.

  

群臣皆以为

陛下方远征辽左而置突厥于河南距京师不远岂得不为后虑

愿留镇洛阳遣诸将东征

여러 신하들이 모두 생각하였다.

“ 폐하께서는 바야흐로 왼쪽으로 원정을 하시는데 황하의 남쪽에 돌궐을 두시면

경사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어찌 후방이 염려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원컨대 남아서 낙양을 진수(鎭守)하시고 여러 장수를 파견하여 동방정벌을 하십시오.”

 

上曰夷狄亦人耳其情与中夏不殊

人主患德泽不加不必猜忌异类

盖德泽洽则四夷可使如一家

猜忌多则骨肉不免为仇乱

炀帝无道失人已久辽东之役人皆断手足以避征役

玄感以运卒反于黎阳非戎狄为患也

朕今征高丽皆取愿行者募十得百募百得千其不得从军者

皆愤叹郁邑岂比隋之行怨民哉

突厥贫弱吾收而养之计其感恩入于骨髓岂肯为患

且彼与薛延陀嗜欲略同彼不北走薛延陀而南归我其情可见矣

황상이 말하였다.

“ 이적(夷狄)도 또한 사람일 뿐이다.

그 마음은 중하(中夏)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인주(人主)가 걱정할 것은 덕택을 입히지 못하는 것이지  다른 족속을 시기할 필요는 없다.

대개 덕택을 주는 것이 흡족하면 사이(四夷)도 한 집안처럼 되게 할 수 있으며,

시기하는 것이 많아지면 골육 간에도 원수 같은 적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한다.

양제는 무도하여 사람을 잃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요동의 전역(戰役)에서 사람들은 모두 손과 발을 끊고서

정벌을 떠나는 병역을 피하였으며  <양현감楊玄感>의 운반하는 졸병들이 여양(黎阳)에서 반란을 일으키었으니

융적(戎狄)이 걱정거리가 된 것이 아니었다.

짐이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모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뽑았으며 열 명을 모집하였는데 백 명을 얻었고,

그 가운데 종군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탄식하며 우울해하였으니

어찌 수나라가 원망하는 병사를 보낸 것에 비교하겠는가?

돌궐은 가난하고 약하여 내가 거두어 그들을 길러 주었으니

그들이 은혜로 느끼는 것을 계상하면 골수에 까지 들어갔는데 어찌 걱정거리가 되겠는가?

또한 저들은 <설연타>와 좋아하고 바라는 것이 대략 같아서

저들이 북쪽으로 <설연타>에게 가지 않고 나에게 귀부한 것으로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다.”

 

 顾谓褚遂良曰

尔知起居为我志之自今十五年保无突厥之患

돌아보고 <저수량>에게 말하였다.

“ 너는 기거주(起居注)를 담당하니 나를 위하여 이를 기록하라.

지금부터 15년 동안 돌궐 사람들의 걱정거리는 없을 것을 보장한다.”

 

俟利苾既失众轻骑入朝上以为右武卫将军   

<아사나사리필>은 무리들을 잃고 가벼운 무장을 한 기병을 데리고 들어와 조현하니 황상은 우무위 장군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