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列島)의 쿠다라(百濟)를 찾아서(5)
9. 오호호도왕(意富富杼王) 腆支王(391-432)
아신14년 봄 3월,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전지왕[혹은 직지라고도 한다.]의 이름을 [양서]에서는 영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아신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고, 6년에 왜국에 인질로 갔다.
14년에 아신왕이 사망하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 訓解 >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 동생 <첩례 碟禮 >가 <훈해 訓解 >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
이 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그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 解忠 >이 와서 고하기를
"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 碟禮 >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전지>가 왜인을 체류시켜 자기를 호위하게 하면서, 바다 가운데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 碟禮 >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 八須 >부인이다. 그녀는 아들 <구이신 久尒辛 >을 낳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는 백제 전지왕은 아신왕의 맏아들로 4살때 태자로 책봉을 받고 7살에 왜국에 인질로 갔다고 한다.
백제 아신왕의 태자가 일본에 인질로 갔다는 것이 사실일까?
삼국사기 기사에 흰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변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삼국사기 아신왕4년 (서기 395)
가을 8월 좌장 <진무眞武>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이 친히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이었다.
필자는 고구려에 패하여 아신왕이 왕비 일파인 진씨(眞氏) 대신 해씨(解氏)를 등용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眞氏 일당이 반란하여 아신왕을 몰아내고 진사왕의 아들 <첩례碟禮>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해씨(解氏)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고 본다.
아신왕은 태자 <전지>를 큰할아버지인 인덕천황의 즉위식(397년)에 축하사절로 보낸 것이지 인질로 보낸 것이 아니다.
백제에 정변이 일어나자 인덕천황은 <전지>와 그의 딸 <팔수>를 함께 백제로 보낸다.
전지왕과 <인덕>천황의 딸 <팔수>와의 사이에서 <구이신>이 408년에 태어나고
전지왕과 <해씨解氏> 사이에서 <비유毗有>가 412년에 태어난다.
일본서기 應神 25년 백제의 直支王(第18代 腆支王, 在位405 – 420) 이 죽었다.
그래서 구이신 (久爾辛, 第19代 久尓辛王, 在位420 - 427)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목만치(木滿致) 가 국정을 행하였다.
그러나 王母 八須부인과 통정하는 등 횡포한 짓이 많았다. 천황이 이를 듣고 그를 소환하였다.
위의 기사에 이어서 일본서기는 “百濟記”를 인용한다.
“목만치(木滿致)는 목라근자(木羅斤資)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여성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 아비의 공적으로 미마나(任那)의 업무를 담당했다.
백제에 온 뒤 카시코키 쿠니(貴國)를 왕래했다.
야마토 조정으로 부터 직제를 받아, 백제의 중책을 맡았다.
권세가 한창일 때 야마토 조정이 그 횡포함을 알고 소환하였다.”
목라근자가 친 신라는 대마도의 신라를 말한다.
420년에 목만치가 반란하여 전지왕을 내쫓고 구이신왕을 세운다.
남송 少帝 景平二年 (서기 424) <映>이 長史 <張威>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서기 423년 목만치(木滿致)와 구이신왕이 몰락하고 전지왕이 다시 왕위에 복귀 한 것으로 보인다.
남송 태조 元嘉2년 (서기 425)
황제가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에게 장문의 격려의 메세지를 보낸다.
서기 430년 元嘉7년 백제왕 <餘毗>가 공물을 보내니 <餘映>에게 주었던 직함을 <여비餘毗>에게 주었다.
毗有왕이 427년 즉위하고 전지왕은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제왕의 길 보다 철학적 사유를 더 사랑했던 사나이였다.
백제 전지왕의 황후 八須부인은 스님같은 제왕보다 신하인 목만치(木滿致)의 매력에 빠졌다.
서기420년 죽었다고 기록된 腆支王은 423년경 다시 왕위에 복귀했었고
서기 427년 서자 비유왕(412 – 465)에게 양위하고 奈良 葛城市에 치온지(置恩寺)를 세우고 승려로 살았다.
백제 腆支王의 일본이름이 큰 부처라는 뜻의 오호호도意富富杼이며
그는 불교에 심취하여 제왕의 자리보다 승려를 원 하였다.
그는 왕좌를 버리고 奈良의 치온지(置恩寺)에서 승려로 살았으나
서기 432년 고구려의 允恭천황이 야마토를 장악한 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10. 개로왕蓋鹵王(429-475)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盍避難以續國系焉.
내가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겠지만 네가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한성 백제 마지막 왕 개로왕 <여경餘慶(429-475) 재위455-474>이 그의 동생 <문주文周(442-477)재위475-476)>에게
남긴 한탄의 말은 마치 유언과 다름없다.
개로왕은 일본서기에는 <가수리加須利>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무슨 자랑이라도 하는 것 처럼 개로왕이 북위의 고종에게 올린 표문을 장황하게 기록하였다.
개로왕에 대한 기사는 일본서기에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397년 아신왕의 태자인 <전지>가 7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와 큰할아버지인 인덕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하게 된다.
405년 <전지>는 15살의 나이에 백제로 들어가 전지대왕으로 즉위한다.
침류왕의 아들인 한제이(反正)가 413년 왜 찬왕(讚王)에 오른다.
백제 전지대왕(腆支大王)의 서자인 비유대왕(毗有大王)(412~465)은 427년에 16세로 즉위하였는데,
432년에 치온지(置恩寺)로 출가한 부왕이 오사카에서 고구려 왕자인 <고진高珍>에게 살해당했다는 비운을 듣게된다.
그리고 왜 찬왕도 438년 7월에 고구려 왕자인 <고진>에게 교토 북쪽 미야쯔(宮津)에서 살해당한다.
<고진>은 438년에 왜 진왕(珍王)으로 야마토에서 즉위한다.
이때 백제 비유대왕의 태자 개로왕자(蓋鹵王子)가 10살의 나이에 큐슈로 건너왔다.
개로왕자는 왜 진왕에게서 쫓겨난 백제의 무리들과 함께 큐슈를 정벌하고
443년 15살의 개로왕자는 스스로 왜제왕倭濟王이라고 칭하면서 오사카로 입성한다.
이때부터 오사카의 개로왕자 왜 제왕과 야마토의 고진왕자 왜 진왕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삼국사기에 개로대왕은 여자를 많이 밝혀서 <도미都彌> 부인을 빼앗기 위해 신하인 <도미>를 괴롭혔다.
<도미> 부인이 끝까지 절개를 지켜 <도미>가 화를 입고 눈이 뽑혀서 배를 타고 떠났고,
<도미> 부인도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갔다가 고구려로 갔는데
이 천성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알 수 없는 지명이라고 했다.
천성도(泉城島)는 바로 오사카에 있는 지명이다. 웅략천황의 고분이 천성도에 있다.
이때는 449년 경으로 개로왕 21살로 큐슈 정벌을 마치고 오사카로 입성한 때이다.
그후 454년에 개로왕은 <고진>을 멸하고 야마토는 동생인 <여곤>에게 맡기고
455년에 백제로 돌아가 개로왕으로 즉위한다.
이 <여곤>이 왜 흥왕이다.
일본서기에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천황이 된 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리쮸우(履中)天皇, 한제이(反正)天皇, 인교우(允恭)天皇의 3명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 났다고 되어 있다.
리쮸우(履中)는 닌토쿠(仁德)의 아들이 맞고, 한제이(反正)는 우지노와키 이라쯔코(兎道稚郞子)의 아들이다.
인교우(允恭)天皇은 고구려의 왕자 高珍으로 야마토를 정복한 적장(敵將)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만들어 만세일계로 만들었다.
11. 왜 5왕은 누구인가?
3세기이후 147년간 기록이 없다가 서기 413년 중국사서에 일본기록이 나타난다
조공을 바치고 작위를 받고자 하는 5명의 왕의 이름이 5세기에 나온다.
야마토 등장 후의 왕들의 이름인데 이들이 누구인지 일본역사 학계는 지금까지 확인하지 않고 있다.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서기 413년 왜왕 찬(讚): 사신기록(晉書 안제기)
② 서기 421년 왜왕 찬(讚) : 유송(劉宋) 무제 안동장군 왜국왕 제수(宋書)
③ 서기 425년 왜왕 찬(讚): 유송 문제(文帝)에게 사신과 공물(宋書)
④ 서기 430년 왜왕 찬(讚): 왜왕 공물(宋書)
⑤ 서기 438년 왜왕 진(珍): 왜왕 찬(讚)이 죽고 동생 진(珍)이 즉위하여 공물을 바치고 스스로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하다.
왜왕에게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宋書)
⑥ 서기 443년 왜왕 제(濟): 제가 공물을 보내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됨(宋書)
⑦ 서기 451년 왜왕 제(濟): 제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 제군사 겸 안동장군 제수(宋書)
⑧ 서기 460년 왜왕 제(濟): 공물기록(宋書)
⑨ 서기 462년 왜왕 흥(興): 제의 왕자 흥(興)을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宋書)
⑩ 서기 477년 왜왕 무(武): 왜왕 흥(興)이 죽고 그의 동생 무(武)가 즉위하여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宋書)
⑪ 서기 478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으로 임명(宋書)
⑫ 서기 479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임명(濟書)
⑬ 서기 502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정동장군으로 추증. 정동대장군의 오기인 듯 함(梁書)
이 시기 백제의 왕은 전지왕 <여전餘腆(391-432) 재위 405-426>, <구이신왕(408-470?)재위 420-422 >,
비유왕 <여비餘毗(412-455) 재위 427-454>, 개로왕<여경餘慶(429-475) 재위 455-475>,
문주왕<여도餘都(442-477)재위 475-476>, <삼근왕(465-479)재위 477-478>,
동성왕<모대牟大,末多(466-501) 재위 479-500>, 무령왕<여융餘隆,.斯摩(461-523) 재위 501-522>이고
일본열도는 <仁德(닌토쿠)(337-419)재위 397-419>, <履中(리츄) (401-432) 재위 420-432>,
<反正(한제이)(408-438)재위 433-437>, <允恭(인교) (416-454)재위 438-454>, <安康(안코)(439-466)재위455-466>,
<雄略(유라쿠)(428-489)재위 467-489>, <淸寧(세이네이) (453-493)재위490-493>, <顯宗(겐조) (464-501)재위 494-501>,
<武烈(부레츠) (492-509)재위 502-508>, <繼體(게이타이)(470-533)재위509-533>이다.
백제가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는것은 근초고왕 27년(372)에 양자강유역에 위치한 동진(東晋)에 조공하고
근초고왕이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임명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후 백제의 동진에 대한 조공은 몇차례나 계속되었고, 침류왕(枕流王) 원년에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들어왔다.
서기 418년에 동진이 멸망하고 420년에 송(宋)이 건국되자
백제는 빈번히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관작을 받았으며 각종 서적과 기술의 전수를 요청하였다.
중국사에서 4세기초부터 6세기말까지 정치 세력이 양자강 남쪽과 북쪽지역으로 양분된 채
많은 왕조가 일어섰다 사라져 가는데 남북조(南北朝)시대라고 부른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백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남조(南朝)의 국가들에게만 조공하였을 뿐,
북조(北朝)의 국가들과는 전혀 교류하지 않았다.
백제가 북조의 북위(北魏)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것은 개로왕 18년(472)의 일인데,
개로왕은 고구려를 매우 비난하면서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장문의 문서를 보낸다.
그러나 백제의 요청은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북위의 완곡한 거절로 무위에 그쳤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에게 발각되어 장수왕의 응징을 자초하여 끝내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과 왕비 왕자들이 모두 처형된다.
순제 승명 2년(478년) 왜왕 무(武)가 표문을 올리기를
신의 나라는 구석지고 먼 곳에 봉 받아 밖의 번신이 되었습니다.
옛 조상 때부터 몸소 갑옷을 입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편히 쉬지 못하였습니다.
동쪽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중이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건너 북으로 95국을 평정하여 왕도가 무륵익어 태평하고,
땅은 서울에서 멀리까지 넓혔으며, 해마다 세공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선대를 이어 나라를 평안하게 통솔하고 있으며,
천극으로 가는 길은 백제를 통해 가야하기에 배를 타고 가야합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비록 나아갈 길은 있지만 그 길이 혹은 통하기도 하고 혹은 통하지 않기도 합니다.
신의 죽은 아비 제(濟)는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히 여겼으며,
활을 당기는 백만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었으나,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양암(빈소)에 거처하였기에,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과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부형들의 뜻을 펴보고자 하옵는데, 의롭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문무를 가릴 것 없이, 공을 나타내려 합니다.
눈앞에 흰 칼날이 번쩍이는 다급함이 있더라도, 또다시 되돌아다볼 필요는 없사옵니다.
만일 황제님의 덕을 입는다면, 이 강한 적을 꺾어 없애고,
어려운 무리들을 이기시어 조용하게 하시면 전대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478년 왜왕 무(武)가 올린 상표문에서 제왕은 개로왕이고 무왕은 무령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왜제왕이 점령한 모인, 중이 등은 큐슈(九州) 지역을 말한다.
필자는 위의 왜5왕에 대하여
제(濟)왕은 개로왕, 흥(興)왕은 곤지왕, 무(武)왕은 무령왕임이 틀림없으며
438년에 죽은 왕은 백제와 왜를 합쳐 반정천왕 밖에 없으니 찬(讚)왕은 침류왕의 아들인 반정천왕이고
이 반정천왕을 살해하고 438년에 왕위에 오른 왜 진(珍)왕은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후손인 <고진高珍>으로
일본서기에는 윤공(允恭)천왕으로 기록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왜흥(興)왕 <곤지>는 일본서기에 세이네이(淸寧)천왕으로 기록되지만
왜제(濟)왕 개로왕과 왜무(武)왕 무령왕은 백제의 왕으로 제위에 오르니 일본서기에 천황으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