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위례성을 찾아서
고국원이 고구려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라면 졸본은 백제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면 졸본은 어디인가?
졸본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서기전58~서기전19)이 처음 도읍을 세운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하다고 전한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 일대로 비정되는데,
이 지역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서 혼강과 그 지류를 따라 넓은 충적 대지가 펼쳐져 있다.
환런현 일대에는 오녀산성(五女山城)과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土城) 등 고구려시대 성 유적과 함께
망강루(望江樓) 고분군, 상고성자(上古城子) 고분군,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고분군 등
고구려 초기의 돌무지무덤 고분군이 밀집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百濟者 大神水之義也 百濟俗重武 而不修文 且多忌諱 故久無史 至近肖古王 時高興始作史 曰書記
<백제왕기>
백제는 큰 신령스런 물이란 뜻이다.
백제는 풍속이 무예를 중시하여 학문을 닦지 아니하였다. 또한 많이들 이를 꺼린다.
따라서 오래도록 역사를 적지 아니하였는데 근초고왕에 이르러
이때에 처음으로 <고흥高興>이 역사를 지었으니 이를 서기(書記)라고 부른다.
백제(百濟)라는 말이 큰 강(아리수)을 의미하니 백제는 큰 강 가에 세워진 나라라는 것이다.
우리말 '크다'의 부여(백제)말이 우루, 우라, 어라, 아리이다.
아리수(큰 강, 한 강) 일명 욱리하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한수(漢水)이고
어라하(大加, 왕)의 성(城)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이다.
한수(漢水), 한성(漢城)은 큰 물, 큰 성을 뜻하고 위례성(慰禮城)은 큰 왕성(王城)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고흥>의 백제서기는 남아있지 않고 일본서기에 백제서기를 인용한 기록이 남아있어
우리는 그나마 일본서기를 통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1. <우대優臺, 一名 우태優台(BC70?-BC41)>와 <소서노召西奴(BC66-BC6)>의 만남
北夫餘解夫婁王之庶孫也 解夫婁王以日神降靈之後 布德北方天下泰平 分遣王子 于列國 以監民疾苦
<우대優臺(BC70?-BC41)>는 북부여(北夫餘) <해부루解夫婁(BC138-BC62)>왕의 서손(庶孫)이다.
<해부루解夫婁(BC138-BC62)>(을원) - <금와金蛙(BC90-BC7)재위 BC62-BC7>(乙氏 BC90?-BC41)
- <우대優臺(BC70?-BC41)>
<해부루>왕이 일신(日神)이 강령(降靈)한 후 덕을 베풀어 북방 천하가 태평하게 되었다.
왕자를 열국(列國)으로 나누어 보내고,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펴보게 하였다.
時卒本太守延陀勃有女曰召西奴 甚美 優台聞之 請往卒本 王以優台母微不許
優台乃私行 至卒本與山 西奴相通 延陀勃以王不許 欲禁之 乃相逃避太伯山谷沸流川上〈今白頭山溫河〉
당시 졸본태수(卒本太守) <연타발延陀勃(BC106-BC37)>에게는
<소서노召西奴(BC66-BC6)라 불리는 딸이 있었는데 대단히 아름다웠다.
<우태優台>가 그 소리를 듣고 졸본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해부루)왕이 <우태>의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우태>가 이에 사사로운 용무로 졸본 여산(與山)에 이르러 <소서노>와 상통(相通)하였다.
<연타발>은 (해부루)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하여 상통하기를 금지하니, 이에 태백산 골짜기 비류천 상류로 도피하였다.
<지금의 백두산 온하이다>
<우대優臺>와 <우태優台>가 혼용하여 쓰여져 있고 〈今白頭山溫河〉는 후대의 누군가가 가필한 것으로 보인다.
祀河神 而生子曰沸流 延陀勃聞之 使人迎歸 遂以卒本之地歸之 時漢元年初元二年甲戌歲也.
하신(河神)에게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낳고 <비류沸流(BC47-AD1)>라 이름 지었다.
<연타발>이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돌아오게 하여 맞이하였다.
드디어 졸본의 땅이 <우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때는 한(漢) 효원제(孝元帝) 초원(初元) 2년(B.C.47) 갑술년의 해다.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 王于卒本.
당시 해부루왕 태자 <금와金蛙>가 왕위에 있었다. 즉 <우태>의 아버지다.
<우태>를 졸본의 왕으로 명하였다.
元年甲戌 五月 立召西奴爲妃 立東明廟 於沸流川
우태 원년(B.C.47) 갑술 5월 소서노를 세워 비(妃)로 하였다.
동명묘(東明廟)를 비류천(沸流川)에 세웠다.
졸본왕 <우태>가 비류천에 세운 동명묘는 동부여 시조 <해부루>왕을 모시는 사당이다.
十二年乙酉 六月 平沸流國 以其主松瀼爲多勿候 沸流本屬卒本 今復歸故也
우태 12년(BC36) 을유 6월 비류국(沸流國)을 평정하였다.
그 나라의 주(主)인 <송양松讓>을 다물후(多勿侯)로 삼았다.
비류는 본래 졸본에 속하였는데, 지금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온 까닭이다.
백제왕기는 비류국이 본래 졸본국의 땅이었다고 한다.
十六年乙丑 丁月 將軍烏伊芙芬奴 分兩道 攻太伯山南東荇人國 取其地爲城邑
우태 16년(BC32) 을축 정월(丁月) 장군 <오이烏伊>와 <부분노芙芬奴>가
양쪽 길로 나누어 태백산(太伯山) 남동쪽 행인국(荇人國)을 공격하여, 그 땅을 취하여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2.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한 <비류沸流>
元年 癸卯 正月 沸流東行 南渡帶水 至彌鄒忽 欲居之 溫祚與烏干馬黎 蓴西南行 而渡浿河 亦會于彌鄒忽 立沸流爲王
비류 원년(B.C.18) 계묘
1월 <비류沸流>가 동쪽으로 가다가 남으로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온조(溫祚)는 오간(烏干), 마려(馬黎)와 순서(蓴西)에서 남으로 가다가 패하(浿河)를 건너 역시 미추홀(彌鄒忽)에서 모였다.
비류를 세워 왕으로 하였다.
미추홀은 200년경 공손도가 설치한 대방군 지역이다.
광명대제3년 갑진(B.C.17)
정월 순노(順奴)와 불노(艴奴)는 비류에게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미추홀로,
관노(灌奴)와 계루(桂婁)는 온조(溫祖)에게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우양(牛壤)으로 하였으며,
연노(涓奴)와 황룡(黃龍)과 행인(荇人)과 구다(句茶)와 비리(卑離)는
왕과 소황후가 함께 다스리도록 하여 소(황)후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
<고구려 사초>
고구려사초와 백제왕기의 기록이 서로 상반된다.
고구려사초는 고구려 관경내의 땅을 비류와 온조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고
백제왕기는 고구려 관경을 벗어나 훗날 대방군 땅의 미추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백제왕기의 기록을 따른다.
八月 遣使于樂浪 而修好 樂浪者辰韓也 在我東南界 共拒末曷 而事馬韓故也
4년(B.C.15) 8월 사신을 낙랑(樂浪)으로 보내어 사이좋게 지냈다. 낙랑은 진한(辰韓)이다.
우리의 동남쪽 경계에 있으면서 함께 말갈을 막았는데, 마한(馬韓)을 섬겼던 연유에서다.
고구려사초는 진한(辰韓)에 섭라국이 있었다고 하고 백제왕기는 진한(辰韓)에 낙랑이 있다고 한다.
五年 丁未 四月 遣王弟溫祚 於馬韓 借地 時馬韓政衰 畏末曷樂浪加耶之漸盛 欲使王 制末曷樂浪 乃許東北百里之地
且許採鐵鑄兵戈 優待王弟 而歸
5년(B.C.14) 정미 4월 왕의 동생 <온조>를 마한에 보내어 땅을 빌렸다.
당시 마한 정부는 쇠락하여 말갈, 낙랑, 가야(加耶)가 점점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왕으로 하여금 말갈과 낙랑을 제어하기를 바랐다. 이에 동북 100리의 땅을 허락하였다.
또 철을 캐내어 병과(兵戈, 무기)를 주조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온조가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온조가 마한으로 부터 빌린 땅 100리가 지금의 보정시 청원구 지역이다.
여기에 BC14년경에 쌓은 성이 위례성이다.
八年 庚戌 二月 末曷三千來 圍慰禮城 王經旬閉門不出 待其糧盡而歸 簡銳卒 追及大斧峴 殺虜五百余人
8년(B.C.11)년 경술 2월 말갈병 3천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10일 동안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식량이 다하여 돌아가기를 기다려, 날랜 군사를 선별하여 대부현(大斧峴)까지 추격하였다.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500여명이었다.
七月 築馬首城甁山柵 與樂浪失和.
7월에 마수성(馬首城)과 병산책(甁山柵)을 세워, 낙랑과 우호를 잃었다.
十月 末曷寇北境 王遣兵二百拒戰 於昆彌川上 而敗 積依靑木山 而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乃退
10년(B.C.9) 10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여 왕이 병사 200명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 상류에서 막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장수가 되어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하니, 적이 이내 물러갔다.
十一年 癸丑 四月 樂浪唆末曷 襲破甁山柵 殺掠百余人
11년(B.C.8) 계축 4월 낙랑이 말갈을 부추겨서 병산책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명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來侵之路.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의 두 책(柵)을 세워 이로써 낙랑이 침입하는 길을 막았다.
十三年 乙卯 二月 嫗化爲男 五虎入城 王禳之 於東明樹王 未幾太后得疾 而薨 春秋六十一 國人立召西奴祠 而祀之
后以延陁勃大王第三女 身長而美 旦有權 數養卵人 與優台王經營卒本國 得人心 且與朱蒙王 經營高句麗國 亦得衆望
及類利背叛 不與之爭 委之以國 又與二子 南渡經營百濟國 太后三國人皆 尊之如神
13년(B.C.6) 을묘 2월 늙은 할멈(嫗)이 남자의 복장(男)을 하자,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이 동명수왕(東明樹王) 아래에서 제사(禳)를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후가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춘추 61세였다.
나라사람들이 <소서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후는 <연타발延陁勃>대왕의 셋째 딸로 키가 크고 아름다웠다.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형세(權)가 있어 수차례 난인(卵人)들을 길렀다.
우태(優台)와 더불어 졸본(本國)을 다스려 인심을 얻었으며,
또 주몽(朱蒙)왕과 고구려국을 다스리며 또한 나라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으며,
유리(類利)가 배반함에 이르러 다투지 않고 나라를 맡겼다.
또 두 아들과 남쪽으로 (물을) 건너 백제국을 다스렸다.
태후는 3국(졸본, 고구려, 백제)의 백성들에게 모두 신처럼 존중되었다.
<백제왕기>
광명대제 20년{AD1}신유, 정월,
<도절都切>태자가 책성(柵城)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으니, <대소帶素>는 이 일을 자괴하여,
<도절>의 시신은 돌려보내고, 자신의 딸은 데리고 있으려 하였더니, 죽은 <도절>이 슬퍼하며 일어나지 않았다.
5월, <비류沸流 BC48-1>가 37살에 죽었다.
상은 감식하며 <召>황후를 위로하였고,
<아이阿爾>의 딸 <진眞>공주를 <비류>의 아들 <양인昜人>에게 처로 삼아 주었다.
<만曼>공주가 <도조都助>에게 개가하였다.
<협보陜父>를 태보로 삼았다.
태보 <대방량大房良>이 82살에 죽었다.
그의 처 <엄掩>공주에겐 매년 양식을 주도록 하였다.
<고구려 사초>
고구려사초 AD 1년 <소서노> 기사는 믿을 수 없다.
BC7년 <아이후>의 죽음, BC6년 <소서노>의 죽음, AD1년 <도절>과 <비류>의 죽음에는
졸본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오이烏伊>와 송후세력의 음모가 있었을 것이다.
<온조>는 AD 1년 <비류>의 사망으로 인하여 AD 1년 부터 <비류>를 이어 백제를 다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한반도의 하남 위례성은 언제 누가 어디에 쌓았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조에....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는데,
…하남 땅이 북으로는 한강을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고, 西로는 큰 바다로 막혀있으니
이 같은 천험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세라, …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삼국사기는 온조가 하남에 위례성을 쌓았는데 지금의 한강 유역이라고 말한다.
태조황제 11년 임술(AD122)
2월 왕이 다시 마한(馬韓), 구다(勾茶), 개마(盖馬) 3국의 군대를 이끌고 천서(川西)와 구려(勾麗)를 쳐서 빼앗았다.
<요광姚光>은 도주하다가 자기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위)구태는 서자몽(西紫蒙)으로 피하여 들어가 서부여(西扶余)로 자칭하였으나, 후에 우문(宇文)에게 쫓겨났다.
........
<고구려 사초>
70년(122)에 왕이 마한 ,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략하였다.
부여 왕이 병력을 보내 이를 구하고 쳐부수었다
마한은 백제온조왕 27년(서기 9)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병력을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에다시 일어난 것인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삼국사기의 편자도 122년에 <위구태>가 마한을 쳐부수고 서부여의 왕이 되었다 하니 어리둥절 한 모양이다.
필자는 이때 대륙백제가 그 곳은 담로로 남겨 둔 채 한반도로 이동하여 지금의 한강유역에 위례성을 쌓았다고 본다.
이때 백제의 왕은 삼국사기는 기루왕(재위 77-128)이 재위하였다고 하나
기루왕은 115년경에 태어나 137년에 즉위하여 166년까지 재위에 있은 왕이다.
필자는 다루왕과 기루왕 사이의 42년에서 136년 사이에 3명의 왕이 누락되었다고 본다.
A왕 재위 42-87, B왕 재위 88-127, C왕 재위 128-136으로 볼 때 B왕의 재위 시 한강유역에 위례성을 쌓았을 것이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20년의 기록은 “百濟記”라는 역사서를 인용하고 있는데….
개로왕 21년인 을묘년(475) 겨울에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을 7일낮 7일밤 공격하니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慰禮)를 잃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통해 대륙의 위례성은 475년까지 백제의 왕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무령왕이 대륙에 진출하여 진평에 거발성을 세우게 된다.
한반도의 하남위례성이 어디인가를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어느 역사서에서도 신빙성있는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7년 풍납토성(風納土城)이 발굴되면서 백제연구는 단연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풍납토성의 발굴은 한반도 백제의 왕성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따른 논란을 잠 재울 유력한 후보이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은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이 토성의 성벽은 版築 (돌을 판판하게 깔고 위에 흙을 다지는 것) 방법을 사용하여
고운 모래로 한 층씩 다져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며 한강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현재의 지명을 따라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현재 남아있는 토성은 북벽이 300미터, 동벽이 1500미터, 남벽이 200미터 정도다.
그런데 이 하남 위레성(풍납토성)이 언제 누가 세웠는가는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