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

삼국사기 초기 기년 조정(2)

지보고 2023. 10. 17. 09:17

내물2년(357년)

봄에 왕이 특사를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그들에게 각각 곡식 3곡 씩을 주었다.

특별히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은 자들에게는 직위를 한 급씩 주었다.

<삼국사기>

 

내물왕 2년(378년) 병인(丙寅)

정월 호제(虎祭)를 행하였다.

<세기世己>를 이벌찬, <장생長生>을 품주로 삼았다.

사궁(四窮,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을 방문하여 어루만지게 하고 각각 곡식 3곡(斛, 10말)을 내렸다.

효제(孝悌)가 남보다 특별한 자에게는 작위를 일급씩 내리고,

보통의 재술(才術)이 있는 자라도 서로 천거하여 쓰게 하고,

시험적으로 써보아 효과가 있으면 곧 상을 내림에 차등이 있었다.

<남당유고>

 

내물왕 2년은 378년이다.

 

내물9년(364년)

여름 4월,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옷을 입힌 허수아비마다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 아래에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다.

왜인은 자신의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곧장 진격해왔다.

복병들이 갑자기 공격하여 허를 찌르니, 왜인이 대패하여 도주하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내물왕 3년(379년) 기묘(己卯)

4월 왜병이 크게 이르러 <등억登檍>과 <내개乃芥>에게 막도록 하였다.

풀로 허수아비 수천을 토함산(吐含山) 아래에 만들어 놓고, 용사 1천명을 부현(斧峴) 동쪽 벌판에 매복하였다.

왜가 마침내 계산하는 대로 걸려들어 크게 패하였다. 추격하여 모두 사로잡았다.

이 때부터 왜와 가야(加耶)가 상통하여 축년(逐年, 해마다) 와서 구하였다.

<남당유고>

 

토함산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왜를 격퇴한 것은 내물왕 3년 379년이다.

 

내물18년(373년)

백제 독산성주가 백성 3백 명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 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왕은 "두 나라가 화목하여 형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지금 대왕은 우리 나라에서 도망간 백성들을 받아 들였다.

이는 화친하자는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대왕에게 기대했던 바가 아니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 보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왕은 "백성이란 항시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왕이 그들을 돌보아 주면 오고, 힘들게 하면 가니,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대왕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과인을 책망함이 어찌 이토록 심한가?"라고 대답하였다.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여름 5월, 서울에 비가 왔는데 물고기가 빗속에 섞여 떨어졌다.

<삼국사기>

 

내물왕 6년(382년) 임오

5월 <마아馬兒>를 위두(衛頭)로 삼았다. 경도(京都)에 물고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부여(夫余)의 독산성주(禿山城主) <포륭布隆>이 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오자 육부(六部)에 거주하도록 명했다.

부여(夫余)가 그를 송환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남당유고>

 

독산성주(禿山城主)  <포륭布隆>이 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온 것은 내물왕 6년 382년이다.

 

내물26년(381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위두>를 부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이 <위두>에게 물었다.

"그대가 해동의 사정을 이야기함에 있어, 사용하는 언어가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위두가 대답했다.

"이는 또한 중국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명칭과 호칭도 바뀌는 법이니, 오늘날의 언어가 어찌 예전과 같겠습니까?"

<삼국사기>

 

내물왕 5년(A.D.381) 금사(金蛇=辛巳)

7월 <등억登檍>을 이벌찬, <선운仙雲>을 품주로 삼았다.

<위두衛頭> 등이 진(奏, 전진)으로부터 돌아와 금인(金人)과 옥마(玉馬)  보기(宝器)를 바쳤다.

처음에 왕의 명으로 <위두衛頭> 등 7인에게 <부량苻良>  7인을 진(秦)으로 보내게 하였다.

진왕 부견(苻堅, 前秦의 3대왕, 재위 357~385)이 묻기를

“계림(鷄林)을 어찌하여 신라(新羅)라고 하는가?” 라고 물었다.

답을 하여

“계(鷄)의 상서로움이 있었던 연유로 계림이라고 말합니다.

라(蘿)를 새로이 한다는 연유로 신라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듣기에 너희 나라 임금(國君)의 (성씨가) 변했다는데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답을 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어진사람을 택하여 서로 전하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한 연유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연유로 계림과 신라는 글자가 비록 다르지만 그 말은 실상 같은 뜻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같다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답을 하여 말하기를

“월주(月主)가 사는 성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여왕은 젊은 남편을 좋아하여 수차례 여러 남편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배우자로 삼을 만한 남자가 없는 것이냐? 짐이 장가들고자 하는데 어떠하냐?”라고 하였다.

답을 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신(神)을 높이 숭상하고 현명한 자를 받드는 것이지 젊은 남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부견>이 그 대답함이 정당하다하여, 도타운 예절로 송별해주고 신후(神后)와 왕에게는 보물을 바쳤다.

후(后)의 명으로 <부견>의 상을 조각하였다.

<남당유고>

 

기림왕 10년(307)에 국호를 계림에서 신라로 다시 바꾸었다.

부견은 신라왕이 석씨인 흘해왕에서 김씨인 내물왕으로 바뀐 내력을 묻고 있는 것이다.

<위두>를 <부견>에게 보낸 것은 내물왕 5년 381년이다.

 

<위두>를 <부견>에게 보낸 년도는 381년으로 삼국사기와 신라사초가 일치하는데 삼국사기는 내물왕 26년이라고 한다.

내물왕 26년이면 내물왕 원년이 355년으로 355년에 즉위하였다는 것이다.

내물왕은 350년생이다. 삼국사기는 6살에 즉위하였다는 것인데 내물왕은 28살인 377년에 즉위하였다.

내물왕이 28살에 즉위한 것이 맞다면 삼국사기 기년대로라면 내물왕이 328년생이어야 한다.

328년은 내물왕의 어머니 <휴례>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말흔(술례) - <말구未仇(297-358)> (휴례休禮331-399) - <내물奈勿(350-402) 재위 377-401>

말흔(유모) - <대서지(314-482)> (예생 339?-403) - <실성(359-417) 재위 402-416>

 

<실성(359-417) 재위 402-416>이 고구려에서 돌아와 44세에 즉위하였으니

실성의 생몰년과 즉위년은 신라 기년의 절대좌표이다.

 

<실성>은 <내물>보다 9살 어린 사촌동생이다.

 

 

내물37년(392년)

봄 정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왔다.

고구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왕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

<삼국사기>

 

내물왕 16년(392년) 흑룡(黑龍:임진)

정월, <마아馬兒>를 <담덕談德>에게 보냈다.

<남당유고>

 

실성을 신라에서는 <마아馬兒> 또는 <보금宝金>이라고 불렀으며

내물왕은 사촌동생인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고구려에 절대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

이때 실성의 나이 34살이다.

 

내물38년(393년)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

<삼국사기>

 

내물왕 17년(393년) 수사(水蛇:계사)

5월, 야인(野人)이 쳐들어오자 그 공효(功)없이 물러감을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크게 쳐부쉈다.

<남당유고>

 

남당유고는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을 구별하여 기록하였다.

왜인은 한반도 남해안의 섬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야인은 일본열도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야인의 침입을 독산에서 격퇴한 것은 내물왕 17년 393년이다.

 

내물46년(401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 고구려에 인질로 가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삼국사기>

 

내물왕 25년(401년) 백우(白牛:신축)

4월, 봄부터 큰 가뭄이 들고 제(帝) 또한 (몸이) 편치 못한데 여러 왕자들은 모두 황음(荒淫)으로 일을 삼았다.

제(帝)가 이에 <일동一同>과 <구리내仇里迺>등을 고구려에 보내 비단과 진주등을 선사하고

<마아馬兒>의 귀환을 청하였다.

두씨(杜氏) 또한 <마아馬兒>를 위하여 <담덕談德>을 설득했다.

“<마아馬兒>는 우리나라에게는 구우일모(九牛一毛)입니다. 돌아가 그 나라에 왕 노릇함만 못합니다.

연중(兗中)으로써 전한다면 대왕(大王)의 골육이 남방에서 왕 노릇함이니 또한 좋지 않습니까?”

<담덕談德>은 그럴듯하게 여기고 마침내 보화를 7수레에 싣고

<마아馬兒>와 두씨(杜氏)를 정기(精騎) 3백으로 호송하여 보냈다.

9월, 두씨(杜氏)가 그 세 아들과 더불어 성산(聖山)에서 제(帝)를 알현하였다.

제(帝)가 두씨(杜氏)에게 골품(骨品)과 자의(紫衣)를 내렸다.

<남당유고>

 

실성이 돌아온 것은 내물왕 25년 401년으로 이때 실성의 나이 43세이다.

9년만에 고구려에서 돌아온 것이다.

 

내물47년(402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伊'를 '企'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별세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원년 3월,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26년(402년) 수호(水虎:임인)

2월, 제(帝)의 병이 다시 심해지자 신산(神山)에 약(藥)을 구하였는데

제(帝)가 말하기를 “천명(天命)이 자재(自在)하거늘 약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하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붕하였다.

제(帝)는 성품이 관인호덕(寬仁好德)하며 무사(武事)에 능하여 남의 업신여김을 능히 제어할 수 있었다.

만년에는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정사를 내궁에 위임하였고,

초년에는 오직 신후(神后)에게 순종해서 받들 뿐 (자신의)뜻을위해 새로 창출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신민(臣民)들은 그 덕에 감동하지 않음이 없어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애통해하였으니 또한 현(賢)이었더라.

즉일로 부군(副君)이 보반궁(保反宮)에서 상례(祥)를 행하고 보위(寶位)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실성제(實聖帝)이다.

실성(實聖)은 고구려에 있으면서 돌아갈 생각으로 여러 차례 볼모를 바꿔 줄 것(代質)을 청하였으나 되지 않자

안으로 불평을 품었었다.

급기야 즉위함에 이르자 비록 <보반保反>으로 후(后)를 삼았으나 음(陰)으로는 보복할 뜻을 가지고

<보해寶海>와 <미해美海>를 나누어서 볼모로 보내고 <눌기訥祇>를 내쫓았는데

<호물好勿>등이 이에 <눌기訥祇>를 옹위하여 그를 안돈시켰다.

부제(父帝)를 추존하여 나물대성신제(奈勿大聖神帝)라 하였다.

 

그 보록(譜)에서 말한다.

“아효성모(阿孝聖母)가 아호성모(阿好聖母)를 낳고 아호(阿好)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을 낳았고,

구도갈문왕이 골정태자(骨正太子)의 딸 녹모골모(綠帽骨母)를 취하여 말흔세신(末昕世神)을 낳았고,

말흔세신이 미추대성태제(味鄒大聖太帝)의 어머니 술례성모(述禮聖母)를 취하여 말구세신(末仇世神)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제(帝)의 아버지가 된다.

(미추)태제(太帝)에게서 제(帝)인 까닭에

내외(內外)가 중시하고 총애가 지극히 깊어 진골(眞骨) 중흥(中興)의 조상이 되었다. 그 천명(天命)이었음 이련가.”

<남당유고>

 

남당유고는 신라 김씨 왕조의 내력을 말하고 있다.

김일제(BC134-BC86) ...... - 포공匏公(표암瓢岩) - 호공瓠公(아호阿好) - 세한勢漢(94-155)(모우毛優) - 아도阿道(가시加市)

- 수류首留(사리舍利) - 욱보郁甫(호례好禮183-?) - 구도仇道(218-301)(녹모綠帽) - 말흔末昕(278-350) ( 술례述禮256-338)-

                                                                                구도仇道(218-301)(술례述禮256-338) - 미추味鄒(292-362)

- 말구末仇(297-358)(휴례休禮331-399) - 내물奈勿(350-402)(보반保反(360-428)

 

김일제의 후손 <호공 瓠公>의 아들 <세한勢漢 (94-155)>이 알지(閼智)로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김일제의 후손 중 다른 한 갈래는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된다.

세상의 모든 김씨는 김일제의 후손이다.  

 

수호(水虎:임인402)

원년 2월 7일 나물제(奈勿帝)가 붕(崩)하였다.

보반후(保反后)가 유명(遺命)으로써 실성(實聖)을 세워 계군(繼君)을 삼았다.

이에 앞서 삼원공주(三元公主)에게 딸이 있어 <예생禮生>이라했는데

꿈에서 백대마(白大馬)를 보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때마침 대서공(大西公)이 이르러 꿈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사통하여 실성(實聖)을 낳았다.

처음에는 <마아馬兒>라 불렀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드러우므로 사람들이 유마아(柔馬兒)라고 했다.

말구공(末仇公)이 몰(沒)하고 대서지공(大西知公)이 그 처 <휴례休禮>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자

이로써 <마아馬兒>는 <나물奈勿>과 한집에 동거하게 되었는데 정호(情好)가 심히 도타웠다.

<나물奈勿>이 뜻을 얻기에 이르자 그를 이끌어서 등용하였는데 고구려가 남침(南侵)하게 되자 사절을 받들고

고구려에 가서는 10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여주(麗主) <담덕談德>이 그 누이(妹) 두씨(杜氏)로 처를 삼게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두씨가 마침내 그를 위해 <담덕談德>을 설득해 말했다.

“현주(賢主)는 신의(信)를 숭상하니 볼모를 잡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 첩의 남편은 저쪽으로 돌아가면 금지옥엽(金枝玉葉)이지만 여기에 머무르면 구우일모(九牛一毛)일 따름입니다.

첩은 원컨대 그 나라에 함께 돌아감으로써 대왕을 위한 계책이 되고 싶습니다.”

<담덕談德>이 그를 허락하였다.

때에 <나물奈勿>은 병질로 정사를 볼 수 없어 <마아馬兒>를 보기 원했는데

돌아오게 되자 기뻐서 그 연고를 물으니 <마아馬兒>가 말했다.

“제가 형의 병환을 듣고서 돌아가고자 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니

하룻밤 사이에 까마귀의 머리가 남김없이 하얗게 되므로

고구려인들이 크게 놀라서 내가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나물奈勿>은 그를 신(神)이라 여겨 이에 실성(實聖)이라 이름하고

부군(副君)의 지위에 있게 했는데 이에 이르러 보위에 오르니 춘추 44세였다.

<보반保反>을 상궁(上宮)으로 삼고, <내류內留>는 하궁(下宮)으로 삼고,

두씨(杜氏)는 난궁(暖宮)으로 삼아 이를 삼궁(三宮)으로 하였다.

 

왕제(王弟) <대물大勿>과 <길막吉莫>을 좌우잡판(左右匝判)으로 삼고,

부공(父公) <대서지大西知>를 추존하여 세신(世神)으로 삼으며,

모주(母主) <예생禮生>을 성모(聖母)로 삼았다.

 

<눌기訥祇>를 태자로 삼고 <초로初老>를 태자비(太子妃)로 삼으니 대개 <나물奈勿>이 남긴 유촉(遺囑)이었다.

 

3월에 <나물奈勿>을 옥릉(玉陵)에 장사하고 <옹판雍判>으로 능문사주(陵門祀主)를 삼았다.

보반후(保反后)가 신제(新帝)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계부(繼夫)로 삼은 까닭은 그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선제(先帝)가 그대를 아낀 까닭이오.

원컨대 선제(先帝)가 남긴 아이(遺兒)들을 보호하여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오.”

하니 제(帝)는 “네(諾)”하고 대답했다.

이에 <보반保反>이 마침내 신제(新帝)와 더불어 성모사(聖母祠)에 참배하고 남도(南桃)에서 하례를 받았다.

 

5월, 제(帝)가 <보반保反>에게 말했다.

“고구려(句麗)의 부강함은 다른 것이 없고 정치가 남자에게 있음이다.

우리나라는 골모(骨母)를 귀하게 여겨 정사가 부인(婦人)의 손에서 많이 나오니 강해질 수가 없다.

내가 네 남편이 되었으니 너는(爾) 나와 한 몸이다.

이제부터 나로 하여금 정사를 맡게 하여 마땅히 고구려와 같은 강성함을 닮게 하라.”

<보반>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있을 것 같으면 무슨 일인들 따르지 않으랴. 이제부터는 네게 맡겨 그리하리라.”

이에 제(帝)가 옛 제도(舊制)를 크게 개편하여 새로운 관제(新官)를 많이 설치하니

종신(宗臣)들이 그를 많이 불편해 하였다.

성산주(聖山主) <방단方丹>이 <나물奈勿>의 아들 <방석方石>을 낳았다.

 

7월, 고구려(麗)사람 <토오세土五稅>에게 명하여 우마(牛馬)의 목축을 가르치게 했다.

<마삼馬三>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개신芥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9월, <일동一同>을 서로군주(西路軍主)로 삼았다.

<남당유고>

 

삼국사기 내물 47년은 내물 26년 실성 원년 402년이다.

 

(6) 실성(實聖)이 실성(失性)을 했나?

 

實聖尼師今立 閼智裔孫 大西知伊飡之子 母 伊利夫人[伊一作企] 昔登保阿干之女

妃 味鄒王女也 實聖身長七尺五寸 明達有遠識 奈勿薨 其子幼少 國人立實聖繼位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는 402 2월에 내물왕이 죽으니 실성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비는 미추왕(재위 261-283)의 딸이라고 한다.

 

삼국사기가 말하는 미추왕은 누구이며 그 딸은 누구를 말하는가?

 

구도(218-301)(술례256-338) - <미추(292-362) 재위 325-349>

 

남당유고에 의하면 <미추>는 <구도>와 <술례>의 아들로 292년에 태어나 

아이혜(286-362)여왕의 부군(副君)이 되어 석씨인 12대 첨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라의 13대 김씨 왕이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실성의 왕비는

<미추味鄒(292-362)> <광명光明(324-392)의 딸인 <보반保反(360-428)> <내류內留(362-432)>

고구려 소수림왕 <구부丘夫(339-384)> 母后 <해씨觧氏(323-404)>의 딸인 <천성天星 ,杜氏(367?- )>이다.

 

<보반> <내류>는 미추왕이 69세와 71세에 낳은 딸이다.

<내류>는 미추왕이 죽은 해에 태어 난 딸이다.

삼국사기가 말하는 미추왕의 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면 미추왕이 28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반> 281년생, <내류> 283년생이 되는 것이다.

<실성(359-417) 재위 402-417>이 즉위한 해 402년에 <보반> 122, <내류> 120세가 되는 것이다.

 

<실성> 44세에 즉위하였다.

44세의 왕이 120세가 되는 미추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실성>이 실성을 했던지 김부식이 실성을 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기사를 우리가 정사로 믿고있는 삼국사기에 어떻게 기록을 한단 말인가?

 

<실성>의 생몰년과 재위기간은 남당유고와 삼국사기가 일치하는 불변의 사실이다.

 

남당유고와 화랑세기를 박창화의 창작이고,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기사를 어떻게 설명할까?

 

아직도 삼국사기를 우리의 정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학자들은 삼국사기 기록의 이 자체 모순을 무엇이라고 항변할까?

 

남당유고를 박창화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사학자들도 실성과 김부식과 같이

모두 다 실성한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미추(292-362)재위 325-349> (광명 324-392) - 보반(360-428)

                                                                             내류(362-432)

 

실성이 44세에 즉위할 때 <보반>은 43세, <내류>는 41세였다.

 

 

 

(7) 박창화 필사본 고구려사초의 신라, 백제 기사의 문제

 

 

박창화 필사본 고구려사초나 고구려사략에 보이는 신라, 백제에 관한 기사는 고구려 기사와는 연결도 되지 않고

순서도 맞지 않게 후세의 누군가가 삼국사기의 기사를 가필하여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사초와 사략의 신라, 백제 기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 차대제 4년의 기사를 보자

기축{AD149},

정월, <미유>를 좌보로, <어질>을 우보로 삼았다.

4월 정묘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5월, 오성{수・금・화・목・토성}이 동방에 하늘에서 한데 모였다.

태사{점치는 관리의 우두머리}가 거짓으로 길조라 아뢰었더니, 주가 기뻐하였다.

12월, 물이 얼지 않았다.

<신라>는 정월엔 <득훈>을 사찬으로 <선충>을 내마로 삼았고,

8월엔 혜성이 천시{불}좌를 범했으며, 11월엔 우레가 일고 경도에서는 돌림병이 크게 돌았다.

 

 

일성16년(149년)

봄 정월, <득훈>을 사찬, <선충>을 내마로 삼았다.

가을 8월, 혜성이 천시 성좌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고,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삼국사기>

 

일성왕 16년(A.D.207)

정월 <홍완洪完>을 경로장군으로, 장씨(章氏)를 경모로,

<득훈得訓>을 사찬으로, <선충宣忠>과 <대관大貫>을 내마로 삼았다.

모두 장령(長岺)에서 공이 있는 자다.

 

2월 <문기>를 대모로 하여, 백대마(白大馬)를 내리고, <현방玄方>을 8품권처로 하였다.

문기(文其, 현방의 시어머니)가 <현방>이 경모(京母)가 되지 못함을 가엾게 여겨, 권처로 삼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3월 품주 <난화暖花>가 병이 들었다.

왕이 약사(藥師)에게 질병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이에 <천덕>을 면직하였다.

<골안骨安>을 이벌찬, 잠씨(潛氏)를 품주로 삼았다.

 

5월 가물었다. 문천(蚊川)에서 비가 오기를 기도하였다.

 

7월 <난화暖花>공주가 죽었다. <천덕>이 목을 찔러 따라 죽었다.

왕이 가엽게 여겨, 비익지총(比翼之塚, 새의 가지런한 날개모양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당시 사람들이 같은 구멍의 형제라고 하였다(=同母兄弟).

왕이 그들의 아들 <천백天白>을 위두사인으로 삼았다.

 

9월 경로(京路) <홍완洪完>을 차기대사(車騎大師)로, 권처 <현방玄方>을 차모(車母)로 삼았다.

이로써 군사(軍事)와 대사(大師)의 직을 겸하여 행하도록 하였는데 예로부터 없던 일이다.

집서 등이 불가함을 따지었으나, 왕이 특별히 그 직을 내렸다.

 

10월 왕과 <문기>대모가 이산(伊山)에 행차하여 대도사(大刀祠)에서 잤다.

<문기>가 이산의 백성들에게 큰 상을 주었다.

이로써 그 복을 모두에게 베풀었는데, 사람들이 이산대모가 다시 왔다고 하였다.

당시 역병이 돌았기 때문에 푸닥거리를 하였다.

 

11월 <문기>의 딸 가씨(可氏)를 <홍부洪夫>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12월 <토기吐己>를 이벌찬으로, <한자汗子>를 품주로 하였다.

<자리紫理>성모가 병으로 죽어 왕이 애통해 하였다. 정후례(正后禮)로 장사를 지냈다.

 

차대제 4년의 신라기사는 차대제 기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기사이다.

후대 누군가가 삼국사기 일성 16년 기사를 그대로 가필한 것을 알 수 있다.

남당유고 일성이사금 16년(207년)의 기록과 대비해 보라. 어느것이 역사적 실체이겠는가?

 

 

(8)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년조정

 

묘호
(생몰년도)
             父               母 삼국사기 재위기
(재위년수)
조정 재위기
(재위년수)
1. 혁거세
    (BC5 - 66)
혁서거 파사(선도성모) BC5 7- 3
(60년)
8 - 65
(58년)
2. 남해
     (28 - 84)
혁거세 알영(BC3 -65) 4 - 23
(20년)
66 - 83
(18년)
3. 유리
    (51 - 107)
남해(차웅) 운제(36?-108) 24 - 56
(33년)
84 - 106
(23년)
4. 탈해
    (51 - 130)
다파나君 성제 57 - 79
(23년)
107 - 125
(19년)
5. 파사
    (90 - 158)
유리 아리(73-133) 80 - 111
(32년)
126-158
(33년)
6. 지마
    (131 - 191)
파사 史省(100 - 173) 112 - 133
(22년)
159 - 191
(33년)
7. 일성
    (135 - 212)
尹公 伊利生 134 - 153
(20년)
192 - 212
(21년)
8. 아달라
    (180 - 243)
일성 지진내례(155 - 212) 154 - 183
(30년)
213 - 243
(31년)
9. 벌휴
    (189 - 256)
석추(155 - 209) 지진내례(155 - 212) 184 - 195
(12년)
244 - 256
(13년)
10. 내해
      (230 - 291)
伊買(211 - 235) 내례(186 - 263) 196 - 229
(34년)
257 - 291
(35년)
11. 조분
     (254 - 329)
骨正(207 - 285) 옥모(238 - 311) 230 - 246
(17년)
292 - 309
(18년)
12. 첨해
     (274 - 324)
내해 옥모(238 - 311) 247 - 260
(14년)
310 - 324
(15년)
13. 미추
    (292 - 362)
仇道(218 - 301) 술례(256 - 338) 261 - 283
(23년)
325 - 349
(25년)
14. 유례
     (306 - 367)
조분 아소례(262 - 327) 284 - 297
(14년)
350 - 363
(14년)
15. 기림
      (330 - 372)
걸숙(? - 363) 아이혜(286 - 362) 298 - 309
(12년)
364 - 369
(6년)
16. 흘해
     (329 - 392)
于老(277 - 331) 命元(307 - 374) 310 - 355
(46년)
370 -376
(7년)
17. 내물
      (350 - 402)
末仇(297 - 358) 휴례(331 - 399) 356 - 401
(46년)
377 - 401
(25년)
18. 실성
      (359 - 417)
大西知(314 - 382) 에생(339? - 403) 402 - 416
(15년)
402 - 416
(15년)

실성 이후로는 기년이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