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유물

덕흥리 고분

지보고 2023. 10. 9. 11:17

<덕흥리 고분 전경>

 

 

1.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글자)

 

<덕흥리 고분 묵서명>

(묵서명 번역문)

□□군 신도현(信都縣) 도향 [중]감리 사람으로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요동(遼東)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幽州)자사였다.

진은 77살에 죽어 영락(永樂) 18년 무신년(408년) 신유월(12월) 을유일(25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이 땅을 보고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의 택함이 한결 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富)는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 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侯王)에 이르고,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와 쌀은 다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두었다.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무덤 찾는 이가 끊이지 않기를

<1976년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의 무덤의 묵서명>

 

덕흥리 고분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료를 알려주고 있다.

묵서명을 검토해 보면 무덤의 주인공 <진鎭(332-408)>의 마지막 관직명이  유주(幽州)자사인데

408년에 관직이 유주자사였다는 것이고 묵서명을 지은 사람은 그의 7대손으로 제후국의 왕이라는 것이다.

 

영락대제18년{단기2741년/AD408}무신, 

3월, <고운>이 찾아와 공물을 바쳤다. 
<고운>은 <고루>의 후손이었다. 미모로 인하여 <모용보>와 <모용희>의 처 <부>씨에게 총애를 받았었다. 
<부>씨가 죽자 <모용희>가 해치려들었더니, <고운>은 <풍발>과 함께 <모용희>를 죽이고,

신하되기를 청하며 찾아와 의탁하였었다. 
상은 그가 동명(東明) 의 서류이었던 까닭에 우대하여 주었었다.  
<전지>는 자신의 서제{이복동생}인 <여신>을 상좌평으로 삼고 군정을 위임하였다.  
왜가 신라의 대마도를 침범하였다.  
<호련>이 <용덕>의 아들 <호경>을 낳았다. 혹자는 장수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十八年戊申, 三月, <高雲>来貢. <雲>, <高婁>之裔也. 以美皃, 得幸於<宝>及<熙>妻<苻>. 及<苻>死<熙>欲害之, <雲>與<跋>殺<熙>, 稱臣来依. 上以其為<東明>之庻流, 故優待之.  <腆支>以其庻弟<餘信>為上佐平委以軍政.  <倭>侵<羅><對馬島>.  <胡連>生<勇德>子<胡景>. 或云<長壽帝>子.

<고구려사초>  

 

408년이라면 산서성 운중과 평성 지역의 북위(北魏) 탁발규와 하북성 정주와 유성 지역의 후연(後燕) 모용수가

395년 참합피(參合陂)에서 싸워 모용수가 대패하여 397년에는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는 정주에서 유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후 모용씨의 뒤를 이어 <고운>이 북연을 세운 다음 해이다.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 유주(幽州)자사 <진鎭(332-408)>은 고구려인인가 중원의 귀화인인가?

13명 태수가 다스린 지명이 고구려의 강역인가 중원의 강역인가 ?

중국과 일본과 북한은 각각 자기나라에 유리하게 주장하는 것 같다.

 

필자는 유주자사 <진>은 당연히 고구려의 지방관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보정시의 요동에서 건국하고 요동에서 멸망하여 그 자리는 발해와 요나라가 이어 받았으며

지금의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지방관이 다스리다 고구려 부흥운동의 본부가 되었고 

918년 서경 송악 출신의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를 세웠는데

서경파(고구려 계승)와 개경파(신라 계승)의 대립 중에  <묘청>의 난으로 서경파가 몰락하고

<김부식>등의 개경파가 득세하자 삼국사를 편찬하면서 고조선과 부여 및 발해의 역사는 잘라버리고

신라를 수위에 놓고, 그 다음에 고구려와 백제를 두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의문을 가져본다.

 

장례 후 부(富)가 7세에 미치고 자손이 번창하였다면 처음 매장한 곳이 무덤의 명당인데

구태여 <진>이 죽은 후 7세대가 지나(2,3백년 후)  덕흥리로 이장한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장례 후 7세대가 지난 때가 고구려 멸망 후라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진>의 7세대 후손의 지위가 후왕(侯王)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때 고구려 부흥운동의 상징으로

광개토왕릉비도 함께 보정에서 집안(集安)으로 옮겨 온 것은 아닐까?

 

이장한 무덤의 규모나 동원된 인원 1만명에게 매일 소와 양을 잡아 먹인 것을 보아

묵서명을 쓴 제후의 부와 권력이면 가능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덕흥리 고분에 그려진 13명의 태수(太守) 벽화

 

<덕흥리 고분의 13명의 태수>

 

또한 덕흥리 고분에는 13명의 태수가 무덤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드리고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13태수의 그림 옆에 ‘XX태수’라고 씌어져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 (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 (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 (11) 현토(玄兎)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

1명은 판독 불능

 

<광개토태왕때 유주(幽州)의 영역>

필자는 판독 불능의 1명은 대방(帶方) 태수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