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

화랑세기(花郞世紀) 完譯(5)

지보고 2023. 12. 5. 18:27

 

11. 11세 풍월주(588-591) <하종夏宗(564 - ? )>

 

夏宗者世宗殿君子也 母曰美室宮主

<하종夏宗>공은 갑신년(564)생이고 무신년(588)에 화랑이 되었다.

<하종>은 <세종>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다.

 

세종(미실) - 하종(564 - ?) <11세 풍월주(588-591)>

 

당초에 법흥제와 <영실>공이 내정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옥진>궁주가 졸리운 눈으로 헝크러진 머리를 하고 이르러 제의 손을 이끌며 말하기를

" 좋은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함께 하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무슨 꿈인가?" 하고 물으니 "칠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웃으며

" 칠색은 섞인 것이고 새는 여자다.빈첩의 조짐이다. 네 지아비와 더불어 함께 하라." 라고 하였다.

<옥진>이 좋아하지 않으니 제가 말하기를

" 네 지아비와 나는 일체이다.

아들을 낳으면 곧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곧 빈으로 삼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옥진>이 이에 기뻐하며 마침내 <영실>과 장막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이루었다.

과연 딸을 낳으니 <옥진>은 제를 신통스럽다고 여겨 <묘도妙道>라 이름 하였다.

 

영실(옥진) - 묘도(525- )

                    노동(531- )

                    사도(534- )

 

<묘도>가 자라자 제가 약속한 대로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

그런데 작고 좁아 맞을 수 없었고 또 제가 양기가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묘도>는 저녁이 되면 괴로워 하였다.

이에 제가 자주 사랑하지 않았다.

 

그 때 <미진부>공이 어머니 <삼엽>공주와 늘 궁중에 입시하여 <묘도>와 전(殿)을 사이에 두고머물렀다.

 

<미진부>는 <묘도>와 동갑이다.

 

<묘도>는 <미진부>공을 사모하여 미진부공이 화랑을 지나는 것을 틈타 몰래 들여서 서로 상통하였다.

하루는 <옥진>궁주가 꿈에 칠색조가 자기의 가슴속에서 날아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나 <묘도>의 침실에 가서 엿보았다.

그 때 <묘도>와 <미진부>공이 바야흐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중이었다.

<옥진>궁주는 이에 기뻐서 알려주며

" 너희 부부는 이제 귀녀(貴女)를 낳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과연 <미실美室>을 낳았다.

 

미진부(묘도) - 미실(547-616?)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玉珍>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碧花>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吾道>를 닮아서 백화(百花)의 영검함을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었다.

 

위화(오도) - 옥진(505- )

손동(벽아) - 벽화(485- )

묘심(선혜) - 오도(487-539)

 

<옥진>이 " 이 아이는 <오도吾道>를 부흥시킬만 하다."라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사도}의 잉첩이 되게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라고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 빈첩(嬪妾)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며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 이 아이는 족히 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라고 하였다.

<미실>은 궁중에 이르러 태후의 아들 전군을 교태로 섬겼다.

전군은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궁궐을 나가 집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미실>은 개의치 않고 <사다함>과 사통을 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을 하였다.

태후는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 <용명用明>을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전군이 <미실>을 사모하여 병이 낫다. 태후는 부득이 <미실>을 불러들였다.

마침내 <하종>을 낳았는데 전군이 <미실>을 애지중지하여

다시는 <용명>을 사랑하지 않으므로 <용명>은 노하여 궁궐 밖으로 나갔다.

공이 출생한 지 얼마 안되어 <미실>은 <사도>의 명으로 태자{동륜}에게 색공을 하여 임신을 하였다.

 

제(帝){진흥대제 삼모진}를 사모하여 애태우는 <미실>의 모습이 더욱 더 애처로웠다.

제가 후(后){사도思道}에게 말하기를

" 너의 조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녀인데 어찌 너의 잉첩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 라고 하였다.

후는 이에 <미실>을 3대{父子孫}를 모시는 자리로서 제에게 추천하였다.

제가 한 번 사랑하고 두 번 사랑하고는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다시 <용명>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실>에게 전주(殿主)의 이름을 내렸는데 <미실>을 총애함이 천하를 뒤집을 만 하였다.

 

제가 출입할 때 반드시 동행시켰다.

황후는 .... 궁과 삼주(三柱)의 신(神)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전주(殿主)는 문장을 잘 지었다.....제가 조정에 나아가 업무를볼 때 전주가 옆에서 모셨다.

문서를 보고 참결(參決)하여 그것이 옳은 지를 살펴 보았다.

조야(朝野)의 권세가 <옥진>궁으로 돌아갔다.

대원신통이 다시 성하게 일어났다.

 

태자의 딸이 태어나자 제는 알지 못하고 자기의 딸로 알고 <애송艾松>공주로 명하였다.

 

동륜(미실) - 애송(566- )

 

공은 <애송>의 오빠로 나이가 겨우 세 살이었는데 사지(舍知)의 직위를 내렸다.

궁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애송>의 벗이 되었다.

공은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우애가 지극히 도타워 공주가 울면 따라서 울었다.

제가 이로 인하여 총애하였다.

<반야般若>가 출생하자 공은 관위가 올라 대사(大舍)가 되었다.

 

삼모진(미실) - 반야(568?- )

 

<난야蘭若>가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나마가 되었다.

 

설원(미실) - 난야(570?- )

 

<수종壽宗>전군이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대나마가 되었다.

 

삼모진(미실) - 수종(572?-)

 

이에 앞서 제는 공주 등에게 공을 오빠로 부르게 하였으나공은품위가 낮아 감히 오빠로 자청하지 않았다.

 

이 때에 <수종>전군이 처음 태어나자 제가 크게 좋아하여 공을 전군으로 봉하여 전주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였다.

전주는 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겉으로 겸양을 베풀었다.

그 때 <삼호三好>공이 내질(內秩)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따져 말하기를

" 사자(私子)가 전군이 되는 것도 참람한데 하물며 사자(私子)의 아들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그만두었다.

<미실>은 이에 <삼호>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 아재비는 나 때문에 내질을 관장하는데 나의 아이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라고 하니

<삼호>가 웃으며 말하기를

"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닙니다. 급히 차면 기울어지고 서서히 이루어지면 완전합니다.

비록 전군이 아니더라도 또한 부마가될 수 있습니다.

하필 제도를 넘어서서 뭇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른 후에 가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미실>의 노여움이 여전히 풀어지지 않자 <삼호>는 내질을 사직하였다.

<미실>은 이에 <영실>공의 아들 <노동弩同>을 천거하여 내질을 관장케 하였다.

 

영실(옥진) - 노동(531- )

 

제가 공을 봉하려는 <미실>의 바램을 알고 공을 제의 가자(假子)로 삼아

전군의 품위를 주어 <미실>의 마음을 위로하니 <미실>은 마침내 기뻐하였다.

전군으로 봉하는 예를 <수종>전군의 탄생 77일에 행하였다.

제와 더불어 <미실>전주, <수종>전군 및 공이 함께 수레를 타고 신궁에 이르러 예를 행하였다.

<미실>의 기쁨이 지극하여 제의 품 안에 엎드려지며 말하기를

" 하루에 두 전군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두 전군은 <수종>전군과 <하종>전군을 말한다.

 

제가 <미실>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 짐과 더불어 한 몸인데 어찌 두 전군뿐이겠는가? 왕자도 가히 너의 아들이 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이날 밤 제는 ....에서 잔치를 열어 친히 축하하고 태자 이하 왕자, 전군에게 명하여

<미실>에게 절하고 어머니라 부르도록 하였다.

태자는 <미실>과 더불어 사통한 바 있는 까닭에 억지로 절하였다.

<미실>이 일어나 멈추게 하며 말하기를

" 태자는 다른 전군과 같지 않은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가 이에 명하여 태자에게는 일배를 허락하였다. 다른 사람은 사배하고 일어났다.

제가 몹시 기뻐 취했고 <미실>도 역시 취하여 서로 이끌며 장막으로 들어가고 태자 이하가 만세를 외치고 물러갔다.

 

당시 <보명宝明>궁주가 태자의 연모를 받았으나 몸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구진(지소) - 보명(550?- )

 

태자는 이에 장사 <수인>과 더불어 궁의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궁주가 <미실>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툴 수 없음을 알고 감히 태자를 힘써 거부하지 않아 일이 성사되었다.

그 후 태자가 매일 밤마다 넘어 들어왔다.

이레째 밤에 태자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들어가다가 큰 개에게 물렸다.

궁주가 안고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동틀 무렵 죽었다.

 

삼모진{진흥대제}(사도) - 동륜(550?-572)

 

제가 태자의 종인(從人)들을 조사했는데 <미실>과 <미생>의 낭도들이 많았다.

<미실>의 추잡한 짓이 종인들의 입에서 많이 나왔다.

제가 비로소 의심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자

<미실>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목놓아 울며 궁을 나갔다.

공 또한 전군의 지위를 사퇴하였다.

<사도>황후가 간하여 말하기를

" 삼주(三柱)의 맹세가 있습니다.

어찌 천한 무리들의 어지러운 말로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혼령을 아프게 하려 합니까?" 라고 하였다.

제가 이에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렸다.

곧 다시 <미실>을 생각하고 제가 친히 거동하였다.

<미실>이 눈물을 흘리고 울며 왕을 붙들고 사죄하니 제가 또한 받아들였다.

그 때 <세종>공이 지방으로부터 소환되었다.

제가 다시 <미실>을 전주로 삼고자 하였으나 <세종>공에게 믿음을 잃을까 염려하여 그만두었다.

<미실> 또한 <세종>공의 지성에 감격하고 공의 부자와 단란한 즐거움을 갖고자 해궁으로 피하여 가 살았다.

공은 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세종>공은 이에 <미실>과 더불어 공의 장수(長壽)를 해신에게 빌었다.

그 때 <수종> 전군이 어렸기에 따라가서 해궁에 있었다.

제가 <수종>을 본다는 핑계로 여러 번 불렀으나 <미실>은 글을 올려 자기의 죄를 늘어놓고 거절하였다.

 

제가 이에 친히 해궁에 거동하여 서로 보고 <미실>은 눈물을 흘렸다.

<미실>이 감동하고 다시 마음이 움직여 제와 더불어 궁으로 돌아갔다.

<세종>공을 병부우령으로 삼아 위로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帝가 ....보명공주를....하고 신궁을 황후궁 좌원에 지어

...모궁(母宮)....입궁하여 공주와 전군의 벗이 되었다.

그 때 <미실>은 세종공의 아들을 임신한 지 이미 수 개월이 되었으므로 해산을 하고입궁하겠다고 청하였다.

제가 허락하지 않자 입궁하여 <옥종玉宗>을 낳고 제의 마복자로 삼았다.

 

세종(미실) - 옥종(574?- )

 

이로써 <미실>에 대한 총애가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

<미실>은 심복들을 다시 끌어모아 중요한 지위를 주었는데 제가 모두 허락하였다.

또 <세종>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살도록 하였다.

 

<미실>은 이에 <사도>황후와 함께 내정을 마음대로 하였고 <세종>, <설원>, <미생>은 외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제는 풍질(風疾)로 내외의 정사를 보지 못하고 오직 <사도>, <미실>, <보명>, <옥리玉理>, <월화月華>

다섯 궁주와 더불어 즐거움에 탐닉하였다.

정사(政事)는 모두 <사도>와 <미실>로부터 나왔다.

처음에 <사도>후와 더불어 <미실>은 삼생(三生){전생, 현생, 후생}의 일체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이르러 제가 자못 몸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미실>은 <세종>에게 <사도>의 사랑을 받도록 권하였다.

<세종>은 힘써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후와 사통하였다.

 

제가 붕하자 <사도>, <미실>, <세종>, <미생>은 비밀로 하였다.

 

입종(지소) - 삼모진{진흥대제}(534-576)

 

태자가 알지 못하였다.

<사도>가 먼저 <미실>로 하여금 태자와 사통하게 하고

다른 마음을 갖지 않기로 약속하고 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몸소 제위(帝位)에 있으며 신왕(新王)을 통제하고

<말보末寶>의 남편인 <황종荒宗>공을 상대등으로 삼아 중망(衆望)을 눌렀다.

 

물력(묘홍) - 황종{거칠부}(512- )

 

그 때 <황종>공의 딸 <윤궁允宮>이 <미실>의 심복이 되었고 <윤궁>의 아우 <윤옥允玉>은 <미생>의 첩이었고

<윤궁>의 남동생 <윤황允荒>은 <사도>의 딸 <월륜月輪>공주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황종>공을 추대한 것이다.

 

황종(말보) - 윤궁(548-606)<문노의 처>

                    윤황<사도의 사위>

                    윤옥<미생의 첩>

 

<거칠부>공은 나이가 많아 대등 <노리부弩里夫>, <노동弩同>공 등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이 때 <황종> 거칠부는 65세이다.

 

그러므로 <미실>은 권세를 잃지 않았다. 공에게 급찬의 지위를 주었다.

공은 15살에 화랑에 들어가 역사를 <토함>공에게, 노래를 <이화>공에게,

검술을 <문노>에게, 춤을 <미생>공에게 배워 모두그 정수(精髓)를 얻었다.

늘 선제의 총애를 생각하여 매번 생일과 기일이 되면 낭도들을 거느리고

릉침에 나아가 눈물을 흘렸는데 비록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그만 두지 않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잘 추천하였는데 정이 치우치지 않고 중망(衆望)이 있었다.

 

공의 어머니가 <미실>궁주였기 때문에 공 또한 대원신통이였다.

<문노>파가 불복하였기에 <미실>은 화합토록 하고자 <이화>공의 아들 <보리>공을 부제로 삼았다.

<보리>공의 어머니는 <숙명>공주였기 때문에 <보리>공은 진골정통이었다.

 

태종(지소) - 숙명(543?-603)

 

진골정통은 <지소>를 종(宗)으로 삼았고 대원신통은 <사도>를 종(宗)으로 삼았다.

진골정통의 조(祖)는 <옥모>로부터 출생하였고 대원신통의 조(祖)는 <보미>로부터 출생하였다.

그렇지만 양 골이 서로 뒤섞이어 풍월주가 되는 사람은 각기 단지 그 당시의 정황에 따라서 나왔다.

 

옥모(골정) - 홍모(내해) - 아이혜(조분) - 광명(미추) - 내류(실성) - 아로(눌지) -  조생(내숙) - 선혜(비처)

보도(모진) - 지소(515- )<진골정통의 宗>

보미(미해) - 항아 

오도(위화) - 옥진(영실) - 사도(534- )<대원신통의 宗>

 

바라는 바가 충족되지 않으면 비록 화합을 하나 안으로는 서로 반목하여 붕당이 더욱 심하여졌다.

공은 비록 젊었으나 이것을 깊이 경계하였다.

골고루 사랑하는데 힘을 다한 결과 일시적으로 상황이 나아졌으나 주형(主兄)과 부제(副弟)가 다른파인 까닭에

자연히 불화가 점차 드러나서 <보리>공을 끌어서 몰아 내려 하였다.

<보리>는 평소에 공에게 좋게 보였기에 마음으로 내키지 않았으나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보리>가 울며 공의 인정에 호소하였다.

공은 이에 <이화>공을 찾아가 옳게 결정할 가르침을 청하니 <이화>공이 말하기를

" 선도는 본래 우주의 청원(淸元)의 기(氣)에서 나왔다. 시비로써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형 <모랑>공이 오직 그 전부를 얻었는데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나도 못나서 그 도를 다 듣지 못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권세와 지위로써 직위를 계승하였기에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끄러워 한다. 직위를 버리고 도를 구하여 참된 생이 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모진(보과) - 모랑(526-555)

 

공은 이에 풍월주의 직위를 그만두고 도에 전념코자 하였다.

낭도들은 <이화>공이 스스로 풍월주가 될 계략으로써 공을 혼란시켰다고 생각하였다.

<미실>궁주가 걱정하였다.

이에 <사도>태후의 조칙으로 낭도 대회를 열고 <이화>공과 <세종>공으로 하여금

연회를 베풀어 화합시키도록 하였고 불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여 진정시켰다.

이로써 가야파가 점차 다시 세력을 갖게 되어 <서현>랑을 전방화랑으로 삼았는데 이이 또한 대원신통이었다.

이것은 <이화>, <미실>, 가야 삼파가 단결한 것이다.

 

그 때 궁중에는 3태후가 있어 행정을 하였고 대왕은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어른들의 명을 받들어 따랐다.

 

3태후는 진흥대제 <삼모진>의 비인 태상태후 <사도(534- )>,

진지대제 <금륜>의 비로 <용춘>의 어머니인 태후<지도(555?-)>,

<동륜>의 비로 진평대제 <백정>의 어머니인 태후<만호(556- )>를 말한다.

 

그러므로 낭도 중 승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태후궁에 많이 붙었다.

태상태후인 <사도>법주(法主)는 <미실>궁주로서 법운(法雲)을 삼았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이 <미실>궁에서 많이 나왔다.

그런데 법주의 딸 <아양阿陽>공주가 곧 <서현>의 어머니였기에 가야파의 태양이 되어 <미실>의 세력을 나누었다.

 

삼모진(사도) - 아양(556?- )(무력) - 서현(576?- )

 

<만호>태후는 대왕{진평대제}의 어머니로 더욱 상의 총애가 있어서 진골정통의 수주(首主)가 되었다.

 

진종(지소) - 만호(556- )(동륜) - 백정(567-631)

 

<지도知道>태후가 태상과 <만호> 사이를 출입하며 <문노>정파를 도왔다.

그러므로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천거하여

<보리>공을 대신코자 하였는데 <만호>태후가 들어 주지 않았다.

 

금륜(지도) - 용춘(578-647)

 

<용춘>공이 비록 풍월주 직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낭도들이 많이 귀부하니 <서현>랑이 말하기를

" <용춘>공은 선군{진지대제}의 아들인데 내가 어찌 감히 상대가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낭도들을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 주었다.

이에 가야파가 또한 <용춘>공에게 돌아갔다.

역시 대원신통이었기에 미실파가 다투지 않았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 좋은 사람을 얻었다." 라고 하였다.

<보리>공 또한 <용춘>공을 사랑하여 다른 무리를 규합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진골과 대원의 논쟁이 이에 비로소 완화되었다.

<하종>공이 비록 모주(母主)에게 효성스러웠으나 형세를 살펴서 따랐으니

안으로는 그 논쟁에 찬성했으나 밖으로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 때 <은륜>공주가 왕의 총애를 잃었다. <은륜>은 태상태후의 막내딸이었다.

 

삼모진(사도) - 은륜(566?- )

 

태상이 대원신통을 걱정하여 공에게 명하여 받들도록 하여 <효종孝宗>공을 낳았다.

 

하종(은륜) - 효종(584?- )

                    하희(586?- )

                    월희(588?- )

 

이에 앞서 공은 <설원>공의 딸 <미모>낭주를 아내로 맞아 아들 <모종毛宗>을 낳았다.

 

하종(미모) - 모종(582?- )

                    유모(584?- )

                    영모(586?- )

 

<효종>의 누이는 <하희夏姬>와 <월희月姬>라 하였다.

<모종毛宗>의 누이는 <유모柔毛>와 <영모令毛>라 하였다.

공은 검소하고 색을 삼갔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여 <세종>의 풍모를 크게 지녔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공에게 복종하지 않던 사람도 있었으나 끝내는 귀부하였다.

 

3년간 재위하다가 <보리>공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 선대 풍월주들이 큰 성인이었는데도 오히려 3년간 재위하였는데 내가 어찌 감히오래 머물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보리>공이 말하기를

" 주형(主兄)은 <미실> 원화의 아들인데 어찌 뭇 화랑들과 더불어 같은 예로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였다.

<보리>공이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보리>공은 곧 나의 증조부이시다.

증조는 일찍이 나의 아버지에게 <하종>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 지금 세상에 이 같은 효자, 충신은 없다." 라고 하였다.

 

대개 <미실>궁주가 삼조(三朝)를 차례로 섬겼는데 형제가 핏줄이 달라 움직이면 어려움이 많았다.

<은륜>공주 또한 골을 믿고 방탕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세종>공이 <미실>을 대접하는 것처럼 하고 불문에 부쳤다.

<태양>공주는 <은륜>의 언니로 공과 더불어 가까이 살았는데

공을 유혹함이 심하였으나 공은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공의 청렴과 지킴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금륜(552-582)

                       구륜(554?- )

                       아양(556?- )<무력의 처>

                       백화(558?- )

                       월륜(560?- )

                       태양(563?- )

                       은륜(566?- )

동륜(사도) - 호륜(570?- )

화문(사도) - 통륜(572?- )

 

賛曰清謹守徳以保令名世宗之子美室之生

찬하여 말한다.

맑게 삼가고 덕을 닦아 훌륭한 명예를 지켰다.

<세종>의 아들이고 <미실>의 소생이다.

 

 

12. 12세 풍월주(591-595) <보리菩利(573- ? )>

 

菩利公者二花公之子也 母曰淑明公主乃只召太后女也

(12세) 풍월주 <보리菩利>는 계사년(573)생이고 신해(591)에 화랑주가 되었다.

<보리>공은 <이화>공의 차자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세종>공과 한 배의 맏누이이다.

 

이화(숙명) - 보리(573- ) <12세 풍월주(591-595)>

태종(지소) - 숙명(543?- )

                    세종(545?- )(미실) - 하종(564- )

 

公夢見黄色神麓而生公生而穎異有大志及長与伯氏圓光法師力学不怠

공주가 꿈에 황색의 신록(神鹿)을 보고 공을 낳았다.

나면서부터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큰 뜻을 가졌다.

자람에 따라 맏형인 <원광>법사와 더불어 배움에 힘써 게으르지 않았다.

 

이화(숙명) - 원광(560?- )

                    화명(564?- )

                    옥명(566?- )

                    보리(573- )

 

圓光嘗教之曰吾為仏爾為仙則可以安吾家国

<원광>이 일찍이 가르쳐 말하기를

" 나는 부처가 되고 너는 선(仙)이 되면 우리나라를 평안하게 할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하종>공의 문하에 나아가 그 낭도에 소속되었다.

공은 <하종>공보다 9살이 적었는데 감정과 생각이 서로 투합하여 같은 배에서 출생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공의 모친 <숙명>공주는 효성과 우애가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세종>을 어린아이처럼 사랑했고 <세종>공 또한 공주를 태후처럼 모셨다.

<미실>이 입궁하고 <세종>이 출정하자 공주가 <미실>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았으나

<하종>공은 곧 공주의 조카인 까닭에 공주가 특별히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한 번은 말하기를

"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은 곧 너의 할아버지이다.

하늘도 높다 않고 땅도 넓다 않는 대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대개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어머니에게는 배우지 말라는 것을 풍자하여 가르친 것이다.

<하종>공은 속으로 명석한 까닭에 그 가르침을 스스로 알았으나 알아 듣지 못한 것처럼 한 것은

<미실>이 <아시>공과 <옥진>궁주를 호신(護神)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공이 처음에 <하종>공에게 속하였을 때 신궁에 따라 들어가서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交神像)에 절을 하는데

<옥진>에게 먼저 절하고 후에 제에게 절을 하였다.

공이 옳지 않게 여겨 말하기를

" 우리들이 오늘 귀한 것은 모두 선제가 내려준 것인데 어찌 그를 뒤로 합니까?" 라고 하니

<하종>공이 말하기를

" 선제 또한 말하기를 '억조창생이 나를 신으로 여기는데 나는 <옥진>을 신으로 여긴다.' 라고 하였으며

<영실>공 또한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하고 나서 제에게 절했다.

이것이 그 상(像)이다.대개 <미실>이 가르친 바이다." 라고 하였다. 공이 부득이 따랐다.

그 다음에 <아시>공에게 절을 하고 다음에 <태종>공에게 절을 하였다.

공은 또한그 순서에 의심을 가졌으나 따지지 않았다.

 

그 때가 건복 2년(585)으로 공의 나이 13살이었다.

<하종>공이 우방대화랑이 되었다.

<미생>공이 부러워 말하기를 " 너는 나보다 낫다." 라고 하였다.

공은 주형(主兄)에게 충성을 다하여 곁을 떠나거나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

<미실> 또한 칭찬하여 말하기를

" 공주에게 좋은 아들이 있으니 행운이 나보다 많다." 라고 하였다.

매번 궁중에서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공을 불러 말하기를

" 나의 사랑하는 조카야! 너의 형을 잘 도와라." 라고 하였다.

공주는 이에 오래된 감정이 조금 누그려들었다.

만년에는 서로 왕래하였으니 대개 공이 힘쓴 때문이다.

 

그 때 <만호>태후와 <숙명>공주는 힘써 진골정통을 도왔다.

<미실>이 두려워하여 <애함艾含>을 공과 결혼시키려 하였다.

 

제문(미실) - 애함(573?- )

 

<만호>가 거절하고 그의 딸 <만룡>낭주를 공의 적처(嫡妻)로 삼았다.

공의 나이 겨우 13살이었고 <만룡>은 7살이었다.

 

정숙(만호) - 만룡(579- )

 

<이화>공이 <만룡>이 어리기 때문에 꺼리자 공주가 말하기를

" <사도> 또한 7살에 대제에게 시집갔는데 오히려 부부의 즐거움이 있었다. 무엇 때문에 꺼리는가?" 라고 하였다.

 

진흥대제 삼모진(534-576)은 7살의 나이에 즉위하여 사도를 황후로 하였다.

사도와 삼모진은 동갑이다.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이화>공은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만호>태후는 공의 포형인 <정숙>태자를 사랑하여 <만룡>을 낳았다.

 

삼모진(숙명) - 정숙(558?- )(만호) - 만룡(579- )

이화(숙명) - 보리(573- )

 

그런데 <미실>의 딸 <애함>을 공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만호>는 대원신통이 진골정통을 빼앗을까 염려하여 특히 <만룡>을 주려고한 것이다.

이에 <만호>는 <만룡>을 불러 무릎에 않히고 묻기를

" 사도태후는 7살에 시집을 가서 제를 잘 모셨는데 너 또한 능히할 수 있는냐?" 라고 하였다.

<만룡>이 말하기를 " 지아비가 누굽니까?" 하고 물었다.

공이라 대답하자 <만룡>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 나의 좋은 오빠입니다. 시집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후는 이에 친히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고하고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공은 늘 태후궁에서 <만룡>을 업고 놀았다.

그러므로 길례가 끝나자 <만룡>이 공에게 업어 줄 것을 청하자 공이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태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 지난날 오빠 동생이 지금은 부부가 되었다.처는 이와 같으면 안 된다." 라고하니

<숙명>이 말하기를

" 부부이자 오빠 동생입니다.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마침내 공에게 처를 업고 태후를 뵈러 가도록 명하였다.

공과 더불어 낭주가 태후를 뵈러 업고 나아가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의 손위 누이 <화명>은 <호종>과 더불어 좋아하였다.

<미실>은 이미 공을 <만룡>에게 빼았겼다.

<화명>을 <하종>공의 적처로 삼으려하였는데 <만호>가 들어주지 않고 모두 진골정통을 받아 들였다.

<미실>이 좋아하지 않으니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기를

" 비록 혼인을 하지 않았으나 조카가 숙모를 어머니로 삼고 주형이 포형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세월이 가면 어찌 또 혼인하는 날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보리>는 <하종>의 고종사촌 동생이다.

 

<미실>이 기뻐하고 마음을 풀며 말하기를

" 너는 진정으로 내 아들이다. 또 무슨 혼인을 하겠는냐?" 라고 하였다.

공은 양 통의 사이에서 이쪽 저쪽을 능히 화해시켰다.

<미실>은 이에 <하종>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도록 하였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어쩔수 없이 풍월주가 되었으니 건복 8년(591) 정월이었다.

<서현>랑을 부제로 삼았다.

<서현>랑은 <아양>공주의 아들인데 영특하고 통달한 기풍이 있어 태상태후{사도}가 사랑하였다.

 

무력(아양) - 서현(573?- )

 

<하종>공에게 명하여 전방화랑을 삼았다.

건복 2년(585)에 공과 더불어 우방화랑이 되었다.

건복 5년(588) <하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을 부제로 삼고

<서현>랑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아 공에게 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르러 공이 <서현>랑을 부제로 삼고 <용춘>공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았다.

 

금륜(지도) - 용춘(578-647)

 

그 때 <만룡>의 언니 <만명>은 나이가 들었으나 혼인을 허락받지 못했는데 <서현>랑과 사통하였다.

 

숙흘종(만호) - 만명(573?- )

 

<만호>는 원래 <아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종(지소) - 만호(556- )(숙흘종) - 만명(573?- )

삼모진(사도) - 아양(556?- )(무력) - 서현(573?- )

 

그러므로 노하여 불허하고 공에게 명하여 <용춘>공을 <서현>랑에 대신하도록 하였다.

<서현> 또한 그 지위를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만명>의 정과 사랑은 더욱 굳어져 몰래 서로 도망하여 만났다.

<만호>는 이에 <만명>을 가두고 <서현>을 만노(萬弩)로 내치려 하였다.

<만명>은 탈출하여 함께 도망하였다.

태후는 더욱 노하여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공과 <만룡>이 힘써 태후의 노여움을 풀어 무사하게 되었다.

그 때 공의 누나인 <화명>과 <옥명>이 모두 진평대왕을 섬겨 사랑을 받았으므로 조정에서는 공을 중용하고자 하였다.

공은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 우리 집은 화랑을 세습하는 것으로 족하다. 다시 무엇 때문에 관리가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이 청렴결백하여 지조를 지켰으나 낭주는 태후의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그러므로 집안 생활이 몹시 사치스러웠다.

이에 공이 낭주에게 일러 말하기를

" 내가 낭도의 우두머리로 어찌 홀로 부귀를 누리겠는가?

나의 아내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라고 하니

낭주가 말하기를

" 부부는 한 몸입니다. 낭군의 마음은 첩의 마음입니다. 어찌안 될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그 재물을 모두 나누어 주니 낭도들이 우러러보기를 부모같이 하였다.

무릇 근심과 재난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공과 낭주는 함께 가서 위로하고 구호하여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 순행하며 다스리는 것에 비교하였다.

<만룡>낭주는 왕의 누이라는 귀한 신분으로 지어미의 도리를 다하였다.

공이 조금만 아파도 몸소 간호했으며 음식과 의복도 친히 조리하고 손질하여 올렸는데반드시 공의 취향에 맞았다.

그러므로 공이 고맙게 여겨 다른 여자를 거느리지 않았고 금슬이 비할 바 없이 좋았다.

늦게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예원禮元>이라 하고 딸은 <보룡宝龍>이라 하였으니

곧 우리 문무왕후의 어머니이다.

 

보리(만룡) - 보룡(602?- )(선품) - 자의(법민) - 정명(645-692, 31대 신문왕)

                    예원(607-673)

 

서자는 <보태菩太>와 <보호菩好>이고 서녀는 <보단菩丹>과 <이단利丹>인데

모두 <만룡>낭주의 침비 <후단厚丹>이 낳았다.

 

보리(후단) - 보태(596?- )

                    보호(598?- )

                    보단(601-680)

                    이단(603- )

 

처음에 <비대>공의 딸 <후만>이 <설원>공과 사통하여 <후단>을 낳았다.

 

설원(후만) - 후단(575?- )

 

<만룡>이 출생하자 <후만>이 <비보>랑의 서매(庶妹)로 들어와 유모가 되었다.

이 까닭에 <후단>이 침비가 되었다.

혼인을 하고 나서 태후가 공은 다 자랐으나 처는 어리다는 것을 고려하여 침비에게 명하여 공을 모시도록 하였다.

공은 거절하고 동침하지 않았다.

낭주가 걱정하여 <후단>과 더불어 뜰에 단을 쌓고 낭주가 속히 자라기를 빌었다.

공은 건복 8년(591) 춘정월 15일에 풍월주의 지위에 나아갔다.

낭주는 아직 겨우 13살이었다.

공은 어리다고 하여 남도(南桃)의 예를 미루려 하였다.

이에 낭주가 말하기를

" 군(君)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남도(南桃)의 예를 행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공이 기이하게 여긴즉 낭주가 말하기를

" 후비(厚婢)가 나에게 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낭군이 그를 첩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비록 그 공을 칭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낭주는 제에게 청하였고제는 공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 <후단>이 비록 침비이나 <비대>전군의 손녀이고 <설원>상선의 딸이다. 첩으로 삼을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후단>을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 적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서자가 먼저 나왔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라고 하니

낭주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 어찌 선후가 있습니까?

만약 제가 낳기를 원하면 곧 데려다 아들을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후단>이 이에 그 아들을 낭주에게 바쳤고 감히 잠자리 시중을 받지 못하였다.

낮이나 밤이나 낭주에게 아들이 생기도록 빌었다.

<예원>공을 낳자 <후단>의 자녀를 돌려 주도로 명하였다.

그 때 공주 등이 모두 신첩이 되어 정해진 지아비가 없는데 오지 공의 처첩은 유독 배반하지 않았다.

골인(骨人)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3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다가 부제 <용춘>공에게 전하여 주었다.

지위는 비록 상선(上仙)이었으나 몸은 불문에 바쳐 백씨(伯氏)를 도왔다.

<만룡>과 <후단> 모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공의 뜻을 받들었다.

<만룡>은 늘 같은 날 성불할 것을 기도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공의 말년의 일은 고승전에 나온다.

 

賛曰菩利沙門 魏公之孫 徳合万竜 恩恵如山 功高佛門 萬世唯尊

찬하여 말한다.

<보리> 사문은 <위화>랑공의 손자이고 덕은 <만룡>과 화합하고

은혜는 바다나 산과 같고공은 불문에 높고 만세에 오직 우러러본다.

 

<世系>

아버지는 <이화>랑인데 곧 <위화>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이화>공은 <모랑>공의 처남으로 함께 <지소>태후를 섬겨 사랑을 받았다.

<모랑>공이 죽자 <이화>공이 <모랑>을 이어 태후의 사신(私臣)이 되었다.

<숙명>공주는 그 때 황후의 지위로 <이화>공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골품을 초개처럼 내버리고 동혈의 벗이 되기로 약속하고손을 잡고 출궁하여

종신토록 배반하지 않는 것이 마치 랑(狼)과 패(狽)가 서로 의지하는것 같았다.

평자 중에는 비난하는 자도 있으나 가만히 생각하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눈이 맞아 출궁했을 때 제의 노여움이 혁혁하여 무거운 형벌이 앞에 있어

목숨이 털끝 같았으나 오히려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굴하지 않아

우리 신국의 대성인(大聖人) <원광>대법사를 낳았으니 진실로 하늘의 뜻이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